어느 패왕과 우희의 완전한 이별
어느 패왕과 우희의 완전한 이별
  • 김명지 기자
  • 승인 2011.08.31
  • 호수 13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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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숨 쉬는 과거, 영화「패왕별희」

▲ 경극 공연에 한창인 우희 역의 데이

불 꺼진 공연장엔 조명이 푸르게 비춰지고 있다. 화려한 경극 공연, 주인공 샬로와 그의 연인 쥬산의 결혼식 등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던 붉은 조명이 아니다. 어딘가 스산하고 힘없는 푸른 조명은 이제 세월이 흘러 공연을 연습하는 것조차 힘이 부치는 두 배우를 초라하게 비추고 있다. 영화는 이 조명이 잠시 어두워짐과 함께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 엄마의 품에 안겨 경극을 구경하는 어린 도즈
S#1. 군벌은 서민을 멍들게 하고

영화는 1924년 군벌시대 북경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유곽의 창녀였던 ‘도즈’(훗날의 데이)의 어머니는 더 이상 홍등가에서 이 여린 아들을 키울 수 없음을 안다. 그녀는 아들이 경극단에 들어가길 원했지만 경극단은 ‘육손이’인 아들을 받아줄 수 없다 말한다. 멀리서 “칼 갈아요, 가위 갈아요”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뭔가 결심한 듯 도즈의 어머니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아들을 데려가 눈을 가려주고는 큰 칼로 그의 여섯 번째 손가락을 잘라버린다.

도즈의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행동을 취한 것은 그녀 개인이 창녀로서 생활고를 겪는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결코 그녀 혼자만의 사정이 아니었다. 군벌시대 서민들의 삶은 지극히 피폐했다. 군벌은 청나라의 멸망 후 성립된 중화민국에서 시작됐다. 민귀식<국제대학원 중국문화연구소> 교수는 “중화민국은 사실상 지배 체제가 확고하지 못했고 따라서 공화국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한 곳에 집중되지 못한 권력은 각 지방에 분산돼 형성됐다. 그곳에서 각자의 권력을 잡은 군부세력들은 자신만의 지배 체제를 만들어 행정, 군사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는 서민들의 고난을 야기한다. 군벌시대 상하이와 같은 대도시의 일부 부유층들이 꿈과 낭만, 국제적 교양을 쌓아간 것도 사실이나 농촌은 그야말로 정반대였던 것이다.


S#2. 지배층은 바뀌어도
▲ 군중 앞에서 모욕 당하기 시작하는 샬로와 데이


경극단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은 ‘데이’(도즈)는 어릴때부터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준 ‘샬로’와 함께 경극 '패왕별희'에서 각각 우희와 패왕 역할을 하며 유명 경극 배우가 된다. 그러던 중 1937년 중일전쟁의 전야, 일본군들이 한밤에 성 안으로 쳐들어온다. 화려한 옷을 입고 일본군들 앞에서 경극을 선보이는 데이와 달리 일본군들이 못마땅하던 샬로는 결국 사고를 치고 끌려간다. 같은 남성이지만 샬로에게 이미 마음을 주고 있던 데이는 샬로를 위해 그를 구하러 간다. 데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일본군들 앞에서 경극을 선보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풀려나온 샬로는 그런 데이를 비난한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한다. 새로이 북경의 지배자가 된 국민당은 일본군 앞에서 경극을 공연한 죄로 데이를 잡아가 재판을 한다. 이전부터 경극단의 후원자로 데이에게 미묘한 감정을 품고 있던 부자 원 대인 등은 데이를 석방시키기 위해 데이가 일본군 앞에서 경극을 한 것은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데이는 말한다. “일본군을 위해 노래를 불렀습니다. 저는 일본군을 증오합니다. 그러나 강제는 아니었습니다.” 재판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지배층이 일본군에서 국민당으로 바뀌었으나 예술을 업으로 삼는 데이에게 좋을 것은 하나 없었다. 오히려 국민당은 일본군보다 더 악랄하게 경극을 모독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가석방된 데이는 국민당 장교 앞에서 경극을 공연한다. 데이의 생사는 애초에 권력의 힘 앞에 놓인 것이었다. 이에 대해 김영숙<이화여대 인문과학원> 교수는 “국가나 정치와 관련된 권력은 돈의 권력보다 예술가들의 자유를 훨씬 더 구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S#3. 문화대혁명, 모든 것을 파괴하다

국민당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48년 장제스 정부가 대만으로 이동하기 직전 공산군은 북경을 포위했다. “삼백년 청나라 권세 끝에 세워진 장제스 정부도 풍전등화로군요.” 그 말은 곧 실현됐다. 1949년 공산군은 북경에 입성한다. 샬로와 데이는 여전히 경극을 하고 있다. 그러나 뭔가 부자연스럽다. 이전과 같은 화려한 의상과 분장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대사는 더 이상 “대왕마마, 어서 첩에게 검을 주소서”, “절대 아니되오”, “어서 검을 주소서”, “당치 않소”와 같은 것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해방구의 하늘은 높고 푸르네”라 말하며 “당신은 인민을 사랑하고 그 사랑엔 끝도 없어”라고 찬양한다. 어설픈 경극 공연을 보고 있던 당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규칙적인 박수를 쏟아낸다.

공산당의 입성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은 중국 사회에 크나큰 변화를 가져왔다. 나아가 문화대혁명의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화 속에선 1966년 어느 날 라디오에서 문화대혁명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문화혁명에 대한 당 중앙의 결정을 알립니다. 무산계급 문화혁명 결정이 통과됐습니다. 문화혁명은 인민의 정신을 개조할 것입니다.”

문화대혁명이란 기존에 중국이 갖고 있던 모든 문화를 뒤엎어 버리는 것이었다.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 등의 ‘4대 구습’을 타파하자는 미명 아래 위대한 고대 통치자로 추앙받던 주공 단의 상, 유학자 공자의 사당 등이 닥치는 대로 부숴졌다. 뿐만 아니었다. 지식인, 자본가 등도 반동분자로 내몰려 주로 10대 청소년들로 구성된 ‘홍위병’들에 의해 엄청난 핍박을 받고 모든 것을 잃어야 했다.

샬로와 데이의 제자였던 ‘서’는 이런 사상을 따르다 데이에게 혼이 나자 반항한다. 분노한 데이가 삼류배우나 되라고 소리치자 그는 눈빛을 바꾸며 데이에게 써오던 경어를 버리고 그를 조롱한다. “데이 동무, 당신 그 말은 구사회에서나 하시오. 신사회에선 맞아 죽을 말이오.” 스승인 데이를 존중하는 것조차 서에겐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경극, 하다못해 집에 있는 비취색 고전 술잔 역시 구습에 해당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경극과 관련된 의상 등을 모아 불태우던 샬로와 그의 아내 쥬산은 비취 잔으로 술을 마시며 씁쓸히  말한다. “어차피 이 비취 잔도 구사회 것이라 남길 수 없으니 마지막으로 한 번 쓰고 없애야죠.”

이처럼 문화대혁명기는 비상식적인 형태로 진행됐다. 그렇다면 문화대혁명은 왜 일어났던 것일까. 1950년대 이후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은 사회 안정과 경제 발전를 도모하는 데 실패한다. 이에 공산당은 백화제망, 백가쟁명의 ‘쌍백운동’을 펼친다. 이는 지식인들에게 자유로운 비판을 허용한 일이다. 그러나 이는 애초 공산당의 의도와 다르게 당 자체에 대한 노골적이고 수위 높은 비판으로 이어진다. 당, 특히 당시 여러 정책의 실패로 당 내부에서 입지가 약해지고 있던 마오쩌둥은 큰 위기의식을 느낀다. 이를 타개하고자 그들은 ‘문화대혁명’이란 이름으로 모든 사회 원리, 특히 자신들을 위협하거나 비판하는 자본가들과 지식인, 문화예술인들을 타도하고자 했다.

영화 속 샬로와 데이 역시 문화대혁명에서 타도의 대상으로 몰려 거리에서 서로를 비난하도록 강요받는다. “데이는 경극만 알고 관객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샬로의 머뭇거림을 참지 못한 홍위병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사정없이 강요한다. “자세히 말해.” 망설이던 샬로가 터트리듯 말한다. “장제스군 앞에서도 노랠 불렀고 자본가, 지주, 깡패 가리지 않았습니다.” 홍위병들은 다시 독촉한다. “또 말해.” 괴로워하던 샬로는 기어이 데이의 동성애 전력까지 들먹인다. 그의 배신에 분노한 데이 역시 샬로와 결혼한 쥬산이 창녀 출신임을 외치며 그녀를 처단하라 한다. 무릎 꿇린 그들의 앞에 활활 타고 있는 불과 성난 군중들의 모습은 당시 자본가, 지식인, 문화예술인 등에게 행해지던 수많은 광적 핍박 중 하나일 뿐이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민 교수는 “5·4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중국 역사에서 최초의 자기문화부정 사건으로 회자된다”고 설명했다. 5·4운동은 중국 근현대사의 시작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할 만큼 계몽적인 의미로 여겨진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은 무분별한 대중운동으로서 폭력적, 근본적, 비논리적인 형태로 이어졌다는 평을 받는다. 이후 당 지도부는 문화대혁명이 ‘극좌적 오류’였음을 시인한다. 마오쩌둥의 사망과 함께 끝난 문화대혁명은 이후 영화 초반에서도 언급되는 ‘4인방(문화대혁명의 주동 세력)’의 처벌을 통해 일단락된다. 이후 권력을 잡은 덩 샤오핑은 개혁개방이라는 우파적 결단을 내린다.

결국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채 20년이 안 되는 세월 속에서 중국인들은 문화대혁명이란 극좌적 경험을, 개혁개방이란 극우적 경험을 번갈아 겪게 된다. 이에 대해 민 교수는 “균형을 위해 극좌에서 극우로 반작용을 이룬 사회적 급변 속에서 중국인들의 세계관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전한다. 문화대혁명이 쇄락시킨 것은 비단 유형의 경극, 문화재뿐만이 아닌 것이다. 실제 저서 「중국을 말하다」 등을 집필하고 현재 반체제 인사로서 수감돼있는 노벨평화상 수상자 류 샤오보 등 중국의 지식인들은 ‘10년의 동란’ 문화대혁명을 현재 중국인의 도덕성 타락의 근원적 이유로 보곤 한다.

어쨌거나 중국 사회전체를 파괴해버린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패왕’ 샬로와 ‘우희’ 데이는 헤어진다. 한때 유망했던 두 경극배우는 그저 그런 ‘어느’ 패왕과 우희가 되고 말았다. 경극의 원작격인 「항우본기」 고사에 나오는 항우와 우희는 천하를 통일하고자 한 대업은 이루지 못했으나 사랑은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한때 유망했던 두 경극배우는 예술도, 인간애도 이룩하지 못한 채, 완전한 이별을 맞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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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 민귀식<국제대학원 중국문제연구소> 교수, 김영숙<이화여대 인문과학원> 교수
참고: 논문 「영화 패왕별희 서사의 다층적 은유」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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