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는 영국의 공화정을 이룩하셨다
내 아버지는 영국의 공화정을 이룩하셨다
  • 김명지 기자
  • 승인 2011.08.31
  • 호수 13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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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년 9월 3일 올리버 크롬웰의 죽음
▲ 올리버 크롬웰
아버지는 마지막 죽음 앞에서까지 엄숙함을 원하셨다. 아버지는 물론 그 주변조차 조용했다. 생전에 그리도 엄격한 청교도주의자셨던 내 아버지 올리버 크롬웰다운 모습이었다.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아버지의 생애가 내 머릿속을 스친다. 아버지께선 1599년 케임브리지 부근 헌팅던에서 태어나셨다. 성실히 청교도적 신념을 키워가시던 아버지께서는 1627년 그 곳에서 협동조합을 결성하시며 최상층계급이 아닌 이들을 위해 활동하고자 하셨다. 그러나 그 지역의 검사장이자 실질적 지배자였던 ‘버나드’란 자가 이를 눈엣가시로 여겼다고 한다. 이로 인해 빚어진 분쟁에서 패한 아버지께서는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불운을 맛보기도 하셨는데, 그때가 가장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라며 이후로도 내게 몇 번씩이나 말씀해주신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시련에도 끝은 있었다. ‘엔클로저운동’이 바로 그 계기였다. 영국의 지주들이 양모생산에 눈이 멀어 곡물을 위한 농지를 목장으로 바꾸고자 했던 일이다. 아버지께서는 그것의 반대 운동에 앞장서시며 지역 내에서 신임을 얻었고 이후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셨다. 물론 의회 내에서 아버지의 영향력이 처음부터 강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제주의에 반대하는 입장만큼은 누구보다도 확실하셨다고 자랑스레 말씀하신 바 있다.

기회는 다가왔다. 혁명, 혹자는 이것을 내전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혁명의 기운이었다. 언제나 그랬던 일이지만, 종교를 믿는 것은 많은 분란을 겪게 한다. 16세기 튜더왕조의 헨리 8세에 의해 영국 국교회(The Anglican Church)가 성립된 이후 영국에서는 계속됐던 일이다. 영국 국교회는 자식이 없던 왕비와 이혼하고 정부 앤 불린과 정식으로 결혼하고자 했던 그가 가톨릭교회와 갈등을 빚고 설립한 것이다. 자연스레 영국의 국교를 가톨릭교회로 되돌리려는 세력이 생겨났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세력이 있었다. 바로 청교도다. 우리 청교도들은 근면, 정직, 절제를 교리문답과 같은 형식적인 것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미덕으로 여기는 집단이다.

찰스 1세의 즉위는 이런 종교적 갈등을 이전보다 훨씬 더 심화된 상태로 내몰았다. 급기야 의회의 권리를 무시한 찰스 1세는 폭정을 저질렀고 이것이 우리의 ‘청교도 혁명’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아버지의 역량이 한껏 발휘됐다.

아버지께선 철기대를 지휘해 의회파의 선봉에 서고 이어 매일 16km 가량의 고된 행군을 통해 결국 승리를 이끄셨다. 위기의 의회파를 소생시킨 것은 우리 아버지셨다. 영국의 공화정은 우리 아버지의 힘으로 이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비록 말년에 의회를 폐쇄하고 소시민의 권리를 신장시키고자 했던 수평파를 탄압하시긴 하셨어도 그것은 대의를 위한 것이었으리라, 아들인 나는 짐작해본다.

호국경이자 국가원수로 5년이 조금 덜 되는 시간 동안 영국을 통치하신 나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호국경이 될 이는 바로 나, 리처드다. 그러나 내겐 여러 걱정이 있다. 앞서 말했던 결단으로 인해 아버지의 말년에 영국이 혼란한 상황이다. 내 성격이 유약하다는 것은 나 자신도 잘 알고 있는 바다. 이런 내가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지, 나 자신조차도 의심되는 상황이다. 아버지가 처형한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가 살아있는 것 역시 내게 위협적이다. 청교도 혁명을 이끈 아버지, 제게 힘을 주십시오. 아버지의 위업을 이어가길 간절히 원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없습니다.

참고: 논문 「올리버 크롬웰과 자유주의」, 「영국혁명의 의의 및 크롬웰의 역할」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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