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 순위 프로그램이 남긴 것들
서바이벌 순위 프로그램이 남긴 것들
  • 한대신문
  • 승인 2011.05.28
  • 호수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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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중<의대ㆍ의학과> 교수
▲ 이형중<의대ㆍ의학과> 교수
2세대 웹의 등장으로 미디어 간의 인터페이스가 통합, 수렴되고 있다. 더 작고 가벼워진 모바일 단말기에 힘입은 소셜 네트워킹은 네티즌들을 24시간 내내 실시간으로 드러내고 평가하게 만들었다.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 규정했던 마셜 맥루한에 따르면 눈, 귀, 두뇌 역할을 하던 TV, 라디오, 컴퓨터는 이제 ‘트랜스포머’의 악당로봇처럼 합체하여 유행을 선도하는 트렌드 세터가 되고 있다.

기존 미디어의 전위대인 TV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통해 참여, 경쟁, 평가란 자본주의의 핵심 도그마를 실현하게 된다. 수십만 명의 참가자로부터 대국민 가수 만들기, 혹은 멘토와 멘티를 통한 재교육 기회부여 이후 신랄한 비평으로부터 살아남은 아마추어 가수의 생존기를 통해.

실시간 시청자 투표는 회를 거듭할수록 이야기를 확대 재생산해내는 경연자의 이미지에 경도돼 찰나의 비주얼에 매몰돼버린다. 어느 순간 생방송으로 포장된 절묘한 몽타주와 미장센, 국면전환용 편집, 뒤를 잇는 감동과 눈물 때문에 다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 법칙은 무의식적으로 승자의 손을 치켜들게 된다.

아이돌 그룹이 판치는 TV에 최근 혼자서 노래 부르는 가수들끼리의 경쟁이 시작됐다. 싱싱한 육체와 춤이라는 시각적 테러 없이 가창력과 표정만으로도 청중을 몰입시키는 종합연예인이 아닌 프로페셔널 가수의 재림이라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그들의 혼이 담긴 공연으로 인해 시청자들은 목숨을 걸고 극한음역을 치닫는 아티스트를 감동적인 시선으로 주시하게 되었다. 편중된 가요의 소비구조 때문에 운신이 좁아졌던 가수와 잊혀진 명곡을 다시 찾아 선보이게 된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장르, 창법과 목소리, 편곡 및 곡 해석 등의 차이점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채 청중의 일방적인 투표로 탈락자를 만드는 냉혹한 순위매기기 시스템은 가수가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면서 핏대를 세우며 옥타브 위를 넘나드는 애드리브에 매달려야만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잣대가 되어 제목을 무색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장벽이자 카스트제도가 되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숫자로 치환된 순위투성이다. 모든 것을 획일화 시켜버린 무작위 랭킹으로 말미암아 사실 대신 해석이, 실존 대신 고착화된 이미지의 복제품만이 남은 세상이 되어버렸다. 피가 흐르지 않는 CG로 만들어진 3차원 피사체인 ‘아바타’가 작년 흥행 1위를 한 것은 벌써 이미지가 실체를 대신하는 시뮬라크르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코끼리의 일부를 전체로 해석하여 남에게 강요하며 100미터 선수와 마라톤 선수를 같이 경쟁시켜 이름이 아닌 순위로 등급을 정하는 무의미한 평등주의는 귀는 열지만 입은 닫아야만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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