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이 그려낸 수묵화
기다림이 그려낸 수묵화
  • 류민하 기자
  • 승인 2011.05.01
  • 호수 13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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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양으로 도달한 경지, 사진작가 배병우

오랫동안 주의깊게 사물을 관찰하며 작업하는 것이 사진작가 배병우의 원칙이다. 신중하고 복잡해 보이는 예술가를 연상했지만 실제로 만난 그는 의외로 소탈한 사람이었다. 기자가 던지는 질문에도 별 고민없이 간단하게 대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단순함은 치열함의 결과물이라고 했던가. 그의 소탈한 면모 또한 긴 시간 끝에 형성되었을 것만 같다.


소나무에서 발견한 한국의 미

사진작가 배병우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이름에서 소나무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가 찍은 숱한 소나무 사진 중에서도 특히 2005년 앨튼 존이 1만 5000파운드(한화로 약 2천 800만원)에 사간 경주 소나무 사진이 화제가 됐다. 이 사진은 앨튼 존의 별장에 걸렸다. 앨튼 존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가 손사래를 쳤다.

“앨튼 존 이야기가 계속 나오니까 세무서에서 자꾸 세금 내라고 그러잖아요. 앨튼 존은 딱 한번밖에 작품 안 사갔는데 계속 내가 부잔줄 안다고.(웃음)”

그는 소나무를 가장 오래 찍어왔다. 1984년부터 소나무를 담기 시작했으니 햇수로는 스물 여덟 해나 됐다. 첫 해는 10만 km가 넘는 답사를 하고 조선시대의 소나무 그림을 모두 찾아봤다. 소나무를 표현하기 가장 적합한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소나무의 어떤 점이 그를 매료시켰을까.

“젊었을 적에 마라도에서 작업하다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것이 뭘까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경주에서 소나무를 발견하고 이거다 싶었지. 겸재 정선의 그림을 봐도 거의 소나무가 등장하거든요. 옛부터 소나무는 우리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살고, 소나무로 불을 지펴서 밥을 해먹고, 소나무로 만들어진 관 속에 묻히고.”

그의 소나무 사진은 한국적인 선의 아름다움이 살아있다는 평을 듣는다. 구불구불 휘어진 곡선이 있는가하면 곧게 뻗은 직선도 있다. 이러한 한국적인 선은 그가 작업의 소재로 삼은 제주도의 오름, 고궁과 정원에서도 발견된다.

“소나무의 선들이 한국의 감성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걸 안거지. 그러고 나서는 산이고 바다고 다니면서 선에 집중하게 됐죠. 한국의 선은 크지도 작지도 않으면서 요란하지도 밋밋하지도 않은 맛이 있어요. 우리나라 산하의 선들을 통해서 한국의 독특한 미감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시간의 양이 가져다 주는 것

그는 피사체를 찾아 끊임없이 걷고 셔터를 누르기까지 충분히 기다린다. 당장 찍기보다 찍는 대상을 이해하기를 선택한다. 그의 소나무 사진이 특별한 느낌을 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간에 따라 피사체가 변하는 모습을 담아내다 보면 그 안에서 피사체의 본질이 보이는 것일까.

“나보고 소나무랑 대화도 하느냐고 묻는데 그런건 아니고 아무래도 오래 보다보면 이해도가 높아지는 거죠. 옛날엔 소나무를 보면 촬영욕심이 앞섰는데 이젠 느긋하게 관찰부터 해요. 마음에 드는 작품 한 점을 얻으려면 필름을 수없이 써야해요. 같은 장소라도 계절과 시간을 다르게 해서 찍기도 하고 똑같은 나무를 사방팔방 돌아가면서 계속 셔터를 누르기도 하고요.”

그는 하나의 주제를 잡으면 짧게는 2, 3년, 길게는 20, 30년씩 붙잡고 씨름한다. 소나무도 그랬지만 다른 것들을 찍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종묘를 찍어달라는 부탁에는 3개월로 정해져 있던 작업기간을 2년으로 늘렸다. 오랫동안 작업량을 쌓아야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무엇이 나온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분식집에서 음식 잘하는 거 봤어요? 삼계탕을 하나 끓여도 확실하게 끓여야지. 종묘 같은 경우는 어떤 해는 낙엽이 좋지 않고 어떤 해는 지붕에 쌓인 눈이 별론데, 그럼 내년에 다시 찍어야 되잖아. 실제로 눈 내린 종묘 풍경만 열 다섯 번 찍었어요.”

자연과 고궁 등 토속적인 소재가 담긴 그의 사진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비평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됐다. 그의 ‘옛날 사진’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로 자연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재조명됐다.

“한 가지를 꾸준히 고수하다보면 결국 자기 차례가 오는거지. 난 그냥 찍고 싶은 것을 찍어요. 파괴된 자연을 보여주면서 자연을 함부로 다루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면서 잘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것도 중요하죠. 제 역할은 자연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거에요.”


빛으로 그린 그림

그에게 사진은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는 사진이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했다. 사진은 창작자의 개성이 그대로 반영되는 예술이라는 뜻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는 고향인 여수의 바다를 그림으로 그려왔다. 전공도 사진이 아니라 응용미술학임을 감안하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실제로 그의 안개 낀 듯한 흑백 사진들은 붓으로 그린 수묵화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평면에서 이뤄지는 조형은 다 통하는 면이 있어요. 붓을 가지고 시를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이 있잖아. 나는 카메라를 가지고 그림을 그린다고. 미술교육을 받은 사람이 카메라를 다루면 예술사진이 되는거지.”

빛으로 그림을 그리려면 가장 큰 광원인 태양을 잘 이해해야 한다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그가 좋아하는 시간대는 동트기 전과 해질 무렵이다. 그는 사진을 찍기 시작할 때부터 매일 새벽녘에 일어나 사진을 찍었다.

“동이 트는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본 사람이면 전부 공감할거야. 해 뜨기 직전에 안개와 섞인 광선의 미묘한 느낌이 참 좋아요. 그래서 늘 동트기 전에 일어나서 하루를 준비하는 거지요. 매일 그렇게 안했으면 내 사진 중 3분의 1은 없었을 거야.”

그는 얼마 전 모 기업의 제안으로 ‘아시아의 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현재는 프로젝트 첫 국가인 중국의 문화를 키워드로 작업을 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의 자연과 궁, 알람브라 궁전 등 동양의 미를 접목한 사진을 찍어온 그에게는 지금까지의 작업들을 심화해서 정리하는 셈이 될 수도 있다.

“극동아시아 문화의 원류를 중국에서 발견할 수 있거든. 중국의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면모를 찾고 있어요. 한쪽에서 연구를 하고, 나는 사진을 찍는거죠. 지금 찍고 있는 것들은 중국문화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도교, 불교의 발상지와 유적이에요. 이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면 자연도 다시 찍을거에요. 그게 익숙하고 편안하니까.”

사진 심소연 기자
사진제공 : 배병우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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