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의 야심찬 발돋움
소니의 야심찬 발돋움
  • 주상호 기자
  • 승인 2011.04.30
  • 호수 13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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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vs마쓰시타 비디오테이프의 승자는 누구

소니의 첫 번째 발돋움
1946년 이부카 마사루와 모리타 아키오는 오디오 전자 기기 사업에 중점을 둔 소니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소니는 점차 오디오 이외의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고 1960년대 후반 비디오 사업에 뛰어 들었다. 미국 암펙스 주식회사가 텔레비전 방송국용 비디오 녹음기 생산으로 대량 소비 시장을 창출한 것에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암펙스의 영역에 뛰어든 다른 후발 주자들과 마찬가지로 소니 역시 화질, 효율성, 사용의 편리성과 가격 사이의 두 목표를 모두 잡지 못해 결국 생산된 제품은 일반 소비자에게 인기를 끌지 못했다.

소니가 초기 실패를 경험하고 찾은 돌파구는 우수한 기술의 전통을 지켜가면서 가정용 비디오 녹화기를 최초로 선보이는 것이었다. 1970년 소니는 자사의 녹화 기술이 광범위하게 활용될 것이라고 확신하며 시장에 진입할 준비를 마쳤다. 단일 표준이 소비자에게 큰 반응을 얻을 것이라고 본 소니는 표준 전쟁을 피하기 위해 마쓰시타(JVC)와 협력을 맺었다.

소니보다 훨씬 규모가 컸던 마쓰시타는 그동안 자체 기술을 개발해온 터였다. 소니는 마쓰시타가 소니의 초기 설계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해 폭 넓은 테이프와 기존보다 큰 카세트 및 케이스를 포함해 필요한 몇몇 기술에 대한 협약을 맺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이렇게 생산된 제품인 U-마틱(당시의 비디오테이프 녹화기)은 가정용으로는 비싼데다 너무 큰 크기로 학교 및 단체로 시장이 국한됐다.

이렇게 소니가 주춤하고 있는 사이 팔로알토 지역의 카트리지 텔레비전 주식회사가 가정용 비디오카세트레코더장비(이하 VCR)인 카트리지비전을 최초로 내 놓았다. 1972년 출시된 카트리지비전은 소매로 공급됐다.

카트리지 텔레비전 주식회사는 카트리지비전을 녹음과 상영 기능을 동시에 갖춘 장치로 개발했다. 이어 영화 몇 편을 제작한 뒤 소매업자들과 계약을 맺고 ‘카트리지 대여 사업’을 운영했다. 그러나 대여 과정이 복잡했다. 대여점은 테이프의 높은 가격과 시장의 불확실성 때문에 직접 상품을 취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소비자들은 영화 테이프를 소매상에 직접 주문해야 했다. 그러면 소매상이 배급업자에게 다시 주문을 하고 배급업자가 이를 소매상에게 발송하면 소비자가 소매점에 가서 받는 식이었다.

게다가 방송국용 영화가 2시간 분량이었던 데 비해 카트리지비전은 녹화 시간이 114분에 불과했다. 결국 기술 결함, 소매 경로의 불합리성과 장치 판매 및 테이프 대여를 확실히 뒷받침해 주지 못한 무력함, 재정 투자자들의 조급증으로 인해 카트리비전 사업은 제품을 발매한지 1년도 되지 않은 1973년 중반 파산을 맞고 말았다.

소니, 비상을 준비하다
이제 소니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마쓰시타와 계속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U-마틱을 개발할 것인가, 아니면 독립적으로 나설 것인가. 소니 입장에서는 두 행로 모두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계속 협력 관계를 유지한다면 마쓰시타의 낮은 기술력 때문에 성장이 제한될 것이었다. 반면 독립을 한다면 자원이 줄어들고 포맷 전쟁에 휘말리는 위험까지 감수해야 했다.

당시 소니는 U-마틱 개발에 아주 큰 몫을 했으나 마쓰시타  때문에 발전이 저해되고 있었다. 따라서 소니는 마쓰시타보다 나은 제품을 더 빨리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했다는 자신감과 최고의 제품이 시장을 독점하게 되리라는 믿음 아래 VCR 기술을 개발해 베타맥스 브랜드를 출시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마쓰시타 역시 자체적으로 VCR을 개발했다. 두 회사는 기술을 계속 발전시켰지만 비용과 품질 모두 잡기 어려웠다. 고화질을 구현하려고 비싼 부품과 고속 테이프를 사용하자니, 비용이 올라가고 녹화 시간이 줄어들었다. 반대로 저렴한 부품과 저속 테이프를 사용하면 가격을 낮추고 녹화 시간을 늘릴 수 있으나 화질과 음향은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못했다.

이러한 기술적 제약에 부딪치자 소니는 고화질과 비용 절감 중 어디에 초점을 맞출지 선택해야 했다. 마쓰시타는 다년간 쌓은 제조 능력으로 설계를 최대한 활용, 비용을 절감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소니는 오래 전부터 기술의 우수성을 강조하며 다양한 단계의 품질에서 우위를 차지해 왔다. 소니는 제품의 차별성을 유지하는 노력을 강화하고 변화를 예시하려는 일환으로 녹화와 재생을 할 때 원본이 그대로 재현된다는 점을 적극 활용했다.

또한 U-마틱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과 창업주 모리타의 경영 신조인 “늘 앞장서라, 절대 뒤따라가지 말라”를 되새기며 앞으로 등장할 잠재적인 경쟁 업체들에게 제품 의장권을 양도하지 않기로 했다. 마쓰시타가 소니의 설계를 제품화하는 데 실패했던 터라, 소니가 베타맥스 포맷을 제대로 생산할 수 있는 하청 업체를 엄격하게 골라내며 완성품의 품질을 놓고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가 점차 쌓이자 소니는 최고의 품질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산성 유지 및 마케팅과 제품 배급에 드는 경비가 높아졌다. 이 같은 불리한 점에도 불구하고 베타맥스가 성공만 한다면 소니는 조직적으로 자체 제품의 비중을 늘려 라이선스 비용보다 훨씬 많은 도매 이윤을 챙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경쟁 정도가 낮기 때문에 가격 책정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희망도 있었다. 다시 말해 소니는 전략상 아주 중요한 내기를 걸었다. 고화질과 비용 절감 중 고화질 전략을 선택했다.

마쓰시타의 전략은 소니와 정반대였다. 마쓰시타는 베타맥스의 영상 및 음향 성능을 따라잡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생산 능력 향상을 위한 연구 개발에 중점을 뒀다. 결과적으로 바로 이점 때문에 마쓰시타의 VHS와 소니의 베타맥스는 큰 차이를 보였다. VHS는 가격이 더 저렴했으며 큰 카세트와 저속 테이프의 속도 덕분에 텔레비전 방송용 영화를 녹화하는 데 필요한 2시간 녹화 능력을 보유하게 됐다.

생산 과정도 VHS가 더 수월했다. 즉, 마쓰시타는 소니에 비해 다방면에 걸쳐 자체 기술의 특허를 출원할 수 있었다. VHS 제조사들이 더 투자할수록 제조사들 사이에 해당 기술을 향상시키려는 경쟁이 더 치열해졌고, 마쓰시타는 얼마 지나지 않아 VHS가 베타맥스의 성능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또 VHS 제조사들 전체를 놓고 본다면 소니보다 많은 마케팅 및 광고비용을 지출했기 때문에 배급망이 확장되고 성능상의 약점이 충분히 보완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마쓰시타는 비용 위주의 전략을 추구하며 소니와 완전히 반대 전략을 추구했다. 베타맥스는 1974년 소니 트리니트론 텔레비전의 부속 제품으로 출시됐고 1975년 독립형으로 나왔다. 소니는 자사 제품이 TV 방송의 역사를 바꿀 혁신적인 개발품이라며 대대적인 선전에 나섰다.

베타맥스 장치는 VHS보다 크기가 작았지만 대체로 기능 면에서 우위를 보였고 리모컨, 정지 기능, 영상 스캐닝과 같은 새 기능을 최초로 도입했다. 그러나 많은 제조사들이 VHS 생산에 전념하고 있었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마쓰시타 혹은 관련 기업에서 소니의 새로운 기술을 모방했다. 어떤 VHS 제조사도 소니 제품의 차별성을 따라잡지는 못했지만, VHS 제품의 선택 폭은 더 넓어졌으며 가격, 기능, 제품 특성도 다양했다.

소니와 경쟁하는 업체는 물론이고 서로 경쟁하는 업체들마저도 VHS를 더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VHS 제조사들은 곧 제품 차별화, 비용 우위 등 갖가지 전략을 구사했다. 이런 점들로 소비자 선호도가 확산돼 VHS는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1970년대 후반 무렵에는 VHS가 베타맥스와의 시장 점유율 차이를 계속 줄여가 결국 앞지르게 될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베타맥스의 독특한 기능을 선호하는 소비자층이 존재할 것이라는 추측도 매우 일리가 있었다. 때문에 어쩌면 소니는 상당히 규모가 크고 이익이 높은 틈새시장을 고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생산 대수로 보면 소니의 VCR은 VHS 최대 생산자인 마쓰시타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소니의 베타맥스, 몰락의 길을 걷다
소비자들이 베타맥스의 우수한 비디오 및 오디오 복제 기능보다 VHS의 장시간 녹화 기능을 선호하면서 점차 베타맥스는 시장을 잠식당했다. 이에 따라 소니는 1977년 베타맥스의 새로운 버전인 BII를 출시했다. 이때부터 베타맥스의 원래 포맷은 BI이라고 불렸다. BII는 녹화시간 증가로 BI보다 화질이 떨어졌다. 가장 중요한 점은 베타맥스 두 버전이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BI용 테이프는 BII에서 작동되지 않았으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소비자들은 기존에 BI으로 녹화해 놨던 테이프를 BII에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BII를 구입하더라도 BI을 처분할 수가 없었다. 같은 장비 두 대를 집에 가지고 있는 것은 정말 번거로운 일이다. 또한 다시 BII를 구입하려면 많은 돈이 들었다. 당연히 BII를 구입하는 시기를 늦출 텐데, 사실 소니 입장에서는 아직 VCR 시장이 무르익지 않은 상황이고 새로운 시장을 유지하거나 확장하는 것이 대체 시장을 고수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점점 BII의 인기가 BI보다 올라갔고 1977년 한 해 판매량이 1974년 베타맥스를 출시한 이후의 누적 판매량보다 2.5배나 됐다. 이에 따라 베타맥스의 설치 기반이 거의 30퍼센트에 다다랐지만, 소니는 결국 1978년 BI을 포기했다. 이로 인해 미국 전역에서 성장하고 있는 소규모 비디오 대여점들은 베타맥스가 시장에서 불리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영세한 대여점들은 베타맥스 두 버전을 취급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점차 BII의 시장 점유율이 빠르게 앞서 나가자 비디오 대여점들은 BII용 테이프를 들여 놓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BII출시와 동시에 대여점용 영화도 인가를 받았기 때문에 BII는 눈에 띄는 시장 점유율을 확보할 시간이 없었다. 그 결과 영화 대여 시장에서 베타맥스의 실제 점유율은 33퍼센트로 1년 만에 25퍼센트가 떨어졌다.

두 가지 압력 때문에 베타맥스의 시장 점유율은 다음 해에도 계속 떨어졌다. 첫째, 다양한 종류의 VHS 모델이 많은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둘째, 대여 테이프의 유용성 덕에 네트워크 효과가 크게 확산됐다. 즉 VHS가 많이 대여될수록 VHS 판매가 늘어나고 다시 VHS 테이프가 더 많이 대여되는 순환 고리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대여 시장은 1982년부터 1986년 사이 해마다 두 배로 성장해 5년 동안 32배로 늘어났다. 이렇게 대여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자 결국 베타맥스는 1989년에 이르러 미국 시장에서 완전히 멸종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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