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마루 너머에 해가 지고 있었다 _ 충남 보령시 대천동
서산마루 너머에 해가 지고 있었다 _ 충남 보령시 대천동
  • 심소연 기자
  • 승인 2011.04.03
  • 호수 13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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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고향을 찾은 「관촌수필」의 주인공
▲ ①'나'가 살던 동네의 주택들은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뀐지 오래다
봄. 만물이 소생하는 따스한 계절.

휴가차 어릴 적 살던 고향동네에 가보기로 했다. 떠나기 전 검색해 본 한내읍은 내가 살던 때와 달리 ‘대천 1동, 2동…’으로 지명이 바뀌어 있었다. 동네만의 향내가 없어진 이름. 하지만 옛 추억을 상기하며 길을 나섰다.

보령 종합 터미널에서 내려 옛 집이 있는 대천 2동 아랫갈머리로 가는 길. 눈깔사탕을 팔던 구멍가게와 사시사철 풀무질로 바쁘던 원애꾸네 대장간들은 온데간데 없었다. 귀가 울릴 정도로 최신가요를 틀어놓은 의류매장과 어디에나 자리 잡고 있는 패스트푸드점이 예전의 모습을 빼앗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세월의 길이를 체감하며 옛집으로 향했다.

대천읍 대천리 387번지. 내가 태어나고 18년 동안 살았던 집. 나를 끝으로 이젠 남의 집이 돼버린 옛집. 빨갛고 파란 슬레이트 지붕들로 어질러진 동네 속에서 그 집을 찾아다녔다. 고향집이 있던 터를 발견한 나는 기대와 달리 실향민이라는 단어를 느꼈다.
▲ ②마을 뒷산의 소나무들은 곧은 풍채를 자랑하며 서있다


집 주변을 지키고 서있던 들충나무 울타리는 하얀 시멘트 담벼락으로 변해있었고 우아한 옛날의 풍모를 자랑하던 집은 2층의 양옥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대문 앞에는 자동차가 주차돼 있고 대문도 닫혀있어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었다.

지금은 변해버렸지만 매화나무, 복숭아나무가 흐드러지게 피던 옛 집에는 나의 정신적 지주인 할아버지와 좌익사상을 목청껏 주장하다 희생되신 나의 아버지, 그 밑에서 자란 나에 이르기까지. 우리 집안의 3대가 공존했었다. ‘페앵…숭헌’, 꾸중을 대신해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할아버지의 그 소리가 시멘트 담장 너머에서 들리는 듯 했다.

서늘해진 마음을 다잡고 친구들과 놀던 뒷산 부엉재의 소나무 숲을 찾았다. 성냥개비마냥 들어선 아파트들로 인해 거진 베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꼿꼿이 등을 펴고 서있는 소나무들. 비록 예전의 풍성하던 모습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푸르른 그 모습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 ③대천 2동 입구에는 관촌수필의 배경지임을 알리는 비석이 있다
해가 점점 지는 것을 느끼며 돌아가기 전 버스터미널 근처 관촌역에 잠시 들렀다. 한 순간 어린 시절 기차역의 풍경들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동네 조무래기들과 마을 어른들이 몰려 미군들이 던져주는 초콜릿과 빵 등을 받아먹던 모습. ‘어이구 저런… 저런 그지떼…’. 우리 집에서 일했던 옹점이가 나지막이 내뱉던 욕지거리. 던져준 먹을거리에 미군들이 침을 뱉는다는 소문이 일고난 뒤로 아무도 반기러 가지 않던 것까지. 지금은 저마다 즐거운 표정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로 가득한 기차역 안.

하나부터 열까지 변해버린 고향을 등지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 ④주말농장처럼 휴일에 들러 농사를 지으러 온 한 아저씨

차창너머 마지막으로 바라본 대천동. 그 옛날 집집마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구수한 연기로 가득 차던 마을은 이제 날이 지면서 차가워진 바람으로 차있었다.

사진 류민하 · 심소연 기자
참고 : 소설 「관촌수필-일락서산」

▲ ⑤대천역에는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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