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 김명지 기자
  • 승인 2011.03.05
  • 호수 13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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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3월 13일 암살당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에서 나의 아버지(알렉산드르 2세)를 향한 폭탄이 터졌다. 비통하고 참담한 마음뿐이다. 범인은 이그나찌 그리네비츠키란 놈이었다. 그 놈이 속한 ‘인민의 의지당’은 꽤 오랜 시간동안 차르(제정러시아의 황제를 칭하는 말)를 위협한 과격파였다. 지난 2월 차르의 거처인 동궁의 식당에 폭발물을 설치했던 것도 그자들의 소행이었다. 다행히 아버지께선 간발의 차로 늦게 식당에 도착하셔서 당시의 위기를 넘기셨다.

이들의 뿌리는 인민주의자들에 있다. 인민주의자들은 ‘브 나로드’(‘농촌 속으로’란 의미)를 외치며 농촌으로 들어가 “모든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주자”라느니, “전제 정치를 타도하자”는 둥의 궤변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1873년부터 약 2년간 지속된 일이었다.

그러나 겁 많은 농민들이 그런 과격한 정치적 구호들을 쉽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심지어 이들을 신고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브 나로드 운동이 실패한 후 이들 내부에서 파벌이 생기는데 그곳에서 갈라져 나온 과격 테러단이 바로 인민의 의지당인 것이다.

브 나로드 운동의 원인은 농노해방령에 대한 불만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개혁적 차르셨던 아버지께선 일찍이 농노해방령을 내리셨다. 이로 인해 농노들은 토지를 전혀 소유할 수 없었던 농노제 체계 하의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무상으로 토지를 나눠주지 않는 것에 대해 농민, 더불어 지식인들까지 불만을 표출했다. 이후 여러 차례 농민 봉기가 일어났던 것을 생각하면 답답하기만 하다. 재정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란 것을 아는 지나 모르겠다.

어디 농노해방뿐인가. 아버지께서는 사회 전체에 새로운 변화를 꾀하셨다. 지방 행정 분야에서는 자치 회의기구인 ‘두마’와 집행기구인 ‘젬스트보’를 만드셨다. 이로 인해 각 지역 내 산업, 교육, 보건 등의 문제를 그들이 자체적으로 논의하고 결정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이들이 근대적 사법제도의 혜택을 받게 된 것도 모두 아버지의 은혜덕분이다. 복잡하고 부실했던 우리 제국의 사법제도가 “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란 기치를 내걸기까지 차르께서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셨는지. 사법권과 행정권이 분리되고 변호사 선임에 배심원 제도까지 만들어지니 평민들의 편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불어 아버지께선 지식인들의 언론활동 검열에도 파격적인 관대함을 보이셨다.

그러나 그렇게나 열심이셨던 아버지께 제국의 신민들은 어떻게 반응했나. 처음 아버지를 암살하려 했던 드미트리 카라코조프를 잊을 수가 없다. 그 사건 이후 아버지께서 제국을 통치하신 기간 내내 암살 위협이 끊이질 않았으니 말이다. 저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쓴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는 또 어떤가. 그 자가 그따위 위험한 혁명적 저서를 썼을 뿐만 아니라 비밀결사까지 만들어 제정을 위협했던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황태자, 아니 이제 차르가 되는 나 알렉산드르 3세는 지방자치의 범위를 줄이고 언론 검열을 강화할 것이다. 또 국교인 러시아정교를 통해 사회를 통제할 것이다. 아버지께선 제국 신민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셨음에도 충격적인 결말을 맞으셨다. 나는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으리라.

도움: 한정숙<서울대ㆍ서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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