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등극과 함께 열린 거짓의 세계
수상 등극과 함께 열린 거짓의 세계
  • 김명지 기자
  • 승인 2010.12.31
  • 호수 13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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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체주의와 대학살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지구상에 수백의 모범이 될 만한 국가가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문화를 담당하고 있는 아리아 인종이 사멸한다면 오늘날의 가장 우수한 민족의 정신적 수준에 알맞은 문화는 존재할 수 없으리라』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 중.

바이마르 공화국의 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힌덴부르크는 다음해인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한다. 힌덴부르크는 초짜 정치인 히틀러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자본가들에게 설득 당해 결과적으로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는 ‘제3제국’ 시대를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엄격한 아버지와의 갈등, 인정받지 못한 미술가로서의 고뇌를 벗어나 히틀러가 선택한 정치의 길은 결과적으로 독일 사회에 길이 잊히지 않을 거대한 변화와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의 경제가 베르사유 조약의 엄청난 배상금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나치스는 공공투자를 통해 경제회복을 꾀하고자 했다. 이는 후에 사학자 치텔만에 의해 긍정된다. 치텔만은 “나치스의 경제정책은 다원주의적 경쟁 원리를 통해 민족공동체의 능력을 극대화시킨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며 나치즘을 근대적인 운동으로 해석했다. 실제 나치스의 집권 이후 독일의 경제가 회복기에 접어든 당시 상황이 이 해석의 근거로 사용된다.

그러나 나치스의 경제정책은 상당 부분 왜곡됐다. 나치스 시대의 경제성장 동인은 주로 국가의 투자였으나 민간 수준에서의 투자는 1920년대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기업가들은 세계 동향에 따라 군수분야에 집중된 공공투자가 언제 종결될지 모른다는 불안함에 투자를 자제했다. 김학이<동아대ㆍ사학과> 교수는 “나치스의 4개년계획은 바이마르 시대 때부터 있어왔던 것을 이어간 것일 뿐”이라며 “군수투자가 유효수요를 창출하고 완전고용을 이끌어 낸 것은 사실이나 같은 시기 영국의 사례보다 국민소득의 증가율이 낮았다”며 비효율성을 지적했다. 가령 표준화, 비숙련 노동자들에 의존하는 형태인 테일러-포드주의적 생산은 벤츠 등의 독일식 자동차 생산방식과 전혀 맞지 않았다.

경제 정책 외에도 나치스 정권이 자신들을 포장하는데 이용한 또 하나의 중요한 무기는 히틀러 개인의 우상화였다. 그 중 여타 선전과 비교되는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청년 호르스트 베셀은 나치돌격대에 소속된 인물이었는데 애인과 동거를 하다가 집세 문제로 집 주인과 다투게 됐다. 마침 집 주인의 죽은 남편이 공산당원이었는데 이 일이 커져 베셀은 여러 공산당원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괴벨스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베셀은 법대생의 신분을 버리고 조국 독일을 구하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숨진 순교자로 포장돼 대중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여타 전체주의 선전과 비교되는 베셀 영웅화의 특징에 대해 권형진<건국대ㆍ사학과> 교수는 “나치스의 선전은 ‘천년왕국 건설’이란 비전으로 전개된다”며 “특히 베셀의 경우 자라나는 미래세대를 공략한 ‘대중영웅화’라는 데 의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더해 권 교수는 “나치스가 만들어낸 대중영웅의 궁극적인 목적은 끊임없이 나치 이데올로기를 위해 희생하는 정치 종교의 순교자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며 “베셀을 이용한 선전에 동상, 조형물과 더불어 그의 이름을 딴 거리, 지역 등의 전통적 영웅 숭배의 문화 기제를 접목시킨 것이 특징”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천년왕국’의 꿈은 결코 실현될 수 없었다. 종전 직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재판에서 나치스는 결국 심판대에 올랐다. 총통 히틀러는 이미 자살하고 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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