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 광장에서 물길의 근원을 떠올리다
청계 광장에서 물길의 근원을 떠올리다
  • 김명지 기자
  • 승인 2010.11.13
  • 호수 13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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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세월 거쳐 사람들 곁에 돌아온 청계천

▲ 복원된 청계천의 여러 가지 축제들은 사람들의 발길을 이끈다
길이 10km 가량의 물길이 복개와 복원의 과정을 거쳐 문화로 자리 잡았다. 지난 2005년 복원 공사를 마무리 한 청계천은 종로구 광화문의 동아일보사 부근부터 성동구 왕십리의 살곶이다리까지 이어지는 물길이다. 풍수지리 전문가 최창조 씨는 “서울의 명당수는 청계천”이라며 “청계천을 사람에 비유하자면 입에서 항문까지의 통로”라고 밝힌 바 있다. 돌아온 명당수 청계천,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분수와 인공 폭포들로 단장한 그 곳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발걸음이 함께 하고 있다.

물길 속으로 들여다 보이는 역사와 그림자

청계천의 변화에는 역사가 담겨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개천은 북악, 인왕, 목멱의 여러 골짜기 물이 합쳐져 동쪽으로 도성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흘러 3수구를 빠져나가 중랑포로 들어간다”며 청계천의 발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개천’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청계천은 조선 건국 초기에 처음 개발되기 시작했다가 이후 사림이 정권을 주도한 시기에는 방치된다.

대한토목학회지 「다시 흐르는 청계천, 그 역사와 미래」에서 조광권<서울시 교통연수원> 원장은 “태종과 세종 시기에는 새로이 건설된 왕조를 굳건히 하려는 생각이, 사림의 집권 시기에는 명분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영조 대에 대대적으로 하천 바닥을 파 물이 잘 흐르도록 한 것 역시 당시의 실학적 풍토를 엿볼 수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논문 「도시 공간 ‘청계천’의 서사성과 문화정체성」에 따르면 청계천은 오염과 범람 문제로 이미 일제 강점기 때부터 복개 움직임이 있었다. 지난 1957년부터 1961년 사이에는 청계천 위를 덮고 고가도로를 건설하는 복개 공사를 본격적으로 실시했다. 4ㆍ19 혁명으로 잠시 주춤했던 공사는 1960년 다시 재개됐다. 다음은 지난 1960년 11월 30일 동아일보에 실린 공사 재개 관련 기사다.

『해방 후에는 오물 유기소가 돼 썩은 냄새가 말이 아니었다. 더욱이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로 하여 삼가에서 오간 수다리까지 이르는 천변은 판잣집 점포로서 흥청거렸으나 인구의 대폭적인 증가로 인한 교통량의 폭주로 …(중략)… 준공되리라 한다. 이렇게 되면 우선 도시의 미관상으로도 십상이지만 무엇보다도 종로와 을지로로 몰리던 교통량을 대거 흡수할 수 있어 교통사고의 방지는 물론 교통량이 그만큼 완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 기사를 통해 복개 공사가 당시 청계천 주변의 저급한 위생 환경과 복잡한 교통 문제로 인해 실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4ㆍ19 혁명 전후 청계천 일대에 근거를 두고 있는 폭력 집단의 행패로 인해 공사가 방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 해 복개 공사는 마무리됐다.  이상헌<건국대학원ㆍ건축설계학과> 교수는 “청계 고가도로의 건설 이후 철물, 전자 관련 상권이 형성됐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광교 부근의 복개된 청계천은 ‘근대화된’,  복개되지 않은 평화시장 부근의 청계천은 ‘낙후된’ 곳이라는 차별적 이미지를 갖게 됐다. 도로의 안전성이나 불법 상거래 등의 문제가 지적되기도 했다. 또 1990년대 제조업이 쇠퇴기에 이르며 제조업 중심의 청계천 주변이 더 이상 산업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됐다.

이에 따라 지난 2002년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청계천 복원’을 공약 중 하나로 내걸었고 2003년부터 공사를 시행했다. 강명헌<단국대ㆍ경제학과> 교수와 이인원<홍익대ㆍ도시공학과> 교수 등이 복원 공사에 대해 찬반의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팽팽했던 논란에도 불구하고 2005년 6월 1일 청계천에는 공식적으로 다시 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다음은 2005년 6월 2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휴대전화로 통수 명령을 내리자 2분 뒤에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졌다. 청계 광장 분수대의 180여 개 관에서 일제히 솟아오른 물은 분수대를 넘어 8도석(石)이 있는 제1연못에 떨어졌다. 8도석은 조선시대 전국 8도를 상징한다』.

복원 공사의 핵심 내용에 대해 홍성태<상지대ㆍ사회학과> 교수는 “청계천은 사실상 복원공사가 아닌 개발공사였다”며 “복개도로를 철거하고 하수구로 이용했던 청계천을 인공 수로로 개발한 것”이라고 전했다. 또 홍 교수는 “청계천의 진정한 자연적 복원과 시민들의 자유로운 이용권 확립은 앞으로의 과제일 것”이라고 밝혔다.

물길 따라 터지는 문화의 환호성

지난 5일부터 시작된 ‘서울 세계 등축제’는 시작된 지 6일 만에 약 94만 명이 다녀갔고 21일까지 연장되기에 이렀다. 이처럼 복원 공사 후 청계천에서는 수많은 문화 행사들이 이어지고 있으며 청년 문화 관련 행사들 역시 심심찮게 개최되고 있다.

청계광장에서 열린 대학생 디자인 전시회 ‘생각대로 Week&T’는 시민들에게 대학생들의 독창적인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장애 가정 대학생들을 돕기 위한 걷기 대회와 같은 지원성 행사도 열렸다.
올해로 3회를 맞은 ‘청계천 대학가요제’ 또한 다양한 대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주최 측 총괄진행자인 문병환<머니투데이> 부장은 청계천을 개최 장소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한국 변혁의 새 상징으로서 생태 환경과 문화 예술이 꽃피는 점과 국내외 사람들이 많이 찾는 세계적 관광명소로 자리잡아가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전했다. 문 부장은 “청계천의 역동적 기운과 계절마다 바뀌는 주변 풍경 등이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대학생 문화 행사와 잘 맞는다”며 행사와 행사 장소인 청계천 사이의 연관성을 설명했다.

집이 가까운 편이라 종종 청계 광장을 찾는다는 김선희<서울시ㆍ서대문구 27> 씨는 “대학 시절부터 찾았던 청계천은 내게 많은 추억을 만들어준 곳”이라 밝히고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색다른 느낌으로 기운을 북돋워준다”며 청계천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친구와 함께 기분 전환을 하러 왔다는 송지영<서울시ㆍ관악구 26> 씨도 “청계천은 우리가 피곤에 지칠 때마다 찾을 수 있는 도심 속 휴식 공간”이라고 전했다.
손수진<한양여자대학ㆍ관광과> 교수와 진병렬<한영관광개발> 대표이사는 논문 「청계천 수변공간의 관광체험에 다른 문화관광지로서의 타당성에 관한 탐색적 고찰」에서 “현재 휴식공간과 보행로로만 인식되고 있는 청계천 수변공간은 최초 목표인 역사문화공간으로서의 방향으로부터 어긋나고 있다”며 “박물관이나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확대해 교육성을 가미 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교수 역시 “어디서도 보기 힘든 번잡한 도심 속 공원이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곳”이라며 청계천 복원의 긍정적 근거를 알렸다. 한편 홍 교수는 “고가도로와 복개도로를 철거하고 도심 속 열린 공간을 마련했으며 인공 수로 개발을 통한 친수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라고 전했으나 “서울도심의 생태활력을 제공한 반면 조선 시대의 가장 중요한 하천 개발 문화 유적을 완전히 파괴했다는 부정적 면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진 류민하 기자
일러스트 김나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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