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게 몰아치는 세상에서 건어물녀로 살아가기
바쁘게 몰아치는 세상에서 건어물녀로 살아가기
  • 김명지 기자
  • 승인 2010.11.06
  • 호수 13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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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게 몰아치는 세상에서 건어물녀로 살아가기

건어물과 캔맥주로도 행복하다는 그녀들의 소소한 일상
엣지녀, 된장녀, 짐승남… 수많은 신조어 속에 ‘건어물녀’가 있다. ‘건어물녀’는 직장에서는 일 잘하는 똑똑한 여성이지만 퇴근 후에는 이와 정반대의 모습을 한 채 건어물과 캔맥주를 먹으며 휴식을 즐기는 싱글 여성들을 의미한다. 최근 여러 여자 연예인들은 ‘건어물녀’를 자처하며 그들의 삶에 공감한다고 밝힌 바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던 그녀들의 일상이 ‘건어물녀’란 단어의 본격적인 등장 이후 여러 사람들의 화두에 오르고 있다.

미디어 속 건어물녀의 초상
일본 방송사 ‘니혼TV’에서는 ‘집에 있을 때는 트레이닝복 차림’, ‘제모는 여름에만 하면 OK’. ‘TV에 장단 맞추며 혼잣말을 한다’ ‘라면을 냄비 째 먹을 때가 있다’ 등을 내용으로 하는 건어물녀 확인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선보였다. 이 방송사에서 방영해 큰 인기를 모은 드라마 「호타루의 빛」이 건어물녀란 단어의 시초가 됐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주인공 ‘호타루’는 나무랄 데 없이 직장 사무를 수행하는 커리어 우먼이다. 그러나 그녀는 일을 나가지 않을 땐 집에 틀어박혀 큰 인형을 껴안고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햇살을 쬔다. 집안은 청소를 안 한지 오래다. 극 중 호타루는 ‘최근 가장 두근거렸던 때가 언젠지’를 생각하며 ‘지하철 계단을 올랐을 때’라고 자답하기도 한다. 다음은 드라마 내용 중 직장동료의 입을 통해 표현되는 건어물녀의 특징이다.

『예를 들면, 직장에서는 언뜻 보기엔 화려한 OL(Office lady)의 차림새를 하고 있어도 집에 돌아가면 바로 트레이닝복 차림이지. 분수 머리를 하고 엉덩이나 긁고 말이야. 한 손에는 맥주를 들고, 푸쉬!』
또 영화「애자」에서 역시 건어물녀가 등장한다. 여주인공 ‘애자’는 힘든 생활 속에서도 남들에게 기죽지 않으며 할 말 다하는 당찬 여성이지만 일 외에는 연애조차도 제대로 신경쓰지 않는다.

실제 ‘건어물을 씹어 먹진’ 않더라도 이와 유사한 행동을 하는 인물들은 많다. 영화 「어글리 트루스」, 드라마 「장난스런 키스」 등에도 자신의 일에 몰두하느라 다른 일에 관심이 없는 건어물녀들이 등장한다.
강혜자<전북대ㆍ심리학과> 교수는 “건어물녀가 그런 생활 패턴을 유지하는 것은 스스로 그런 생활을 추구한다기 보다는 직장에서의 일과를 마치고 귀가했을 때 혼자만의 공간에서 택하는 하나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일 뿐”이라며 “외부 활동 대신 휴식과 함께 간단한 술과 마른안주를 먹는 이유는 그것이 그녀들의 피곤하고 지친 심신에 대한 비교적 신속하고 편리한 ‘셀프 서비스’이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미디어 속 건어물녀는 많은 이들의 일상과 무관하지 않다.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고 학기 초 참석하던 술자리에도 뜸해졌다는 이은섭<연세대ㆍ생명과학기술학부 09> 양은 “봉사활동 외에는 대외활동이 거의 없는 편”이라며 “수업이 끝난 후 과제를 하며 집안에서 편한 옷을 입고 뒹굴거리는 것이 편하다”고 전했다.

건어물녀와 은둔형 외톨이, “우린 달라요”
대외 활동에 대해 ‘귀찮음’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건어물녀와 유사한 의미를 지니는 신조어는 많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신조어들과 건어물녀, 특히 은둔형 외톨이와 건어물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저서 「폐인과 동인녀의 정신 분석」에 따르면 은둔형 외톨이, 일명 ‘히키코모리’는 타인과 전혀 관계를 갖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사는 젊은이들을 뜻한다. 2000년 1월 니카타 현 가시와자키 시에서 일어난 소녀 감금 사건의 용의자가 오랫동안 은둔 생활을 했다는 점이 주목을 받으면서 ‘은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생겨났다. 다음은 한 은둔형 외톨이의 일가족 살해 사건에 대한 기사다.

『얼마 전 30대 은둔형 외톨이 남성이 일가족을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 일본에서 은둔형 외톨이 문제가 또다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중략)… 일본에서 은둔형 외톨이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지금과 같은 장기불황이 엄습했던 지난 1990년대부터다. 많은 젊은이들이 긴 불황 속에 경제적인 압박을 받게 되면서 사회적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방안에 숨어사는 일이 급증하게 됐다.』

이처럼 은둔형 외톨이는 방 안에 틀어박혀 사느라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일절 금하고 있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사에 등장하는 30대 은둔형 외톨이 역시 중학교 졸업 이후 15년가량을 집안에서 틀어박혀 살았다고 진술돼있다. 그러나 건어물녀는 겉으로는 ‘뭐든 완벽한 커리어우먼’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수행한다는 뜻을 함축하기 때문에 이들과 현저한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 강 교수는 “은둔형 외톨이가 바깥사람은 물론 가족과도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온전히 스스로에게 갇혀 사는 것과 달리 건어물녀는 남들과 같이 일하고 인간적 소통을 지속해간다”며 “두 집단 간에 존재하는 약간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함께 엮이기 힘든 존재”라고 전했다.

건어물녀를 바라보는 우리사회
굳이 건어물녀가 아니더라도 그들의 가치관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들은 많다. 대학생들도 예외는 아니다. 외부 활동을 하며 가끔씩 사람들의 부정적인 면을 보면 회의감을 느낀다는 김보라<전북대ㆍ독어교육과 10> 양은 “집에서 드라마 같은 것을 보면서 무기력하게 보내는 것은 나쁘지만은 않은 경험”이라며 “그런 혼자만의 시간이 자신에 대한 고민과 재충전의 시간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결혼정보 업체 ‘가연’ 등이 미혼남녀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건어물녀에 대한 남성들의 다소 부정적인 인식을 엿볼 수 있었다. 여성 응답자의 61.7%가 자신을 건어물녀로 생각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남성의 63.1%는 건어물녀에 대해 친구로는 좋으나 애인으로는 싫다고 답했다. 특히, 남성이 생각하는 건어물녀의 단점으로 개인주의적 성향, 결혼과 연애에 대한 부정적 시각,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떨어진다는 점 등의 답변이 이어졌다.

건어물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이처럼 녹록치 못하다. 저서 「당신, 충분히 괜찮아」에서 고란 작가는 “건어물녀, 괜찮은 것 같은데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럽다”며 결혼을 권하는 사회에서 건어물녀들이 겪는 부담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일 외의 것들, 심지어 연애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는 건어물녀들에게는 “때에 맞춰 살지 마라, 100년도 못 사는 인생인데 남들 시선에 맞춰 살 필요가 있겠나”하는 조언을 전한다. 또 건어물녀의 출현에 대해 “빡빡하게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반작용 혹은 작은 숨통”이라며 “건어물녀가 됐다는 건 그만큼 일터에서 치열했다는 방증인데 밖에서 기진맥진해 돌아와 집에서 무장 해제되는 건 당연하지 않냐”며 건어물녀들의 생활을 옹호했다.

한편 건어물녀의 생활에도 부정적인 면이 없지 않다. 고 작가는 “건어물녀들은 공존에 대한 감각을 포기하고 살아간다”며 “언제나 중용이 중요하듯, 혼자 한숨 돌리는 시간이 소중한 만큼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강 교수 역시 이런 생활이 장기화 될 경우 개인적 우울증이나 건강 상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좀 더 건전한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강 교수는 “‘사랑과 친밀감이 행복의 원천’이라는 심리학의 최근 연구 결과들에 비추어 볼 때 알콜 등을 통한 일시적 자기위안보다는 친밀한 인간관계를 통해서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전했다.                          
 
김명지 기자 divine15@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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