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혁명을 이끈 민중에 대한 두 가지 시선
사회주의 혁명을 이끈 민중에 대한 두 가지 시선
  • 유지수 수습기자
  • 승인 2010.11.06
  • 호수 13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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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2월 러시아에서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한 봉기로 절대왕정인 차르 체제가 철폐되고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지만 민중들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배와 전쟁이 없는 세상을 원했던 민중들은 그 해 11월 혁명세력 볼셰비키를 위해 목소리를 모으기 시작했다.

볼셰비키혁명은 앞선 2월 혁명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으로부터 시작됐다. 러시아는 러ㆍ일전쟁의 패배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지도 못한 시점에서 차르는 제 1차 세계대전 참전을 선언했다. 거듭된 패배로 민중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며 전쟁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갔다. 1917년 2월 ‘국제 여성의 날’을 맞아 페트로그라드의 여성 노동자들이 빵과 평화를 요구하며 벌인 시위에서 시작된 민중봉기형태의 2월 혁명은 차르 체제을 무너뜨리고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민중들이 원하는 토지분배와 복지정책은 내놓지 않고 전쟁을 계속 해나가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민중들은 다시 분노하게 된다. 이 때 스위스 망명 중 귀국한 레닌이 볼셰비키들과 함께 토지의 국유화와 생산과 분배의 내용을 담은 4월 테제를 선언하며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레닌의 주도와 민중들의 지지로 일어난 혁명의 결과, 세계사 최초의 사회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볼셰비키혁명은 민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혁명이다. 한정숙<서울대ㆍ사학과> 교수는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임시정부가 아닌 볼셰비키를 지지했기 때문에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전했다. 레닌과 볼셰비키가 민중의 요구안을 수렴하면서 민심을 이끌었기 때문에 지지층을 잃은 임시정부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민중들의 적극적인 사회개혁 참여는 개혁 이후 그들의 일상생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예로 여성노동자들이 2월 혁명을 이끄는 등의 여성의 사회적 참여의 목소리가 커지자 당시로선 획기적인 여성 복지제도가 등장했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인정함으로써 부부간 개인 재산을 나눠 소유할 수 있는 부부별산제를 인정했다. 여성의 사회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탁아소 사업을 크게 확대했으며 더 나아가 아이를 부양할 능력이 되지 않을 경우 낙태를 합법으로 허가하기도 했다. 한 교수는 “남녀평등과 여성의 사회활동을 보장하는 여성 복지제도는 동시대의 다른 나라보다 선진적 복지 정책이였다”고 전했다.

그러나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사회주의가 실패한 체제라는 평가가 나오면서 혁명을 지지했던 민중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체제의 변화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닌 민중들 자신의 현실 탈피를 위해 무비판적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했다는 해석이다. 이에 대해 논문「사회주의 몰락 이후 러시아혁명 해석의 흐름」에서 박원용<부경대ㆍ사학과> 교수는 “어떠한 이유로 러시아 사회가 급변했는 지의 해석이 필요하며 민중들이 볼셰비키를 지원했는지를 러시아만의 특수성과 연관 지어 해석해야한다”고 전했다.

러시아 민중들은 이전 절대왕정 체제를 거치며 상위계층만 부를 누리는 계급사회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이미 두 번의 혁명을 겪으며 정권교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다음 정치적 흐름에 예민한 상태였다. 한 교수는 “당시 러시아는 농업 국가였기 때문에 토지배분의 문제가 가장 중요했고 토지의 국유화와 생산과 분배를 주장한 볼셰비키를 지지한 것은 민중들의 현실적인 선택이자 이상사회를 이룩하려는 노력”이라고 전했다.
유지수 기자 kelsey214@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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