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을 끌어안고 새로운 시대로
다름을 끌어안고 새로운 시대로
  • 취재부
  • 승인 2006.01.05
  • 호수 12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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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이희수 <국문대·문화인류학> 교수

몇 해전 남미문화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일본과 미국을 경유하면서 하늘에 떠 있는 시간만 28시간이나 되는 긴 여정이었다. 이 때 한 일행이 화를 내면서 함께 여행을 할 수 없다며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막무가내다. 사정을 들어보니 다른 일행과 떨어져 자기 혼자만 모르는 사람과 28시간 동안 고통에 시달리며 왔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옆 자리 손님은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기차나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이나 여행을 갈 때도 옆에 앉은 사람과 눈인사 한번 하지 않고 5-6시간을 같이 앉아가는 경우를 흔히 경험한다. 아마 세계 초유의 인내심 소유자들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남”은 거의 적에 가깝다.  남은 보호해주지도 보호받지도 못하는 서먹한 관계다. 지하철에서 한 시민이 또 다른 한 사람에 의해 행패를 당해도 섣불리 나서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라는 카테고리를 만들고 강화한다.  혈연과 지연, 학연도 모자라 같은 신앙을 공유하는 사람끼리 신연(信緣)을 만들고 동아리로 뭉친다. 보호막의 확장이다.  그러다가 옆에 앉은 사람과 대화가 시작되면 공통의 코드를 찾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 따른다. 이름을 묻고 고향을 따지고, 학교와 살았던 동네 이름을 서로 교환한다. 우연히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거나 서로 아는 사람을 발견하면 금방 친해진다. 휴게소에서 커피를 서로 사려고 다투고, 아끼지 않고 나누려 한다. 5분전만 해도 평생 다시 보지도 않을 것 같은 무관심한 남이었는데....

21세기는 남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글로벌 시대다. 자기와 다른 생각, 다른 색깔을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협력할 것인가의 문제가 최대의 화두로 떠오를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전 지구촌을 상대로 교역을 해서 먹고 사는 경우에 글로벌 지식과 인식은 생존과도 직결되어 있다.

지난 세기 약소국으로서 우리의 생존전략은 최고 강자에 의지하여 실익을 도모하는 방식이었다. 강자에 붙는 생존전략의 전형적인 예가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로마에 의해 유대왕국이 멸망당하자 팔레스타인을 버리고 로마로 건너갔다. 민족적 차별과 종교적 박해를 당하면서도 기독교 유럽사회에서 2천년간 국가 없는 유랑(디아스포라)생활을 감내했다. 그러다가 2차 세계대전으로 세계의 무게중심이 미국으로 옮겨가자 하루아침에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돈보따리를 싸들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유대자본이 미국 자본주의의 근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월스트리트 금융가와 언론, 할리우드 문화계를 주름잡으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도 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모든 신생독립국들이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할 때, 과감하게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세계최강자인 미국에 국가적 운명을 걸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1945년 이후 독립한 나라들 중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하게 선진국 대열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20세기 사고방식과 글로벌 인식으로 21세기 다문화 공존의 시대를 준비할 수는 없다. 문화상대주의와 상호존중으로 다른 삶과 방식에 대한 예의와 이해가 필요하다. 14억 인구와 57개 이슬람권을 적대적 무지상태로 만들어 놓고, 국내 거주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세계최악의 인권 탄압국이라는 오명으로, 나아가 라틴 아메리카와 중앙아시아, 아프리카에 대한 지식과 전문가를 거의 찾을 수도 없는 수준에서 글로벌과 세계화를 이야기하고 21세기 문화세일즈를 준비할 수는 없다. 새해에는 나와 다른 생각,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감성적 훈련과 인식의 전환으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자, 문화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고 같고 다름의 문제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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