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여장부 인디라 간디
두 얼굴의 여장부 인디라 간디
  • 김명지 기자
  • 승인 2010.10.09
  • 호수 13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도의 초대 수상인 네루에게는 외동딸이 있었다. 그녀는 훗날 아버지인 네루에 이어 인도 수상으로서 이름을 높인다. 그러나 1984년 10월 31일 그녀는 자신의 경호원들에 의해 총을 맞고 죽게 된다. 사건 이후 경호원들에게는 한 가지 특별한 점이 발견됐고 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적 원한이 아닌 한층 더 복잡한 원인으로부터 빚어진 사건이 됐다.

인도의 정치는 1947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61년 인도는 고아를 점령한 이후 카슈미르와의 영토 분쟁까지 겪었다. 1938년에 정식으로 인도국민회의파에 입당한 그녀는 꾸준한 정치생활을 해왔다. 네루의 사망 이후 그녀는 당내 투표에서 수상으로 선출됐고 이후 당의 위기들을 물리쳤다.

인디라 간디의 치적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엇갈린다. 저서 「갠지스강의 어머니」의 저자 곽학송 씨는 “끊임없는 이웃 나라들과의 국경분쟁, 회교도들과 힌두교들과의 종교분쟁, 그리고 빈곤과 무지와 기아로부터 일어나는 걷잡을 수 없는 위기 등 유능한 정치가가 아니고서는 인도를 끌고 나갈 수 없었다”며 “이와 같은 고난과 고애를 안고서도 인도의 문명화를 위해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은 수상”이라고 인디라 간디에 대해 호평했다. 그러나 김찬완<한국외대ㆍ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강성한 인도 건설에 기여했던 바를 인정받지만 일각에서는 두 차례의 비상사태 선포와 야당 탄압 등을 통해 권위주의적인 사회분위기를 만들었다는 내부의 비판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런 비판은 인디라 간디가 행한 시크교도 탄압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인도 정치사에서 종교 간의 대립은 빼놓을 수 없는 문제다. 대다수가 힌두교도들인 인도 내에서는 여러 차례 힌두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 간의 분쟁이 있어왔다.

그러나 시크교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사상이 통합된 종교로 힌두교와 별다른 갈등이 없었다. 논문 「국가폭력의 양상과 그 성격」에서 김경학<전남대ㆍ문화인류학과> 교수는 “모든 시크교들은 힌두교에서 개종한 것인 만큼 두 종교는 매우 깊은 관련성을 가진다”고 전했다.

 시크교도들은 인디라 간디가 정권 안정을 위해 시크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고난을 겪게 된다. 김 교수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평화로웠던 힌두교와 시크교도의 관계가 인디라 간디의 권력 강화 수단으로 이용됐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런 갈등상황도 머지않아 끝나고 말았다. 종파·종족 분리에 대해 무척 민감했던 그녀가 암리차르에 있는 시크교 분리주의 세력을 무력 진압하려다가 결국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그녀를 총으로 쏜 경호원들은 시크교도들로 밝혀졌다. 시크교와 인디라 간디의 악감정이 결국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후 인도에서는 조직적인 ‘시크대학살’이 자행됐고 수많은 시크교도들이 죽임을 당했다.

‘인도의 대처’라 불리며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했던 인도의 여성 총리 인디라 간디, 그녀의 죽음에는 멀지 않은 과거의 인도가 가지고 있는 미완의 문제가 함께 있다.

일러스트 김나래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