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 속 인플레와 디플레 그리고 예술
대공황 속 인플레와 디플레 그리고 예술
  • 김명지 기자
  • 승인 2010.10.03
  • 호수 13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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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목요일’로 기억되는 1929년 10월 24일, 뉴욕 월가의 주가가 크게 폭락한다. 이날 몇 명의 주식 투자자들이 자살을 감행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날의 여파가 전 세계 경제를 불황에 빠뜨리고 결국엔 2차 대전 발발의 원인이 되리라 예측하진 못했다. 미국 발 대공황은 경제적으로 미국에 직ㆍ간접적인 영향을 받는 수많은 나라들의 경제를 연쇄적으로 무너뜨렸다. 일찍이 러시아의 경제학자 콘드라티프나 인도의 사상가 사카르 등은 이에 대해 “60년의 주기를 가지는 자본주의의 불가항력적인 순환”이라고 말했다.

대공황에 대해서는 조금 생소한 몇 가지 사실들이 있다. 우선 대공황에는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이 모두 관련돼 있다. 인플레이션은 1차 대전 후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독일에서 극심하게 일어났다. 작가 귄터 그라스의 저서 「양철북」에서 주인공이 “나는 더 이상 성장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당시 독일의 엄청난 불안함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 한편 대공황기의 디플레이션에 대해 이항용<경금대ㆍ경제금융학과> 교수는 “1차 대전이후 각국은 통화량의 감소, 지출 축소 등의 정책을 폈으나 물가하락과 경기 침체를 겪는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가계 생활도 자연스레 어려움을 겪게 됐는데 그 이유에 대해 이 교수는 “디플레이션으로 인해 가계가 보유하는 자산 가치까지 급락했다”며 “반면 명목적으로 고정된 가계의 부채는 물가로 인해 그 가치가 크게 상승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경제가 침체됐으니 학문과 예술 활동마저 암흑기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대공황과 관련해 생소하게 느껴지는 또 다른 사실은 대공황기 예술의 성장이다. 저서 「대공황시대」는 공황기의 사회 분위기에 대해 “19세기 말에 싹튼 세기말적 불안감이 1차 대전 동안 증폭되어 극에 달한 시기”라며 “진보, 이성 등에 관한 낙관론이 팽배하던 19세기 유럽의 예술관이 실증적이고 논리적, 과학적인 것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다윈의 진화론이 지식 사회에 받아들여진 것도 이때의 일이다. 의심과 불신에 시달리는 군인이 정부를 살해한다는 내용의 사실적이고 비관적인 오페라 「보첵」이 이 시기에 초연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위기감은 모더니즘 예술로도 발전한다. 모더니즘은 이후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 문학, 건축 등 유럽과 다른 나라의 생활양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저서 「대공황시대」에서는 또 다른 문화적 변화상으로서 대중영화의 성장을 설명한다. 그중에서도 찰리 채플린은 단연 돋보이는 존재로 “잔인하고 미친 세계를 희화화한 영화들을 연출하며 대중적 오락과 예술성이 영화로 결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평가받았다. ‘모던타임즈’는 그 대표적 예다. 이렇듯 미국영화는 스튜디오 시스템을 도입하며 호황을 누렸고 미국의 그 어느 산업보다도 재빨리 대공황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대공황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영화의 전무후무한 황금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대공황은 사람들에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논문 「대공황기 갱스터 영화에 나타나는 성공 신화의 붕괴」는 「공공의 적」이란 당시의 영화를 통해 이를 설명한다. 영화는 시작 부분에서 “미국적 삶의 환경을 솔직하게 묘사하려는 것”이라며 제작 목적을 밝히고 있다. 범법행위를 통해 돈을 버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대공황과 관련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사실적이고 회의적인 시각을 제시해주며 당시의 사회와 예술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대공황은 경제뿐만아니라 문화 예술까지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를 이끌어냈다.

일러스트 주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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