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본 없는 국민적 드라마
각본 없는 국민적 드라마
  • 한양대학보
  • 승인 2010.09.20
  • 호수 13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차동 <법대·법학과> 교수
신임총리 및 장관후보자들에 대한 국회의 인사청문회가 진행되고 있다. 평소 점잖고 근엄할 것 같은 유명 인사들이 크고 작은 잘못을 추궁당하면서 얼굴을 붉히고, 눈물짓고,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인품도 사람 간에 별 차이는 없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우리 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해진다. 또 가르치는 한 사람으로서 학생들에게 어떤 관점에서 이런 문제를 접근하여 미래를 준비시켜 주어야 할까 매우 궁금해진다. 사실, 그 후보자들 중 함량미달인 일부를 제외하고는 범부로서 능히 있음직한 일들을 했을 뿐인 경우가 많다. 자녀교육을 위한 위장전입, 생애 첫 분양을 위한 위장전입 등은 나도 그 순간 그 입장이었더라면 많이 망설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인간적으로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러나 명백히 주민등록법에 정해진 위법행위이며 처벌규정도 있다.

잠시 이야기를 바꿔 사람들은 부자에 이렇게 반응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자신보다 10배정도의 부자는 경멸하고, 100배정도의 부자는 가까운 사람으로 삼으려 하고, 1000배정도의 부자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그의 노복이 되겠다고 자청한단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도 내 주위 돈께나 있는 친구가 있을 때는 처음엔 부모님 재산 좀 상속받았겠지, 부동산 투기로 돈 벌었겠지,하면서 지레 경멸하다가도 부의 규모가 점점 커져 100배쯤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 친구 역시 경영의 자질이 남달라.”, “어릴 때부터 남다른 점이 있었어.” 등으로 칭찬일변도로 바뀌며 접근해 친하게 지내려 한다. 급기야 1000배쯤 부자란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마치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을 모시듯 목소리까지 떨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왜 많은 사람들이 삼성그룹 이모 회장의 측근으로 남고 싶어 하는지, 그를 위해 신명을 다 바쳐 일하고 싶어 하는지 생각해 보면 부의 크기에 따라 인간에게 주는 메시지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란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사람의 인격도 그렇다 하면 지나친 일반화일까? 우린 처음 올곧은 사람을 만났을 때 “젠체하기는...”하며 곧이곧대로 그 인품을 평가하지 않는다. “혼자 잘 난체 한다.”며 비난도 서슴지 않는다. 10배쯤 부자에 대해 시기하는 반응과 마치 흡사하다. 하지만, 그 사람의 진심을 알게 되고 줄기차게 올곧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볼 때 점차 그 시기와 악평은 친근함으로 변하고 그를 가까이 두어 자신도 닮아 가고자 노력한다. 게다가 인간의 인내로는 도저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바른 생활을 하는 사람을 발견하게 되면 친근함을 넘어 존경의 단계로 들어선다. 마치 1000배쯤 부자를 만나 노복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처럼....

가끔 학생들에게 내가 전에 법원장으로 모셨던 적이 있던 조모 전 대법관의 일화를 들려준다. 그 분을 뵐 때마다 범부인 나에 비해 인품이 1000배정도는 더 높아 보인다. 도저히 시기나 비하를 할 수 없을 정도다. 학생들이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앞으로 내가 남보다 10배정도 올곧아서는 안 되겠다. 적어도 100배 또는 1000배는 정직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주길 바란다. 마치 이웃집 부자는 경멸하지만 세계적 대기업을 이끄는 존경스런 부자가 되기를 꿈꾸는 것처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