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회 한대신문 문예상 우수상
제38회 한대신문 문예상 우수상
  • 취재부
  • 승인 2005.12.06
  • 호수 12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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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전자시대의 ‘숨은 자아 찾기’에 대한 연구
         - 이원의『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를 중심으로 -


                                                                                  주효주<인문대 국문 01>


1. 펼쳐보기
  고대와 중세 시대에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존재란 무엇인갗, ‘신이란 무엇인갗라는 물음이다.
이러한 물음을 바탕으로 이 시대에는 도달해야 하고 추구해야 할 가치를 상정하고 그것의 실현가능성이나 그 가치 자체에 대한 의미는 고려되지 않은 채, 그저 인간이면 누구나 따라야만 하는 윤리적이고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 국한되어서 인간의 살아감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고대와 중세를 지나 근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물음은 ‘나는 누구인갗라는 물음이다. 이 물음이 중요해진 이유는 ‘나’를 새롭게 발견하고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앎을 통해서만 나에게 주어진 세계의 본질도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세계는 더 이상 그 자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 의해 의식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보는 세계의 참모습을 파악하기 위해 세계를 보는 우리 자신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진 시대, 이리하여 ‘나’에 대한 물음이 철학의 근본물음이 된 시대, 그 시대가 바로 근대이다. 따라서 근대시대에는 ‘나’에 대한 물음을 바탕으로 삶의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차원이 아닌, 현실 속에서 살아나감을 강조하고, 그 살아나감 속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를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시대에도 ‘나’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유효한가. 호스트 컴퓨터나 네트워크에 아이디(ID)와 암호를 입력해서 자신을 알리고 등록하여 호스트 컴퓨터의 사용 허가를 받아 로그인을 하면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사용을 종료하고자 할 때에는 사용을 끝내겠다는 것을 알리는 로그아웃만 해주면 되는 전자시대에까지 ‘나’에 대한 물음이 필요한가. 무엇이든지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전자시대에 찾아야만 하는 그 무언가가 있을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들의 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이원의 시집 속에서 그러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이원의 시집을 펼쳐보게 되었다. 과연 이 속에서 전자시대의 ‘나’에 대한 물음, 그 물음들이 가지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숨은 그림 찾기는 찾아야 할 대상의 항목이 제시되면 그림 속에서 찾는 놀이다.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고 하나씩 찾아내지만, 결국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 생기곤 한다. 아무리 찾아도 없을 때 그림 속에 없는 것이 아닐까 의심해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미 그려진 그림 속에 숨어 있다. 단지 주변의 다른 것과 구별되지 않아 금방 눈에 띄지 않을 뿐 분명히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사실을 알기에 마지막 남은 그것을 찾고자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지도 모른다.
  본고는 이원의 시집『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를 통해 근대 이후로 계속된 ‘나’에 대한 물음, 진정한 자아를 찾는 과정이 지금의 전자시대에 주는 의미를 짚어보고자, 전자 시대에 ‘나’를 찾고자 하는 것이 ‘숨은 그림 찾기’와 닮아 있다는 전제 하에 이원의 시집『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속에서 숨은 자아 찾기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2. 들여다보기
  ‘나’에 대한 물음, 진정한 자아를 찾는 과정이 지금의 전자시대에 주는 의미를 찾기 위해 이원의 시집『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속에 숨어 있는 중요한 의미들을 찾아가는 것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숨은 그림 찾기에 찾아야 할 항목이 있듯이 숨은 자아 찾기에도 항목이 있다.   시집의 제목인『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인의 말인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 시집 속에서 많이 등장하는 ‘클릭하기’의 의미, ‘사막’과 ‘낙타’의 의미, ‘뿌리 없음’과 ‘허공’의 의미, ‘또박또박 뚜벅뚜벅 걸어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의미들을 시집 속에 실린 시 속에서 찾아보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 시집 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과 전자 시대의 숨은 자아 찾기에 대한 의미의 연관성을 짚어보고자 한다. 

2.1.『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제목의 의미
  이 시집은 제목부터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제목을 보자마자 ‘월인천강(月印千江)’이 떠오른다. 부처가 수많은 세상에 몸을 바꾸어 태어나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마치 ‘달이 천 개나 되는 강, 즉 모든 강에 비침’과 같다는 의미에, 달(月)은 석가를, ‘천 개의 강’은 중생을 비유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집의 제목과의 차이를 살펴보면, 서술어의 의미면에서 ‘월인천강’에서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는 것이라면, 이원의 시집의 제목에서는 하나의 강에 천 개의 달이 뜬다는 점에서 다르다. 주어와 다른 성분과의 관계 면에서 ‘월인천강’에서 분명하게 하나의 달이 존재하고 그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는 것에 반해, 이원의 시집 제목에서는 천 개의 달이 ‘야후!’라는 강물에 뜬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리고 문장의 어순 면에서 ‘월인천강’에서 ‘달’이 문장의 앞에 위치한 것에 비해 이원의 시집 제목에서는 ‘야후!의 강물엷가 문장의 앞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월인천강’과 이러한 차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월인천강’에서 ‘달’의 존재가 초점이 된다면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에서는 ‘강’, 그것도 ‘야후!’라는 ‘강’이 초점이 된다. 이러한 강이 ‘월인천강’에서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비춰주고,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해주는 매개체였다면 이원의 시집 제목에서는 매개체의 성질을 넘어서 그 자체가 달을 낳고, 뜨게 하는 주체로서 부각된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의 달이 아닌 ‘천개’의 달을 뜨게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월인천강’에서 천 개의 강에 비친다 해도 그것은 하늘 위의 떠 있는 달의 영상(映像)일 뿐이고, 강에 비쳐진 달의 모습을 통해 저 하늘에 분명히 하나의 달이 존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 이 시집의 제목 속에서 ‘달’은 어느 것이 진짜 달인지를 구분할 수 없고, 어느 것이 진짜 달이라는 것을 단언하기가 어려워지고 만다. 그러나 분명 ‘달’이라는 것은 있는 것이고, 어느 것이라 분명하게 알 수 없기에 달은 오로지 하나로 존재하여 그저 바라보던 대상에서 찾아야하는 대상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터넷, 즉 전자 세계를 비유하는 대표적인 포털 사이트인 ‘야후!’라는 강물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월인천강’의 전체적인 의미와의 연관성 속에서 살펴보면 ‘월인천강’에서 그러한 제목을 통해 ‘달’, 곧 부처가 진정한 자아의 모습이자 모든 중생, 곧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궁극적인 대상임을 드러내었다면, 이원의 시집에서는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라는 제목을 통해 전자 세계 속에서 진정한 자아는 찾아야만 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집의 제목이 구체적으로 시 속에서 어떻게 형상화되었는가. 이를 보기 위해 시집 속의 이에 해당되는 시를 찾아보지만 그 제목에 해당하는 시가 없다. 이는 ‘야후!’라는 하나의 강에 천 개의 달이 뜨듯, 이 제목의 구체적인 의미는 시집『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1부 24편, 2부 32편, 3부 6편의 시 속에서 찾아야 함을 보여준다. 이제 시집을 펼쳐 시 속에서 구체적인 의미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도록 한다.
2.2.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의미
  차례를 넘기면, 제일 먼저 시인의 말,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와 만나게 된다. 이 를 보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떠오른다. 데카르트가  더 이상 의심할 여지없는 명제를 찾아 그것을 근대 철학의 굳건한 출발점 내지 기반으로 삼고자, 방법론적 회의를 거쳐 결코 부정할 수도 의심할 수도 없는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발견해낸 것처럼, 이원은 그 명제에 바탕을 두면서도 그와 같은 방법론을 거쳐 그 새로운 명제를 발견한다. 그것이 바로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발견했을 근대 시대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바로 내가 생각하는 행위를 통해 증명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존재 하는갗하는 자아 발견의 물음이 중요한 가치를 지녔기에, 나의 존재함의 방식을 생각하는 행위를 통해 증명한다는 것은 곧 ‘사유, 생각함’이라는 것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전자 시대에는 무엇을 통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 이원은 ‘클릭하기’라는 행위를 통해서라고 말한다. 이로써 ‘나’는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이 아닌 ‘클릭하는’ 것을 통해 존재하고, 클릭은 ‘나’가 존재함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행위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이원의 시 속에서 ‘나’는 새로이 규정되며, 이것을 바탕으로 시는 출발한다.

2.3. ‘클릭하기’의 의미
  ‘클릭한다’는 말은 컴퓨터 용어로 단순히 마우스의 버튼을 누르거나, 버튼을 눌러 화면상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 행위이다. 이를 통해 언제든지 어디서나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더 나아가 그 행위를 통해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이미 언급하였다. 그렇다면 ‘클릭하기’가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지 이 속에서 찾아보도록 한다. 
잉크 냄새가 밴 조간신문을 펼치는 대신 새벽에 / 무향의 인터넷을 가볍게 따닥 클릭한다
신문 지면을 인쇄한 모습 그대로 / 보여주는 PDF 서비스를 클릭한다
(중략) 클릭을 할 때마다 신문이 한 면씩 넘어간다 / 나는 세계를 연속 클릭한다
클릭 한 번에 한 세계가 무너지고 / 한 세계가 일어선다
(중략) 마우스를 둥글게 감싼 오른손의 검지로 메일을 / 클릭한다 지난밤에도 메일은 도착해 있다
캐나다 토론토의 k가 보낸 첨부 파일을 클릭한다
(중략) 곧바로 나는 인터넷 무료 전화 dialpad를 클릭한다
k의 전화번호를 클릭한다
(중략) 오른손으로 미끄러운 마우스를 감싸쥐고 나는
문학을 클릭한다 잡지를 클릭한다 / 문학 웹진 노블 4월호를 클릭한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을 클릭한다 신간 목록을 들여다보다
가격이 20% 할인된 폴 오스틴의 / 우연의 음악과 15% 할인된 가격에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을 주문 클릭한다

검색어 나에 대한 검색 결과로 / 0개의 카테고리와 / 177개의 사이트가 나타난다
나는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 / 나는 나를 찾아 차례대로 클릭한다
광기 영화 인도 그리고 나………나누고 / ……나오는…나홀로 소송……또나(주)…
나누고 싶은 이야기……지구와 나…………
따닥따닥 쌍봉낙타의 발굽 소리가 들린다 / 오아시스가 가까이 있다
계속해서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부분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에는 클릭을 할 수 있는 세계, 즉 컴퓨터 속의 전자 세계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 세계 속에서 취하며, 오른쪽 손을 마우스위에 올려놓고 검지로 클릭하기만 하면 한 세계와 만나고, 그 세계를 무너뜨리고, 또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다. 그야말로 컴퓨터 속 전자 세계 속에서 ‘클릭하기’를 통해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 속에서는 20번의 클릭을 통해서 인터넷, 인쇄된 신문을 대신하는 PDF 서비스, 신문의 다른 면, 다른 세계, 로봇 인간을 꿈꾼다는 케빈 워윅의 웹 사이트, 캐나다 토론토의 k의 메일, k가 보낸 첨부파일, 인터넷 무료 전화 dialpad, k의 전화번호, 문학, 잡지, 문학 웹진 노블 4월호, 인터넷 서점 알라딘, 지도, 지리산 콘도 쿠폰, 동백 꽃잎을 단 나와 만나게 된다. 그런데, 왜 ‘나’는 계속해서 클릭을 하고 있는가. 왜 ‘나’를 입력하여 ‘나’에 대한 검색 결과를 확인하고 ‘나는 어디에 있는갗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인가.
  데카르트가 모든 것을 의심하는 가운데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만은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생각하고 있는 나’를 통해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명제를 발견한 것과 같은 방법론을 거쳤다면, 분명 클릭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드러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클릭으로 ‘나’의 존재는 확인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검색 결과 속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수없이 많이 드러나지만 그 속에서 내가 찾는 ‘나’는 없다. 따라서 클릭하는 것 자체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클릭을 하는 것이 된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시집 제목의 의미에 대입해보면 다음과 같다. 즉 나를 ‘달’로, 나를 찾고자 하는 그 인터넷 속의 세계를 ‘강’이라고 한다면,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는 제목의 의미는 인터넷 속에 ‘나’가 무수하게 드러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시집 제목은 바로 인터넷이라고 하는 전자 세계가 ‘나’를 수없이 낳고 있지만 그것은 진정 ‘나’가 아니라는 것을, 어딘가에 숨어 있을 단 하나의 ‘나’를 찾는 것보다, 수없이 많은 ‘나’중에서 진정한 나를 찾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로써 제각각 비춰진 강물 속 ‘나’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나’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과 달리 ‘나’는 ‘찾아야하는’ 대상이 되어버렸음을, 그리고 그러한 과정이 ‘야후!’로 비유된 컴퓨터 속, 인터넷의 세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대 시대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에서 사유를 통해 내가 존재함을 증명하고자 한 것처럼 전자 시대 이원의 명제 속에서도 내가 존재함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사유가 아닌 클릭하기를 통해 ‘나’를 만날 수 있다고 한 점에서 다를 뿐이다. 따라서 진정한 나를 찾고자 사유를 하는 것과 전자 시대에 클릭을 하는 것은 같은 행위이고, 진정한 나를 찾고자 ‘나’는 계속해서 클릭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4. ‘사막’과 ‘낙타’의 의미
  그런데「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시에서 ‘따닥따닥 쌍봉낙타의 발굽 소리가 들린다 / 오아시스가 가까이 있다’라는 구절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 제목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와 사막과 오아시스, 낙타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영어 단어 ‘click’은 컴퓨터 용어로 마우스의 단추를 누름, 또는 그런 행위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사로 ‘딸깍 소리가 나다(소리를 내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클릭하는 행위, 클릭할 때나는 소리는 의미상 연관이 있고, 이는 낙타가 걷는 소리와도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따닥따닥 쌍봉낙타의 발굽 소리가 들린다 /오아시스가 가까이 있다’는 ‘클릭하는 소리’를 ‘낙타의 발굽 소리’로, ‘나를 찾고자 클릭하는 행위’는 ‘가까이 있는 오아시스를 향해 가는 것’으로 대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낙타와 사막의 구체적인 의미는 다음의 시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사막의 달은 차고 환해 내가 들여다봐도 내가 나오지 않는 거울이야 : 인공 관절을 두 개 박고 병원 문 앞에서 다시 일어서려는 낙타와 그 낙타가 눈 속에 급히 쑤셔 넣은 모래의 허공과 어제의 표지로 뒹구는 뼈와 사막을 뜯어먹는 바람이야 : 나도
                                                         -「거울 속에서 낙타는 어디까지 갔을까」부분     사막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모래만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무언가를 세울 수도 없고,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 수도 없는, 그저 어딘가에 숨어 있을 오아시스를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야만 하는 곳이 바로 사막이다. 그러한 사막의 달은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막의 달을 이 시에서는 차고 환해서 들여다봐도 내가 나오지 않는 거울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실 세계에서 가장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불필요하게 되고, 모든 것은 뜨거운 모래와 태양빛에 벗겨지고 내던져진다해도 오직 버릴 수 없는 두 가지, 육체와 정신, 그것만으로 진정한 ‘나’와 마주할 수 있는 곳, 사막이 바로 가장 극한의 상황을 의미한다면, 사막의 달이 내가 나오지 않는 거울이라는 표현은, 이제 가장 극한의 상황에서조차 진정한 ‘나’와 마주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사막의 모습은 계속해서 클릭 해야만 하는 전자 세계와 닮아 있다.
  그렇다면 인공 관절을 두 개 박고 병원 문 앞에서 다시 일어서려는 낙타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인공 관절 두 개를 박았다는 것을 통해 이미 있던 관절은 닳았다는 것을, 관절이 닳을 만큼 얼마나 많이 걸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공 관절을 새로 박고 병원 문 앞에서 다시 일어서려는 낙타의 모습은 계속해서 걸어 나가야 함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에 ‘나도’라는 표현을 통해 쉴 새도 없이 병원 문 앞에서 바로 다시 일어서서 걷고자 하는 이러한 낙타의 모습과 자신을 일치시키는데, 이는 극한 상황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끊임없이 나아가야만 하는 운명을 지닌 나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와 이 시의 의미를 연관 짓는다면, 내가 전자세계에서 클릭을 하는 것은 쌍봉낙타가 사막에서 따닥따닥 걸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이렇게 오아시스를 향해 끊임없이 낙타가 걸어야만 한다는 것을 통해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클릭을 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아시스가 가까이 있다는 점이다. 오아시스가 가까이 있는데도 계속 가야만 하는 상황은 저 넓은 사막에서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오아시스를 찾는 것이 아닌 바로 앞에 가까이 있는데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고, 이는 인터넷 속의 수많은 나 가운데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클릭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강조한다.
  이제 ‘나’는 인터넷 속의 전자 세계, 사막을 동일시하고 전자 사막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본격적인 준비를 한다. 다음 시에서 전자 사막 속에서 살아남고자 준비하는 것들을 살펴보자.
노새를 살까 양을 살까 / 낙타 한 쌍을 살까 (중략)
유목민으로 살아남기 위해 야생 아네모네 씨를/ 구해볼까 개양귀비 씨를/ 구해볼까 튤립 씨도 구해볼까
코오롱 텐트를 하나 살까/ 봉숭아향과 레몬향이 첨가된 생수를
한 박스 사둘까 김춘수 시전집을 따로 하나 / 포장해놓을까 액정이 푸른 손목시계를
하날 살까 트렉스타 등산화를 / 하나 맞출까 약한 위장과 심장을 / 하나씩 더 주문 예약해둘까
소니에 신형 워크맨 구입 예약을 해놓을까 / 휴대폰의 배터리를 열 개쯤 더 구입할까
이리듐 위성전화를 12개월 할부로 구입할까
그리고 북방으로 길을 떠날까 / 남방으로 길을 떠날까 (후략) 
                                                        -「전자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부분
  이것들은 과연 전자 사막이라는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인가. 열거된 것들은 전자 사막과 관계가 없는, 생뚱맞기만 한 것들이다. 그리고 왜 전자 사막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말로 표현한 것인가.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은 살려고 애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는 곧 전자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비를 하려고 하지만 무엇을 준비해야할지를 모르는 데에서 비롯되는 막연함과 불안함, 그리고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막연함과 불안함, 두려움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2.5. ‘뿌리 없음’과 ‘허공’의 의미
  전자 사막에서 살아남으려고 하지만 ‘나’는 막연해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 그렇게 된 근본원인은 앞에서 잠시 언급한 전자 사막의 특성과 관련된다.
이곳에는 발자국이 찍히지 않습니다.
(중략)
오아시스는 허공의 뒤쪽에 있다고 전해집니다.
하늘은 허공의 위쪽에 펼쳐진다고 전해집니다.
지평선은 허공의 먼 앞쪽에 걸려 있다고 전해집니다.
이곳에서는 허공을 만질 수는 있어도
서로의 몸이 만져지지는 않습니다.
                                                               -「사막을 위한 변주」부분
  ‘이곳에는 발자국이 찍히지 않는다’에서 발자국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발자국이 찍히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앞의 시들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계속해서 클릭을 하는 것과 낙타가 끊임없이 걸어가는 행위가 닮아있음을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걷는 행위는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발자국은 과거의 자신, 그리고 현재 자신의 흔적이다. 즉 자신이 어디로부터 걸어왔는지, 지금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게 해주고 가장 극한의 공간 속에서 자기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매개체이다.
  그런데 걷는 행위는 발자국을 남기기 마련인데 이곳, 전자 사막은 발자국이 찍히지 않는다. 이는 전자 사막에서는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진정한 나를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나’는 전자 사막을 걷고 있으며 자신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오아시스, 하늘, 지평선이 허공에 있다고 전해지는 말들을 떠올린다. 또한 전자 사막에서 허공을 만질 수는 있어도 서로의 몸이 만져지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한다. 모래만으로 이루어져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 수가 없는 원래 사막의 뿌리 없음이라는 특성에 허공이라는 특성까지 지닌 곳이 바로 전자 사막이라는 이 사실을 확인하자 ‘나’는 전자 사막에 대한 막연함, 불안함, 두려움을 갖게 된 것이다.
2
말끔하게 다 지어진 신축 건물 앞을 그냥 지나쳐도
골조 공사가 한창인 신축 공사장 앞에서는
어김없이 발걸음이 멈춰진다 나는
철골이 세워진 공사장만 보면 멀리서도 가슴이
뛴다 철골들은 어디에서나 망설임 없이
가로로 세로로 어긋나며 박히고
허공 속으로 단호하게 솟아 있다
그 철골들 앞에서 내 몸 속에도
저런 것들 몇 개쯤은 버티고 있으리라

강풍이 불어도 폭우가 쏟아져도 부러지지 않을
저런 것들이 녹슨 몸이 되어도 주저앉지는 않을
저런 것들이 내 내부에도 몇 개쯤은
박혀 있으리라 두드리고 자르고 박는
금속성의 단호한 소음을 딛고 우뚝 선 / 철근들 앞에서 나는
                                                                        -「단단한 것에 대하여」부분
  이 시에서 철골이 세워진 공사장을 보고 가슴이 뛰는 이유, 강풍과 폭우에도 부러지지 않고 녹슬어도 주저앉지 않을 단단하게 우뚝 솟은 철근들이 내 몸 속에 버티고 있기를 바라는 이유 모두 ‘나’가 전자 사막이 지닌 ‘뿌리 없음’과 ‘허공’의 특성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한낮 하드 디스크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나는 내 그림자를 바이러스처럼 물그러미 들여다본다

나는 내 그림자를 못처럼 박는다

나는 내 그림자를 돌로 두드린다

나는 내 그림자를 발로 푹푹 파낸다

나는 내 그림자의 신경망을 잘라내어

한낮 하드 디스크 구석에 심는다                                     
                                                               -「나는 신경망을 심는다」 전문     이 시에서 ‘나’는 ‘나’로 드러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한낱 그림자조차도 놓칠 새라 그림자가 가장 선명한 한낮에 못을 박아두고, 돌로 두드리다 못해 아예 땅에서 파내고 신경망을 잘라내어 하드 디스크에 심어두고자 한다. 이는 전자 사막 속에서 자신의 흔적이 남겨지지 않음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음을 두려워하며 한낮에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그림자를 붙잡아 영구 보관해두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행위 또한 전자 사막의 ‘뿌리 없음’과 ‘허공’이라는 특성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6. ‘또박또박 뚜벅뚜벅 걸어감’의 의미
(전략)
하늘나라와 하늘나라 계곡은 지도가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끝에 걸려 있다
내가 닿고 싶은 곳은 이곳이 아니다 무심코
에덴 계곡으로 손을 옮기다 말고 그러나
불쑥 갈보리 산을 열고 만다
(중략)
내려와야 한다 나는 업데이트된 애기동자꽃을
연다 그러나 애기동자꽃의 서버를 찾을 수 없다는
그곳에서 나는 갑자기 멈추어 선다 막힌 세계
너머에는 광활한 신대륙이 펼쳐지고 있겠지만 창은
금방 벽이 되어 내 앞에 선다
진공 포장되어 장기 보존되고 있는 것이
나일 수도 있다
오래전 저장된 게임이
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정보가 아니어서 의자에 엉덩이를
놓고 허리를 의자의 등받이에 바싹 붙인다
내 몸이 닿아 있는
세계에서는 여전히 땀냄새가 난다
                                     -「나는 검색 사이트 안에 있지 않고 모니터 앞에 있다」 부분     ‘나’는 인터넷, 전자 세계 속에서는 내가 닿고 싶은 곳에 닿을 수 없다는 것, 닿고 싶은 곳이 이곳이 아니라는 것, 정작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을 가려다가도 불쑥 다른 곳으로 빠지게 되는 것, 언제든지 서버를 찾을 수 없다는 말이 벽이 되어 자신의 앞에 멈추어버리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전자 세계 속에서 더 이상 클릭하는 것이 의미가 없음을, 그 행위를 통해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클릭하기를 통해 나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전자 세계 밖에 의자에 자신의 몸이 붙어 있음을, 자신의 몸이 세계에 닿아 있음을 느낀다. 이는 뿌리 없고, 허공뿐인 전자세계와 대조적인 지금-여기의 세계를 느끼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제 나는 검색 사이트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모니터 앞에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전략)
내 앞까지 온 길은 거울 앞에서
접촉 불량 회로처럼 끊어졌다
나는 뽑힌 플러그처럼 버려져 있다
                                                                       -「모니터, 캔산소, 거울」부분    그런데 진정한 ‘나’는 검색 사이트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모니터 앞에 있음을 인식하는 순간, 내 앞까지 온 길은 거울 앞에서 끊어지고, 나는 뽑힌 플러그처럼 버려지고 만다. 자신을 ‘어딘가에서 뽑힌 플러그’라고 표현한 것은 ‘나’가 전자세계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으면서도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는 전자 세계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전자 세계와 연결되어 있던 것이 익숙했고 ‘나’는 전자세계에 꽂히고 싶은 것이다. 이로써 자신은 모니터 밖에 있다는 사실과 함께 진정한 자아 찾기는 전자세계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전자세계가 뿌리가 없다는 것과 허공뿐이라는 그 사실로부터 갖게 된 두려움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이 전자세계에 연결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전자세계로부터 갖았던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한다. 
뿌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날 밤부터 잠이 오기 시작했다 두 다리는 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길이 확인시켜준 다음날부터 꿈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꿈의 뿌리는 몸에 있고 몸의 뿌리는 꿈에 있다는 사실을 다리가 말한 다음날 부터 먼 곳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나다 세계는 푸르거나 검다는 것을 인정한 다음날 아침 신발을 신었다 누가 원하는지 문밖에는 공기가 지천으로 깔려 있다 나는 푸른 세계의 한 부분에도 속해 있다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걸어나왔다 나는 모래와 길의 세계에도 속해 있다 나는 어디에서도 접속 가능하다 
                                                                       -「실크로드」부분 
  그래서 뿌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이 시에서 ‘뿌리를 인정한 날 밤부터 잠이 오기 시작했다’는 표현을 통해 뿌리가 없다는 사실이 두려웠지만 그것을 인정하게 되면서 더 이상 불안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뿌리 없음’이 전자 세계의 특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두 다리가 뿌리가 아니다’라는 표현을 통해 뿌리 없음은 다름 아닌 나의 특성이었음을,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그 사실이 나다’라는 표현을 통해 뿌리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느끼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전자시대에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은 전자세계가 뿌리가 없고, 허공뿐이라는 그 사실 때문에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나의 다리가 뿌리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이는 곧 전자세계 안의 세계이든 밖의 세계이든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을 작가의 말인 뒤표지 글은 자세히 전한다. 
인간에게 뿌리가 있었던 적이 있는가.
사실대로 말하자.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뿌리란 없었다. 인간인 우리가 갖고 싶어 하는 뿌리라는 것은 인간 욕망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욕망하는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뿌리가 없다는 사실을, 뿌리가 없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두 다리로 지상에서 걸어다니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다. 나는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어떤 사람이 뿌리에 관한 욕망 속에서 산다면, 나는 뿌리에 관한 욕망을 지워버린 욕망 속에 산다고 해도 좋다.
- 뒤표지 글 부분    이 글에서 작가는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뿌리란 없었다는 것과, 그 사실이 두려운 것은 끊임없이 두 다리로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뿌리가 없다는 사실, 그래서 끊임없이 걸어 나가야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결국 작가는 걸어감, 즉 인간의 진정한 자아 찾기의 여정을 인간의 운명으로 끌어안아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또박또박 뚜벅뚜벅 걸어갈 거예요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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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박또박 뚜벅뚜벅 걸어갈 거예요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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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박또박 뚜벅뚜벅 걸어갈 거예요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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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박또박 뚜벅뚜벅 걸어갈 거예요
어디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어느 길에 대한 또박또박하고 뚜벅뚜벅한 코드」전문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걸어가는 일, 그냥 걸어가는 것이 아닌 또박또박, 뚜벅뚜벅 걸어가는 일이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하는가. 물음표로 처리되어 있어 알 수 없다. 그렇다면 표지판을 보고 따라가면 어떨까. 그런데「겨울 표지판」이라는 시에서 ‘표지판은 이미 방향을 바꿀 수 없는 곳에서만 나타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표지판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장치인데 제목 ‘겨울 표지판’은 표지판이 꽁꽁 얼어 그 기능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결국 ‘표지판은 이미 방향을 바꿀 수 없는 곳에서만 나타난다’는 표현은 어딘가를 향해 가는 행위가 표지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내가 나아가는 것과 표지판은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다시 「어느 길에 대한 또박또박하고 뚜벅뚜벅한 코드」를 보면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걸어갈 거예요’라는 표현하는 것을 통해 인간에게는 뿌리가 없다는 것, 그래서 계속해서 걸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걸어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로써 어떤 것에도 연결되지 못하고 어떤 것에도 닿아있지 않는 나를 두 발로 가능한 한 힘을 주어 또박또박, 뚜벅뚜벅 걸음으로써 내 몸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여기저기 수많은 나 속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걸어감’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3.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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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후 메일 속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인가. 무엇이 있기를 바란 것인가. 야후 메일 속에서 내가 찾았던 것은 바로 ‘나’였다. ‘야후!’의 강물에 뜬 1228통의 메일, 그것은 분명 ‘나’를 향한 메일이었다. 진정 ‘나’를 향한 메일을 바란 것이고, 그것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고, 나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편지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향한 편지를 기대하며 클릭하는 일은, 전자세계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정보를 쉽게 찾게 해준다 해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기에 전자세계 속에서 나를 찾고자 끊임없이 클릭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삶은 크게 두 가지, ‘살아지는 삶’, ‘살아가는 삶’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어 따라야만 하는 무언가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면서 나를 내맡긴 채 사는 삶이 ‘살아지는’ 삶의 모습이라면, ‘나’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과 자신의 존재의 의미, 그리고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삶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의 삶의 모습을 시대와 연결해보면, 인간이면 누구나 따라야만 하는 가치가 있었고, 인간은 그것에 따라 그저 살기만 하면 그만이던 고대와 중세 시대의 인간의 삶의 모습을 살아지는 삶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중시하던 근대 시대의 인간의 삶은 살아가는 삶으로 볼 수 있다.
  근대 이후 ‘나’의 대한 물음은 중요하게 되었고 전후 시대에 우리 문단을 지배했던 실존주의로 
진정한 자아를 찾는 물음은 절실함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눈앞에서 ‘펑’하는 소리에 의한 폭격, 그로 인해 터져나가고 무너져가고 초토화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 속에서 언제 ‘나’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절실함도 더 이상은 없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전자시대에는 진정한 자아 찾기에 대한 물음은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에는 내가 ‘나’를 잃어버리고 그 안에 이미 다른 ‘나’가 자리하고 있고, 언제든 그 안을 채울 수많은 ‘나’가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어느 것이 진짜 나인지 구분할 수 없어 진정한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지금 시대에 더욱 절실하다. 이는 단지 전자시대라는 특성 때문에서가 아니라 찾아야 하는 인간의 존재 자체의 특수성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나’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찾아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야말로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속에서 전자 시대의 숨은 자아 찾기를 했었다.
본고는 이원의 시집『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에서 시집 제목의 의미,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의미, ‘클릭하기’의 의미, ‘사막’과 ‘낙타’의 의미, ‘뿌리 없음’과 ‘허공’의 의미, ‘또박또박 뚜벅뚜벅 걸어감’의 의미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들이 근대 이후로 계속된 ‘나’에 대한 물음, 진정한 자아를 찾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음을, 전자 시대의 숨은 자아 찾기의 의미와 연관됨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시대에 ‘나’라는 문제가 왜 중요한가. 진정한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바로 이러한 물음 속에 ‘나’는 존재한다. 지금 펼쳐지는 세상을 당연하게 보지 않는 시선, 익숙한 것들을 뒤흔드는 물음들 너머에서 ‘나’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원의 시집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는 바로 그러한 시선으로 물음을 던지고 있으며, 그 시선과 물음은 나에게 옮겨와 ‘나’를 찾게 한다. 마지막 남은 목록인 진정한 자아, 그것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 물음이 존재하는 한, ‘전자 시대’의 ‘숨은 자아 찾기’는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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