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회 한대신문 문예상 우수상
제38회 한대신문 문예상 우수상
  • 취재부
  • 승인 2005.12.06
  • 호수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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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방인의 노래

                                                                                박재혁<대학원 경영 04>

추위와 습기에 희생된 전사의 시체 두 구가 바다에 던져진다. 고깃덩이에 불과해진 육체는 바다 깊은 곳으로 천천히 가라않는다. 영웅(英雄)의 삶은 아니었더라도, 비겁자란 평가는 그들에게 공정치 않으리라. 세상사에 무관심한 듯 보이는 바다가 사자(死者)들을 한 입에 삼켜버린다. 
 안개가 심해 시계(視界)는 고작해야 십여 미터뿐이 되지 않는다. 예상보다 힘겨운 항해가 계속 되고 있다. 두려움이 자꾸만 고개를 쳐든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은 커져만 간다.
 불안을 누르고 분노를 키워나가자. 우리들은 침몰과 추위, 갈증, 배고픔 대신 분노에 눈을 돌린다. 이방인(異邦人)들은 언제나 화가 나있는 종족이라면서 우리들을 비웃었다. 그들의 비난은 전적으로 옳다. 분노는 우리들의 천성(天性)이니까. 선대(先代)로부터 전해오는 시가(詩歌)가 노래하는 건, 분노와 전쟁 그리고 모험과 자유정신, 그 중에서도 분노는 최상의 것에 속한다. 
 검정색 새 몇 마리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전사들의 머리 위를 어지럽게 선회하고 있다. 새들이 토해내는 불길한 울음소리가 전사들의 녹슨 투구 위로 뚝뚝 떨어진다. 태양은 요사스러운 붉은 색채를 길게 늘어뜨리며 건전한 현실감각을 파괴해갔다.
 환상 따윈 원치 않는다. 우리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현실만을 원한다. 하지만 그런 우리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양은 환상(幻想)과 기상(奇想)의 붉은 색을 주위에 뿌려대었다. 그러므로 태양은 얄미운 방해꾼.  
 경계와 경계의 모든 주장을 받아들일 줄 아는 우리는 노련한 항해자(航海子), 우리는 모든 모순(矛盾)을 끌어안음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하나의 커다란 모순이 되고자한다. 어떠한  계시(啓示)도 우리 자신을 거북케 할 수는 없다. 경지에 들어선 항해자란, 모든 주장에 대해 코웃음을 칠 줄 아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해안선이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내놓는다. 붉은 머리는 불안해하는 동료들을 독려했다. 허리춤에 지닌 손질이 잘된 단검을 매만지며, 그는 이렇게 소리친다. 
 
 얼음이 피어나는 동토(凍土)의 땅에서 내려온 우리는
 사나운 폭풍의 정복자
 제물(祭物)에 값하는 행운을 내어놓지 못하는 신(神) 따윈 죽여 버리는 우리는
 각성한 몽상가(夢想家)들
 깨어나라, 달콤한 환상 안에서
 깨어나라, 거짓된 신들의 품 안에서
 내어놓아라, 이방의 여자를
 내어놓아라, 이방의 황금재물을

 붉은 머리는 민첩한 솜씨로 전사들을 지휘해나갔다. 이방인들에겐 약탈과 공포의 상징이 되어버린 전함 십 수대가 뽀얀 살결을 지닌 모래 해안을 기습적으로 범한다. 묵직한 도끼와 예리하게 손질된 칼로 무장한 전사들이 수도원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진군해나간다. 우리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은 우리를 대적할 수 없으리라, 
 반항하지 않는 자들도 살해당했으며, 반항하는 자들은 더욱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붉은 머리는 도끼에 묻은 선혈(鮮血)을 닦아내며 천천히 수도원(修道院) 안으로 들어갔다. 사제(司祭)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자는 살인과 약탈의 한 가운데서도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모든 재물을 아낌없이 내어주겠다고 그는 말했다. 공손한 어조임에도 오만함이 느껴지는 그런 말투였다. 우리에겐 그들의 약속이나 양보 따위는 전혀 필요가 없다. 그의 약속은 공허한 하나의 제스처에 불과할 뿐이었다. 
 구원받은 자의 오만한 눈빛은 우리의 야만을 비웃었으며, 피안(彼岸)을 노래하는 입술은 우리의 운명을 은밀히 저주했다. 그러므로 사제는 스스로 화(禍)를 부르는 위험한 원리주의자(原理主義者).
 사제가 들고 있는 황금 지팡이는 이방인들에겐 특별한 의미를 지닌 성물(聖物)이었다. 지팡이 끝에 매달린 유리구 안에는 성자의 유골이 보관되어 있었다. 붉은 머리는 사제에게서 성자의 지팡이를 빼앗았다. 바닥에 나자빠진 사제는 미친 듯이 혓바닥을 놀리며 저주의 말을 쏟아냈다.
 스스로 명줄을 재촉하는 사제의 분노에서는 병적인 희열감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지상에서 출발한 저주의 언어들이 지옥에 미처 가닿기도 전에, 사제의 가슴팍으로 시퍼런 단도가 날아든다. 붉은 머리는 통쾌하다는 듯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사제의 가슴에 깊게 박힌 단도를 뽑아내자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수도원을 붉게 물들였다. 마치 우리들의 성공적인 상륙을 축하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수도원은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우리들은 수도원의 재물을 정신없이 약탈했다. 인간의 욕망을 꼭 닮은 불길이 혀를 날름거리며, 수백 년 역사를 지닌 수도원(修道院)을 욕보였다. 우리는 성(聖)과 속(俗)이 뒤섞인 유쾌한 혼종(昏鐘)의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성스러움이 유린당하면 인간의 얼굴에는 분노가 끓어오른다. 정을 나누었던 친구를 잃게 되면 인간의 얼굴엔 슬픔의 눈물이 흐른다. 하지만 곧 잔인한 인간백정질이 시작되면, 인간의 얼굴엔 공포만이 남게 되리라. 그러므로 공포야말로 희비극을 초월하는 힘을 지닌 최후의 승자.
 사제들은 불길에 휩싸인 수도원을 절망적으로 바라보았다. 하늘로 솟아오르는 불길은 영원히 타오르기라고 할 것처럼 맹렬하기만하다. 그것은 그대들이 이야기하는 지옥 불을 꼭 닮지 않았는가.
 악기를 들고 있는 한 사제의 눈길은 다른 동료들처럼 수도원을 향해 있지 않았다. 붉은 머리는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사제는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 사제의 얼굴은 다른 이들처럼 공포에 찌들어 있지 않았다. 붉은 머리는 죽음을 기다리는 무리에서 그를 빼내었다. 죽음이 목전에 왔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동요하지 않는 그에게서 호감을 느꼈던 것이리라. 
 살인에 대한 어떠한 거리낌도 없었다. 묵직한 도끼에 박살이 난 머리에선 뇌수가 흘러나왔고, 예리한 검에 찔린 몸뚱이에선 시뻘건 내장이 튀어나왔다. 발밑에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내장이 굴러다녔고, 역겨운 오물에선 참기 힘든 악취가 풍겨 나왔다. 시커먼 피가 죄악의 냄새를 풍기며 초록 잔디 위를 끈적끈적하게 적셨다.
 몇몇은 순교자(殉敎者)로 죽기를 원했고 또 그렇게 죽어갔다. 필시 그들은 지옥에서 고초를 당할 우리의 미래를 상상하며 즐겁게 죽어갔으리라. 부디 그러한 환상이 죽어가는 그들에게 마지막 위로가 되었기를.
 약탈한 보물로 가득찬 배를 타고서 우리는 고향을 향해 출발했다. 사냥을 막 끝낸 자의 포만한 배를 두드리면서. 그렇지만 우리는 얼마 안가 다시 허기를 느끼리라.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만족을 모르는 욕구.
 청명한 하늘, 따사로운 햇살, 평화롭게 출렁이는 물결, 흥분과 피로, 포만감과 허기짐이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의 주위를 에워싼다. 바다는 수천 개의 눈으로 우주를 바라보지만, 분노라는 오직 한 가지 혀만을 지니고 있다.  
 붉은 머리의 손에는 사제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아니면 그걸 구실 삼아 천국(天國)으로 가기를 바랐던 성물(聖物)이 들려있다. 그는 이방인들의 성물인 지팡이를 바다에 힘껏 내던졌다. 성물인 지팡이는 항해도중 목숨을 잃은 동료의 영혼을 위로해줄 훌륭한 전리품(戰利品)이 되어 주리라.
 우리는 독주(毒酒)로 고독을 달래며 별에게서 모자란 지혜를 배우고 시가(詩歌)가 노래하는 용기를 바다로부터 채운다. 뱃사람이 의지하는 것은 하찮은 동료애(同僚愛) 따위가 아니다. 항해지식도 아니다. 전사들의 매끈한 갑옷 위로 분노와 광기가 번쩍인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용기 있는 전사들을 영원토록 모방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 역시 그러하리라.
 따사로운 햇살, 시원한 바닷바람, 애틋한 새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배가 항진할 때마다 속삭이는 느긋한 물결 소리. 우리는 마침내 평화와 안식을 얻었다. 신경은 빠른 속도로 이완되어갔다. 목숨을 걸고 쟁취한 승리가 그 현실감을 급속도로 상실해가고 있었다. 그럴수록 전사들은 더욱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러한 느낌을 부정이라도 하려는 듯이 말이다. 
 붉은 머리는 며칠 전에 꾸었던 꿈 하나를 떠올린다.
 꿈속에서 그는 마을의 가장 유명한 악사(樂士) 한 명을 배에 태우고서 바다로 나갔다. 바다 한 가운데 이르렀을 때, 그는 악사에게 연주를 부탁했다. 하지만 악사는 그를 무시하는지 이렇다 할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화가 난 붉은 머리는 거친 욕설을 해댔지만, 그럼에도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붉은 머리는 눈을 부라리며 악사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그러나 놀라고 당황한 건 오히려 붉은 머리였다.
 악사는 인형처럼 부자연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입 크게 벌려 웃고 있었지만, 기뻐 보이지 않았고, 즐거운 듯 웃고 있었지만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인형의 얼굴을 한 악사는 마지못해 악기를 천천히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다는 꼭 움직이는 인형을 연상시켰다. 그의 손놀림에 생동감이라고는 없었지만,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음악은 미쳐서 펄펄 날뛰었다. 그 자체로 진화하고 변화하는 살아있는 생명체였다. 그 아름다움에 시간마저도 숨을 죽이고 느리게 흘러가는 듯 했다. 붉은 머리는 꼼짝도 않고 서서 악사의 음악에 빠져들었다. 그는 조용히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이것이 그가 며칠 전에 꾸었던 꿈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그는 꿈의 내용을 온전히 기억해 낼 수 있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악사가 들려주었던 꿈속의 선율만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음악이 불러온 감동과 흥분은 아직 남아있는데 말이다. 그의 감동과 흥분은 순식간에 실체 없는 유령의 것이 되고 말았다. 그는 음악이 아름다웠다는 사실만을 기억할 수 있었을 뿐, 아름다운 음악 그 자체를 기억하지는 못했다.
 현실로 되돌아 온 붉은 머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이 보이지 않는 사제를 뱃머리로 불러들였다. 그는 사제에게 자신을 위해 악기를 연주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제는 약간 뜸을 들이더니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그의 연주는 평범한 듯 했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기교가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남들이 흉내 내기는 불가능할 것 같은 그런 독특한 연주였다.
 붉은 머리는 눈을 감고 사제가 들려주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이방인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서정적인 선율에 감동한 붉은 머리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이로써 붉은 머리는 꿈이 그에게 들려준 예언(豫言)을 성취시키는 재능을 보여주었다.
 쾌청한 날씨가 깃발을 나부끼며 귀환하는 우리들을 환영해준다. 밝은 태양이 오랜 항해를 마치고 무사히 귀환하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다. 격렬한 전투와 계속된 항해로 인한 피로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흘러넘쳤다.
 이방인들에게서 빼앗은 보물들이 차례로 옮겨진다. 이방의 역사와 종교, 사상과 문화가 깃든 보물들은 곧 쇠 가마 속에서 녹아 탐욕스러운 자를 위한 재물로 바뀌리라. 이방인의 문화는 잃어버린 역사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그들의 모든 상징과 양식은 살아있는 것이 아닌, 죽은 상형문자가 되어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리리라. 시간이 흐르고 흘러 먼 미래가 되면, 이방인들의 역사와 문화를 회상하는 이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리라. 퇴색된 역사가 되리라. 망각의 역사가 되리라. 오직 우리의 역사와 문화만이 회상의 대상이 되리라. 오직 우리의 전사들만이 모방되리라. 축제의 나팔소리가 울린다.
 
*

 나는 유년 시절 곧잘 언덕 위에 올라가 많은 시간을 보내었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풍경이 마음에 들었고, 바다를 마주대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공상이 또한 좋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바다에 대한 동경도 키워나갔던 것이다. 
 나는 수많은 영웅들을 흉내 내었다. 다양한 개성을 소유한 신들을 연기했으며, 수없이 많은 상상 속의 전투를 치렀다. 몇몇 특정 신들에 싫증을 느낀 나는 여러 신들을 뒤섞어, 새로운 전형을 스스로 창조해보기도 하였다.
 여느 때처럼 언덕위에서 시간을 보내던 나는 수면 위를 떠다니는 조그마한 배 한 척을 보게 되었다. 일인용 보트에는 소년 붉은 머리가 타고 있었다. 나는 무척이나 감동어린 시선으로 그의 보트를 바라보았다. 이후로 나는 언덕 위에서 바다를 구경하는 일 따윈 집어치우고, 그를 따라서 보트를 타고 직접 바다로 나아갔다. 보트에 누워 따사로운 햇살을 받는 느낌은 여유로운 달콤함 그 자체였다.
 우리들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범속(凡俗)한 것들을 비웃고, 가진 것 없어도 스스로를 낮추지 않으며, 한껏 잘난 척하길 좋아하는 태도가 그와 나의 공통점이었다. 우리는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를 발견해 둘만의 아지트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둘만이 아는 비밀 장소라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
 무인도는 결투를 위한 신성한 장소였다. 우리는 무인도에서 살인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배에 칼을 맞은 젊은 남자는 피를 흘리며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튀어나온 내장을 감싸 안으며 극심한 고통 때문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의기양양한 승자는 마치 은혜라도 베푸는 듯, 괴로워하는 상대의 목을 찔러 숨통을 단박에 끊어주었다. 
 붉은 머리의 아버지는 가장 뛰어난 전사들 중 한명이었다. 탁월한 항해능력과 적의 기선을 제압하는 용기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돋보이게 했던 건 시인으로서의 재능이었다. 그의 문장은 간명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지나치게 탁월했던 인물은 붉은 머리가 철이 들기도 전에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마을 사람들은 붉은 머리가 미쳤거나 적어도 정상은 아니며, 그렇지 않다면 곧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보여주는 기이한 행동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그의 어머니였다.
 태양이 유난히 뜨거웠던 어느 여름날 정오, 붉은 머리의 어머니 그러니까 광기(狂氣)에 희생된 이 불쌍한 여자는 부엌에서 쓰는 칼로 남편의 엉덩이를 깊숙한 곳까지 찔러버렸다. 심각한 중상을 입은 그는 며칠 동안 앓다가 결국 삼일 째 되던 날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붉은 머리의 아버지는 돼지 잡을 때나 쓰는 칼에 엉덩이를 찔려 죽은 최초의 영웅이었다.
 사람들은 붉은 머리의 분노와 기이한 행동들이 모두다 어머니의 못된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붉은 머리 역시 어머니처럼 얼마 안가서 광기에 완전히 사로잡혀 버릴 거라 생각했다. 붉은 머리도 어머니의 광기를 두려워했다. 그는 자신도 어머니처럼 미쳐버리고 말거라는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를 닮아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몸서리쳤다. 그는 자신의 피 속에 흐르는 광기를 확인했다. 자신은 남들과 다르며 평범한 인생은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붉은 머리는 어머니의 태(胎) 속에서부터 저주받은 자였다. 
 달빛이 유난히 밝았던 어느 가을날 저녁, 소년 붉은 머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그대로 잔디밭에 드러누웠다. 달빛을 바라보고 있으니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외로움이 밀려왔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흔히 느끼는 그런 외로움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갑자기 부자연스럽게만 느껴졌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거북스러웠다.
 소년은 검은 하늘을 초점이 맞지 않는 공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모든 것의 배후(拜候)에 누군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으며, 인공의 냄새를 맡았다. 그는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 생각이 붉은 머리를 항상 고통으로 내몬 건 아니었지만, 가끔은 그렇기도 했다.
 그는 뱃머리에 새겨진 꽃과 줄기가 뒤엉켜있는 문양들, 장신구에 새겨진 소용돌이무늬들을 이유 없이 싫어했다. 둥근 달이나 수면 위에 떠오르는 태양, 차가운 물줄기와 얼음덩이 같은 것들도 역시 싫어했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혐오감의 이유가 무언지 설명하지 못했다. ‘원래부터 이상한 거라면, 이상하다는 것도 이상할 건 없다.’ 그는 단지 이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붉은 머리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광기를 조금씩 내보였다. 그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괴물은 건전한 현실감각을 하나씩 하나씩 파괴해갔다. 붉은 머리의 가장 큰 특징인 현실감각의 부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마저 실체 없는 환영의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용기 있는 전사였다. 하지만 그가 지닌 용기는 두려움을 극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두려움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상적인 공포심이 결여된 정신병자였다.
 붉은 머리의 성격은 날로 포악해져갔다. 그는 날이 갈수록 괴상한 행동들을 일삼았다. 동료를 향한 그의 빈정거림은 도가 넘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성스러운 전사들을 우둔하다며 공공연히 비웃었다. 용맹한 전사의 일족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던 그는 이제 태도를 바꾸어 자신을 포함한 우리 일족 전체를 혐오했다. 그는 피를 흘려 쟁취하는 영광스러운 승리도, 나약함에 대비되는 고결한 용기도, 드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자랑스러운 모험심도 모두가 우습기 짝이 없는 것이라며 경멸했다. 그는 친구와 일족 전체를 비웃었다.     

*

 앞이 보이지 않는 사제는 이교(異敎)의 신앙을 버리고 마을의 처녀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다. 사제는 마을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의 연주에는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나 역시 사제가 들려주는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낯선 느낌을 떨치기 힘든 이방의 음악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담겨 있었다.
 마음이 울적할 때면 나는 곧잘 사제부부의 집에 들러 음악을 청해 듣고는 했다. 사제는 성격이 친절해서 이러저러한 요구에도 별로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나를 경계하지 않았고, 나 또한 그를 진심으로 대했다. 우리는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가며 우정을 쌓아갔다.
 나는 그에게 맹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불행하게 생각지는 않는지 물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하면서, 단지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기는 하다고 대답했다. 사제는 사고로 시력을 잃은 게 아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는 앞을 전혀 보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꿈속에서라면, 그도 수면에 비치는 강렬한 햇살을 볼 수 있지는 않을까. 눈부시게 푸른 바다를 느껴볼 수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그에게는 시각적인 상상력 위한 원형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미소를 짓고 있는 사제 옆에는 유사(有史) 이래 대단한 추녀인 그의 부인이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조금 더 머물다 가기를 권하는 사제 부부의 청을 뒤로하고, 나는 약속 시간에 맞춰서 밖으로 나왔다. 붉은 노을의 핏빛에 물든 양떼구름은 분명 불길함의 전조였다. 나는 겁을 먹었고, 뒤로 물러 설 핑계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계획을 실행해야만 했다. 그대로 물러선 다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뱃머리에 올라선 공모자들은 이미 거나하게 취해있었다. 독주에 젖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건, 한 사람의 목숨을 거두기 위한 비밀스러운 약정. 비밀이야기를 엿듣는 건 바닷가에서 편히 쉬고 있는 우리 자신의 분신인 전함이 유일하다.
 - 붉은 머리의 생명을 거두자. 그의 생명을 취하자. 
 붉은 머리는 어린 시절 우리의 아지트였던 무인도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그의 보트에는 나의 여동생이 타고 있었다. 내 여동생은 정신이 약간 모자란 불쌍한 아이였다. 화가 난 나를 앞에다 두고, 붉은 머리는 뻔뻔스러운 얼굴로 빈정대며 나를 놀렸다. 내 여동생은 배가 불러왔고, 그는 화가 나서 따지는 나를 비웃었다. 그는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광기를 물려받은 저주 받은 자였다.
 나는 그와 결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들의 유년시절 아지트였던 그 무인도에서 말이다. 그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의 건전한 상식에 비추어 보자면, 결투를 피하는 것은 결코 명예로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모든 걸 이치에 맞게 해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결투를 포기한 것이다. 목숨이 아까워서도 겁이 나서도 아니었다. 단지 붉은 머리의 생명을 확실하게 취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몇몇의 공모자들과 함께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그를 혐오하는 적들은 사방에 넘쳐났다.   
 명예를 위해 우리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가지였다. 우리는 여동생을 벼랑에서 던져버렸다. 그녀는 곧바로 숨을 거두었다. 턱뼈가 완전히 으깨어져 예전의 곱고 아름다웠던 얼굴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된 끔찍한 시신을 거두어 들여 장례를 치러 주었다. 
 나는 위선 떠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참회나 반성 역시 내가 좋아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 건 천박한 자들에게나 어울리는 일일 뿐, 나는 그런 것을 믿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행복을 찾고 싶어 하는 무리들에게나 어울리는 일이지 내게는 아니다. 그렇게 행복이 좋다면, 그렇게 원한다면 행복하게 뒈져라!! 그러므로 행복이야말로 천박한 자들의 유일무이한 정언 명령(定言命令).
                                        
*

 새벽공기가 바짝 얼어 붙어있다. 두꺼운 얼음벽 깨지는 소리가 찬 공기를 타고 울려 퍼진다. 별들은 아직 밤을 지배하고 있다. 모든 불분명함을 포용할 것 같은 어두컴컴한 밤하늘과 사물의 기이한 공존을 그대로 인정하며 모순(矛盾)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고 말하는 별들. 나는 이 기이한 공존(共存)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별들이 누리는 호사스러운 자유를 흉내 내고 싶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서서히 밝아오는 하늘과 함께 서투른 환영은 걷혀간다. 나는 동료들을 따라 짐들을 배에 실어 날랐다. 파도가 솟구칠 때마다 배들은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우리가 내지르는 포효조차 바다는 집어 삼켜버린다. 
 우리는 형식주의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치사한 수도 마다하지 않는 범죄자들, 수백 년을 산 노인 같은 형식주의자들을 비웃는 유쾌한 악행(惡行)이 이제 곧 시작된다. 죽는 순간, 행복한 웃음을 짓고 싶어 하는 우매한 자들을 공포로 몰아넣기 위해 우리는 떠난다. 우리가 택한 날짜는 이방인들의 성축일(聖祝日), 천국으로 가기 위해 죽음을 자청하는 자들이 짓는 표정은 참으로 숭고했다. 인간은 환상의 도움을 받는데 결코 주저함이 없다.
 우리는 참으로 용감한 민족, 간교한 꾀를 쓰는데도 망설이는 법이 없다. 우리는 손에 피를 묻히는 것 또한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화가 나있는 종족이여, 현실이 비워둔 공간을 환상으로 채워놓아라. 그러므로 우리들은 각성한 몽상가들. 
 겁에 질려 도망치는 자들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감촉이 짜릿하게 느껴진다. 모든 것은 여기 있다, 여기 없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오랜 항해가 불러들인 우울한 노래, 과거의 추억과 미래의 기억을 조심스럽지 못하게 불러들이는 악령의 노래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나는 살아있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태양에 비친 사물들의 윤곽만큼이나 확실하다.
 목숨을 걸었던 전투라도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는 단지 꿈을 꾼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어느 게 환상이고 어느 게 현실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적들이 쏘아대는 화살을 피하고, 날카로운 이교도(異敎徒)가 휘두르는 칼날을 피해 달아나는 동안에는 그것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몸이 축 처진 노인과 이제 막 아이티를 벗어난 소녀 할 것 없이 모두다 능욕의 대상이 되었다. 동료 한명은 가랑이를 벌린 채 미쳐 히죽대는 여자를 정신없이 욕보였다. 이로써 우리들은 모든 것을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 있었다. 축제에 열광하는 것이나 전쟁에 열광하는 것이나 매한가지, 전쟁은 우리들의 현실 감각이다. 우리들은 그것을 찾아 정기적으로 항해를 떠난다.
 겁에 질린 우리 측 전사 한 명이 어처구니없게도 도망을 치기 시작한다. 그는 이교도들에게 등을 보인 채, 전열을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갔다. 그런 짓을 한다는 건, 세계로부터의  영원한 추방을 의미하는 것, 세상과의 절연을 의미한다. 제정신으로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남은 생을 죽은 자로 살아갈 생각이란 말인가.
 비겁한 도망자는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등을 맞고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사기의 저하를 우려한 동료가 행한 훌륭하고도 빠른 처리였다. 저렇게 탈주하는 자를 그대로 두었다간, 사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제 아무리 전투에 이골이 난 우리들이라도 말이다.
 우리는 화살을 맞아 이미 절명한 도망자를 끌고 와서 목을 베었다. 목이 잘린 시체는 한 손에 칼이 들린 채, 기둥에 단단히 묶여졌다. 겁쟁이인 동료를 마음껏 비웃음으로써 우리는 그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줬다. 
 인간은 무언가를 모방(模倣)하는 모방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행했던 모방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다시 모방된다면, 처음의 모방은 하나의 원형(原形)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니 자연스러운 천성인지 아니면 단순한 흉내 내기일 뿐인지 묻지 마라. 너를 기른 것이 문화인지 종교인지 아니면 사상인지 타고난 성격과 유전된 자질인지 구별하려 하지마라. 우리들은 모방자였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모든 것을 어색해하지 말고 그대로 해치워버려라.
 앞을 보지 못하는 사제가 밤새 꾸는 꿈은 선장 없이 항해하는 배와 같은 처지였다. 사제의 뇌는 긴 수면의 시간 동안 무엇을 모방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다. 현실에서 보지 못한 것을 꿈속에서 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의 꿈속에 등장하는 인간과 짐승, 악마와 천사들은 모두다 구체적인 형상이 결여되어 있었다. 모호하고 질퍽하고 죽처럼 흘러내리는 형상들, 조야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터무니없는 그림들만이 그의 꿈속에 나타났다.     
 붉은 머리는 타고난 모방자인 동시에 훌륭한 창조자이기도 했다. 그는 시인을 흉내 냈다. 그는 용감한 전사의 역할도 즐겼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버지, 우리 일족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 분의 그림자를 훌륭하고 성실하게 따랐다. 
 반면 인생 후반기에 그가 보여주었던 행동들은 악덕에 가득 찬 것들뿐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전례(前例)를 찾기 힘들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는 사제와는 다르게 현실에서 보지 못한 것을 꿈속에서 보는 재능을 소유하고 있었다. 모든 게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일까, 그는 일생동안 변덕을 부리며 수도 없이 자기 변신을 행했다. 그는 어떠한 삶이라도 자기 삶의 원형으로 삼을 수 있었다. 
 붉은 머리가 스스로의 상상력에 의지해 만들어낸 것들은 모두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길러준 사회에 복수를 가했으며, 전통과 계율에 반항하는 자의 역할에 몰입했다. 우리가 신성시하는 가치들을 비웃었다. 그는 마치 자신에게 유전된 광인의 피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모방을 넘어선 광기였다. 그의 어머니,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방법으로 남편을 살해한 여자로부터 저주스러운 재능이라도 물려받았던 걸까. 그는 오직 상상력에만 의지해 견고한 뼈대를 지닌 형상들을 꿈속에서 만들어내었다. 그는 홀로 꿈을 꾸었으며, 우리와는 다른 꿈을 꾸었다.  
 머리가 깨져서 뇌수가 바닥에 흐르는데도, 그는 바닥에 떨어뜨린 단검을 잡기 위해 마지막까지 발버둥 쳤다. 처참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커다란 희열을 느꼈다.
 홀로 꾸는 꿈은 위태롭다. 어머니에게서 광기를 물려받았다는 그 남자는 결국 융화되지 못한 일족, 불명예스러운 전사, 미치광이 인간으로서 생을 마감했다.
 이것이 우리가 붉은 머리에 대해 아는 전부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이야기에는 중요한 부분에서 많은 오해가 있어왔다. 우리 뿐 아니라 붉은 머리 그 역시도 말이다. 어머니에게서 광기를 물려받은 그의 일생은 어머니를 꼭 닮아있었다. 그는 정말로 어찌해볼 수 없는 광기의 인간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는 진실이 아니다.    
 그의 가까운 친척 되는 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붉은 머리의 어머니는 광기에 차서 남편을 살해한 그 미친 여자가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붉은 머리는 하층민 출신의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그의 인생은 요람에서부터 누군가를 흉내 내는 것으로 시작된 것이다. 광기를 물려받았다고 굳게 믿은 그는 결국 광기마저도 모방했다. 그는 광기마저도 훌륭하게 해치워버린 것이다. 
 
 술기운이 떨어졌을 때 부르는 노래는 어색한 것
 연극이 끝난 뒤에 휘두르는 신(神)의 망치는 아이들의 장난감
 꿈에서 깨어나지 마라
 어쩔 줄 몰라 하거나 어색해하지 마라
 차라리 훗날 자신이 미친 짓을 했었노라 자책해라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런 것은 미래를 위해 남겨두어라
 네가 어색해 미칠 것 같다면, 우리가 같이 노래를 불러주마
 수천 명이 다함께 부르는 노래는 이미 환상(幻想)이 아니다
 전진! 전진! 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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