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회 한대신문 문예상
제38회 한대신문 문예상
  • 취재부
  • 승인 2005.12.04
  • 호수 12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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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때묻지 않은 지성이 살아 숨쉬는 대학, 그래서 더욱 소중한 이 공간에서 한대신문이 지성의 오늘을 확인해온지 38년이 지났다. 올해도 한대신문은 지난달 시, 소설, 비평 부문에서 공모를 통해 작품들을 받았다. 65인의 학생들로부터 시 47편, 소설 7편, 비평 12편이 마감 기일에 맞춰 제출됐으며, 이 작품들은 네 분 심사위원들의 엄정한 심사를 거쳤다.

예고한 대로 대상 1편, 우수상 2편, 가작 5편을 가린 제38회 한대신문학술문예상에서 영예의 대상은 시 ‘검정우산’을 투고한 곽영신<사회대·사회 01>에게 돌아갔다. 곽 군은 ‘검정우산’에서 우산을 소재로 이 시대의 아이러니에 대해 미적 비판을 쏟아냈다. 우수상에는 소설 ‘이방인의 노러의 박재혁<대학원·경영 04>과 비평 ‘전자시대의 ‘숨은 자아 찾기’에 대한 연구’의 주효주<인문대·국문 01>가 당선됐다.

가작에는 소설 ‘굳바이 조르바’의 임태우(공대·전자전기 99), 소설 ‘잿빛 담장’의 김인숙<교육대학원·국어교육 04>, 시 ‘등불신’의 이상민<대학원·연영 05>, 시 ‘시작’의 박선영<국문대·국문 03>, 시 ‘길을가다갗의 박숙영<국문대·문화컨텐츠04>에게 돌아갔다.

시를 쓰기 위해, 소설을 쓰기 위해, 비평을 쓰기 위해 밤을 새며 내뱉은 아쉬움, 그리고 기쁨들이 작품 곳곳에서 배어났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어느 작품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그렇기에 우열을 가리기 또한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당선과 낙선을 가려야 하는 부분에 아쉬움이 남는다.
마지막으로 대학이 생명력을 잃치 않았고 젊은 심장은 언제나 뛰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 65분의 학생들에게 감사드린다. 또한 공정한 심사를 흔쾌히 허락하신 네 분의 심사위원들께도 감사드린다. <편집자 주>

당선작

대상       시  ‘검정우산’ 곽영신 <사회대·사회 01>
우수상   소설  ‘이방인의 노러 박재혁 <대학원·경영 04>
               비평  ‘전자시대의 ‘숨은 자아 찾기’에 대한 연구’ 주효주<인문대·국문 01>
가작상   소설  ‘굳바이 조르바’ 임태우 <공대·전자전기 99>
               소설  ‘잿빛 담장’ 김인숙 <교육대학원·국어교육 04>
                시      ‘등신불’ 이상민 <대학원·연영 05>
                시      ‘시작’ 박선영 <국문대·국문 03>
                시      ‘길을가다가' 박숙영<국문대·문화컨텐츠 04>

심사위원
시  
    이승훈  교수 <인문대·국문과> 
          윤석산  교수 <국문대·국문과>

소설  서경석  교수 <인문대·국문과>

비평  이도흠 교수 <인문대·국문과>

우수상 소설 ‘이방인의 노러 박재혁 <대학원·경영 04>, 비평 ‘전자시대의 ‘숨은 자아 찾기’에 대한 연구’ 주효주<인문대·국문 01>, 가작상 소설 ‘굳바이 조르바’ 임태우 <공대·전자전기 99>, ‘잿빛 담장’ 김인숙 <교육대학원·국어교육 04>은 한대신문 홈페이지(www.hynews.ac.kr)에 전문이 게재 돼있다.

대상

                                                검정 우산

곽 영 신 〈사회대·사회 01〉

1. 요사이 두어 달은 유난히 가물어서, 우리는 토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가 오지 않을 때에는, 검정 우산의 삶이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였다. 어떤 이는, 녀석이 지금은 현관문 앞쪽인지 옆쪽인지에 쳐 박혀있어도, 내일이나 비가 오면 스파이더맨 거미줄처럼 쫘악, 몸을 필 수 있을 테니 괜찮다고 하였다. 다른 이는, 비가 오지 않아도 우산은 그 단단한 뼈마디를 굽히고 싶지 않을 거라 하였다. 전에 비가 그칠 때, 우산이 검은 울음을 뚝뚝 떨어뜨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단다.

푸른 모체에서 벗어나 낚시 바늘에 걸린, 슬픈 몸뚱이 마냥. 
  이런 이도 있었다. 그는 맑은 날에는 검정 우산을 양산으로 쓰면 되지 않느냐고 하였다. 조카들 칼싸움하기에도 좋고 말을 잘 안들을 때는 때리기도 좋다나. 할머니 지팡이로도 괜찮겠다고 얘기할 때쯤, 마침 TV에서는 어여뿐 아나운서가 내일도 소풍가기 딱 알맞은 화창한 날씨라며 생글거렸다.

2. 침묵하던 검정 우산은 온 몸을 짜 비틀었다. 다들 모르는군. 두려워하는 거겠지. 노아의 비, 이제는 영원히 그치지 않을. 그리고는 아무도 모르게 감추어둔 한 방울의 눈물을 하늘에 올려, 사막 한복판에 한 땀의 작은 구멍을 뚫는 것이었다.

당선소감
졸업을 앞두고 정말 크고 귀중한 선물을 받았다. 이제껏 내가 끄적인 글들이 시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그러기에는 너무 부족한 점이 많았다. 사실 내가 문학에 관심을 가진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 대학 초년생 때까지만 해도 시나 소설 같은 것은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과 삶과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질수록, 문학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커져 갔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문학을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를 어설피 사랑하고 즐기는 것만은 확실하다.

한대신문 문예 공모를 위해 수십 번 시를 고쳐 쓰고 새로 쓰면서, 이 일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나의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이와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는 그저 쉽게 발현되지 않는 것 같다. 각고의 노력과 고통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하나의 짧은 외마디로 표현되고 소통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것은 정말이지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기도 하다. 어떠한 생각을 붙잡느라 해야 하는 일(가령 우리의 시험공부와 레포트와 같은)을 제대로 못하고 있을 때에도, 은근히 느껴지는 그 긴장감은 사람을 살아있게 한다. 그 것이 하나의 정제된 언어로 자리 잡게 되었을 때는 그야말로 기쁘다.

나의 시를 잘 보아주시고 뽑아주신 교수님들께 정말로 감사드린다. 이를 통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안도와 하고 싶다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푸근한 상아탑을 떠나고 사회로 나가야 하는 시점에서 소중한 추억을 또 하나 얹었다. 막연히 시에 대해 알고 싶어 수강하게 된 “문예창작의 이해”의 선생님과 학우들에게도 정말 감사드린다. 함께 시를 읽고 배우며 ‘시를 쓰고 싶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사랑하고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또한 감사를 드린다. 시든 무엇이든 삶에서 우러나오는 향기 나는 모든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끝으로 삶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며, 끝까지 믿고 배우고 쓰고 이겨내며 살아가고 싶다. 아울러 우리 한양인들도 추운 겨울 따뜻하게 나고, 각자의 소중한 의미를 찾아 살아가길 같은 학우로서 바란다.

시부분심사평
사물을 새롭게 보는 방법

이 승 훈 (인문대·국문) 교수

시쓰기는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사물을 새롭게 보는 하나의 방법이고 새롭게 보는 것은 낯설게 보는 것. 사유의 상투형을 벗어나는 것. 그러므로 시쓰기는 이성이 지배하는 현실의 허구와 조작과 억압에 대한 미적 저항이다.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이 시대의 정신적 빈곤을 극복하는 길은 결국 예술, 종교, 철학이고 그것은 이 시대가 망각한 감성, 믿음, 사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전제로 하고 시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의 세계이고 아니 감성적 이성 혹은 이성적 감성의 세계이다.

그러나 투고된 작품들 대부분이 보여주는 것은 상투적 상상력, 감상적 넋두리, 낙서 조각들이고 이런 작품들을 심사하는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이지만 이것도 팔자라고 생각하며 심사 기준을 소재, 구성, 상상력, 주제의 측면으로 나누고 무슨 수학 시험의 답안지처럼 점수를 매겼고 이건 한대신문사 측의 요구이기도 했다. 예술art의 어원은 만드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우선 구성이 무언지 모르는 작품들, 그러니까 메모나 낙서같은 작품들은 C, 다음 소재가 전 근대적이고 상상력이 부족하고 묘사력이 미흡한 작품들을 B로 분류하고 남은 작품들, 그러니까 A로 평가된 작품들이 10편이었다.

10편 가운데 이 시대 현실의 구체적 삶을 동기로 하며 동시에 신선한 감동을 주는 것들에 더 높은 점수를 준 결과 ‘검정 우산’, ‘시간의 길을 가다갗, ‘쥐포’ 등의 순으로 선정됐다. ‘시간의 길을 가다갗는 시간이라는 이름의 길을 가는, 살아가는, 떠도는 현대의 내면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만 시적 공간이 프랑스라는 점이 문제였고 ‘쥐포’는 쥐포를 매개로 하는 일상적 삶의 풍경을 간결하게 묘사하면서 가난 속의 행복을 노래한 것이 좋지만 시가 소품이라는 느낌이다.

‘검정 우산’이 노래하는 것은 우산을 매개로 하는 이 시대 삶의 알레고리이다. 알레고리는 이야기가 있는 시이고 이 시에서 그것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양분된다. 전반부는 두 달 가까이 가문 날 몇 사람이 모여 우산의 삶, 그러니까 우산의 정체성, 알리바이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이고 후반부는 그동안 침묵하던 우산의 말로 이제까지의 상황이 반전되고 이런 반전이 미적 충격을 준다. 우산은 비가 올 때 가치가 있다.

그러나 토의에 참여한 인물들은 이런 가치, 정체성을 부정하고 이런 게 이 시대 삶의 아이러니와 통한다. 요컨대 이 시는 사용가치가 사라지고 교환가치, 상징가치, 나아가 기호가치가 지배하는 이 시대 자본주의적 삶의 허구를 미적으로 비판하고 마침내 우산이 몸을 비틀며 말한다. 다들 모른다는 것, 이제는 노아의 배를 타고 바다를 떠돌아야 한다는 것. 시를 쓴 학생이 누구인지 궁금하지만 이 정도면 이 땅의 2류 시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잘난 척 하는 많은 신인들도 입을 다물어야 할 것이다. 요컨데 이런 시를 만나게 되어 기분이 좋다는 말씀이다.

詩 부문 가작

                          等身佛
                                                      이 상 민 〈대학원·연영 05〉

할머니의 손가락으로 엮어진 집이었습니다.
대문에서 가마솥으로
걸으시고 난 뒤부터 잃어버린 북간도의
수도작(水稻作) 숭늉 내음 서리서리 담겨 있었습니다.
가마솥 사흘 나무해 오시듯
아침 서리 맺힌 털 고무신을 신고 공양하러 가십니다.

길다란 생각의 그림자를 태우시며
오랫동안 불을 활활 지피시고
슬픔을 굽고 아픔을 깨트리며
부엌으로 새어 들어온 별빛마저 활활 태우고 계십니다.

마디마디 흰 가루 묻은 竹幹사이 상처
끊임없이 툭툭 분질러 넣으면서
모질게 태워 검은 재가 청동처럼 차갑습니다.
산다는 것은 소망의 그림자를 불에 넣어
가마솥에 활활 태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바람은 저녁을 다듬어
첫 별 뜨는 곳으로 기울고
아직도 다 타지 못한 연한 육체의 공양이 시작됩니다.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

뚜벅뚜벅 흔들리는 할머니의 웅크린 몸 너머로
향·등·꽃·과일·차·쌀
풍경 소리 은은하게 별 그림자 긋습니다.
맛있고 달콤하게 할머니를 씹습니다.

*수도작 : 논농사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 : 천수경의
*본래 명칭
 향·등·꽃·과일·차·쌀: 불교에서 대표적인 공양물 여섯 가지, 육법 공양의 상징물


                       시간의 길을 가다가
                                                          
                                                              박 숙 영 〈국문대·문화컨텐츠 04〉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바삐 추를 움직이는 시계를 보는
테이크아웃점의 바리스타(Barista)
6시에 그는 퇴근준비를 한다
창밖을 보니
비가 올지도 모를 흐릿한 하늘

바리스타의 차는 샹젤리제의 거리를 달리다
빨간 불에 차를 세우며 문득 백미러를 본다
귀밑에 프림이라도 묻은걸까…

아슬하게 차선을 밟고 온쉼표처럼 멈춰 있는 차 한 대
그 차 안에서 마흔일곱의 사내는
시간이 하얗게 쇠어버린 것을 알았다

바리스타는 정지 없이 이어지는 길 위에서
백미러에 얼굴을 들이대고
벌서듯 두 손을 귓가에 대고
삐져나가는 시간을 향해 헛손질을 해본다
아무리해도 프림이 묻은 머리칼은 쉬이 뿌리를 보이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 시간의 길에서 바리스타는
문득 바리케이드가 치고 싶어졌다
[유턴할 수 없는 길에서 갑자기 역행하고 싶어졌다]

유턴이 되지 않는 길에서
비상등을 켠 온쉼표 하나가 샛노란 두 줄을 넘는다
온쉼표는 마치 2분쉼표처럼
바뀌길 바란다

가로수에서 떨어져 나온 누런 낙엽하나가
서늘한 바람을 타고 유턴하는 차를 따라간다

 

                                                   시작

                                                                         박 선 영 〈국문대·국문 03〉

소소한 일상과 지독한 고집을
동시에 머금은 듯한 색깔이 마음에 든다.

처음엔 네게 이유를 밝히진 못했지만
나는 시를 쓰기 전에 털실가게에 갔던 것이었다.
마치 원래 뜨개질에 관심이 있던 사람처럼.

우는 어린애에게 엄마젖을 먹이듯
너에게 나는 글로 짠 옷을 입혀주고 싶구나.
자음과 모음 뭉치를 풀어 조합한 부끄러운 나의 얼개가
네 몸에 꼭 맞는다면···
따뜻하다고 말해줄 것 같기도 하구나.

혹, 형태가 비뚤거나
올이 하나라도 빠지지 않도록
잘 살펴야 한다.

밤을 밝게 바꿀 수는 없어도
붉은 인이 그득히 묻은 종이 위에 성냥개비를 긋다보면
아침도 오기 마련이다.

내 어둔 날의 詩作도
화로에 땔감을 지펴넣는다기보다는
거느리기에도 아직 익숙찮은 대바늘에다 코를 거는 일.

다 짜낸 옷 속의 온기를 상상하는 것은
흔들의자에 앉은 자의 여유······.

시부분심사평
외적 형식 변화 했지만 시의 정신 여전

윤석산<국제문화대·국문> 교수

흔히 현대를 시의 위기의 시대라고 한다. 종이와 펜이 사라지고, 컴퓨터와 인터넷이 모든 것을 대신하는 시대, 원고지 위에 만년필로 쓰여지던 시의 시대는 갔다. 그러나 그 외적인 형식은 바뀌었어도 시의 정신은 오늘이라는 시대에도 남아 있으므로, 진정 시의 위기의 시대는 아닌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증명이나 하듯이 금번 한대신문 주최 문예모집에 많은 작품들이 투고가 되어 성황을 이루었다. 투고된 작품들은 대부분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즉 정통적인 시에의 연마가 어느 정도된 사람들의 작품임을 알 수가 있었다. 어느 사람의 경우에는 많은 작품을 투고하여, 고른 수준을 보여주기도 하여, 그 사람의 시에의 연마가 어떠한가를 가늠할 수가 있었다.   

투고된 많은 작품들 중에서 네 편의 작품을 선에 넣었다. <택시의 자랑>은 매우 풍자적인 작품이다. 그 작품의 전개 역시 풍자적인 수법을 쓰고 있어, 한층 돋보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작품이 말하려고 하는 시적 메시지가 다소 부족하였다.
이에 비하여 <빨래줄>은 필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분명한 작품이다. 빨래줄을 어머니로 환치시킨 점이 매우 좋다. 나아가 빨래줄을 통해 어머니의 애환이 잘 들어나 있음을 볼 수가 있었다.

또한 <시작>은 그 시적 구성에 있어 다소 미약한 부분이 보이고 있으나, 시적 언어의 선택이나 비유 등이 신선하여 선에 넣었다. 가령 “붉은 인이 그득히 묻은 종이 위에 성냥개피를 긋다보면 아침이 오기 마련이다.” 등의 잘 표현된 구절들이 보이는 작품이다.
끝으로 <등신불>은 그 시적 구성이나 전개가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할머니와 할머니에 대한 생각과 그리고 할머니의 삶을 매우 밀도 있게 그려낸 작품이라고 평가된다.

비록 선에 들지는 못했어도 많은 사람들이 투고를 해주었고, 또 그 수준이 만만치 않았었음을 밝히며, 위로의 말을 전한다. 

우수상 - 비평 - 
당선소감
전자시대의 ‘숨은 자아 찾기’에 대한 연구
- 이원의『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를 중심으로 -

주효주〈인문대·국문 01〉

한대신문사입니다. 한 대문예상 우수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낯선 문자 메시지를 받고 키보드를 하나씩 밟고 하얀 모니터 위에 섰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당황할 새도 없이 떠밀려 무대 위로 올라간 어느 시상식의 수상자처럼. 3학년 1학기 때, <현대문학의 감상>과 <현대문학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정신없이 읽고 쓰기를 반복했었다. 1910년대부터 50년대, 50년대부터 80년대를 넘나들다 한 학기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종강을 하자 가슴이 휑했다. 그때, 읽고 쓰는 것이 내 삶의 전부였음을 느꼈다.   

 3학년 2학기 때, <한국문학사>와 <텍스트 읽기의 즐거움>이라는 수업에서 교수님이 건네주시는 텍스트들을 통해 나만의 눈으로 깊게 읽고 쓰는 연습을 할 수 있었다. 텍스트를 읽고 쓰면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셨던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지난 학기 <현대문학연습>이라는 사범대 수업에서 교수님의 소개로 이원의 시집을 펼쳐보게 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발표문을 작성했었다. 교수님은 그 글을 그냥 두지 않게 해주셨다. 부족한 점을 추가하고 내용을 보완하여 졸업 논문으로 제출하던 날, 우연히 펼친 신문에서 ‘한대 신문 문예상 공모전’이라는 말을 보게 되었다. 결국 교수님의 격려로 서툰 발표문은 졸업 논문으로, 졸업 논문은 공모전의 출품작이 되었고, 우수상의 영광까지 얻게 되었다.

교수님들의 말씀처럼 모든 것이 텍스트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시대에 텍스트는 넘쳐난다는 점이다. 따라서 ‘무엇을, 얼마나’ 읽느냐보다 ‘어떤 눈으로’ 그 텍스트를 읽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의 눈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그것은 나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그 의미를 발견할 때, 나는 내가 살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아직 읽지 못한 것이 너무도 많기에 앞으로 읽을 것이 많아 나는 행복하다.
앞으로도 나만의 눈으로 읽고 쓰는 그 기쁨을 찾아, 나는 또박또박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비평전문은 한대신문 홈페이지(www.hynews.ac.kr) '한대신문 이벤트' 에 게재

비평심사평
평론에서도 죽어야 산다

이도흠 <인문대·국문> 교수

비평이란 작품을 텍스트로 놓고 읽는 행위다. 텍스트란 언어기호가 여러 원리에 따라 짜여있어 메시지를 캐낼 수 있는 체계이다. 짜여 있기에 그것은 풀어냄을 요구하고 메시지를 담고 있기에 드러냄을 기다리며 독자와 만나 아울러지기를 원한다.

풀어냄은 얽히고설키며 짜인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요, 드러냄은 텍스트에 담긴 의미들을 찾아내고 해석하는 것이요, 아우름은 텍스트와 독자가 만나 미적 체험을 빚는 것이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이 모든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텍스트란 분석과 해석, 미적 체험을 기다리는 대상물이자, 이 과정에 의하여 다시 태어나는 창조물이다.

기대를 가지고 13편의 비평문을 읽었다. 실망. 2편을 빼고는 평론이라 할 수조차 없었다. 우선 텍스트를 읽는 훈련이 덜 되었다. 비평문이라기보다 감상문이었다. 줄거리 요약에 자기의 인상비평적 감상을 덧붙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텍스트에 대한 치밀한 분석도, 자기 나름의 해석도, 작가의 의도를 넘어서서 작품의 의미와 비평가의 창조적 해석이 어우러지는 황홀감도 없었다.

<개화를 고대하며>와 <전자시대의 ‘숨은 자아 찾기’에 대한 연구>가 1차 심사를 통과하였다.
<개화를 고대하며>은 김영하의 <검은꽃>에 대한 비평인데 줄거리 요약에 감상을 보태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작품을 시대의 맥락에서 읽으려 하고 자신의 평가를 곁들인 것을 그나마 평가하고 싶다.

<전자시대의 숨은 자아 찾기에 대한 연구>는 이원의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뜨다>를 중심으로 디지털시대에서 자아의 의미에 대하여 성찰하였다. 우선 텍스트에 대해 비평가가 나름대로 비전을 가지고 읽는 것이 좋았다. 디지털 시대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이 가운데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를 모색하자는 논자의 취지는 디지털 시대의 핵심을 짚어내고 있다. 텍스트에 대해 평자 나름대로 분석하고 이 분석한 것을 디지털 사회의 맥락에서 해석하여 평론에 철학적 깊이를 더하였다. ‘낙타’, ‘사막’ 등 핵심 시어에 대해 심도 있게 해석을 한 점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자기 앞의 세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출발하여 비전을 꿈꾸는 글쓰기 방식은 루카치를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텍스트의 분석이 치밀하지 못하였다. 이는 ‘디지털 사회의 자아 문제’에 대해 평자가 가지고 있는 주관적 견해에 시 텍스트의 해석을 짜 맞추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검색 사이트 안의 자아’와 ‘모니터 앞의 자아’ 사이의 차이와 양자의 소통 문제에 대해 구체적 논증이 없어 글이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어버렸다. 디지털 시대에 대한 통찰과 철학이 아직 무르익지 않은 까닭이다. 시의 장르적 특성과 본질의 면에서 보아도 이원의 시는 좋은 시일까? 이원의 시에 대해 시로서 시다운 특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산문을 해석하듯, 그것도 시적 분석이라기보다 평자의 주관에 의한 유추적 해석을 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작품을 읽고 이를 글로 표현하는 평론가로서 자질은 충분히 있으니 앞으로 많은 노력을 바란다.

가장 적극적인 평론은 작품을 주석하는 데서 벗어나 작품을 다시 쓰면서 새로 창조하는 것이다. 평론이라면, 이 경지까지 가지 못하더라도 작품에 감추어진, 남이 보지 못한 의미를 찾고 미적 요소를 발견하여 드러내야 한다. (평론에서도) 죽어야 산다.

우수상 - 소설 - 
당선 소감
이방인의 노래

박재현 (대학원 경영 04)

본의 아니게 학교를 오래 다녔음에도, 그다지 기억에 남을만한 일이 없다는 것을 평소 안타깝게 여겼는데, 아무튼 이번 기회를 통해 작은 추억을 간직하게 된 것을 즐겁게 생각합니다. <이방인의 노래>의 제목과 소재는 레드 제플린의 노래에서 우연하게 따온 것으로, 바이킹의 정복활동이라는 역사적 배경과 소설과는 특별한 관계는 없습니다. 주제에 있어서는 써 놓은 지가 벌써 사년이나 되어서,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쓰게 되었는지는 저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광기와 예술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보자면,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훌륭한 예술가란 무릇 광기를 지니고 있어야 하지만, 진짜로 미쳐서는 곤란하다는 것 입니다. 모범이 될 만한 예로는 피카소와 살바도르 달리가 있으며, 경계해야할 비극적인 예로는 빈센트 반 고흐가 있습니다.  반 고흐는 미쳤기 때문에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단지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미친 척 했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다만 고흐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사정을 잊어버리게 되었고, 결국 광기에 완전히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반면 피카소의 경우는 끝까지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았습니다. 

광기라는 것은 사회와의 단절을 의미하며, 사회적 유산의 공유를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이는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선천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고, 또한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의식적으로 광기를 내보이는 경우는 매우 예외적인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어색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으로 사회적 유산을 모방하고 공유화하는 사회화 작업이야말로 수고스럽고 에너지가 많이 소비되는 일입니다.

결코 쉽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택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광기와 유사광기의 본질적 차이는 두고 싶지 않으며, 본질이라는 말처럼 애매한 말도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람과 평범하게 행동하는 사람과의 차이 역시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전문은 한대신문 홈페이지(www.hynews.ac.kr) '한대신문 이벤트' 에 게재

소설부문심사평
일상의 억압 탐사과정의 문학적 표현

서경석 <인문대·국문> 교수

투고된 여러 편의 작품들을 흥미 있게 읽었습니다. 정말 즐거웠습니다. 눈에 들어온 작품들은 [내 이름은 카인입니다], [잿빛 담장], [이방인의 노래], [굳빠이 조르바], [열대어를 위한 시간].
하나 같이 일상의 공복감이나 정형화된 삶에서 느끼는 억압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을 탐사하는 과정이나 그 곳에서 벗어나는 길에 대한 나름의 인식론을 올바른 문장으로 잘 표현했는가 하는 점이 심사의 초점일 터. 
먼저 [내 이름은 카인입니다]. 이 작품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즉 성경을 원용한 실험적인 작품입니다. 쌍둥이 동생을 태어나기도 전에 뱃속에서 죽였다는 한 사내가 의사에게 상담을 청하고 있습니다.

 죽은 동생의 영혼까지를 마음속에 지닌 이 사내란 정신병자이지만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자기 속의 또 다른 자기를 밖으로 내뱉고 있는 형국이니까. 그렇게 보면 이것은 우리에게 낯익은 분열된 주체의 이야기나 억압된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실험적이라 했지만 실상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잿빛 담장]은 이야기를 해대는 힘이 좋습니다. 가작으로 뽑았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으며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이야기하려는 필자의 과욕이 자꾸 눈에 거슬립니다. 문학이란 말을 아끼며 많은 의미를 담아내야하는 것 아닙니까. 문학어의 특징이지요. 이 작품에는 아주 피곤한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현실의 피곤함을 묘사하는 데 너무 많은 지면을 허비합니다. 어머니, 대학생활, 교생실습에서의 교사들의 모습까지. 차라리 그 피곤의 원인을 단도직입적으로 찾아보았으면 어땠을까. 일그러진 가족내력과 가난이 피곤한 삶의 원인으로 등장합니다. 이런 주제는 우리 문학에서 너무도 자주 나오긴 하지만 학생이 쓴 이 글에서는 이러한 잿빛 담장을 넘어서는 방법을 어떻게 제시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병증을 오래 진단하다가 처방을 놓쳐버렸지요. 

[그리스인 조르바]는 대학생다운 작품입니다. 이 말은 다른 뜻이 아니라 모든 글은 ‘읽고 쓰는’ 글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책을 읽고 그 책 마당을 놀이터로 하여 자기 생각을 뛰놀게 하는 일은 롤랑 바르트를 들지 않더라도 현대적 글쓰기의 전형이지요. 상호텍스트성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갑갑한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주인공은 자유인 조르바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독서과정 자체이기도 하지요. 그를 읽으며 나의 고민을 읽는 일, 이것은 쓸 데 없는 망상에 빠짐없이 공부하는 학생이 할 수 있는 최대치라 생각합니다. 가작으로 뽑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고언을 하자면 왜 조르바일까 하는 생각. 자유인 조르바는 우리에게는 자유의 극단적 추상입니다. 그것과 우리네 삶의 엄청난 차이는 현실적인 과격함을 강요하거나 좌절을 부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변에서 대화상대를 찾아보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열대어를 위한 시간]에서 저는 제도에서 벗어나는 안목이 아름다운 어항 속의 열대어를 매개로 열리길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피츠제럴드의 갯츠비의 흔적은 없고 강도하의 만화 갯츠비가 모방될 따름이었지요. 그런 상상력이야말로 제도의 감옥인 ‘어항’에서 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스스로 빠져드는 것은 아닌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혹은 “나는 내 인생을 간다”란 지배이데올로기가 자기의 순수성을 위장하기 위해 만들어낸, 전형적인 체제 재생산 담론의 일부인 것을 필자는 의식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방인의 노래]는 흥미롭습니다. 잿빛 일상에서 벗어나 있는 세계, 카인이 억압하고 있는 또 다른 자아가 문명에 대한 불만을 여지없이 폭로하는 세계란 어떤 것일까. 무협지나 폭력 게임의 상상력 속에서 이를 드러내 보면 어떠할까. 이 작품은 이런 상상력의 난장입니다. 특히 문장의 호흡이나 결을 짜낸 솜씨가 돋보였습니다. 우수작으로 뽑았습니다.

이렇게 선별해놓긴 했지만 여러 학생들이 작품 속에서 보여주었던 어떤 ‘고투’가 계속 뇌리에 남아있습니다. 그 진지함을 높이 사면서 투고한 학생들 모두 계속 정진하시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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