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첫 10년의 문화 아이콘, 바이러스
21세기 첫 10년의 문화 아이콘, 바이러스
  • 한양대학보
  • 승인 2009.12.30
  • 호수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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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복<국문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최근에 내가 편집위원으로 있는 문화 저널 「쿨투라」 겨울호에서 21세기 첫 10년의 문화 아이콘을 선정해 발표했다. 21세기 첫 10년 동안 우리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가시적 혹은 잠재적인 차원의 영향력을 행사해온 점을 고려해 선정한 문화 아이콘들은 바이러스, 생태, 인권, 융합이었다. 사실 이 네 아이콘들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바이러스에 특히 주목했다. 우선 이 단어들에서 우리가 가장 강하게 환기 받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다.

신종플루처럼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는 매체를 통해 표현된 텍스트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다. 가령 에볼라바이러스를 소재로 삼고 있는 볼프강 페터젠감독의 「아웃브레이크」, 바이러스에 의한 인류의 위기를 다루고 있는 테리 길리암 감독의  「12 몽키즈」 등에서 그리고 있는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신종 바이러스가 1967년 이후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는 여러 정황은 실제로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신종 바이러스와 변종 바이러스의 확산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바이러스의 확산에 대한 과도한 공포로 인해 우리가 정작 놓치고 있는 중요한 진실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보여주고 있는 과민 반응은 바이러스 자체를 낯설고 공포스러운 괴물과 같은 대상으로 간주해 그것을 영원히 인간으로부터 추방하거나 소멸시켜버려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공포심과 이기심이 낳은 잘못된 생각이다.

바이러스는 다른 생물의 세포 안에 들어가야만 비로소 생존할 수 있는 아주 기묘한 생명체다. 이렇게 다른 생명체의 몸을 빌리는 것은 바이러스가 스스로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만들거나 물질의 대사를 위한 어떤 도구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는 오로지 숙주세포에 침투해 들어가 그곳의 여러 도구를 활용해 자신을 복제하며 증식시킨다. 생물로 보기에는 현격히 자격 미달이지만 일단 숙주세포만 있으면 자신과 같은 바이러스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무생물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인간을 포함해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그것을 숙주로 만들어 버리는 특성을 지닌 바이러스는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금까지 공생해온 것이 사실이며,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존재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 때문에 그것을 마치 낯설고 공포스러운 괴물로 인식해 제거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바이러스와 인간 사이의 전쟁은 이미 시작된 지 오래며, 그 싸움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살벌한 힘겨루기다. 오히려 다양한 신종과 변종으로 몸 바꾸기를 거듭하면서 공격해 들어오는 바이러스에 인간의 저항은 이렇다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 인간이 바이러스에 대한 적절한 저항과 동시에 그것과의 공생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바이러스와의 공생이라는 말이 낯설고 소름 돋는 일이지만 지금까지 인간은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인간의 몸을 숙주로 해 살아왔지만 그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생명체다. 바이러스도 하나의 생명체라는 인식을 가질 때 공생의 길이 드러나며, 그것을 부정하고 배제해 버릴 때 공멸이라는 끔찍한 일이 발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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