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이 먼저다
소통이 먼저다
  • 한양대학보
  • 승인 2009.11.15
  • 호수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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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 회원들에게 알림. 오늘 저녁 6시까지 모일 것. 칼’ 언젠가 강의실 칠판 오른쪽에 적힌 위와 같은 문구를 봤다. 보기에 따라서는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데 그 구절이 자꾸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칼이라니. 공고자나 회장의 별명일까’ ‘반드시, 정확하게’ 시간을 지키라는 강력한 뜻을 나타낸 것일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마음이 씁쓸해졌다. 자꾸 거칠어지고 과격해지는 요즘 젊은이들의 마음과 언어 행태의 한 단면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 표현에 위협적 의미가 깔려 있음을 생각하면 온몸이 다 오싹해진다.

우리 사회는 지금 입에 담기도 끔찍한 폭력과 패륜이 횡행한다. 그런 사회를 반영하듯 텔레비전에서는 온종일 막가는 드라마가 쏟아진다. 어디를 가든 상스럽고 폭력적인 언어가 난무할 수밖에 없다. 어디 그뿐인가.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외국어가 남발된다. 이런 현상을 보면 우리말이 중국과 달라서 소통에 불편을 느끼는 백성들이 많음을 안타깝게 여겨 새로 훈민정음을 만드신 세종대왕의 높은 뜻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해 후손으로서 부끄럽기만 하다.

어느 날 지하철역에서 서울시 홍보문구를 봤다. ‘120 다산콜센터’에 전화해 ‘서울형 데이케어센터’를 소개받았다는 내용이다. ‘데이케어센터’를 이용할 대상이 주로 노인임을 감안하면 이름을 꼭 그렇게 영어로 지어야 할까. 하기야 최근 세종로에  들어선 세종대왕 동상 바로 앞에 만든 꽃밭의 이름표를 ‘Flower Carpet'이라고 영어로만 써 붙여놨으니 그 정도는 이해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방식이 반드시 세계화로 나아가는 길만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말을 앞세우고 외국어를 함께 쓰면 우리 자긍심도 살리고 외국인들도 이해하게 하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 텐데 왜 그런 식으로 영혼이 없는 짓을 골라 하는지 안타깝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한문을 써야 문자께나 쓰는 유식한 사람으로 알아주던 조선시대의 왜곡된 언어관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마치 외국어를 섞어 쓰면 유식한 듯, 외국어로 이름을 지으면 고급스러워지는 듯 착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영락없이 그렇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긴 외국어로 된 아파트 이름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시어머니 못 찾아오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떠돌 지경이다. 사실 웃어넘길 일이 아니라  소통을 가로막고 단절을 자청하는 언어 행태로 각박하고 비정한 현대인들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언어의 첫째 기능은 소통이다. 소통되지 못하는 언어는 소리나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근본적인 언어관을 망각해 소홀히 하고 우리말의 자존심을 지키지 않으면 머지않아 큰 재앙이 닥쳐올 것이다. 목적과 수단을 분별하지 못하는 가치관은 오직 서로를 단절과 갈등으로 내몰 뿐이다. 영어의 위상을 드높인 셰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고 선언한 영국인의 모국어에 대한 자긍심이  지방언어에 불과했던 영어를 오늘날과 같은 막강한 위력을 갖게 만든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이 달라져도 모국어에 대한 사랑마저 달라질 수 없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심성이 각박해지고 피폐해지는 오늘날이야말로 우리말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잘 가려 쓰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청된다. 고운 언어에 고운 마음이 깃들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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