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오늘이 된「Yesterday」
영원한 오늘이 된「Yesterday」
  • 서정훈 기자, 안원경 기자
  • 승인 2009.11.14
  • 호수 13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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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로 불리는 그들, Beatles를 조명하다


부스스한 머리에 양복을 갖춰 입은 4명의 영국 청년이 거리의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서로에게 무심한 듯 앞만 보고 걸어가는 이들은 바로 1963년 데뷔해 전세계 음악 시장을 점령한 ‘비틀즈’다.
우리들의 부모님들이 태어나던 때쯤 데뷔한 비틀즈는 4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전설로 평가받고 있다. 6ㆍ70년대의 열풍을 넘어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비틀즈, 그들은 어떻게 전설이 될 수 있었을까.

비틀즈, 그들이 남긴 업적
1964년 2월 7일,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쇼 프로그램 「뉴욕 시티 에드 서리번 쇼」에 귀를 덮는 긴 머리를 흔들며 ‘I want to hold your hand’를 외치는 네 명의 영국 청년이 나타났다. 포마드에 듬뿍 적신 엘비스 프레슬리의 헤어스타일이 유행했던 때 더벅머리를 하고 몸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는 네 명의 청년 ‘비틀즈’에 미국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이들의 비트에 맞춰 눈물을 흘리며 춤을 주는 미국 젊은이들의 모습이 방영된 「뉴욕 시티 에드 서리번 쇼」는 약 7300만 명이 시청했는데, 이는 미국  TV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영국 출신 밴드 비틀즈의 세계 정복이 시작된 것이다.

1964년부터 1966년까지 매년 진행된 비틀즈의 전 세계 순회공연은 방문하는 도시마다 엄청난 인파를 몰고와 도시가 마비될 정도였다. 비틀즈 멤버들의 손을 잡으면 몸이 회복될 것이라 믿은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비틀즈의 대기실을 방문하기도 했고, 일본 공연 때는 도쿄 올림픽 보다 더 많은 수의 경찰이 비틀즈를 경호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비틀즈를 보고 기절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들의 주변엔 항상 경찰차와 구급차가 대기해야했다. 또 비틀즈가 등장한 영화 「The hard day's Night」가 1964년 개봉하자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은 극장에서 마치 콘서트장에 온 듯한 함성을 내질렀다.

비틀즈는 현재 20여개의 빌보드 차트 1위곡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1964년 4월 4일에는 비틀즈의 노래가 빌보드 차트 1위부터 5위까지 모두를 석권하기도 했다. ‘비틀즈 매니아’ 카페를 운영하는 서강석 씨는 “현재까지의 비틀즈의 앨범 판매량을 정확하게 집계할 수 없지만 2000년 이후 소비된 비틀즈 앨범만 해도 전체 앨범 판매 순위 2위를 기록한다”며 “이것은 그룹이 해체된 지 40년이 지났어도 지속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60년대 시대정신을 대변한 비틀즈
당시 젊은이들에게 비틀즈는 가수 이상이었다. 사람들은 비틀즈가 입은 옷은 물론이고 그들의 행동까지 그들의 모든 것을 따라 했다. 특히 비틀즈가 처음 선보인 헤어스타일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Mop-top 스타일’이라고 불리기도 한 파격적인 헤어스타일은 눈썹까지 내려오는 앞머리가 특징이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군인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고 귀를 대부분 드러낸 미국 젊은이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비틀즈가 성공적으로 미국에 진출하고 난 뒤  뉴욕의 잡지 「헤럴드 뷴」은 비틀즈의 성공 이유에 대해 “75%의 홍보, 5%의 노래, 20%의 헤어스타일 덕분”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이지연<생활대ㆍ의류학전공> 교수는 “비틀즈가 데뷔 초기에 입었던 깔끔하고 몸에 딱 맞는 양복과 뾰족한 구두는 상류층을 표방한 것”이라며 “비틀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패션을 따라하다 바지통이 너무 좁아 길을 걷던 도중 바지가 찢어지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했다.

60년대 저항정신을 대표하는 ‘히피족’은 비틀즈를 자신의 대변자로 여겼다. 전통적 기독교 주의를 거부하고 산업사회로부터의 일탈과 자연으로의 복귀를 추구하는 히피족에게 가장 대표적인 이념은 ‘사랑’이었다.  서 씨는 “비틀즈는 「All you need is Love」에서 오직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는데 이 메시지는
히피족의 대표적 정신을 표현한 것”이라며 “이후 히피족이 비틀즈를 자신들의 편이라 여기게 되면서 비틀즈와 히피족은 상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비틀즈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기독교와 서양철학의 한계를 인정하고 문제 해결 방법을 동양의 가치관에서 찾기 시작했다. 1968년 비틀즈는 한 달 동안 인도를 방문해 그곳에서 명상을 배웠다. 이를 통해 비틀즈는 서구적 가치관에만 기울어 있던 서양의 젊은이들에게 동양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서 씨는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서양 문화권에서 인도는 물론 동양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며 “비틀즈는 혼란스러웠던 60년대에 노래를 통해 낙관적인 미래는 물론 진보정신과 이상을 전한 뮤지션이다”라고 밝혔다.

지금도 여전한 비틀즈의 영향력
비틀즈의 영향력은 6ㆍ70년대를 넘어 90년대, 현재까지 그 힘을 미치고 있다. 특히 영국 본토에서는 비틀즈의 최고 전성기인 1964년부터 1966년까지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계속됐는데 이 노력 중 하나로 탄생한 것이 바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브릿팝(Brit Pop)’이다.

브릿팝은 영국에서 처음 탄생한 복고적 분위기의 음악을 지칭한다. 브릿팝은 비틀즈 외에도 롤 링스톤즈, 데이비드 보위 등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음악이지만 음악적 측면에서는 비틀즈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 이는 브릿팝이 기존의 록 음악과 달리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멜로디 위주로 이뤄진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브릿팝의 대표적 밴드 중 특히 비틀즈의 영향을 크게 받은 밴드로는 블러, 라디오헤드, 콜드플레이, 더 필링 그리고 오아시스가 있다. 특히 오아시스는 ‘제2의 비틀즈’라고 불릴 정도로 비틀즈와 음악 스타일이 비슷하다. 때문에 오아시스는 비틀즈의 음악을 표절했다는 의혹에 휩싸이기도 했는데 오아시스는 자신들의 표절 사실을 당당하게 인정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오아시스의 ‘표절’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표절과 차이가 있다. 팝 칼럼니스트 강문 씨는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우리나라 가수의 표절과는 달리 오아시스는 비틀즈의 노래를 가져와 자신들의 스타일에 맞게 새롭게 재창조해냈다”고 평했다.

특히 자신들의 곡을 표절한 오아시스의 노래를 들은 비틀즈의 멤버 폴 매카트니는 “오아시스는 우리의 노래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며 “앞으로 오아시스가 우리 음악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오아시스는 비틀즈의 음악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잘 표현해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브릿팝을 하나의 음악장르로 인정하는 것의 여부에 대해선 논란이 많은 상태다. 브릿팝 밴드로 분류되는 밴드 중 일부는 자신들의 음악을 브릿팝으로 분류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기도 한다. 이에 대해 강 씨는 “아직까지 브릿팝을 하나의 음악 장르로 인정하기보다 영국 음악의 세계적 대중화를 위한 음악적 운동으로 정의하거나 얼터너티브 록의 한 장르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며 “하지만 1990년대 새롭게 등장한 브릿팝을 하나의 음악적 운동이나, 록 장르의 일부로 분류하기에는 지나치게 대중화된 면도 있다”고 전했다.

비틀즈가 활동한 약 8년의 시간은 어찌 보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과 그들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40여년의 세월 동안 우리 주변을 지키고 있다.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비틀즈는 답답한 세상에서 벗어나고픈 20대들을 향해 이렇게 외칠 것이다. ‘Let it be!'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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