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밝혀지지 않은 해례본의 진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해례본의 진실
  • 문종효 기자
  • 승인 2009.10.10
  • 호수 13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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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과 다른 다양한 견해 선보여
최근 「훈민정음 해례본」 (이하 해례본)은 다시금 논의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해례본의 발견 및 보존 방법에 대해 새로운 역사적 발견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 년간 해례본 원본은 △왜 책의 겉표지가 찢겨진 채 발견됐는지 △서적의 뒷면에 빼곡히 적힌 낙서는 무엇이며 △언제 작성됐는지 △어떤 경로로 간송미술관에 전해졌는지에 대해 수많은 추측 및 가설이 난무했다. 기존의 가장 유력했던 설은 여진정벌에 공을 세운 진성 이 씨의 선조에게 세종대왕이 상으로 하사했다는 것이다. 연산군의 언문탄압 때는 제목이 써있는 첫 장을 뜯고 뒷면에 전혀 다른 내용의 글을 써서 수난을 피했다.

이후 진성 이 씨 이한걸 선생의 가보로 전해온 이 책은 1940년에 고미술품 수집에 심혈을 기울이던 간송 전형필 선생에게 인도돼 간송 미술관으로 이전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몇몇 학자가 이 사실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박영진<동래여고ㆍ한문> 교사는 ‘한글학회’ 소식지 「한글새소식」을 통해 “공을 세워 해례본 원본을 받았다면 그 기록이 문헌이나 실록에 명시돼있어야 하는데 그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원본이 하사되는데 기록에는 아무런 언급조차 돼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폭군이었던 연산군의 언문탄압으로 인해 찢겨졌다고 알려진 첫 장이 한자로 쓰여져 있었다는 점도 어색한 대목”이라며 “한자로 된 표지는 당시 탄압의 대상이 아니었다”고 전했다. 이밖에도 많은 의문점들이 학자들에 의해 제기됐다. 

김주원<서울대ㆍ언어학과> 교수는 지난 2005년에 발표한 그의 논문에서 “해례본 뒷면에 적힌 낙서는 그 내용이 중국 고대사를 요약한 사서인 「십구사략」을 쉽게 풀어쓴 언해이며 쓰여진 시기는 17세기와 18세기 사이”라고 밝혔다. 또 “해례본의 첫 장이 찢겨나간 시기는 18세기 이후의 일이며 연산군의 언문탄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연구는 해례본의 뒷면에 빼곡히 써있는 글자를 해독하면서 시작됐다. 뒷면 글씨가 적힌 사진을 얻게 된 김 교수는 컴퓨터 작업을 통해 글의 내용이 「십구사략언해」 1권의 내용인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글에 드러난 각종 문법들을 비교해 이 낙서가 쓰여진 시기가 연산군의 언문탄압 때가 아닌 18세기 전후인 것을 밝혀냈다.

이밖에 박종덕<국립국어원> 박사는 자신의 논문에서 “해례본이 광산 김 씨 긍구당 가문의 가보이며 그의 사위에 의해 외부로 유출됐다”며 “사위 이용준이 사리사욕을 위해 종가의 서적을 빼다 팔았다”고 주장했다. 또 뒷면의 낙서에 대한 새로운 의견도 제시해 관심을 끌었다.

박 박사는 뒷면의 낙서가 긍구당 종가의 재산 상속을 기록한 문서인 분재기의 내용과 일치한다고 언급했다. 또 해례본 첫장이 찢겨진 이유가 긍구당 가가 자기 가문의 서적 앞표지에 찍는 장서인을 감추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이처럼 해례본을 둘러싼 다양한 견해는 베일에 쌓여있는 훈민정음의 이동경로를 한 꺼풀씩 벗겨내고 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문자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 수없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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