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만 모여도 동문회가 돼요”
“가족만 모여도 동문회가 돼요”
  • 안원경 기자
  • 승인 2009.09.06
  • 호수 1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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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한 가족이야기

“우리 가족은 한양대 가족입니다” 안산배움터 ‘현실경제의 이해’ 교양 강의 시간 학생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30여년 세월동안 우리학교와 함께한 임덕호<경상대ㆍ경제학부> 교수는 삼형제는 물론 조카들 까지 우리학교 출신인 ‘한양대 가족’의 일원이다. 임 교수 가족의 장남인 임종호<상학과 66> 동문을 시작으로 집안의 막내인 김은혜<체육학과 박사 1기> 씨 까지 우리학교의 60년대부터 2000년대를 함께했다. 임 교수의 말에서는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드러나고, 임 교수의 눈에서는 가족에 대한 따뜻한 정이 느껴진다. 평생을 우리학교와 함께한 임 교수 가족이 모이기만 해도 동문회가 된다는 ‘한양대 가족’ 이야기를 들어봤다.   

입학 전 부터 이미 한양인
임 교수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 우리학교 도시공학과에 재학 중 이던 둘째 형과 함께 왕십리 하숙집에서 같이 살았다고 한다. 하숙집 이웃 중에는 우리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구씨 아저씨도 있었다. 첫 월급을 받은 날, 구씨 아저씨는 첫 월급을 타지에 올라와 고생하는 임 교수 형제에게 술과 고기를 사주는데 쓰면서 타지 생활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이를 통해 임 교수는 우리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이 때 우리학교의 이념인 ‘사랑의 실천’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과 삶이 임 교수를 한양대로 이끌었지만 막상 우리학교에 입학한고 난 뒤 집안 분위기가 마냥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제가 우리학교 경제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어요.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됐다며 좋아했던 형들과는 달리 아버지의 반응은 냉담했어요. 합격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저를 보시고 한 첫 마디가 ‘너마저 한양대냐?’ 였어요”
       
한양대, 너는 내 운명
임 교수는 미국 유학 당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임 교수의 스승이자 당시 상경대 학과장 교수였던 손정식 교수가 임 교수의 됨됨이를 보고 지금의 아내를 소개시켜준 것이다. 힘든 유학생활도 아내가 있어서 가능했다.

당시 대부분 한국 유학생들이 그랬듯 열악했던 국내의 경제상황과 맞물려 미국 유학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경제적인 궁핍함은 계속되었고 자녀들 양육비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기에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했고, 아내 역시 함께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이어나가야 했다.

“제 인생에 가장 자랑스러운 일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온 것과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이에요.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로서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도 한양대가 있어서 가능했죠. 제 아내를 만나게 해주신 손정식 교수님께 평생 감사하며 살고 있어요”

임 교수는 아내와 힘겹게 보낸 4년간의 유학 생활을 거치고 바로 모교 강단에 섰다. 임 교수는 학생들에게 ‘미국박사 1호’ 선배이자 친구 같은 교수였다. 2년간 강사 생활을 마치고 임 교수에게 주변 대학에서 많은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임 교수는 우리학교를 떠날 수 없었다. 임 교수를 교수로서 선배로서 따르는 학생들과 헤어질 수 없었다. 또 2년 간 강사 생활은 자만해질 수 있는 임 교수에게 교수의 자세를 가르쳐줬고, 교수라는 직업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줬다. 이후 임 교수는 23년을 우리학교와 함께 하고 있다.

“첫사랑을 평생 못 잊듯 첫 제자는 영원히 잊지 못해요. 첫 강의가 우리학교였고 첫 제자가 제 후배들이었죠. 처음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학교를 떠나지 못하고 있어요”

긴 인생, 짧은 6년
임 교수는 대학을 20살이 훨씬 넘어서 입학했다. 유학도 다른 학생들 보다 늦게 다녀왔다. 군대를 갔다 오니 동기들이 6살 어린 동생들이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나이를 떠나 마음을 열고 동기들에게 다가갔고, 동기들과 깊은 유대를 나눌 수 있었다.

임 교수도 수업시간에 종종 나이 많은 학생들을 보곤 한다. 임 교수는 자신이 대학을 다닐 당시와 처지가 비슷한 학생들을 보면 동질감을 느낀다 했다.

“학생들 중에도 재수, 삼수해서 온 학생들은 스스로 벽을 쌓고 자기 자신을 가두는 사람들이 있어요. 다른 사람들보다 늦춰졌다는 생각에 조바심 내고 마련이에요. 스스로 쌓은 벽에서 나오세요. 주변에 먼저 다가가는 게 중요해요. 좀 늦으면 어때요? 너무 서두르려고도 하지 마세요. 다른 학생들이 겪지 못했던 힘들지만 소중한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인생을 길게 생각하고 의연하게 앞을 보고 걸어가세요” 

우연한 입학, 영원한 인연
임동호<상학과 66> 동문은 임 교수의 큰 형으로 제일 먼저 우리학교와 인연을 맺었다. 임 동문이 대학에 입학할 당시, 대학은 전기와 후기로 나눠 지원하는 구조였다. 임 동문은 당시 전기에서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해 뜻이 맞는 친구와 후기에 우리학교를 지원했다고 한다. 이런 인연이 동생들에게, 세대를 뛰어넘어 다음 세대에게도 이어진 것이다.

“제가 학교 다닐 때인 60년대 후반 캠퍼스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지금은 시골 고등학교에만 있을 법한 일들이 우리학교 교정에서 벌어졌어요. 남학생들은 4년 내내 교복을 착용하거나 미군 작업복을 염색해서 입고 다녔어요. 여학생들은 양장을 입고 하이힐은 신지 못했죠. 고인이 되신 당시 김연준 총장이 직접 교수들과 교문 앞에서 복장검사를 하고 다녔죠. 아직도 그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요”

아들에게 이어진 한양대
부모로서 자식이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학과에 가길 바랐지만 자식 일은 맘대로 되지 않았다. 아들이 재수를 했기에  더 이상 욕심을 부릴 수 없었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종합대학이 되면서 명문대학으로 자리 잡아가는 우리학교를 보며 아들의 진로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임 동문도 한양대를 졸업한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전한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각박해진 젊은이들이 안타까울 때가 있다며 우리학교 후배들은 ‘사랑의 실천’이라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마음이 넉넉한 후배들이 되기를 바란다고.     

“부모 욕심으로는 아들이 더 좋은 대학을 가길 바랐습니다. 아이가 어렸을 적부터 공부를 곧 잘했기 때문에 기대가 많았죠. 하지만 대를 이어 동문이 되는 것도 싶지 않은 일인데 이것도 운명이 아닐까요?”

자연스런 한양대 입학
임동락<경제학부 95> 동문의 우리학교 입학은 한양 가족의 선봉인 작은 아버지 임덕호 교수의 권유로 인해 이뤄졌다. 임 동문에게 작은 아버지를 교수로 둔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면서도 심적으로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작은 아버지들이 그러했듯, ‘한양대가 우리가족의 운명이었지 않았을까’라는 아버지의 생각처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우리학교에 들어왔다.

“처음에 작은 아버지께서 한양대에 오라며 적극 추천해주셨어요. 직접적으로 도와줄 수는 없지만 심적으로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하셨죠”      

엄격한 교수, 따뜻한 작은 아버지
임 교수는 임 동문의 작은 아버지이자 교수다. 임 교수의 권유로 들어온 캠퍼스 생활은 그리 녹록치 못했다. 같은 핏줄이라는 이유로 돌아오는 특혜는 없었다. 오히려 낮은 학점과 호된 가르침 뿐. 임 동문은 밤새서 공부를 하다가 잠깐 잠이 들어 임 교수 시험 시간에 30분 정도 늦게 들어갔다 된통 혼났다며 에피소드를 풀어놨다. 교수연구실이 이어진 복도에서 임 교수는 학생의 본분을 지키지 못했다며 복도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임 동문을 엄하게 꾸짖었다. 평소 유쾌하시고, 젊은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시는 작은 아버지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고

 “혼내실 때는 정말 엄하게 혼내셨어요. 평소에는 경제적인 마인드가 있다면서 칭찬도 종종 해주실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제 학점은 오히려 다른 학생 보다 인색하게 주셨어요. 조카라고 봐주시는 건 없더군요. 그래도 마음속으론 특별하게 생각해주셨겠죠”

영원히 이어질 한양대 가족
임 동문은 현재 우리학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증권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직원 중에 우리 학교 출신이 많기 때문에 ‘또 다른 한양대 가족’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임 동문은 영업팀과 인사팀을 거쳐 리서치팀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임 동문은 애널리스트라는 직업을 역동적이고 끊임 없이 변화하며 창조적인 일이라고 소개했다. 또 좋은 애널리스트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 배운다는 자세로 일해야 한다는 것.

“지금 저도 배운다는 자세로 일하고 있어요. 제가 대학 시절 한양대에서 배운 성실함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밑바탕이 돼주고 있어요” 

임 동문에게 우리학교는 자부심이고 가족을 이어주는 끈이다. 또한 집안에 우리학교 출신이 많다는 것이 자랑 아닌 자랑이 되었지만 이런 가풍을 거스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임 동문은 선배로써 후배들에게 한마디 전했다.

“대학 4년은 인생의 초석을 다지는 기반입니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계획하고 치열해야 합니다. 대학 다니는 동안 인생에 대한 설계를 미리 하고 젊은 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노력했으면 해요”

나의 무용, 나의 이상, 한양
김은혜<체육학과 박사 1기> 씨는 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막내 외삼촌이 우리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외삼촌 모두가 우리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까지는 몰랐다. 그래서 우리학교에 진학할 때 외삼촌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한다.

김 씨가 우리학교로 진로를 결정하게된 것은 주변의 권유가 아닌 그 자체가 목표였단다. 김 씨는 예고에서 무용을 공부하며 김복희<예술학부ㆍ무용학전공> 교수가 이끈 ‘김복희 무용단’의 공연을 많이 접했다. ‘김복희 교수님과 같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학교가 목표 대학이 되었다고. 그리고 그 결국 목표를 이뤘다.

“부모님께서 무용하는 것에 대해 많이 반대를 했지만 막내 외삼촌만은 네가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라며 많은 격려를 해주시고 부모님도 설득해주셨어요. 다른 식구들도 제가 한양대에 올 줄 몰랐어요. 저도 한양대에 합격했다고 하니까 모두들 깜짝 놀라셨죠”

마음 한 쪽의 불편함, 교수 외삼촌
김 씨가 학부생 3학년 때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는 우리학교로부터 많은 조화가 와 있었다. 김 씨는 ‘내가 학교에서 유명한 사람도 아닌데 왜 이렇게 조화가 와있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우리 친척 중에 한양대에 연관 있으신 분이 계시냐”고 물어보니 삼형제가 모두 한양대 출신이라는 대답을 들었단다. 그 때까지 막내 외삼촌인 임 교수만 우리학교를 졸업하신 걸로 알고 있었다고.

“외삼촌들이 모두 한양대에 나오셨다는 것을 한참 뒤에나 알았어요. 저는 설마 ‘제 앞으로 이렇게 많은 조화가 온건가’라고 고개를 갸우뚱했죠”

김 씨는 처음 학교에 입학한 뒤 외삼촌이 교수로 계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학교를 수시로 들어온 만큼 ‘외삼촌이 학교에 계셔서 들어오기 쉬웠던 것 아니냐’라는 왜곡된 시선이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김 씨의 노력을 통해 얻은 자리가 삐딱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좋지 않게 비춰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그래서 김 씨는 그 사실을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석사과정을 마칠 때쯤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았을 때 사람들은 대부분 “뭣 하러 그런 걸 숨겼냐”며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외삼촌이 학교에 교수로 계시다는 것이 심적으로 안정이 되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하기도 했단다.  

“하지만 이제 제 실력으로 여기까지 왔기에 외삼촌이 우리학교 교수님으로 계시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요”

한양대에 뼈를 묻으리
김 씨는 우리학교 무용학과를 나와, 무용학과 석사과정을 마치고, 체육학과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김 씨는 박사 과정 인터뷰 중에 “무용하던 사람이 왜 이제 와서 체육학을 공부하려 하냐”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김 씨는 우리학교에서 계속 공부하고 싶었고, 석사과정 중 조교를 하면서 쌓았던 신뢰로 박사과정까지 이어갈 수 있었다.  “전 그래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어요. 대학도 한양대를 나왔고, 석사과정도 한양대에서 지냈으니 박사과정도 한양대에서 하겠다고, 뼈를 묻겠다고 했죠”

지금 박사 과정을 지내고 있는 김 씨는 자신도 자기가 여기까지 올지는 몰랐단다. 공부하면 할수록 자신에 대한 확신이 생겼고 조금씩 욕심을 내다보니 점점 목표가 뚜렷해졌다고 전한다. 김 씨는 항상 후배들에게 “나도 하는데 너희가 못하겠니?”라는 말을 하며 희망을 주고 있다.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도 자신의 가능성을 믿으면 할 수 있어요. 자신도 모르는 자기 자신을 믿으세요. 사람은 자신을 믿는 만큼 목표를 이룰 수 있거든요”   
사진 이유나ㆍ최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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