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100년을 위해 반세기를 되새기다
더 나은 100년을 위해 반세기를 되새기다
  • 권경하기자, 문종효 기자, 이다영 기자
  • 승인 2009.09.06
  • 호수 1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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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요구에 따라 물결친 한대신문 50년사

우리학교와 본지의 자리매김 5ㆍ60년대
(제1호~제256호)

지난 1959년 5월 11일, ‘漢陽大學報’가 그 빛나는 아침을 열었다. 당시 4면으로 탄생한 본지는 주로 종합대학으로 거듭난 교정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제목을 비롯한 대부분의 어휘가 한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60년대 중반까지 쓰인 국한문 혼용체는 당시의 한문 중시 풍조를 짐작케 한다.

지난 1963년 4월 11일은 우리나라 대학언론의 역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당시 발행된 제82호는 ‘한양대학보’로서 대한민국 신문 최초로 가로쓰기를 도입했다.

이는 1980년대 일간지들이 처음 가로쓰기를 시도한 데 비해 상당히 획기적이고 창조적인 시도였다. 또한 일본식을 벗어난 편집방식의 독립을 의미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국한문 혼용체였던 본지는 60년대 들어 점차 한글의 비중이 늘다가 제166호(1966)부터는 ‘한대신문’ 제호와 함께 순 한글신문으로 탈바꿈했다. 또 1~2달에 1번 비정기적으로 나오던 신문은 60년대 들어 1달에 1번, 보름에 1번, 열흘에 1번의 과정을 거쳐 1968년부터 방학을 제외하곤 1주에 1번씩 발행됐다. 이는 본지가 지금의 주간 신문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

제162호(1966)부턴 '한대신문 교환권'을 배부해 이를 들고 온 학생들에게만 신문을 배부했고 제193호(1967)에서는 윤전기를 통해 신문을 내며 잉크냄새를 즐기기도 했다.

한편 신문이 창간된 해 3월엔 우리학교가 문리과대학과 정경대학을 신설해 종합대학으로 승격됐다. 또 1967년까지 체대ㆍ음대ㆍ사범대ㆍ의대가 설치돼 현재의 뼈대를 이루는 터전을 다졌다.

이렇듯 5ㆍ60년대 본지는 동아공과학원에서부터 시작된 우리학교가 공과대학으로, 나아가 종합대학으로 약진하기까지의 과도기를 담고 있다. 이때의 학생들은 신문에 대한 참여가 매우 활발해 기고와 소설ㆍ수필 등의 투고가 성황을 이뤘다. 또 60년 4.19운동 관련보도와 64년 대일굴욕외교 반대시위 기사 등은 학생운동의 초석을 다졌던 60년대 학내의 모습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정치ㆍ문화 격동의 시기 70년대
(제257호~제557호)

1970년대 본지는 여전히 4면으로 이뤄졌으며 신년특집호, 100호 단위 기념호, 학술상 특집호에서는 8면이 발행됐다. 또 본지에서 가장 많은 면을 차지한 사건이 생기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헌법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워진다.

우리학교는 지난 1872년 10월 17일 공포된 유신헌법 중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 3항(각 대학은 당분간 휴교함)에 의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고, 휴교된 45일 동안의 학과별 과제가 장장 8면에 걸쳐 소개된 것이다.
본지를 통해 본 70년대는 이처럼 사회적 격동의 시기기도 했지만 문화와 새로운 매체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 또한 요동치던 때였다. 이는 제241호(1970)부터 잘 드러난다. 당시 신문의 마지막 면을 보면 처음으로 연극 평이 쓰여 있다. 이후 영화, 문학, 발레 등에 대한 서평들이 실리기 시작했으며 학생들의 연재소설 또한 다수 수록됐다.

작은 변화들이 모여 제363호(1973)의 마지막 면에는 처음으로 문화부라는 각주가 실렸으며 제381호(1974)의 2,3면에는 각각 기획부와 조사부라는 각주가 등장해 현재 본지의 모습에 한층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제555호(1979)에서는 대학주변에 유흥업소 및 오락실의 증가에 대한 비판성 투고가 등재되기도 했다. 제489호~제500호(1977)에 12회에 걸쳐 연재된 ‘현실에의 재조명 다시 생각해 봅시다’라는 코너에서는 일상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문제들을 심사숙고하고 있다.

이처럼 70년대는 유신정권 아래서도 사회를 향한 학생들의 비판적 시선과 새로운 문화 수용에 대한 열망이 뜨겁게 타오르던 시기였다.

자유를 향한 투쟁 80년대
(제558호~제812호)

1980년대 본지의 지면 수는 4면에서 8면으로 확대됐으며 제700호(1985)의 경우 20면까지 확대 발간됐다. 한편 제612호(1980)에는 “학문의 전당임을 자부하는 대학에서 한자에 대한 올바른 해독만이 날로 증가하는 한문 정보를 보다 확실하게 습득케 하고, 정확한 문자생활을 영위하도록 할 수 있다”는 알림이 있다.

이로써 한글전용체제를 확립하며 사회의 대한 지침 기능을 수행해 왔던 본지는 제613(1982)호부터 전면 국한문 혼용체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제호 또한 ‘漢大新聞’이 됐다.

제562호(1980)에는 3월 15일 현 안산배움터의 시초인 반월분교의 개교소식이 실렸다. 이는 80년대 타 대학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우리학교만의 독자적 발전이었다. 1차 준공만 이뤄졌고 기숙사와 교통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후 총 16면으로 구성된 제761호(1987)에서는 학생의 날을 기념해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학생운동의 논리와 그 특질을 심화시키고 있다. 더불어 언론투쟁 합의사항과 언론자유 쟁취투쟁 일지 등 당시 대학언론을 감시했던 정부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투고글들이 실렸다. 특히 80년대 후반 제737호(1986) 1면에 실린 ‘건국대 연합시위 본교생 48명 구속’, 제773호(1988)의 ‘전 사회적 차원서 군사교육 전면 재검토 돼야’ 등 사회의식이 담긴 기사들이 매일같이 지면을 차지했다. 이는 우리학교가 80년대 깨어있는 학생의식을 주도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면개혁의 과도기 90년대
(제813호~제1057호)


1990년대 본지는 상당한 지면상의 변화를 겪었다. 90년대 초기 ‘漢大新聞’은 8면과 12면이 번갈아 발행됐다. 당시 12면 신문은 특정 주제로 여러 사람이 토론을 하거나 한 사람의 인터뷰가 한 면 전체를 차지하는 등 특집호의 성격이 강했다. 각 지면에 정해진 기사를 쓰는 방식도 이 시기에 생겨났다. 구분이 미약하긴 하지만 제823호(1990)부터 문화면, 사회면 등 고정 지면도 등장했다. 다시 국한문 혼용으로 전환됐던 본지의 문체 또한 제883호(1991)이후 전면 한글화됐다. 

사회ㆍ경제적 문제의식에 입각한 기사가 유난히 많은 때기도 했다. 등록금 투쟁에 관한 기사가 그 대표적 사례다. 이는 10~20%에 달했던 등록금 인상률에 대한 학생들의 반대운동에 본지가 적극적으로 동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밖에도 재벌 해체 운동이나 기업들의 무리한 차입경영, 동성애에 대한 경멸 등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점이나 점차 상업화되고 있는 학교에 대한 고발 등 소재의 범위가 다양해졌다.

또 다른 시기에 비해 저명인사의 기고가 다수 등장했다. 예로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기고를 비롯해 현대ㆍ기아 자동차 그룹 회장 정몽구<공업경영 67> 동문의 축사, 소설가 공지영의 인터뷰, 신영복<성공회대ㆍ사회과학부> 교수의 휘호, 야구선수 박찬호<경영대ㆍ경영학과 92> 동문의 축사 등이 있다.

90년대 본지의 또 다른 특징은 산업화ㆍ근대화에 밀려난 소외계층을 관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급격한 개발로 빈곤층으로 전락한 성북구 주민들이나 열악한 작업환경에 노출돼있는 공장 근로자 등 사회적 약자들은 본지를 통해 목소리를 내곤 했다.

투쟁에서 벗어난 문화신문 2000년대
(제1058호~)

2000년대는 다양한 측면에서 ‘漢大新聞’의 전환기가 됐다. 제1050호(1999) 부터는 지면수가 4차례 8면에 1차례 12면의 형식으로 변화했다. 또 학원소식과 학원취재로 나눠져 있던 취재면이 제1285호(2008) 이후 서울소식과 안산소식으로 개편됐다.

2005년 9월 5일엔 본지의 인터넷 사이트가 개설됐다. 이는 구독률 저하라는 종이신문의 위기에 발맞춰 세부정보나 독자투고 등의 서비스를 강화하려는 취지에서였다.

또 1240호(2007)이후 본지의 제호가 ‘한양대학보’로 변경됐다. 기존의 ‘漢大新聞’이 한글 전용인 본지의 성격과 맞지 않는단 이유에서였다. ‘한양대학보’는 60년대의 형태에서 그대로 따왔다.

또 이전 시기 본지가 정부ㆍ사회의 부당한 처사나 내몰리고 있는 도시빈민층을 주시했다면 2000년대엔 문화적이거나 압축적 경제성장으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가지 현상에 중점을 둔 기사가 많았다. 신용불량자 대책의 일환인 배드뱅크제도에 대해 알아본 제1164호(2004)의 학술면이나 인디음악에 대해 다룬 제1200호(2005) 문화면이 대표적 사례다.

2008년에는 개교 70주년과 본지 창간 50주년을 앞두고 에너지 절약 방안을 강구하는 문화 캠페인 ‘Saving HYU’를 이끌기도 했다. 물론 이때도 등록금 투쟁 등 학생의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은 여전히 지속됐다.

한편 매년 11월 열리는 ‘한양대학보 문예상’ 대회는 약 40년 간 자리를 지켰다. 이는 문학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재능을 발굴하며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본지는 독자와 소통하는 내일을 위해 오늘도 나아가고 있다.    

사진 최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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