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는 ‘최악’에 강해진다
‘최고’는 ‘최악’에 강해진다
  • 한양대학보
  • 승인 2009.05.31
  • 호수 1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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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만<사범대 교육공학과>교수

유영만 <사범대ㆍ교육공학과> 교수


최고는 항상 최고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지 최고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최고는 어떤 결과를 지칭하지 않고 최고가 되기 위한 과정을 지칭한다. 이런 점에서 최고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끊임없이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최고’는 탄생하고 ‘최고’의 명성이 유지된다. ‘최고’는 그래서 '최악'을 친구로 살아간다. ‘최악’이 없다면 ‘최고’는 ‘최하위’로 순식간에 전락한다. ‘최악’이라는 시련과 역경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사람, ‘최고’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이다. ‘최고’가 탄생되는 여정에 언제나 ‘최악’의 시련과 역경이 맞물려 있다. ‘최악’은 ‘최고’가 되기 위해 반드시 경험해야 되는 필수 코스다.

‘최고’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면서도 늘 부족함과 아쉬움을 느낀다. 진정한 ‘최고’는 겸손하다. 겸손은 실력 있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미덕이다. 실력이 없는 사람이 겸손하면 비굴해보이고 아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력이 없는 사람은 겸손할 자격이 없다. 겸손은 ‘최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자세와 태도다. ‘최고’는 언제나 초보자의 마음,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자신이 ‘최고’라고 인정하고 안주할 때 바로 그 지점이 안락사로 가는 지름길임을 잘 안다. ‘최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지존의 경지를 유지하는 유일한 비결, 늘 자신이 처음 출발할 때의 처음의 마음으로 일을 시작한다.

‘최고’는 이런 점에서 미완성 교향곡과 함께 살아간다. 인생은 ‘미완성’의 변주곡이다. ‘미완성’의 변주곡이기에 언제나 ‘완성’될 여지가 남아 있다. ‘완성’될 여지가 남아 있어야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다시 신발 끈을 졸라 맬 수 있다. ‘미완성’은 실패나 결핍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성취로 가는 여정에서 가져야 되는 마음 자세다. ‘미완성’이라고 생각해야 이전과는 다른 노력으로 ‘완성’에 근접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미완성’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초보자의 마음이다. 초보자는 언제나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더 노력해야 될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완성’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이다. ‘미완성’이라고 생각해야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성취를 이뤄냈어도 언제나 초보자의 초심을 잃지 않고 분투노력한다.

‘최고’는 남보다 잘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전보다’ 잘하려고 노력한다. 경쟁은 남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의 경쟁이다. 적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 밖의 적보다 안의 적을 물리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경쟁이다. 경쟁을 통한 성취도 ‘남보다’라는 바깥 기준에 비춰 본 평가보다 전보다라는 안의 기준에 비춰 본 평가가 소중하다. 전보다 잘하려는 분투노력이 전보다 나은 자신으로 발전시키는 동력이다. 남보다 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경쟁이 곧 상쟁이다. 타인을 밟고 일어서야만 내가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남보다 잘하려는 사람은 남의 눈치를 보지만 ‘전보다’ 잘하려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내면이라는 거울에 비춰 반성하고 성찰한다. 전보다 나아지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변모시키기 위한 전혀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남보다 나아지려는 사람이 남보다 나아지면 그것은 곧 경쟁의 종식을 의미한다. 경쟁을 멈추는 것은 실력을 연마하는 노력을 멈추는 것과 다름없다. 실력은 경쟁을 통해서 생긴다. 경쟁력이 곧 실력이라면 경쟁력은 경쟁을 통해서 생긴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경쟁은 바깥에 있는 경쟁자와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의 경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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