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위로가 찬란한 이유
당신의 위로가 찬란한 이유
  • 한양대학보
  • 승인 2009.05.24
  • 호수 1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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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수<국문대ㆍ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오월은 온통 연두다. 연두는 햇빛을 온몸으로 통과시키며 제 빛깔을 만든다. 막힘없고 거침없는 것들은 강한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받아서 제빛과 어울리게 하는 연두와 같은 것들이다. 오월은 그런 계절이다. 스스로 드러내기보다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드러나게 함으로써 더할 수 없는 찬란함에 이르는 계절, 그것이 오월이다.

어제 저녁 친구의 조문을 다녀왔다. 친구임에는 분명하지만 친구라기에는 25년쯤의 시간을 건너야 하는 대학동기의 빈소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선명한 인상의 그 친구는 작은 소리로 말하지만 크게 움직일 줄 아는 친구였다. 늘 최루탄 가루가 마른버짐처럼 피어나고, 민주화의 구호들이 절실한 만큼 격했던 그 시절, 같이 분노하고 아파하며 그 긴 겨울공화국을 건너왔던 친구들이 전날 벌써 한걸음에 달려왔었다는 말을 이제는 터무니없이 나이든 선배 전해줬다.

처연하게 타오르는 향 위로 탐스럽게 핀 흰 국화가 쌓이고 있었고, 그 위에서 대학시절의 선한 눈 그대로 친구는 그렇게 시간을 멈춘 채 영정 안에서 웃고 있었다. 작년 여름 동기들이 학교 앞에서 모이던 날, 일이 늦게 끝나서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친구에게 ‘꼭’ 보자고 약속했는데, 어제 우리 동기들은 ‘다음’을 잃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스스로 목숨을 놓기 전, 친구는 동기들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는데 각자 사는 일에 분주한 친구들은 그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고 결국 빈소에서 영정으로 그녀와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산 사람의 약속은 부질없을 뿐이다.

대학마다 축제가 한창이다. 혹자는 대학축제가 낭만이 사라졌고, 술만 퍼 마시며, 연예인들의 축하공연 중심이라고 비판한다. 옳은 말이다. 학생들이 주도하는 다양한 문화행사는 해마다 줄고, 그것이 주는 만큼 주점과 어설픈 유흥이 넘치는 것도 분명 사실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일은 학생들의 참여가 해마다 줄고 있다는 점이다.

즐길 거리를 만드는 사람이 없고 즐기는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축제가 흥성거릴 수 있겠는가? 가야 볼 게 없다거나 즐길 것이 없다는 볼멘소리는 사실이지만 옳지는 않다. 그것은 잔칫상을 차려야할 주체가 누군가 자기 잔칫상을 차려주기를 바라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찬란한 계절, 젊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찬란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축제가 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있느냐’는 사실만으로도 축제는 충분히 즐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누구나 살면서 위로가 필요하다. 그것이 하림의 노래 「위로」이거나 즐거운 축제가 될 수도 있지만, 가장 좋은 것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우리 모두 서로 위로하거나 위로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세상은 살아볼만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놓을 만큼 위로가 필요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인생이라는 여정은 인간에게 주어진 상과 같다. 무언가를 성취한다는 건 참 멋진 일이지만 그걸 축하해줄 가족과 친구가 없다면 모든 게 무의미하지 않겠나?”라고 묻는 존 라세터의 말이 시간이 흐를수록 뼈저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찬란한 계절에 나는 누군가의 위로가 되고 있는지,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것인지, 스스로 물어보아야할 때다. 연두가 찬란한 오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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