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난, 20대를 ‘고시’로 몰아넣다
취업난, 20대를 ‘고시’로 몰아넣다
  • 서정훈 기자
  • 승인 2009.05.23
  • 호수 129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시학원에서 만난 이 시대 20대의 모습

오후 5시 반, 저녁시간이 되자 노량진이 붐비기 시작한다. 편한 차림새로 거리에 나온 그들은 패스트푸드점이나 분식점으로 들어가 끼니를 때운다. 간간이 손에 공책을 쥐고 나온 사람들도 있다. 고시학원이 밀집한 노량진에서는 저녁때마다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노량진에서 노점상을 운영하고 있는 김점례<서울시ㆍ동작구 73> 씨는 “젊은 청년들이 공부할 시간이 모자라 간단히 끼니를 때우는 모습을 볼 때면 안타깝다”며 “하루빨리 좋은 직장을 가져야 할 텐데…”라며 아쉬움을 표한다.

고시 열풍 속 사회
노량진의 한 고시학원. 강의가 진행되고 있는 강의실은 빈자리 하나 찾아볼 수 없다. 강의실을 가득히 메운 책상에는 한가득 책이 쌓여 있다. 강사의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녹음기를 꺼내 둔 학생도 상당수다. 떠들거나 조는 모습을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긴장된 분위기다.

“그럼 잠시 쉬다 하죠”라는 강사의 말이 흘러나와도 교실의 분위기는 그대로다. 잠시 스트레칭을 할 때도 물을 마실 때도 눈은 책에 꽂혀 있다. 공무원 시험 중 행정법 강의를 담당하고 있는 김진호<서울시ㆍ양천구 48> 씨는 “국가직 공무원 시험과 지방직 공무원 시험이 연달아 있어 학생들의 긴장도가 많이 높은 것 같아요. 하지만 10여 년 전부터 봐왔던 광경이라 이젠 학생들의 예민한 모습이 익숙할 정도죠”라고 말한다.

실제로 지난 23일 치러진 지방직 공무원 시험엔 전국에서 13만 3천 668명이 지원했다. 이를 위해 노량진 고시학원에서는 이른바 ‘스타강사’들이 지방으로 내려가 출제 예상 문제를 강의해주는 ‘투어특강’까지 진행했다.

‘합격’만을 바라보는 그들
“공무원 시험을 왜 준비 하냐고요? 글쎄요… 딱히 할 게 없었어요. 대학 졸업하고 몇 개 기업에서 면접도 보고 했는데 다 떨어졌거든요. 지금 시험도 2번째 도전인데 이것도 떨어지면 부모님 얼굴을 어떻게 뵐지…”
노량진의 한 고시학원에서 만난 고시준비생 A는 시험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시험에 떨어져도 문제지만 막상 붙어도 공무원 생활에 잘 적응할지는 미지수다. 대학에 다닐 때 공무원을 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취직이 되지 않아 마지막 보루로 선택한 것이 공무원 시험이다.

“제가 공무원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정말 모르겠어요. 하지만 일단 붙기만 하면, 어떻게든 적응 하겠죠. 그렇게 믿는 수밖에요”

실제로 현재 노량진 고시학원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에 실패해 최후의 수단으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상당수다. 아예 대학을 자퇴하거나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공무원 시험부터 준비하는 경우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박정화<경기도ㆍ수원시 20> 씨도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 대신 노량진의 고시학원을 선택했다. 내신도 좋지 않았고 수능 성적도 좋게 나오지 않아 대학에 간다는 것이 소모적인 일로 느껴져서 고시 준비를 시작했다. 하루빨리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돈을 벌겠다는 그녀의 생각을 부모님도 이해하셨다고 한다. 단순히 ‘안정적’이라는 이유에서다. 공무원 시험 응시 이후, 그녀의 세 번째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떠날 날이 없다. 펜을 너무 꽉 쥐고 쓰는 바람에 세 번째 손가락이 휘기까지 했다고.

“가끔은 제가 이것만큼 수능공부를 했다면 정말 좋은 대학에 갔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진짜 암울한 미래에 고민하며 공부를 하는 것보다 차라리 안정적인 공무원 시험을 택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나중에는 내가 더 먼저 웃겠지, 이런 생각 하면서 버티고 있는 거죠”

학원에 마련된 자습실. 저녁 시간이지만 빈자리를 쉽게 찾을 수 없다. PMP를 통해 동영상 강의를 듣거나 오늘 배웠던 강의를 복습하는 학생들이 대다수다. 몇몇 사람들은 불편한 자세로 잠시 동안 단잠을 청하기도 한다.

한 학생의 책상에 붙어있는 달력이 눈에 띈다. ‘내 인생의 봄날, D-3’ 3일 후는 지방직 공무원 시험이 시행됐던 바로 그날이다.

청춘이 저무는 곳
노량진 고시학원 상담실에서 일하고 있는 한아름<서울시ㆍ성북구 27> 씨는 “공무원 시험은 임용고시, 사법고시, 외무고시처럼 고학력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자격 요건도 까다롭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지원하는 것 같아요. 저보다 더 어린 사람들이 고시 준비하겠다고 상담을 하러 오면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죠“라고 심정을 토로한다.

이따금씩 학생들이 상담실을 방문해 학원 측에서 제공하는 ‘고시 일정표 및 특강 계획표’를 받아간다. 한 씨가 학생들에게 “요즘 어때요”라고 묻자 모두가 하나같이 쓴 웃음을 짓는다. 공무원 시험 날짜가 다가올수록 학생들의 고단함이 피부로 느껴진다.

상담실을 나오자 학생들이 강의실에서 쏟아져 나온다. 3시간에 걸친 강의가 끝났다. 여느 학원과 다를 바 없는 광경이지만 학생들의 얼굴엔 웃음도 없고 학생들 간의 대화도 없다. 모두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빠른 걸음을 재촉한다. 이따금씩 한숨 소리도 들린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빠져 나간 뒤 그 다음 시간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하나 둘 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간 이들을 따라 노량진 거리를 걸었다. 노량진 거리는 여느 거리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음료수나 분식을 파는 노점상 대신 볼펜과 공책을 파는 노점상이 즐비하다. 건물 벽은 온통 ‘고시반 대 모집’과 같은 학원 포스터로 도배돼 있다. 거리에서 쉽게 받아볼 수 있는 전단지도 온통 ‘고시’에 관한 것들이다. 그렇게 노량진 고시촌의 하루도 저물어 간다. 노량진을 밝게 비춰주던 해가 지던 것처럼 그 곳에서 시험공부에 매진하는 20대의 청춘도 조용히 저물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