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곰이 나에게」
영화「곰이 나에게」
  • 서보영 기자
  • 승인 2009.04.13
  • 호수 129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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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의 소녀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방에 이사를 오는 장면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아직 이삿짐도 완전히 정리하지 않은 채로 소녀는 방에 쭈그리고 앉아 컵라면을 먹는다. 라면 물 조절을 제대로 못했다며 푸념하지만 소녀의 말을 들어줄 이는 곰 인형뿐이다. 저번에 봤을 때 보다 방이 작아진 것 같다며 말을 걸고 보일러 조절을 못해 춥다며 한탄한다. 목도리를 두른 곰과 소녀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이사 온 날은 다 이런 건가’라고 쓸쓸히 말한다.

사실 소녀는 완전히 혼자가 아니다.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곰과 대화하고 있다. 영화에서 직접적인 곰 인형의 목소리가 나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곰 인형은 소녀의 혼잣말에 대해 화면을 통해 대답하고 있다. 처음엔 다 그런 거라며 소녀를 위로하고 토닥인다. 소녀가 천장을 바라보는 동안 배경은 자취방에서 바닷가로 바뀐다. 자취방에서 소녀가 침대에 몸을 뉘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하지만 소녀의 침대가 순간이동을 한 바닷가는 밝은 대낮이다. 곰 인형도 소녀만큼 훌쩍 커 소녀와 나란히 바닷가에 선다. 곰 인형과 함께 있는 소녀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예전에 처음 이 곳에 왔을 때도 지금처럼 낯설지 않았냐는 곰 인형의 말에 소녀는 두려움에서 벗어난다. 같이 날리던 연은 이미 날아가 버렸지만 소녀는 이미 성장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어느 순간 주변이 확 트이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이 영화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고민하던 소녀가 어떠한 계기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특별 상영작이었다. 영화제 책자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는 혜영이 처음으로 집을 떠나 홀로 낯선 도시에 온다’고 이 영화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영화 어디에도 소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나와 있지 않다. 어쩌면 우리 안의 소녀를 끄집어낼 수 있길 바라는 감독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십 분 남짓의 단편 영화지만 그 어떤 장편 영화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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