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차와 구천
부차와 구천
  • 한양대학보
  • 승인 2009.02.22
  • 호수 1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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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사성어 가운데 오월동주, 와신상담, 토사구팽 등은 춘추시대의 오나라와 월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00여개의 크고 작은 제후국들이 끊임없이 대립하고 합병하면서 300여년 지속된 춘추시대는 정치적으로 복잡했던 만큼이나 사연도 많고 그래서 말도 많았다.

오월동주는 오나라와 월나라가 원수지간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고, 토사구팽은 오나라를 제압한 월나라의 일등공신 범려가 동료인 문종에게 한 말이라고 일설에 전해지고 있지만, 오월 양 국가간의 관계를 넘어 적나라한 인간의 다양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역시 와신상담이다.

와신상담의 주인공은 월나라 왕 구천이지만, 비중 있는 그 상대역은 오나라 왕 부차다.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에게 회계산 전투에서 패한 후 월국의 재기를 꿈꾸며 오나라 노비로 끌려간다. 마구간에 살면서 병든 부차의 대변을 먹기도 하고, 오국 재상 오자서의 계략에 말려 아들의 죽음을 목전에서 바라보는 등 3년 동안 온갖 모진 오욕의 삶을 보낸다.

결국 부차의 신임을 얻어 모국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복수의 칼을 가는데, 이것이 바로 와신상담의 기원이다. 구천은 안락한 궁궐 대신 오국에서 지낸 마구간과 똑같은 처소를 마련해 매일 건초더미위에서 잠을 자고 쓸개 한 조각을 방에 걸어놓고는 식사 전에 쓸개의 쓴 맛을 본다. 매일 스스로를 일깨워 오국에서의 치욕을 상기하고 방심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구천의 이러한 와신상담 그리고 당대 최고의 전략가 범려와 충신 문종의 도움에 힘입어 구천이 환국한지 10년 만에 오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범려 못지않은 지략가 오자서의 자결, 신하 백비의 무능함으로 중원의 패자였던 오왕 부차는 군사를 모두 잃고 월왕 구천과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여기서 두 사람간의 마지막 자존심 대결은 드라마 “월왕구천”의 백미다.  부차는 구천에게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자, 구천은 “기다리지 말고 먼저 찾아오지 그랬냐”고 몰아 부친다. 그러자 부차는 “십여년 동안 줄곧 네가 찾아왔지 않느냐. 규칙을 깨고 싶지 않았다”고 답한다.

구천이 거만함을 탓하자, “부차는 영원히 부차다. 너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구천은 “내가 너 같았다면 월국은 십여년 전에 사라졌을 것이다”라고 하자, “나라와 함께 망할지언정 자존심을 버릴 수는 없다”고 부차는 응수한다.

구천이 다시 “자존심? 망국의 군주가 자존심을 논할 자격이 있는가?”라고 묻자, “오국은 패했지만 과인은 아니다”고 답한다. 부차가 마지막 대결을 청하자 구천은 먼저 부차가 투항할 것을 조건으로 내건다. 부차가 투항을 거부하자, 구천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한다. “네가 내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회계산 전투에서 패했을 때 자신이 부차 앞에 무릎을 꿇었듯이, 이제 부차가 자신에게 무릎을 꿇을 때라는 것이다. “잃었던 걸 되찾고 싶으냐”고 묻자 구천은 “되찾는게 아니라 두배로 받으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부차는 “아쉽게도 네게 줄 수 있는 것은 충고뿐이다. 한번 잃어버린 건 영원히 되찾을 수 없다”고 말한 후 미소 지으며 자복한다. 구천은 제왕의 예를 갖춰 후히 장사를 지내준다.


오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해도 부차는 끝내 투항을 거부하고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구천은 조국의 부활을 위해 오욕의 긴 세월을 보냈고, 월국의 재건이 곧 그에겐 자존심이었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 보존의 본능이 있다. 그런데 인간만이 이 본능을 넘어 자기 존중감이 있다고 한다. 이른바 자존감이다. 보존의 욕구가 생물학적인 것이라면, 자존심은 다분히 정신적이다. 정치철학자 존 롤스가 말했듯이, 자기 존중(self-respect)은 사회적 기본재 가운데 으뜸이다. 자기 존중이 없다면 인간은 자신의 인생관을 설정하고 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인간은 나름대로의 자존심을 갖고 있고, 이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위에 때로는 목숨 걸고 저항한다. 자존심은 개인의 최종적인 존재 이유인 셈이다. 문제는 어떤 자존심인가이다. 부차의 사적 자존심인가, 아니면 구천의 공적 자존심인가.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는가. 그것은 개인의 실존적인 선택일 것이다.

이현복
<인문대ㆍ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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