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에 대한 두 가지 시선 : 문자세대와 영상세대
타자에 대한 두 가지 시선 : 문자세대와 영상세대
  • 한양대학보
  • 승인 2008.12.07
  • 호수 1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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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재<인문대ㆍ국어국문학과 01>

-「베를린 천사의 시」와 「릴리슈슈의 모든 것」-
1.
  우리를 감싸 쥐고 있던 권위들이 하나 둘씩 해체되어가면서 신비는 자신의 영역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신비의 이면에 도사리던 도그마들이 허황된 저변 위에 구축된 세계라는 폭로가 문예판의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고 우리는 혼란스럽다. 그러나 신비란 사실 경직된 권위 위에서 우리는 압도하는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강요에서 태어난 것이라기보다는 알 수 없음으로 하여 우리를 매혹하는 속성을 지닌 관념이다. 그렇다. 신비의 문제는 알 수 없음에서 비롯된다. ‘미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가가면 이내 드러날 것 같은 은폐의 한 속성을 우리는 신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비는 우리를 매혹하고 자신을 긍정하도록 이끈다. 신비는 진실에 대한 긍정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꽃이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고 내 삶에 적용하고 또 살아내는 순환 속에 살고 있다. 즉, 나는 타자와 접촉해서 어떤 형식으로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 이야기의 총합이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우리를 살게 하는 이유-진리 일 수도 진실 일 수도 체념 일 수도 있는-를 획득하는 방법과 그 습득물의 정체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고로 타자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중요성이 곧 친밀감이나 평온함을 환기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타자는 일단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부류에게는 그것이 미지와 고통의 합으로, 어떠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신비해서 다가가 풀어헤치고 싶은 무엇으로 정의되기도 하는 것이다. 즉, 타자는 그 안에 지옥도, 신비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고로 타자의 주소지는 두 개인 셈이다.
 타자의 본적은 ‘신비’이다. 그러나 타자의 현주소는 ‘미지’이다. 우리는 본래 타자와 현실에서의 물리적 만남 통해 관계를 맺었고 이는 대상에 다가가서 대상과 접촉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 이는 타자가 가진 일회성, 절대성을 의식저변에 정초하는 이해의 방식이다. 고로 타자는 주체를 매혹하며 접촉을 시도하게끔 만드는 일종의 신비일 수 있다. 
 그러나 매체의 발달로 인해 우리가 소유하는 공간은 물리적 공간을 너머 가상의 공간으로 무한히 확장되었다. 가상의 공간, 그러나 분명 존재하는 공간. 모두가 등위의 무게를 지니는 공간 속에서 타자를 접하는 방식을 우리는 이미 학습했고 학습해나가고 있다. 그래서 일회적이며 영원과도 같은 아우라가 실종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와 자판을 몇 번 두드려 보지 않은 미지의 기호가 바로 타자로 해석되는 시대를 우리를 살아나가고 있는 것이다. 즉, 타자와 관계 맺는 방식의 차이가 바로 타자에 대한 정의의 상이함을 낳는 셈이다. 
 문자세대는 문자로 사유한다. 문자는 지극히 물질적이며 직접 표상을 제공하지 않는다. 문자세대의 사람들은 백지위에 드러난 검은 기호를 보고 자신 속에서 자신의 감각의 도움을 받아 기호가 표현하려 했던 바를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경험으로 바꾸어 낸다. 이는 사실 까다로운 인식의 방법이다. 영상세대가 그들의 사유를 얻어내는 방식보다도 한 단계 더 심화된 표상능력을 요구하며 이는 그들이 가진 경험의 양에 의거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고로 표상작용은 능동성을 요구한다. 한, 번, 더, 사유해야 하고 한, 번, 더, 물어봐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이해가 성립되며 대상의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 의미화 작용을 더 수월하게 만들어주는 경험의 확보 역시도 대상에 대한 개인의 능동적인 접근을 요구하지 않는가?
 경험이란 접촉의 기억이다. 근본적으로 경험이란 사물과 나, 타인과 나의 관계가 전제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해 획득된 정보로 구성한 경험을 신뢰한다. 내가 경험했지만 경험으로 규명된 사물이지만 타인은, 또 사물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게 전달하지 않는다. 나는 대상의 일면과 소통하며 대상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기억은 경험에 경험은 감각에 감각은 대상에 대상은 나에게 의존하는 세계가 바로 문자세대의 의식구조인 셈이다. 그러므로 기억은 경험을 긍정하고 경험은 감각을 긍정해야, 이 감각은 내 옆에 있는 너를 긍정해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베를린 천사의 시」에 등장하는 다미엘은 타자를 감각과 경험으로 완성해나가 삶을 긍정하는데 이른다. 상기의 인식방법이 작품 속에서 적절하게 운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릴리슈슈의 모든 것」은 그것의 대극점에 서있다. 유이치, 호시노에게는 신비가 없다. 그들이 가진 것은 미지일 뿐이며 이 ‘미지’에 대한 극한적 체험은 사실 ‘허황된’ 희망을 말하는 문자세대의 나이브한 성찰보다 솔직한 것일 수 있다. 문제는 그들이 신뢰하는 이 솔직함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아직 검증이 끝나지 않은 솔직함이라는 데 있고 또 이것이 절망을 낳는 솔직함이라는데 있다. 이 영화에 나타난 주인공들은 아직 절망으로 판명나지 않은 삶을 미지로 규정하고 삶이 곧 절망이라는 인식에 동의한다.
 본고는「베를린 천사의 시」를 분석하면서 무엇이 작품 속의 인물들을 살아나가게 하는지 에 대해 해명하고 아울러「릴리슈슈의 모든 것」을 보면서 무엇이 영상세대에 속하는 그들을 파멸로 몰고 갔는지를 살펴본다. 그러기에 앞서 나의 논의는 영상세대의 대기가 오염되었다는 인식에서 출발했음을 고백해야겠다. 이 대기는 병들어 있고 우리를 병들게 한다는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복합적이며 양면적인 하나의 현상에서 부정적인 측면을 주시한다는 방향설정이고 그것은 이 부정적인 속성이 극복되어야 하는 문제이므로 긍정의 측면보다는 더 뿌리 깊은 사유로 인도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쨌든 영상세대를 만든 여건들 속에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로 필자는 문자세대의 장점을 살피고 영상세대의 문제점을 살피도록 하겠다. 위기는 진지함을 낳는다는 스스로의 믿음에 충실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2.
 베를린 천사의 시는 거장 빔 밴더스의 1987년 작품으로 그 해 칸느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것으로 유명하다. 뒤에 니콜라스 케이지, 맥라이언 주연의 시티오브 엔젤이라는 작품으로 리메이크 되어 더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베를린에 내려온 두 천사-가서엘과 다미엘-가 겪는 일들을  모노크롬과 컬러의 극명한 색 대비, 시선을 쫓다가 문득 배경을 파노라마로 비추는 영상의 섬세함, 대사의 깊이, 연기의 중후함 등으로 잘 조율하여 버무려 내었으며 중간 중간 운문으로 이루어진 대사들을 삽입하여 우리가 삶에서부터 전달받으나 깨닫지 못하는 소소한 성찰들을 잔잔하게 전달 해주고 있다.
 베를린에 내려온 다미엘과 가서엘은 소외받는 이들, 자신의 상처를 감당하는 방법을 모르는 이들에게 말없이 다가가 곁에 있어주며 위로한다. 천사는 인간들 각자가 지닌 내면의 독백을 들을 수 있다. 그들이 귀 기울이는 인간들은 항상 불평과 걱정 속에 살며 불안이 심화되었을 때 삶을 포기하려 한다. 그런 고통의 독백, 불평불만들이 천사의 귀에는 여과 없이 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다미엘과 가서엘에게 세상은 비참에 허우적이는 신음들로 가득 찬, 그들을 바쁘게 만드는 소리의 쓰레기장이다. 그들이 보는 세상은 흑백이고 이 흑백의 농도가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며 얻는 빛의 다양함이며 고통의 소리와 함께 감정을 획득하는 수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다미엘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답답함과 더불어 인간에 대한 부러움을 느낀다. 다니엘의 처지에서 보자면 인간들이 고통 받는 그것, 즉 타자와 접촉할 수 있는 능력, 타자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공유할 수 있는 능력, 그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느낄 수 있는 능력, 들이 너무나 소중해 보이는 것이다. 인간들에게는 느낌이 있고, 총천연색의 세상이 있으며, 사랑이 있고 커피의 향도 있고, 여인의 맨살의 보드라움을 느낄 수 있는 권리 역시도 허락되어있지 않은가? 요컨대 인간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그것도 시간 속에서 말이다. 언제 존재의 끈을 놓아버릴지 모르는 불안의 정점에서 아슬아슬하게 생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천사의 보살핌이 없이는 절망만을 되풀이 하는 미욱한 존재이긴 하지만 그들에게는 느낄 수 있는 능력과 사그라들 수 있어 더 아름다운 생명이 있는 것이다.   인간을 부러워하던 다미엘은 서커스단에서 공중그네를 타는 마리온을 보고는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녀를 계속 떠올리며 그녀의 곁을 지킨다. 마리온에 대한 열망이 날이 갈수록 짙어지고 있던 때 그는 천사 출신의 인간을 만나고 그는 다니엘에게 인간이 되길 권유한다.   인간이 되고 싶으나 인간이 될 방법을 몰랐던 다니엘은 인간이 되어 하고 싶은 것들을 가서엘에게 늘어놓다가 다미엘은 문득 사위가 인간의 색으로 번져나감을 느끼고 자신에게 감각이 생겨난 것을 알게 된다. 그에겐 더 이상 인간 내면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즉, 인간이 된 것이다. 나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려 하는 욕망이 결국 천사를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제 그는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이제 그도 타자라는 것을 가지게 된 것이고 다가가 접촉하고 베일을 벗기며 아껴줄 수 있는 대상이 생긴 것이다. 이제 그도 그 대상과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된 다미엘은 마리온이 자주 들리던 클럽에서 그녀를 만난다. 그들은 첫눈에 서로가 이어져있던 존재임을 직감하고 사랑을 나눈다. 이 사랑은 그가 천사였을 때도 존재했으나 인간이 되고 나서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된다. 사랑은 타인과 나의 거리가 확보 되고-다미엘은 더 이상 다른 이의 내면을 들을 수 없다-이 거리를 좁히기 위해 타인과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관념이다. 당신의 근원에 대해 알고 싶지만 알 수 없는 상황, 이 때문에 더 다가가게 되는 역설이 바로 관계의 형식이며 이 관계에서 바로 우리를 살게 하는 신비의 실마리가 제공되는 것이다.


3.
 이 작품이 매력적인 바는 영화라는 장르의 이점을 영상 속에서 충분히 살려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품의 전반에 걸쳐 우리가 체험하는 감각에 대한 낯설게 하기 즉, 감각에 대한 시각적 청각적 재현에 무척이나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예컨대 다미엘이 교통사고로 죽음에 다가가는 한 남자의 영혼을 위로해 줄때 남자가 죽음의 공포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다미엘은 남자의 삶 속에서 건진 아름다운 것들을 읊어준다. 다미엘이 들려주는 영혼의 소리에 맞추어 남자도 함께 읊조리며 공포에 맞선다.
  “안개 낀 계곡에 비치는 햇살, 남십자성, 극동의 땅, 알베르 까뮈, 어린아이의 눈길, 야외의 하얀 식탁보, 색깔있는 돌, 한발로 뛰기, 집에서 꿈꾸는 가정, 아버지, 나의 어머니, 나의 아내, 나의 아이….” 단어가 나열 될 때 마다 단어와 연결된 영상이 남자의 머릿 속을 채운다. 처음 그것을 접하고 느꼈던 기쁨과 감탄을 담아서 말이다. 순간 그의 삶 자체가 낯설게 되고 그가 놓고 지냈던 수많은 경험들이 다시 그를 삶에 근접하도록 만든다. 남자는 죽음에서 한발씩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체험의 유기적 결합이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힘인 것일까? 삶이 허락된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품게 했던 대상들은 무궁무진하며 저마다 다양하다. 색깔있는 돌, 야외의 하얀 식탁보, 극동의 땅 등 나의 환상 속에서 나와 끊임없이 교류하던 대상 또는 현실에서 맞이하는 소소한 관념들이 모두 나의 역사이며 인간의 역사이며 고로 삶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한계상황을 일깨워주는 장치임과 동시에 우리가 그 한계 속에서 피어난 여린 꽃망울이라는 자각역시도 제공한다. 인간은 언젠가 질것이기에 아름다운 꽃인 셈이다.
 다미엘은 인간이 되면서 미각과 후각 촉각의 감각을 얻게 된다. 미각과 촉각은 사물과 나의 물리적 접촉이 전제되어야 얻을 수 있는 감각이며 이것은 타인과 나의 관계를 실제의 상황, 단 한번 뿐이며 절대적인 상황을 만들 수 있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다미엘은 자신의 불멸을 포기함으로써 단 한번이지만 영원인 체험을 얻게 된다. 이 감각의 복권은 결국 사랑으로 수렴되며 이 사랑으로 수렴되는 서사가 바로 인간이 잊어가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고로 다미엘은 마리온과 지냈던 하룻밤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누가 누구인가? 타인과 같이 있다고 누가 감히 주장하는가? 단 한번이었다. 단 한번이었지만 영원이었다. 그날 밤의 일은 죽을 때까지 남을 것이다. 나는 그 속에 살 것이다. ‘둘’이라는 놀라움이, 그것이 나를 인간으로 만들었다.”
 인간은 이야기를 잃어가는 시대 속에서 살고 있지만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존재이다.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객관화 시키고 자신을 둘러싼 타인의 숨결에 나른한 행복을 감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이 이야기를 가진다함은 기억을 가진다는 것이고 그 기억은 근원적인 감각들의 생동 속에서 축적되는 것이다. 이것이 살아있는 인간이며 인간의 조건이다. 이 영화는 문자세대가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을 이렇게 표현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되는 타인과의 관계는 곧 이야기이며 이 이야기는 인간이 자신의 근원적인 감각들을 섬세하게 소유하고 있을 때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 인간의 역사가 아름다운 것은 그것의 물질적 유한성에 기인한 것이며 이것을 긍정함으로써 인간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자세대가 인간에 대해 공유하는 성찰이다.  
 
4.
 이번엔 영상세대의 비극적 이야기를 살펴보자. 이 작품은 영화 레브레터로 우리에게 친숙해진 이와이 슈운지의 2001년 작품으로 인터넷 쌍방향 소설 릴리슈슈의 모든 것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개봉되지 않아 비교적 덜 알려진 작품이긴 하지만 이와이 슈운지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를 비롯하여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품이기도 하다. 감독인 이와이 슈운지 조차도 스스로 필생의 역작이라고 말할 정도로 공을 들인 작품이다. 서사가 진행되는 중간 중간 인터넷 공간 속에서 닉네임을 한 대화자들이 각자 그들이 신봉하는 가수 릴리슈슈에 대해 나누는 대화가 글쇠 하나하나 찍혀 나가는 장면이 컷으로 삽입되어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세계가 병존하여 진행되는 형식의 독특함이 주목된다. 이는 사실 그냥 형식의 독특함으로 주어진다기보다 서사 속에서 진행되는 인물들의 갈등과 대조적으로 드러나 비극성을 더해주기도 하며 영화의 서사와 긴밀히 소통한다. 형식의 파격이 서사까지 번져 나가며 울림을 주고 있는 셈이다.
  유이치와 호시노는 같은 중학교에 진학하여 같이 검도부에서 우정을 쌓는다. 검도부에서 뭉친 친구들은 여름방학을 맞아 오키나와로 여행을 떠날 것을 결심하고 다른 이의 돈을 훔쳐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을 계기로 이지메에 시달려온 여린 호시노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호시노는 오키나와에서 두 번 죽음에 근접하는 체험을 하는데 한번은 시쟈라는 날치류 물고기에 의해 죽음을 느끼고 그 후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죽음을 맞이했던 사람은 호시노가 아니라 그곳에서 만난 낯선 남자였으며 호시노는 방금 전까지 자신들과 웃고 떠들었던 한 남자의 죽음이 가지는 순간성, 자신의 임사체험 등을 통해 생의 잔인한 면모를 직시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이 그 남자의 희생을 통해 유지 되었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레 경험한 죽음에 대한 인상은 호시노를 180도 바꾸어 놓는다. 호시노는 점차 잔인하고 교활한 리더가 되어가며 절친했던 친구 유이치를 이지메하기 시작한다. 그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데, 반 학우인 츠다를 원조교제 시켜 돈을 가로채고 유이치가 짝사랑하던 쿠노를 그를 따르는 아이들을 시켜 강간하기까지 한다. 시뻘건 폭력에 노출된 유이치는 괴로움에 절규하지만 자신에게 강요되는 폭력에 전혀 저항하지 못한다. 그는 오직 도피의 방법밖에 모르는데 그 도피가 바로 그가 신봉하는 릴리슈슈의 음악을 듣는 것. 유이치는 에테르가 가득 담긴 릴리슈슈의 음악을 들으며 에테르라는 양수로 채워진 릴리의 세계 속에서 또 다른 폭력을 감내하기 위해 자신을 재생시켜나간다. 호시노 역시 삐뚤어진 자신의 모습에 당혹감을 느끼며 릴리슈슈를 듣는다. 그가 폭력을 자행했던 것은 자학의 일종이다. 그는 삶의 극단을 두려워했고 삶은 결국 혐오의 대상이라는 것을 자신으로부터 가까운 사람들에게 확인 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도피처 역시 릴리슈슈의 세계였다. 그들은 마치 컴퍼스처럼 떨어져 있으나 릴리슈슈로 한데 묶여 있었던 것이다. 이런 그들의 공유는 영화 중간에 삽입되는 인터넷 대화글에서 드러난다. 유이치는 ‘아오네코(アオネコ)’로 호시노는 ‘피리아(匕リア)’로 가상공간에서 활동하며 릴리슈슈를 함께 찬미한다. 릴리슈슈로 맺어진 그들은 그 인터넷이라는 공간 속에서는 서로를 신뢰하고 동경한다. 즉, 그들은 하나로 뭉쳐진 동지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설정이 더욱 비극적인 결말을 환기하게 되는 것일까? 그들이 기다리던 릴리슈슈의 공연 날 유이치는 어렵게 구한 표를 들고 공연장에 도착한다. 그는 그곳에서 푸른 사과를 들고 있는 호시노와 만나게 된다. 푸른 사과를 들고 나타나겠다던 ‘피리아’가 바로 호시노였던 것이다. 유이치는 말할 수 없는 배신감에 사로잡힌다. 유이치는 자신의 표를 호시노에게 빼앗기고 공연이 끝나도록 공연장 밖에서 호시노를 기다린다. 그리고는 군중 속의 혼란을 틈타 호시노의 등에 비수를 꽂는다.

5.
유이치는 결국 호시노를 죽임으로서 자신이 갈망했던 에테르의 허구를 목격하게 된다. 슈운지 감독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비극을 매우 아름답고 몽환적인 영상으로 전달한다. 그토록아픈 이야기가 슈운지 특유의 영상미, 영상에 빛을 강조함으로써 마치 자신과 타협하여 자신의 기억을 아름답게 윤색한 채 반복재생하며 쾌감을 느끼는 우리들의 속물성을 영상으로 담아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영화의 전면에 흐르는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역시도 그 선율의 달콤한 몽환적 이미지를 영상으로 번져나가게 한다. 슬프고 끔찍한 이야기를 더욱 불편하게 주시하도록 하는 장치랄까? 철저한 타인의 시선으로 무덤덤히 그려진 그들의 이야기는 어쨌든 비극이다. 그러나 그들이 맞게 되는 파국은 철저히 그들의 탓이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상황에 너무나 수동적으로 반응했다. 유이치의 경우, 변해가는 호시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며 호시노는 변해가는 자신을 구원하기위해 릴리슈슈의 음악만 찾았다. 호시노의 패거리들에게 자신이 몸판 돈을 상납하던 츠다 역시 수동적이긴 매 한가지이다. 그녀는 유이치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나. 살찌면 원조교제 그만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이다. 하늘을 날고 싶었던 츠다는 결국 자살하고 만다. 스스로 삶을 바꿀 수 없는 인간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들은 유토피아를 원했다. 자신이 발붙이고 있는 이곳이 아닌, 저 너머에 있는 아라베스크를 갈망했던 것이다. 이때 타인은 자신이 유토피아에 다다라는 것을 방해하는 미지의 존재일 뿐이다. 타인을 미지로 상정한다는 것은 영상세대의 습속이다.
  그들이 스스로 미지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옆에 있는 ‘너’였으며 너와 접촉이 없었으므로 너라는 대상에 대해 알 수 없었고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도와달라는, 네가 필요하다는, 한마디의 말이 비극의 사슬을 끊었을지도 몰랐다.
 그들의 수동적인 인식습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하나 지적해야 할 것은 유이치와 호시노는 온라인상에서 자신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나의 바로 옆에 있는 너에게 그들은 심중의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즉, 소통에 대해 두려워했던 것이다. 온라인상에서 자신은 있으되 있지 않은 무엇이다. 고로 타자의 무게를 감당하지 않고도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들이 감각을 편식했던 사실에서도 기인한다. 그들은 컴퓨터 화면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영상으로 구성된 세계이다. 즉, 맛도 없고 냄새도 없으며, 만질 수조차 없는 반쪽짜리 세계이다. 유이치와 호시노는 어떤가? 그들은 청각을 신뢰한다. 그리고 화면에 찍혀나가는 글쇠를 신뢰한다. 그들이 진실된 소통이 일어나고 있다고 믿었던 그 장소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 사이에 있는 괴리를 주목하지 못하게 조장한다. 나와 너 사이에 있는 그 틈, 그 거리가 바로 서로에게 다가가게 만드는 요소이며 그 틈 안에 존재하는 미지가 바로 타자의 신비인데 말이다. 
 물리적 접촉으로 전달된 감각은 존재의 일회성과 그 신비를 우리에게 전달한다. 우리가 무엇에 닿으면 우리는 그것을 느낌과 동시에 대상 역시도 우리의 체온에 의해 데워지지 않는가? 촉각과 미각을 가지기 위해서는 대상에 다가가야 한다. 너에게 손을 뻗어야 하는 것이다. 물리적 접촉이 전제된 원시적 감각을 통해 인간은 인간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영상으로 전달되는 이미지는 항상 말랑말랑하다. 그것은 소화하기 매우 쉬운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구체적인 표상능력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이미 이미지화된 것이 내게 들어오는 것이다. 먼저 다가오는 매체의 속성을 통해 그들은 수동성의 달콤함에 젖어들어간다. 
 그러므로 시각과 청각이 자신의 모든 감각기관이라고 세뇌당한 세대는 기다는데 익숙하다. 눈으로 들어오는 너의 존재를 무감히 바라보고 네가 내는 소리를 무감히 듣고 있을 뿐, 다가가 나의 체온을 전하려 하지도 너의 체온을 느껴 보려 하지도 않는다. 누군가 다가와 자신을 어루만져주길 하염없이 기다리는 꽃들이 지천에 피어있는 이곳은 꽃밭이다. 양귀비 꽃밭이다. 지천으로 널린 양귀비가 뿜어내는 독기에 오염되었고 이 대기가 바로 그들과 내가 몸담고 있는 영상세대의 대기이다. 양귀비의 진한 독기 뒤로 ‘위안’이라는 꽃말이 애처롭게 떨어질 뿐이다. 그들의 유토피아는 릴리슈슈에게 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이 다가가려 시도하지 않았던 타인이라는 신비에 있을지도 몰랐다. -그들에겐 ‘미지’일 뿐이겠으나-

6.
오프라인에 있는 타인이 이 시대에 나의 지옥으로서 밖에 있을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원본과 사본의 구분이 불가능한 디지털의 속성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몰라도 너는 언제든지 복사되고 대체될 수 있다는 식으로 ‘존재하는 상태’조차도 하나의 물질로 둔갑시켜 대상화하려는 굴절된 욕망이 타인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것이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너는 ‘Delete’가능한 미지가 된다. 얼마나 편리한가?
문자세대가 타인의 불가해성을 신비로 인식하고 그 속에서 영원을 바라보려 했다면 영상세대는 타인을 아직 알지 못하는 것, 미지로 바라보고 그 속에서 절망을 끄집어내었다. 다소 비약이겠지만 타인과의 실제적인 접촉이 가능한 공간에서 이미 우리는 장애와도 같은 어색함과 어려움을 느낀다. 우리의 관계는 우리의 접촉이며 이 접촉은 우리의 인식에 화학변화를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그 변화가 나를 절망으로 인도하기도 하고 희망으로 인도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타자의 불가해성은 나를 구원하는 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가능성을 폐기하도록 조장한 수많은 시도들 틈에서도 아직 사랑이 이루어지고 있다. 삶이 날 것의 느낌으로 날아드는 순간을 포착하는 굳은 인내와 접근의 전설이 가늘게 이어져 오고 있었다. 호시노와 츠다는 죽었지만 유이치와 쿠노는 아직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다시 그들의 접촉이 하나의 화학변화를 촉발하길 소망한다. 나와 다른 타인, 타인이 내포한 미지의 차이를 가슴깊이 이해하는 감각의 생생한 약동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다가갔으면 하고 손잡았으면 한다.
사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문자세대와 영상세대로 가름하는 것은 비약의 소지가 짙다. 나는 어디에 포함되는가 물어본다면 ‘잘 모르겠다.’ 라고 답할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상이한 매체의 틈 속에 끼어 있다. 문자의 지층과 영상의 지층에 화석처럼 머무는 것이 숙명이라면 숙명일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은 타자를 체험하는 본래적 방식을 기억할 수 있고 이것이 축복이라면 축복일 것이다. 그럼에도 벌써부터 폐쇄당한 감각, 능동성, 타자를 위한 레퀴엠이 연주되고 있다. 누군가가 소중하게 느껴진다면 그래서 내 안에 계속 살게끔 하고 싶다면 우리는 이것을 새로운 부활의 노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부여된 이 수동성의 굴레를 벗고 타인이 가진 신비의 차이를 긍정하고 다가가야만 레퀴엠은 부활의 노래로 다시 울려 퍼질 것이다. 죽음 속에서 다시 부활해 현현하는 영원한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 되살아오는 감각들, 되살아오는 타인들 되살아오는 접촉들 속에서 우리는 ‘Delete’가능한 삶이 아닌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해 통찰할 것이다. 단 한번이었지만 우리를 살게 하는 느낌들을 평생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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