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데이
발렌타인데이
  • 한양대학보
  • 승인 2008.12.07
  • 호수 128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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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영<법대ㆍ법학과 02>

1. 겨울에 핀 개나리
유난히 구름한점없는 파란하늘에 떠오른 태양은 며칠동안 내린 눈이 녹았다 얼었다 반복해서 만들어진 빙판길 표면을 녹이고 있었다. 따뜻해진 날씨에 모처럼 아이들은 밖으로 뛰어나와 아파트건물에 가려져 그늘진 곳에 녹지 않고 쌓여있는 눈을 뭉쳐 던지고 놀기 시작했다. 그중 몇몇 아이들은 던지는 눈을 피해 도망치다 설녹은 빙판길에 미끄러져 옷이 엉망이 된채 울기도 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더러워진 털잠바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곧바로 일어나 다시 뛰어놀기 시작했다.
그러던중 한아이가 무슨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아파트근처 화단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저 멀리 무리를 지어 노는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얘들아! 이리와봐 여기 개나리가 피었어! 이리와봐!”
아이들은 눈싸움을 멈추고 모두 화단으로 뛰어와 신기한 듯이 개나리를 바라보았다. 어떤 건물그늘에도 가려지지 않고 볕이 드는 그 화단에 정말로 노란개나리가 피어올라있었다. 차가운 날씨라 움츠린 듯 활짝 피어나진 않았지만 분명히 그 화단에는 개나리가 수줍게 피어 올라있었다.
“너희들 시간이 몇시인데 아직도 놀고 있니? 빨리 안들어올래?”
“너 옷이 그게 뭐니? 어제 빨아서 입힌옷인데 벌써 엉망이 되었잖아? 혼나기 전에 어서 안들어오니?”
점심시간이 넘도록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아파트 각층마다 아주머니들이 점심을 먹으라 큰소리로 불렀지만 아이들은 대꾸도 하지 않고 화단에 피어있는 개나리를 보며 신기해 하고 있었다.
“너 빨리 안들어오면 맞는다! 어서 안들어오니?”
그러자 아이들이 마치 합창을 하기라도 정한 듯 아파트 윗층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엄마! 이리와서 이거봐봐! 개나리가 피었어! 빨리 와봐!”
그러자 애들 엄마들 몇몇이 화가난 듯 거친 숨소리를 내며 아이들이 모여있는 화단으로 다가왔다. 개중에 성질급한 아이 엄마는 애를 붙잡아 쥐어박기 시작했고 아파트 앞은 다시 애들 소리와 애들 엄마 소리에 시끌시끌거렸다. 아이들을 붙잡아 집으로 끌고 들어가면서 아줌마들의 수다가 시작되었다.
“준석 엄마, 지금이 몇월인데 개나리가 피는거야? 날씨가 미쳤나봐. 세상에 2월달에 개나리가 피다니 원..”
“전에 신문을 보니까 대기오염인지 오존층인지 뭔가가 오염되고 안좋다고 해서 온실효과 때문에 매년 기온이 올라간다고 하지뭐야?”
“그래서 개나리가 피는건가? 하긴 우리 어릴적 이맘때에 얼마나 추웠어? 요 몇 년동안은 그렇게 추워본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지 않아?”
“계속 이렇게 대기가 오염되면 지구가 육지들이 다 가라앉을지도 모른다고 하데?”
“정말! 언제쯤 말야?”
“한 1~200년쯤 후에나?”
그때 얼굴에 잠이 잔뜩 들어있는 듯 보이는 한 뚱뚱한 아줌마가 방정맞은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 들었다.
“에이~ 그러면 우리는 별로 상관없는 거잖아. 걱정 안해도 되겠네. 우리 살아있을 동안 별일없는 건데 뭐하러 걱정해!”
몇몇 아줌마들도 맞다고 맞장구치면서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심하다는 듯이 몇몇 애들엄마가 그녀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이그~ 수용이 엄마! 우리는 별로 상관없지만 지금 수용이 크면 어떻게 할건데? 그리고 수용이가 나중에 애낳으면 그 애들은 어떻게 할건데? 그 애들은 죽으라는거야?”
“그러니까 나중에 우리 애들 잘살게 하자고 부녀회에서 미리미리 분리수거 잘하자고 재활용, 음식쓰레기통을 따로 다 마련한거 아냐. 그래야 나중에 애들이 편해지지. 안그래?”
멋쩍은 듯이 수용이 엄마라는 아줌마는 머리를 긁었다.
그때 눈치없어 보이는 수용이라는 남자아이가 불쑥 말을 꺼냈다.
“맞아. 엄마 맨날 밥도 태우잖아? 어제도 동생 젖병 소독한다고 끓는물에 삶다가 다 녹았잖으면서, 히히히!”
그러자 수용이 엄마는 챙피한 듯 수용이 입을 막았으나 다른 애들 엄마의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눈치없는 수용이는 불행히도 한마디를 더해 매를 벌었다.
“또 엄마는 맨날 초록 비닐이 아니라 검은 비닐에 쓰레기 버리면서~ 치! 아야!! 왜 때려! 아까 눈 맞아서 머리 아픈데 왜 또 머리 때려!”
그러자 애들 엄마들의 시선은 수용이 엄마에게 집중되었다.
“그럼 그 범인이 수용이 엄마였단 말야?”
“그것 때문에 아파트 정문에 경고 붙어있던 것도 몰랐어?”
“어쩜 세상에.. 그거 얼마나 한다고 그럴수 있는거야! 수용엄마 너무 하네!”
수용엄마는 애를 쥐어박으며 황급히 그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남은 여인들의 수근 거림은 한동안 계속 되었다. 수용엄마는 계속 중얼거리며 애를 쥐어박았다.
“그래! 혜란 엄마는 석사까지 나왔다고 재는거야 뭐야! 오존층? 대기오염? 나 그런거 모르고 중학교밖에 안나왔어도 잘만사는구만. 그래봤자 저나 나나 똑같은 전업주부면서 잘난척 하기는. 근데 이놈의 남편 수상해. 이번달 월급에 분명히 보너스가 있을텐데 생각보다 갖다준 돈이 적단말야. 어디다 꿍쳐둔거 아냐? 그리고 쓰레기봉투 가격도 생각하면 아까워 죽겠는데 다들 왜 이렇게 난리인거야. 흥!”
“엄마! 왜 자꾸 때려! 아프단 말야!”
“내가 못살아! 니가 엄마 망신 다 시킬려고 작정했니? 너 때문에 며칠동안 얼굴도 못들고 다니게 생겼어 이것아! 매를 벌어요 매를!”
“우이씨! 내말 맞잖아! 왜때려!”
“이게 어디서 말대꾸야! 확! 버르장머리없이! 하는짓은 지아빠랑 똑같아가지고 뭐가 되려고 그러는거야!”
수용이 엄마가 들어가려고 집문을 열려고 할때 바로 옆집문이 열리고 한 아가씨가 그릇을 들고 나왔다. 수연이었다. 그때 잠시 애를 쥐어박는걸 멈추고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했으나 표정관리를 하기에는 이미 늦은 타이밍이었다. 그 아가씨는 살며시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하면서 그릇 을 건내주었다. 그릇에는 바나나가 10개남짓 담겨있었다.
“저번에 주신 부침개 맛있게 잘먹었어요. 고마워서 여기 바나나좀 몇 개 담아가지고 왔어요. 수용이도 잘있었니?”
한대 더 맞기 전에 때 맞춰서 나와준 수연이 고마웠던 수용이는 헤벌레 웃으면서 수연에게 인사를 했다.
“히히~ 겨울방학이라 맨날 놀아요. 바나나 무지 맛있겠다. 점심 말고 이거 먹어야지! 누나! 밖에 이거랑 똑같은 색깔 개나리 꽃이 폈어요!”
그러자 수용엄마는 애써 참는 듯 미소지으며 수용이에게 말했다.
“바나나 말고 밥을 먹어야 키가 크지~ 으응!”
엄마가 비록 부드럽게 말을 하지만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걸 본능적으로 느낀 수용은 다시한번 수연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수연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아까 그광경에 웃음을 짓다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수용이 어머니 이름은 뭘까? 혜란이 어머니 이름은 뭘까? 서로 누구엄마 누구엄마라고만 부르고 진짜이름은 왜 아무도 물어보지 않을까?’
수연은 자기 어머니이름을 누가 부르는걸 들어본적이 거의 없었다. 가끔 명절날 큰집에 일가 친척들이 다 모여도 큰어머니, 작은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는걸 들어본적이 없었다. 그냥 수연엄마일뿐이었다. 언젠가 한번 사촌오빠의 결혼식장에 갔을때일이 떠올랐다.
“김정희, 박귀남님의 차남 김수혁? 으흠... 아빠? 큰어머니 성함이 김정희야 박귀남이야?”
그때 수연의 아버지는 어이없다는 듯 수연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다.
“네가 김씨니까 당연히 큰아버지 성함은 김정희지 이녀석아.”
수연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아는데 큰어머니 성함이 박귀남이라는거야? 이름 너무 촌스럽다.. 근데 여지껏 그 이름을 처음들어본 것 같아.”
수연의 아버지도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이네.. 나도 형수님 성함을 여지껏 들어본적이 없었어. 성이 박씨라는것도 오늘 처음 알았구나.”
그때를 회상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 1층 버튼을 누르면서 하나씩 낮아지는 숫자를 바라보았다.
‘나도 결혼을 하고 시간이 지나 아이도 가지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 내이름 김수연이라는 석자도 묻혀져 버리게 되는걸까?’
이런 저런 페미니스트들이나 할법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게 자아는 가려진채 가족의 행복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걸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 남자들도 똑같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결국 그들도 돈버는 기계로 전락했고 나이가 들면 힘을 못쓰고 이리저리 채이고...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위로 또다른 얼굴이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춥다고 집에만 있을때 책만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왜이렇게 복잡한 생각이 드는거지?’
생각을 털어버리듯 도리질을 한후 수연은 엘리베이터 한쪽면에 붙어있는 거울을 보며 옷매무세를 다듬었다. 수연의 눈에는 거울에 비친 회색 롱코트와 노란원피스는 정말 아름다워 보였다. 가장 매력있는 여성은 여성도가 100이라면 그보다 20정도가 더해진 120정도의 여성이라던 잡지의 기사가 떠올랐다. 문득 그 120인 여성이 자신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잠시 빠졌다. 그러던중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허험!”
문이 열린것도 모른채 거울을 보고 있던 수연은 그소리에 놀라서 소리가 난곳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할아버지 한분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채 헛기침을 하고 계셨다.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수연은 얼굴이 빨개진채 엘리베이터를 종종걸음으로 빠져나왔다.
‘내가 공주병에 걸렸나? 요즘 살이 좀 빠져서 얼굴이 갸름해져서 예뻐보인건가?’
지나가던 아줌마가 수연의 옆을 지나가면서 힐끗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한겨울에 회색코트에 샛노란 원피스라니... 옷색깔도 참 이상하게 맞추어 입는구만, 참나...”
수연은 듣지 못한 듯 그 아줌마를 지나쳐 아파트 정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생각보다 차가운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자 수연의 볼은 금새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 2월이라 전보다는 날씨가 풀렸다고는 했는데 아직도 쌀쌀하구나. 꽃집이 오늘 열었을지 모르겠네.”
수연은 아직 덜녹은 빙판길에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가 잠시 멈칫 하더니 다시 가던길을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아까 옆집 수용이가 했던말이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히히~ 겨울방학이라 맨날 놀아요. 바나나 무지 맛있겠다. 점심 말고 이거 먹어야지! 누나 밖에 이거랑 똑같은 색깔 개나리 꽃이 폈어요!’
수연은 근처 아파트 근처 화단을 둘러보다가 건물 반대편 햇빛이 비치는곳에 피어있는 개나리를 발견하였다. 철이 철인지라 많이 피어있거나 활짝 핀거 아니지만 분명히 노란꽃이 가지에 올라와 있었다. 수연은 매우 소중한 보물을 만지기나 하듯 그 개나리꽃의 조그맣고 부드러운 꽃잎을 조심스레 쓰다듬기 시작했다. 수연은 나즈막하게 혼잣말을 했다.
“개나리꽃 정말 예쁘지않니? 대단한 향기를 가지지도 화려한 모양을 가지지도 않았지만 보아도 보아도 질리지 않잖아. 그리고 개나리는 모든게 소생하는 봄을 가장 먼저 알려주잖니? 가장 아름답고 의미있는 꽃중의 하나가 개나리 아닐까?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도 이런 개나리를 닮지 않았을까?”

 

2. 입학식
1년전 초봄.....
아직 겨울의 냉기가 가시지 않은 3월.
유래가 없던 이상저온현상으로 3월임에도 불구하고 봄기운을 전혀 느낄수 없었다. 게다가 며칠전에는 1, 2월에도 내리지 않았던 폭설이 내려 생긴 수많은 교통사고에 관한 뉴스에 사람들은 정신이 없었고 또 추위에 다들 집밖으로 나가기를 꺼려 대부분의 거리가 한산한 편이었다.
그러나 행당대학교 대운동장에는 이번에 새로 입학하는 학생들과 학부모들로 가득했다. 마치 도시전체의 사람들을 모두 여기에 모아놓은것처럼 빽빽히 운동장에 차있었다. 입시지옥을 딛고 대학에 입학한 자식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는 부모님들의 모습과 여기저기 터지는 카메라 플래쉬, 그리고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듯한 학생들의 수다, 모든게 당황스러워 두리번 거리는 학생들 이 자리에 모인 모두다 아무런 질서없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중 두명이 남학생이 여타 여학생들의 수다와는 비교도 안될 속도와 목소리 크기로 주위를 압도하고있었다. 주위에 있던 학부모들과 학생들은 그 목소리크기에 서로의 대화를 듣기에도 버거운 듯 하나둘씩 그 주위를 피하였고 그 두학생 주위에는 마치 보호막이라도 쳐진 듯 둥글게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둘은 전혀 모르는 듯 서로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볼만한 콤비였다. 하나는 뚱뚱한데다 난장이 하나는 멀대에다가 홀쭉이였다. 덤앤더머가 따로 없는 광경이었다.
뚱뚱한 녀석은 성문, 난장이 녀석은 성대였다. 고등학교때부터 항상 단짝이었던 녀석으로 불리는 별명도 가지가지 였는데 특히 성문은 성이 송씨, 성대는 성이 홍씨였다. 학교 다닐때 항상 성문종합영어, 수학의 정석으로 불리었으나 불행히도 성문은 영어를 잘못했고 성대는 수학을 잘하지 못했다. 비록 3년내내 다른반이긴 하였지만 같은 음악동아리라 자주 만날 수 있었던터라 같은 반인 친구보다도 더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내다 성대는 법대에 지원하여 합격하였고 성문이는 공대에 합격하였다. 둘은 자주 티격태격 하기는 했지만 같이 대학에 오게되어 서로 무척 좋아하는 터였다.
“입학식이 몇시야? 손에 감각이 하나도 없다! 에고~”
“여기 안내를 보니까 10시쯤에 한다고 써있다. 아직도 30분이 남았네.”
“30분이나! 그냥 후딱하고 끝내지 학생들 얼어죽으면 학교가 책임질거야!”
“맞아! 우리 등록금먹고 크는 학교인데 입학식날 이렇게 밖에다 두고 고문을 시키다니 등록금도 더럽게 비싸구만! 강의실 들어가보니까 책상이 고등학교때보다 더 꾸졌어. 이게 말이나 되냐? 난 깔쌈한 책걸상과 프로젝트 TV를 기대 했는데 칠판은 고등학교에서도 안쓰는 낡은 칠판이더라. 에휴~ 학교에서 등록금 쳐먹고 뭐하는가 몰라.”
“야야~ 그래도 넌 인문계라 나보다 나은편이지, 공대는 인문보다 2배나 된다. 울아부지 허리가 끊어질정도가 아니라 남아나지도 않게 생겼다.”
“그렇긴 하지만... 야 잠깐만!”
“왜! 내 얼굴에 똥묻었냐?”
그러자 성문이 웃음을 참으면서 성대를 놀리기 시작했다.
“으으~ 푸흐흐~ 똥묻었다. 킥킥!”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성대는 주먹을 쥔채 은근히 협박을 하면서 성문의 옷깃을 붙잡았다.
“너 이놈 잘걸렸다. 지금 생각났는데 나를 놀리는게 유일한 삶의 낙이라고?”
“얌마 무슨? 아냐 내가 이리도 신성한 옥동자를 어떻게 놀리겠냐~ 푸흐~”
“이 샹놈의 시끼! 오늘의 입학식을 내일의 재삿날로 만들어주마!”
“야! 근데 정말 똥묻었다니까?”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 구나! 크흐흐! 나의 북두신권을 받아라! 도망가도 소용없다 이기어검술이 너를 놓치지 않을것이다. 스커드 미사일, 광명성 1호와 비교가 안되는 정확도를 가지고 있지. 흐흐흐”
그러자 성문은 슬쩍피하며 한마디를 더 꺼냈다.
“이 자슥은 학교 다닐때 교과서는 안보고 무협지만 봤나~ 뭐, 광명성 1호? 니 몸보니 딱 김정일장군이시다. 아예 장풍을 쏴라 반사해주마! 근데 니 머리에 정말 똥묻었다니까! 방금전에 비둘기가 네 머리에 싸고 갔어! 푸헬~”
성대는 그말에 바로 손으로 머리를 만져보았다. 무언가 물컹한게 손에 묻어나는게 느껴졌다. 그리 좋지 않은 감촉에 새똥인걸 직감하였다. 그리고 가뜩이나 그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피해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새똥이란 말에 그 공간은 더욱더 넓어졌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수군거림은 더해갔다. 몇몇 여학생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아예 그 자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뭐야! 저런 애들도 대학에 들어오니?”
“난 대학오면 멋진 남자들만 있을줄 알았는데~ 쟤네들 보니 정말 암울하구나.”
“이번에 이학교 입학생중에 남녀 비율이 7:3이라 듣고 대접받겠구나 싶었는데 벌써부터 자퇴하고 싶어진다야.”
그러나 불굴의 덤앤더머는 그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 듯 아니 들어도 신경안쓰는 듯 서로 실랑이를 벌였다.
“으엇! 이런 썅놈의 비둘기가!”
성대의 머리위로 비둘기들이 때지어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이 닭둘기시끼들 잡히기만 하면 깃털을 홀랑뽑아 고추장을 발라 구워서 닭꼬치로 만들어주마!”
성문은 얼마나 웃었는지 숨까지 못쉬고 있었다.
“야~ 돼지야~ 니 머리 그걸로 염색해부러라! 푸헤헤헤!”
성대는 신경질을 부리다가 갑자기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성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새똥묻은 손바닥을 앞세우며 성문에게 다가왔다.
“그래 이놈~ 이 똥장풍이나 한방 먹어봐라!”
웃느라 정신없던 성문은 피할순간도 없이 똥장풍을 얼굴에 맞고 나뒹굴지 시작했다. 그리고 손바닥에 뭍은똥을 슬며시 넘어진 성대의 점퍼에다가 닦았다. 성대는 마치 세계정복이라도 한 듯 뒹굴고 있는 성문을 팔짱을 낀채 바라보며 거만하게 서서 낄낄대고 있었다.
“으아아! 냄새 죽이네! 닭똥, 소똥냄새 지독하다고는 들었는데 이건 뭐 냄새가 이래!”
“자슥아 비둘기가 닭이랑 친척인거 몰랐냐? 그래서 닭둘기아니냐~ 낄낄!”
“죽으려면 혼자죽지 왜 나까지 끼어들이고 지랄이여!”
“원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거 아니냐~ 켁켁!”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던중 성대이 잠시 무언가를 바라보더니 멈칫했다.
“잠깐! 어디서 많이 본 여자애인데..”
“니가 아는 여자가 어딨다고 보냐. 옥동자같은 놈이 말야. 혹시 모르겠다. 니가 김정일이라서 기쁨조를 봤다면 모를까~ 체형은 완전 김정일장군님이여~ 킥킥!”
“이 썩을놈! 암튼 어디서 본애란 말이야. 어디서 본거지...”
그때 앞에서 누군가가 소리치기 시작했다.
“학생 및 학부모 여러분! 이제 곧 입학식을 시작할겁니다. 각 과별로 정렬을 할 예정이니 학생 여러분들은 앞에 보이는 안내판에 따라 움직여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판에 쓰여진 과이름을 보시고 4줄씩 맞추어 주시기 바랍니다.”
성대는 성문에게 말했다.
“어라? 이제 시작인가 보다. 이따가 끝나면 전화해라!”
“니가해 이놈아! 전화비 아까워 죽겠구만.”
“암튼 이따 전화할테니까 그때 만나자.”
“알았다. 이따가 보세나~”
키가 작은 성대는 한참 안내판을 찾다가 겨우 앞에 법대가 쓰여있는걸 발견했다. 이미 많은 학생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다들 아까는 그렇게 시끄럽더니 막상 같은과라도 잘모르는 사람끼리 모이니까 서먹한 듯 다들 별말이 없었다. 말많은 성대도 혹시 누구 아는 사람없나 두리번 거려보았지만 아는 사람이 보이지가 않았다.
“아깐 노가리라도 까서 덜 심심했는데 지금은 심심해 죽겠구만. 아는 사람도 하나도 안보이고 여기는 법대라서 그런가 정말 여자애들이 안보이네. 저옆에는 뭔데 여자애들이 많아? 생활과학대? 나도 저기로 갈걸 그랬나? 그건 그렇다 쳐도 이건 남자녀석들도 다 칙칙하게 생겼잖아.”
성대는 신림동에서 고시공부를 하던 사촌형이 떠올렸다. 나이는 올해 30살인데 본인은 끝까지 만으로 29살이라고 우기고 있으나 29이던 30이던 몇 년동안 보았던 사촌형의 모습은 별로 달라진게 없다. 항상 헐렁한 옷에 담배를 피워가며 자기와 스타크래프트를 했던 기억이났다. 놀러가면 술값이 싸다고 종종 술도 사주고 순대맛있다고 순대도 사주고 그랬었다. 그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가끔은 한심하다 생각을 했는데 자기도 그렇게 되는게 아닌가 하는생각이 떠오르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언제 사법시험에 합격할지 기약도 없고 또 내가 잘할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입시야 괜찮게 보아서 점수 맞춰 법대오기는 했는데 잘한건지 아닌지 계속 의구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행당대학교에 입학하신 신입생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우리학교는 오랜 전통과 빛나는 선배들로...... 어쩌고.. 저쩌고...”
성대의 귀에 총장의 인사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냥 단지 춥다는 생각과 내가 잘선택해 온건가 하는 의문에 머릿속이 복잡할 따름이었다. 인사말과 환영사가 끝나고 문이과 수석합격자 시상을 한뒤 학교 음대생들이 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교가가 뭐이리 촌스럽냐. 하긴 어느학교든 안그런가. 교가도 좀 멋있게 만들지 말야. 우리나라 학교 교가들은 다 똑같잖아. 저기 태평양에 마샬인가 하는 신생독립국가는 국가의 작곡자가 우리나라의 작곡자 뭐더라.. 뭐더라.. 맞아 패티김 남편이었던 길옥윤인가 뭔가 하는 대중음악 작곡자던데 그런사람한테 부탁해서 교가를 만들면 안되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성대는 아까 보았던 여학생이 몇줄앞에 있는걸 발견하였다.
‘도대체 누구지? 낯이 익는데 대체 누굴까...’
그 여학생이 누구인가 골똘히 생각하던 성대는 기억을 더듬다가 누구인지 단서를 찾아냈다.
“맞다!”
갑자기 큰소리로 소리치던 성대는 주위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걸 알고 민망해져 머리를 긁적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맞아, 초등학교때 6학년때 같은반이던 수연이구나! 옛날에는 키가 무척 컸는데 지금 키는 그때랑 비슷한 것 같네. 뭘 못먹고 자랐나? 그래서 내가 쉽게 알아보지 못했나 보군. 그때는 꽤나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정말 많았던 것 같은데. 하긴 수연이는 우리반에서는 공주였지. 정말 예쁜아이였는데... 어릴때 이쁜게 커서까지 가는건 아닌가 보군. 지금은 예전만큼 예뻐보이지 않는걸보니 말야.’
계속 수연을 바라보던 성대는 수연의 뒤쪽줄에도 낮익은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대체 누구지? 졸업한지 얼마나되었다고 나이가 몇 살이라고 이렇게 기억력이 안좋아진거야! 집에가서 총명탕이라도 끓여달라고 해야지.’
“맞아!”
또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치던 성대는 주위의 시선이 아까보다 더 많이 자신에게 집중되는걸 알고 민망해져 머리를 긁적이고 얼굴까지 붉히면서 시선을 피하려했다.
‘박대혁이구나. 거참 재미있네 6학년때 같은반이던 녀석 2명하고 같은과가 되다니. 이것도 대단한 인연이구만. 암튼 당분간은 덜 심심하겠군. 흐흐. 하긴 대혁이 걔도 참 특이한 녀석이었어. 별말도 없고 항상 뒷자리에 있었으니.’
성대의 기억속에 대혁은 존재감이 별로 없던 아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실 뒤편에 기르던 화분의 물주기는 항상 도맡아서 하려고 했고 틈나면 근처 화단에서 꽃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곤 하였다. 선생님이 누가 할거냐 물으시면 말없이 자기가 한다고 손을 들곤 했다.그것 때문에 기억을 되새길수 있었는지 모른다. 성대의 기억속에 대혁과의 대화는 단 한번뿐 이었다. 6학년 여름방학때 학교 건물뒷편 화단에서였다.
성대는 그때 모처럼 반친구들과 만나 축구 시합을 했었다.
“얘들아! 나 물먹고 머리도 감고 올게!”
“빨리 먹고와! 여기 사람 모잘라! 지면 니가 책임져! 지면 니가 아이스크림사!”
“그래 알았으니까 기다려 새끼들아~”
평소에도 놀기를 좋아하던 성대는 그렇게 한참을 뛰다가 목도 마르고 더워서 학교 건물뒷편에 위치한 수돗가에 달려갔다. 그리고 수도 꼭지를 최대로 틀고 머리를 갖다 대었다.
“자식들 지면 난 도망가버릴겨~ 킥킥! 와~ 졸라 시원하다!”
그렇게 머리를 감던 성대는 옆 수도꼭지에 호스가 달려있는걸 보고 그 수도 꼭지를 최대로 틀고 온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이야! 정말 시원하다! 근데 저기 누구지?”
성대는 수도꼭지를 잠그고 저멀리 화단가를 보았다. 그곳에서 대혁이가 분무기에 물을 담아 화단에 물을 주고 있었다. 물을 한번 주고나서는 화단에 피어난 꽃에 얼굴을 가까이한채로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어? 저거 대혁이 아냐! 방학중에 화단에 물을 주고 있다니. 할 짓도 더럽게 없나보네. 얼라 꽃에다 얼굴가져다대고 뭐하는거야? 미쳤나...’
성대는 호기심에 대혁에게 다가갔다. 정말로 대혁은 꽃에 물을 한번 주고 꽃에다가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진짜 미친거아냐?’
대혁은 누가 다가오는것도 모르는 듯 화단에 물을 주기만 하고 있었다. 성대는 왠지 부르기 서먹했지만 호기심에 대혁의 이름을 불렀다.
“대혁아! 너 방학인데 여기서 뭐하는거니?”
대혁은 놀란 듯 쳐다보다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더니 조용히 하라고 말했다.
“쉿! 조용히 해. 꽃이 쉬고 있어.”
대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천천히 대혁에게 다가왔다.
“꽃이 쉬고 있다고?”
대혁은 아까처럼 꽃에 무어라고 중얼거리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물을 주고 있었다. 성대는 그 꽃이 무언가 궁금해서 다가와서 보았지만 그 꽃이 무엇인지 알수 없었다.
“대혁아, 그 꽃 이름이 뭐야? 난 애국자라 무궁화밖에 아는게 없거든?”
대혁은 천천히 화단앞의 푯말을 가리키며 말했다.
“패랭이꽃.”
“패랭이꽃? 그게 무슨 꽃인데?”
대혁은 꽃에 대한 대꾸는 없이 말을이었다.
“패랭이꽃은 마른곳에서 사는데 요즘 너무 덥길래 말라 죽지 않을까 싶어서 찾아와 물을 주는거야.”
대혁은 툴툴거리며 푯말에 쓰인글을 읽었다.
“뭐야.. 쌍떡잎식물 중심자목 석죽과의 여러해살이풀이고 분류는 석죽과? 석죽과가 뭐야? 분포지역은 한국과 중국이고 자생지는 낮은 지대의 건조한 곳, 냇가 모래땅 그리고... 꽃말은 지워져 있네? 안지워지게 매직으로 잘 써놓지 말야.“
성대는 대혁에게 물었다.
“대혁아 패랭이꽃 꽃말이 뭔지 너는 아냐?”
대혁은 그저 말없이 미소만 지은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괜히 무안해진 성대는 그냥 짜증섞인 말투로 한마디 던졌다.
“됐다됐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기 싫다고 하던가~ 잘난척은, 암튼 남은 방학동안 잘보내고 2학기때 보자~”
“그래 알았어. 2학기때 얼굴보자.”
그리고 성대는 운동장으로 달려갔고 그 이후 2학기동안 대혁과 말을 나눌 기회가 거의 없었다. 아니 성대뿐만 아니라 다른 반친구들도 대혁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그게 대혁에 관한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 이후 중학교, 고등학교때도 대혁에관한 어떤 이야기도 들어보질 못했었다. 그때는 그냥 대혁에게 호감을 느끼지 못했지만 이렇게 대학에서 친하지는 않아도 안면이 있는 사람을 만나니 성대는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네 이것으로 행당대학교 입학식을 마치겠습니다. 참석해주신 학생 및 학부모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마치 정치인같은 말투로 지겹게 진행되던 총장의 폐회사가 끝난뒤 다시 주위는 우왕좌왕 하기 시작했다. 성대는 앞줄에 있던 수연과 대혁에게 이야기를 걸으려 다가가기 시작했다.
“야! 돼지 새끼! 너 어디있냐?”
뒤에서 성문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대는 뒤돌아서 소리쳤다.
“기다려! 똥묻은개야~ 곧 갈테니 좀만 참아라. 너한테 냄새나서 가기 싫다. 냄새 빠지면 가도록 하마!”
그리고나서 앞을 보았지만 어느새 수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수연과 대혁의 모습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나중에 같이 수업듣게 될테니 그때나 이야기 해보지 뭐.”
뒤에서 성문의 놀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정일장군님~ 여기 기쁨조가 왔어요~ 호호호호!”
“잡히면 죽는다. 뿌드드득!”
성대는 군중들을 재치며 성문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입학식은 끝이났다.

 

3. 회상(1)
성대와 성문은 이리저리 사진찍느라 정신없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제치면서 운동장을 빠져나왔다. 부모님은 맞벌이로 바빠서 따로 오시지 않으셨기에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보자 성대는 괜히 심술이 났다. 그래서 그냥 모여있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밀치면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어이~ 학생! 사진찍는데 껴들면 어떻게해?”
“하나~ 둘~ 셋! 어엇! 아 이런 조심해야지 학생? 밀치고 가서 셔터를 잘못눌렀잖아? 필름값 아깝게말야!”
마음에 심술보가 가득찬 성대의 귀에 그런말들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이 양반들은 무슨 사진 못찍어 안달이난 귀신이 들었나? 아님 평생 사진 한번 못찍어 보았나. 필름값? 필름값 아까우면 디지털카메라 하나 장만하시던가!’
성대의 마치 축지법을 쓰는 듯 빠르게 군중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성문은 그런 성대의 몸놀림에 입이 벌어지며 감탄을 하기 시작했다.
“어라? 저 자식 맨날 무협지만 보더니 삘받아서 경공이나 축지법이라도 익혔나? 근데 폼은 영락없는 날아라 돈까스구만. 하도 뚱뚱해서 달릴때 가속도가 붙었나? 아니야, 의외로 가벼울지도 몰라! 기름은 물에 뜨잖아? 저 녀석 몸의 10%는 물이고 90%는 지방이니까 생각보다 가벼울지도 몰라! 킥킥킥!”
성문의 앞에 도착한 성대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좀만 더 있었으면 깔려죽을뻔했다. 무슨 아우슈비츠 감옥 가스실도 아니고 숨도 못쉬게 사람들로 꽉찬다냐?”
“그러니까 살좀 빼거라. 그렇게 살이 찌니 제대로 다닐수나 있겠어? 강의실 입구에 홀맨처럼 끼어서 못들어오는거아냐? 킥킥킥!”
“어디 마른 장작껍데기 같이 생긴놈이 헛소리여! 이 뱃살과 후덕한 얼굴은 다 인격을 뜻하는것인걸 어찌 너같은 뱁새가 황새의 뜻을 알겠느뇨. 허험~”
“어이구 황새님 어째서 이 녀석을 세상에 데리고 오셨사옵나이까~ 꺼이꺼이~”
“황새? 황새가 뭐하는건데? 황선홍이냐?”
성문은 성대의 머리를 불쌍하다는 듯 쓰다듬으며 말을 꺼냈다.
“이놈의 대학은 교양과 인성을 보지도 않고 학생을 뽑는가보구나~ 이런 하이퀄리티 유머도 못알아듣는 교양머리 없는놈과 같이 이 학교를 다녀야 하다니~ 꺼이꺼이~ 불쌍한...”
성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성문의 말을 끊고 질문을 했다.
“도대체 뭔소리냐니까? 짜증나 죽겠네. 아직 이녀석이 나의 헤드락을 덜 당해보았군.”
성문은 킥킥 거리며 대답을 했다.
“너는 동화도 못보았냐? 황새가 애기 엄마아빠한테 애들을 물어다 준다는 동화도 모른단말야? 너 그러고서 어떻게 수능보고 대학들어왔냐? 황새가 힘이 쌨나 정력이 좋았나? 어떻게 이 녀석을 물어서 데려다 주었지? 부리에 물면 정원초과라 날지도 못할텐데? 황새가 데리고 오기는 하도 무거워서 택배로 보냈나? 아니지 택배도 40Kg넘으면 못보내지. 용달차로 보냈나? 아니야 아니야... 황새가 물고오다가 하도 무거워서 떨어트렸는데 네 몸 90%이상이 지방질이라 떨어져도 전혀 몸에 손상이 없었을꺼야. 아마 떨어진다음 너네 집까지 소주 빨면서 기어왔을거야! 킥킥!”
성대는 저 놀림에 대항하기도 지쳤다는 듯이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발길을 돌렸다.
“야야~ 이제 상대하기도 귀찮다. 그러니 빨리 밥이나 먹으러가자. 배고파 죽겠다.”
성문은 한마디 더하고 성대와 학생식당을 찾기위해 발길을 옮겼다.
“어라? 반응을 안보이면 재미가 없는데~ 암튼 먹으러 가자. 하긴, 아까 그렇게 빨리 빠져나오는걸 보니 아침에 연료로 먹은 여물이 다 소화될만도 하더군. 여기 학생식당이나 어떻게 생겼는지 가보자 돼지야.”
성대는 한숨쉬며 성문을 뒤따라가기 시작했다.
“성문이 저놈은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입이 근질근질해 참지 못해서 자살할 놈이야. 그래 친구 하나 살리는셈치고 참아주지. 휴우~ 야 근데 학생식당이 어디있냐?”
“여기 안내판 보니까 저 왼쪽 언덕으로 가보면 나올 것 같은데?”
“그리 멀지는 않구먼 어서가서 연료를 채우자!”
성대와 성문은 안내판을 따라 학생식당으로 향했다. 학생식당으로 가는 길목마다 선배들로 보이는듯한 재학생들이 동아리 홍보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 여기 영어회화 동아리에 들어오세요! TOEIC 900점 이상의 토익귀신 선배들이 후배여러분들을 모두 귀신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저희 헬스 동아리에 들어오세요! 여자후배 여러분들은 고3동안 책걸상에 앉아 펑퍼짐해진 엉덩이를 탄력있게 만들어드리고 남자후배 여러분들은 수험기간동안 운동은 안하고 먹기만해서 E.T가 되어버린 체형을 확바꾸어 드립니다!”
“신입생 여러분! 다들 일탈을 꿈꾸어 보시지 않았습니까? 저희 동아리에서 그 일탈을 누려 보십시오! 저희 사교 댄스 동아리는...”
성대와 성문은 그런 절절한 외침들을 뒤로하고 수군거리며 학생식당에 들어와 메뉴판들을 살폈다.
“야 돼지야, 아까 영어회화 동아리 모집하는 사람보니까 정말 귀신같이 생겼더라 정말 저기 가면 토익귀신은 아니라도 귀신으로 만들어 버리기는 하는 모양이다. 너는 거기 헬스동아리 들어가라. 니 몸매 딱 E.T아니냐? 뱃살나오고 팔은 길지만 가늘고 다리는 리모콘다리니까 말야. 가서 그 사람이랑 손가락 맞대고 E.T찍어라. 킥킥! 스필버그 불러다 줄까? 아님 햄버그 불러다 줄까?”
“너는 저기 사교댄스 동아리인가 가보거라. 일탈을 꿈꾸는 자? 너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자체가 일탈아니냐. 너 그 동아리 들어가면 바로 유망주 그리고 정신적지주가 될거다 이놈아! 지금 니몸에 빤짝이 옷입히고 머리 올빽으로 밀면 근사하겠다. 크크!”
그렇게 둘은 잡담을 하면서 먹을것을 정하기 위해 이리저리 메뉴를 살피기 시작했다.
“오호! 닭개장? 나 치킨 킬러인데.”
“가격도 저정도면 저렴하구만~ 맨날 닭개장만 먹고 살아야겠다.”
“줄많이 서있네 빨리가서 줄서라 홀쭉이 제비같은놈아!”
“알았으니 얼렁 쫓아와라. 나따라 올라믄 한시간은 걸리겠구나.”
둘은 줄서서 음식을 받은뒤 자리를 잡고 마치 며칠을 못먹은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그 둘의 근처에 줄서있던 몇몇 남학생들이 한마디씩하며 지나갔다.
“쟤네들 훈련소에서 탈출했나?”
“나도 훈련소에서 저런 속도로는 먹지 않았는데 말야. 요즘 탈영한놈 신고하면 포상금 얼마냐?”
“야야~ 머리가 긴 훈련병도 보았냐? 연예인이냐? 여드름 자국있어도 피부에 탄력있고 아직 쌔끈한거 보니 신입생인가 보다”
“하긴 요즘은 고3애들이 더 늙어보인다니까? 집근처에 고등학교 있는데 그 학교 애들보면 무서워 내가 먼저 피한다. 얼굴이 무기라니까?”
“젠장! 닭개장이다! 나가자!”
“뭐? 닭개장?”
“군대에서 그렇게 먹었는데 학교에서 까지 닭개장을 봐야하나? 도대체 조리사가 누구야?”
“야 닭소리 꺼내지도 마라. 취사병할 때 하루에 계란을 몇천개는 깠던 것 같다. 생각하면 지금도 쏠려. 너 카드값 밀린거 어쨌냐?”
“카드 이야기 꺼내지도 마라! 카드값 연체 된거 때문에 환장하겄다!”
“그러니 누가 과외비 받은걸 하루에 다 술쳐먹으라고 했냐?”
“지놈도 쳐먹었으면서? 아 과외 가기 싫다. 맨날 과외한다고 걸리는 학생이라고는 씨커먼 남학생들뿐이니 말도 더럽게 안들어요. 숙제도 하나도 안한다.”
“얘가 몰라서 그러네. 나 저번에 여자 중학생 과외했는데 얘가 나좋다고 맨날 편지써서 골치아팠어 여자애들이 더 문제라니까? 아! 왜 폭력을 쓰고 지랄이여?”
“꼭~ 매를 벌어요 이 놈은, 복에 겹냐? 암튼 나가서 그냥 딴거 사먹자!”
그말을 듣고 민망하게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던 둘은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서로의 입은 빨간 국물과 기름으로 번들거렸다.
“야 근데 우리 왜 이렇게 짐승처럼 먹냐?”
“이게 다 학교에서 맨날 도시락 까먹어서 그런거야. 그 속도에 너나 나나 습관이 되어 버린 것 뿐이야. 그리고 쉬는시간에 출출하면 꼭 매점가서 컵라면 사먹었잖아. 출출하지 않아도 따라가 배채우곤 했잖아.”
“하긴 우리는 학교다닐때 등록금이나 수업료 문제집값보다 식비가 훨씬 많았을거야. 그래도 나중에는 지성인처럼 젊잖게 먹자.”
그러자 성대가 왼손에 젓가락 오른손에 숟가락을 들고 닭개장을 쑤셔대기 시작했다.
“지성? 젊잖게? 야 이놈아 이게 무슨 비프스테이크냐? 넌 닭개장에서 닭고기 건져 칼질할거냐?”
“암튼 다음에는 좀 조심해서 먹자고 이놈아. 그래도 이제 대학생아니냐?”
“근데 아까 그 인간들 군대 갔다왔나? 말하는거 참 재수없구만.”
“우리도 멀지 않았다. 남 얘기 할거 아니라니까?”
“복학생인가 보다. 우리 형도 저러고 논다.”
“크크 돼지야 넌 몸 때문에 군대나 가겠냐? 체중초과로 못가는거 아니야?"
“군대 가는거 좋은것만은 아닌거 같더라. 우리형 군대 있을때 휴가나오면 보기가 참 안쓰럽더라. 나중에는 하도 자주나와서 보기 싫긴 했지만 말야. 뭐 지금은 전역하고 집에서 복학준비하고 있다. 자기 말로는 군대에서는 시간 잘간다고 빨리 군대가래. 그런데 자기가 100일휴가때 복귀하는날 시간 안간다고 자살하고싶다할땐 언제고.”
성문은 거만하게 팔짱을 낀채 대꾸하였다.
“그래도 남자의 로망은 군대 아니냐. 난 안보내준다면 병신되어버린데 고치고라도 갈거니 걱정말거라 자슥아.”
“나중에 갈 때 울지나 마라. 울형도 그 소리 하다가 훈련소에서 울었다고 엄마가 말씀해주시더라. 암튼 다 먹었으면 치우고 나가자. 난 집에가서 자고 싶다.”
“그렇게 퍼자니 그 살을 유지하지, 쯧쯧! 그래 얼렁 집에나 가자.”
성대는 입을 닦기위해 배치된 휴지를 마구뽑아 입을 닦기 시작했다.
“야 돼지야, 너는 똥닦을라고 휴지를 그리 많이 뽑았냐?”
“난 얼굴 면적이 넓잖냐.”
“그래도 니가 어떻게 생긴줄 아니 그건 참 다행이구나. 킥킥!”
“빨리 지하철이나 타러가자.”
“어떤 대학교는 지하철에서 내린뒤 마을버스 타고 가야 학교가 나온다더라. 그러면 지하철역 이름에 대학이름을 붙이지나 말던가!”
“그래도 이 학교는 오기가 편해서 좋다. 지하철역이 바로 옆이 잖냐?”
“쩝! 이 돼지는 지하철타고 오면 그나마 하던 걷기운동도 안되서 굴러 다닐텐데말야.”
“암튼 난 생긴대로 살다가 죽을란다. 야 빨리 교통카드 찍고 와라! 뭐하는거냐?”
성대는 지갑을 위에 올리고 역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성문은 계속 지갑을 올리는데도 삑삑하는 경고음만 들리는것이었다.
“돼지야! 카드에 잔액이 없나보다!”
“뭐라고 이 거지 같은놈!”
“야! 돼지 동전있음 줘봐. 표좀 하나 사오게.”
“너는 돈없냐? 니 돈으로 사거라!”
“성대야 돈좀 주세요~”
“필요할때만 이름 부르고 지랄이네? 웃기지마! 오던 말던 맘대로 해라!”
“저 노랭이 같은놈!”
“왜 지돈 안쓰고 나보고 뭐라그려? 노랭이? 이 스크루지의 화신아!”
“1000원짜리 깨기 싫어서 그래 자슥아!”
“니 천원은 이황선생님이고 내 천원은 이황놈이냐? 내가 세종대왕님이면 또 이해를해. 이황가지고 말야.”
“드러운놈! 넘어 간다~~”
성문은 훌쩍 뛰어넘어 역으로 들어왔다. 물론 주위의 시선은 둘에게 집중되었고 성대는 창피함에 자리를 슬슬피했으나 성문은 실실거리며 성대에게 다가왔다.
“야야~ 저리 떨어져라! 아는사람인줄 알겠다!”
“아잉~ 왜그러세요~ 저팔계님”
“아예 학교 망신 다시키고 살아라! 여기 학생이라 말도 하지마라! 나보고 아까 지성과 인성이 없다고? 그래 제대로 인성 가지신 그대께서는 어인일로?”
“암튼 나도 쪽팔리니까 빨리 가서 열차나 타자! 열차오는 소리 들린다.”
그들이 뛰어서 도착했을때 열차는 딱 멈춰 서있었다.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앉을만한 자리는 얼마 있지를 않았기에 둘은 겨우 뛰어들어 자리를 잡아 앉을수 있었다.
“언제부터 수업이냐, 홀쭉아?”
“내일부터 하는거 같은데. 이미 수업시간표는 다 짜여져 있나보더라?”
“그래? 고등학교도 아니고 말야.”
“이야기 들어보니 다음학기부터는 자기가 시간표 짤수 있다고 하더라. 시간표는 아까 입학식에서 받은거 보면 나와있다고 하더라. 아니면 학교 홈페이지 가보던가.”
“그렇단말이지? 젠장 내일 9시부터 수업이다.”
“크크! 그러냐? 불쌍한놈. 나는말야~ 어라 나도 9시 수업이네?”
“그러니 맘좀 곱게쓰고 그만 사람 놀려먹고 개과천선하거라. 근데 말야.. 잠깐!”
“왜그래, 돼지야?”
성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편 창문쪽으로 달려가 밖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수연이가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연이도 누구와 같이 오지 않은 듯 혼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도 보았냐, 돼지?”
성대는 뒤로 손을 흔들며 대답을 했다.
“초등학교때 같은반이었던 여자애인데 아까 보니 나와 같은과가 되었더라구.”
“그만보고 와서 앉아라. 앉지 않으면 후회할걸?”
“알았어! 기다려봐! 잘못봤나 아닌가 자세히 보게.”
“이쁘냐 계속 쳐다보게? 안오면 후회할텐데?”
“알았어! 갈게~ 어라?”
성대가 앉았던 자리는 이미 통통하신 아주머니께서 자리를 잡고 계셨다. 성문은 킥킥거리며 성대에게 속삭였다.
“거봐~ 후회할거라 했잖아. 크크크.. 으앗! 새로산 신발이란 말이야. 그 몸으로 내발을 밟으면 신발에 돼지기름묻고 발바닥은 뭉게지고 내발을 두! 번죽이는거다 이 돼지같은놈아!”
성대는 성문의 발을 다시 한번 지근지근 밟아준뒤 한마디 했다.
“뭐냐? 그 신발 NICE잖냐? 이 귀하신 몸이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어 주셨는데 엄살은, 킥킥!”
반대편 창문에는 수연의 모습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내일 수업에나 들어가서야 이야기 해볼수 있겠군. 생각해보면 시간도 정말 빠르구나. 벌써 대학에 들어오게 되다니.’
지하철이 터널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자 성대는 마치 자신의 기억도 빨려들어가는 듯 열차에 가만히 선채 예전 기억으로 빠져들었다.

 

 

4. 회상 (2)
“성대야~ 일어나라 씻고 밥먹고 학교가야지!”
“엄마.. 5분만 더잘게... 5분만..”
“5분? 빨리 안일어나!”
“5분만.... 아이고 추워! 춥단말야~”
성대를 깨우던 어머니는 일어나라는 명령에 성대가 일어나지 않자 지체없이 이불을 거두어 들였다.
“빨리 안일어나고 뭐해!”
“알았어요... 아아함~~”
“이불 정리잘하고 전에처럼 몸만 쑥빠져나오고 도망가면 혼난다~”
“네....”
성대는 졸린눈을 비비며 이불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6학년이 되는건가? 봄방학은 왜이렇게 짧은거야? 그래도 같은반이었던 애들이 6학년에서도 많이 같은반 된거 같은데말야. 오늘은 가면 일찍 끝나겠지? 끝나고 애들모아 오락실에 가서 실컷놀아야겠다.”
1학년때부터 5학년때까지 항상 1등을 도맡아온 성대는 반에서 인기가 좋은아이였다. 키가 크거나 잘생긴건 아니었지만 유머감각이 풍부한편이라 반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았고 싫어하는 아이들이 없었다. 이리저리 놀기도 무척 좋아하고 또 놀때도 항상 앞장서서 놀지만 그래도 항상 시험에서는 1등을 차지해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으며 선생님들도 홍성대라는 이름만 들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우등생이라고 추켜세우곤 하셨다. 잘생기지는 못했지만 재미있게 생겼기 때문에 반아이들로부터 받는 인기가 많았고 또 그 이유때문에 아이들에게 편안함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성대야~ 학교가자!”
밖에서 몇 명의 학교친구들이 아침밥을 먹고있는 성대를 부르기 시작했다. 성대는 밥을 먹다말다 가방을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엄마아빠!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뛰어나가던 성대의 뒤로 어머니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녀석아! 실내화 가방 가지고 가야지! 어째 그렇게 맨날 덜렁거리냐?”
“아하! 알았어요. 담부턴 잘챙길게요~”
성대는 그렇게 뛰어나온뒤 친구들과 함께 학교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등교시간은 5분정도밖에 남지 않은터였다.
“야! 홍성대! 너 늦으면 책임져 이놈아!”
“빨리 달리기나 해라! 늦겠다!”
“선도부한테 걸리면 골치아플텐데?”
성대는 실내화 가방을 휘돌리며 친구들에게 말했다.
“내가 잘해볼테니까 걱정 말어! 암튼 걸리지 않게 빨리 뛰자!”
다들 뛸수 있는한 뛰어왔으나 이미 선도부 친구들은 교문앞에 버티고 서서 지각하는 학생들을 붙잡거나 저학년 아이들 주머니를 뒤지다 나온 군것질 거리들을 먹으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그중에 한 선도부 녀석이 성대 일행을 불렀다.
“야 너희들 이리와봐!”
난처해하는 일행을 뒤로 하고 성대가 선도부앞에 가서 이야기를 하였다.
“친구끼리 뭐하러 그러냐? 내 친구들이니 다같이 그냥 들여보내줘라~”
“그래도 선생님이 잡아야 한다고 했단말야.”
또다른 덩치큰 선도부녀석이 군것질거리를 씹으면서 성대앞에 다가와 말했다.
“무조건 안된다니까! 빨리 여기서 무릎꿇고 손들어!”
그러자 성대가 덩치큰 선도부녀석에게 팔짱을 낀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그래 규칙을 어기면 혼나야 하긴 하는데... 너 입에 물고 있는거 뭐야? 저 쪼꼬만 애들한테서 뺏은거지?”
성대는 벌을 서고 저학년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얘가 먹는거 너희들한테서 빼앗은거지?”
“응.. 맞아.. 힝힝~”
성대는 덩치큰 선도부아이에게 말했다.
“우리야 벌서면 되지만 쟤네들한테 뺏은거 선도부선생님이 아시면 너희들은 더 많이 혼날텐데.. 안그러냐?”
선도부아이들은 당황한나머지 말을 더듬으며 소리쳤다.
“우흠... 그.. 그래 얼렁 들어가라! 2,3,4학년 니들도 빨리 교실들어가라!”
성대주위의 친구들은 모두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성대를 추켜세웠다.
“홍성대 최고! 따봉이다.”
“따봉? 따봉이 언제적건데 지금 따봉이냐. 근데 아까 선도부녀석들 쩔쩔매는거 봤냐?”
“킥킥! 속이 다 시원하더라. 저것들 덩치가 커서 뭐라고 말도 못하겠구, 저번에도 걸려서 벌서가지고 선생님한테 혼났거든?”
“야 빨리 들어가자! 선생님 먼저들어오시기 전에!”
성대를 비롯한 친구들은 재빨리 들어와 맨 뒷자리에 모여 앉았다. 다들 선생님한테 안들켰다고 킥킥거리는 순간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담임선생님은 약 40대정도로 보이는 중년의 아주머니였다.
“안녕하세요! 1년동안 6학년 1반의 담임을 맡게된 전은자라고 합니다. 여러분과 만나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1년뒤 중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1년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배치고사점수를 잘받아야 하고......”
성대는 선생님의 말들은 듣지않은채 아는친구들이 누가누가 왔나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중간쯤을 살펴보니 키가크고 예쁜아이 하나가 앉아있었다. 수연이었다.
‘쟤는 전교에서 1등한다는 여자애잖아? 그렇다면.. 난 반에서 1등도 한번 못해볼지도 모르겠네? 어쩌면 좋지?’
공부에서 항상 1등만 해보았던 성대는 그런걱정에 선생님의 말이 끝나고 수업이 끝날때까지 어떤말들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록 전체 1등은 못해 보았지만 자기말고 다른아이가 반에서 1등하는건 상상도 못해보았던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좀더 열심히 하면 되는거지 뭐! 저 여자애가 대수냐?’
성대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리고 그날 학교에서 성대는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친구들과 이야기 하고 놀면서 즐겁게 지냈지만 놀다가도 수연이가 우연히 눈에 띄면 그런 경쟁심이 자신도 모르게 생기곤 했었다. 틈만나면 항상 책상에 앉아 책을 읽으며 앉아 있는 수연의 모습에 긴장감이 들기도 하였다.
‘맞아, 6학년에 들어와 처음등교하던 날이었지? 초등학교 6학년의 기억은 별로 남아있는게 없는데 유독 그날만은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잘때까지 기억이 생생생해. 그날의 감정까지도 말야. 수연이를 처음보고 느낀 긴장감때문이었을까? 그땐 어리지만 여자애들한테도 워낙 매너가 좋다고 소문난터라 수연이에게 대놓고 짖궂게 하거나 뭐라고 말은 못했었지. 그래도 속으로는 괜히 미워하곤 했었는데. 그땐 왜 그랬나 몰라.’
성대는 지하철 문옆에 기댄채 그날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야 성대야, 너 어디 아프냐? 왜 실실 웃고 난리냐?”
“아니야, 그냥 옛날 생각나서 그래.”
성문은 알수없다는 표정을 지은채 고개를 기울인채 눈감고 자기 시작했다. 성대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은뒤 다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성대는 6학년 내내 한번도 수연이를 시험에서 이긴적이 없었다. 평소에 공부하지도 않고 시험을 치르던 성대는 1년내내 시험때만되면 책을 붙잡고 시험공부를 해서 부모님을 놀라게 했으나 결과는 항상 수연은 전체1등 성대는 전체2등, 즉 수연은 반에서 1등 성대는 반에서 2등이었다. 단 1점차이든 1문제 차이든 도저히 그 벽을 넘을수가 없었다.
‘그때는 어린마음이긴 했지만 내가 남자니까 그래서 애들한테 쪼잔하게 보일까봐 아무런 이야기도 못했었어. 하긴 내가 계속 6학년때까지도 맨날 1등만 했다면 중고등학교에 다닐적에 성적이 좋지 않았을때에 많이 방황했을지도 몰라. 생각해보면 수연이가 계속 1등을 했던게 지금에와서 생각해보면 나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
수연이도 말수가 적던 아이였고 성대도 굳이 수연이와 이야기하지는 않았기에 서로 별다른 이야기를 나눈 기억은 없었다. 있더라도 기억에 남아있는건 없었다. 하지만 워낙 예쁘장한터라 다른 남자아이들에게는 인기가 좋아서 어떻게든 수연이와 이야기해보거나 관심을 끌으려는 녀석들이 많이있었다. 그래서 여자아이들에게 은근히 질투의 대상이기도 했다. 성대는 다 잘하지만 털털한 모습으로 모두에게 편안함을 주는 타입이었다면 수연은 무언가 벽으로 둘러싸여있는듯한 느낌이 들어서 여자아이들은 수연에게 불편함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남자아이들은 수연이만 좋아하니 여자아이들에게 좋은소리를 못듣는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후 수연이는 여자중학교에 입학한후 1학년을 마치고 대전으로 전학갔다는 소식만 들었는데 여기서 그것도 같은과에서 만나게 된것도 참 우연이군... 생각해보니 더 신기한건 대혁이야. 항상 교실뒷편에 놓인 화분에 물만주고 시험성적은 그냥 잘하지도 아주못하지도 않고 중간정도 하던 녀석이었는데 그동안 열심히 공부한건가?’
성대는 별로 신경조차 쓰지 않던 대혁이가 결국은 자신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사실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성대의 기억속의 대혁은 항상 맨뒷자리에 앉아서 무언가 골똘히 생각만하는 모습뿐이었다. 그리고 다들 청소가 하기 싫어서 몰래 빠져나갈 때 유독 대혁이만은 남아서 청소를 했었다. 그래서 대혁이와 청소당번이 걸릴때면 다른친구들은 전부 청소를 하지 않은채 교실을 빠져나가곤했다.
‘하긴 그녀석과 당번이 걸리면 나도 항상 빠져 나가곤했지. 그래도 대혁이는 아무 불만도 화도 내지 않았었어. 지금 돌이켜보면 말이 없고 좀 이상한 행동을 해서 그랬을뿐이지 다른애들한테 피해를 준적도 없고 착한 녀석이었는데말야. 거기다가 다들 가장 귀찮아서 하기 싫어하던 화단에 물주기 당번이나 교실뒷편 화분의 물주기는 시키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손들고 도맡아 했었어. 그점에서는 우리반 애들이 가장 편했을거야. 덕분에 교실 미화점수도 우리가 가장 높았지.’
따지고 보면 대혁이 혼자 열심히 교실 미화에 힘쓴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워낙 표가 안나게 하는터라 선생님이 칭찬해 주는 경우도 반친구들이 칭찬해 주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런게 당연하게 되어버린 듯 모두들 미화에 조금만 문제가 생기면 일단 대혁이를 먼저 불렀고 대혁이는 그저 묵묵히 할 따름이었다.
성대는 흔들리는 지하철문에 기대 그 진동을 느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후 대혁이에 관해서는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던 것 같아. 종종 반창회를 했어도 수연이같이 전학간친구들은 전학갔다는 소식정도는 들었어도 대혁이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들은적이 없었어.’
사실 가끔 모임을 가지던 반창회에서도 대혁이 이야기는 나온적이 없었다. 성대도 졸업후 대혁이가 어느학교를 갔는지 무엇을 하는지 관심을 가진적도 없었고 또한 어떤 누구도 관심을 가져 물어보거나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같은 대학같은과에서 만나게 되었다고 이제서야 겨우 관심을 가지게 된게 약간은 미안하기도 했다. 괜히 과에 아는 사람도 없어서 예전에 관심도 없던 녀석에게 당분간 혼자지내기 심심하다고 찾아가 아는척 한다는 것은 왠지 속물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별의별 생각이 다드는군. 어쨌든 별다른 친분은 없었어도 다가가 먼저 인사해주는게 좋은거 아닌가?’
성대는 복잡했던 감정을 접고 나름대로의 논리로 자신을 정당화하려 계속 그런 생각을 머리에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이힝~~ 잘잤다! 몇 정거장이나 남았냐?”
졸린눈을 비비며 성문은 기지개를 펴가며 물었다. 사람들로 꽉찬 의자에 앉아서 무릎을 붙잡고 기지개를 펴는 모습을 보니 성대는 웃음이 나오지 않을수 없었다. 영락없이 바닥에 없드려 기지개 펴는 똥개의 모습같았다.
“기지개 폼은 완전히 도그베이비구만 크크!”
“에엥? 피그베이비가 지랄한다~ 암튼 몇정거장 남았냐?”
“신기한놈, 인제 딱 한정거장 남았다. 뭐 이런놈이 다있지?”
“헤헤헤, 내가 배고플때 울리는 배꼽시계나 이렇게 지하철이나 버스타다가 시간맞춰 울리는 알람시계는 거의 원자시계 수준이라니까? 거 가장 정확하다는 시계가 으흠.. 뭐더라?”
“세슘시계 아니냐~ 이 멍청아! 그러고도 공대들어갔냐?”
“암튼간 이 피그베이비야! 그 세슘시계는 날 기준으로 맞춰야 한다니까? 킥킥!”
“세슘은 거 방사선이 나온다는 원소아니냐?”
“어라? 문과녀석이 별걸 다 기억하네? 맞는데?”
“넌 세슘이 아니라 칼슘일거야.”
“칼슘은 방사선원소가 아니다. 이 무식한 녀석아~”
그러자 성대는 성문이의 가느다란 팔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마 칼슘이 방사선원소라면 네 뼈는 이미 붕괴되어 골다공증일것이다. 너는 이미 붕괴되고 있다!”
“어라 이 돼지가? 그게 웃기냐! 그게 하이퀄리티 유머냐! 웃기냐! 웃기냐!”
그들의 대화와 육두문자가 오감에 따라 주위의 사람들은 점점 그들로부터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지하철칸의 분위기는 이미 붕괴되고 있었다
 

 

 


5. 귀향 (1)
‘다시 돌아왔구나.’
역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에 밀린 바람이 수연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은 몹시 차갑고 또 그다지 좋지 않은 냄새가 느껴졌다. 하지만 수연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황색 안전선 밖으로 물러서라는 승무원의 감정없는 목소리조차도 반가울 따름이었다.
‘다시는 여기로 돌아오지 못할것만 같았는데...’
수연은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하철 자리에 앉았다. 지하철에는 몇몇 아이들이 떠드는 것을 제외하고는 한산했다. 그래서 그런지 수연은 아이들의 소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근처에는 아이 어머니인 듯한 젊은 여자가 자리에 앉아있었지만 아이들에게 별다른 야단이나 제재는 없었다.
‘저렇게 아이들을 기르면 너무 버릇없어 지지는 않을까?’
수연은 아이들을 보며 얼마전에 보았던 TV 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
‘부모들이 저렇게 무엇이든 아이들이 하고 싶은대로 내버려두고 뭐든지 해주려고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걸까?’
그 다큐멘터리에서는 버려지는 노인들에 대한 문제를 대대적으로 다루었다. 수연이 이해 할 수 없었던던건 버려지는 노인들 상당수가 자식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자식이 너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미안함을 느껴 스스로 가출을 하는 노인도 있었다. 하지만 자식들이 생활의 여유가 충분히 있음에도 형제자매 서로가 그 책임을 떠넘기며 자신들을 헌신적으로 길러주었던 부모님을 버린다거나 스스로 나가도록 내몬다는것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TV에서 종종 보이는 부모와 자식의 감동적인 사연이나 화목한 모습은 그리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 더 자주 보이는건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가에 대해 혼란해졌다.
‘부모님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길러 주셨다면 최소한의 보답은 해야 하는게 도리가 아닐까? 모든 것이 다하고 늙어 더 이상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못하다는 이유로 노인들을 버린다는건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어.’
아이가 지하철 내부를 뛰어다니며 소란스럽게 하는걸 그대로 두고보며 웃는 아이어머니의 표정에는 아이에 대한 그 어떤 질책의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 아이를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볼 뿐 이었다. 수연은 그 여인의 얼굴과 눈빛이 아침에 입학식에 오기위해 지나쳤던 지하도에서 구걸을 하기위해 손벌리며 앉아있던 할머니의 얼굴과 비슷해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혹시 이 아주머니는 아까 그 할머니의 자식은 아닐까?’
수연은 쓸데 없는 생각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또 다른 의문이 머리를 스쳐갔다.
‘아까 지하도에서 본 할머니도 자식들을 저런 맹목적인 사랑으로 키웠을까? 그렇게 모든 것을 다해 남 부럽지 않게 못 해주는 것 없이 키우려 모든걸 다 쏟고 늙고 병들어지자 자식들이 버린건 아닐까? 만약 그 자식중의 하나가 저 아주머니라면 그 자신의 운명도 그 어머니나 아버지와 똑같이 반복되는건 아닐까?’
수연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자 예전에 들었던 사마귀의 습성이 떠올랐다. 암컷은 교미를 할때 수컷을 잡아먹는다. 그런데도 수컷은 아무런 저항없이 순순히 암컷에게 머리를 내주며 희생한다. 그렇게 수컷은 자신의 후손을 남기는 동시에 암컷의 몸에 흡수되어 자신의 새끼들에게 양분이 되어준다. 그러나 암컷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암컷이 알을 낳으면 알에서 나온 수많은 새끼들은 암컷의 몸을 뜯어먹고 자란다. 수연은 사마귀의 그런 운명이 오래전부터 계속 되어 온 그들만의 생존방식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사람의 운명은 적어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 역시 사마귀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하는 기계처럼 돈을 벌면 외국에서 공부하는 자식들에게 몇 년간 돈을 쏟아 보내는 기러기 아빠들, 자식의 사교육비가 모자라 유흥업소에 일하다가 적발되어 TV에 종종 등장하는 애엄마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채 그저 부모가 해주는 대로 그리고 하고 싶은대로 왕자처럼 자라나는 아이들, 모두 사마귀와 인간이라는것만 다를뿐이지 그 삶의 본질이 사마귀와 다른게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다들 너무 소중한걸 잊고 살아가는건 아닐까?’
저기서 뛰어노는 철없는 아이의 아버지는 지금쯤 일터에서 가족만을 생각하며 일하고 있을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자 수연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였다.
‘아빠......’
수연이 서울에서 대전으로 전학을 갔던건 대기업 말단과장이셨던 아버지께서 인사고과에서 밀려 근무지를 옮기시게 되었을때였다. 수연의 어머니는 수연이와 동생 수완의 교육을 위해서 주말부부가 되더라도 당신혼자만 대전으로 가는게 좋지 않겠느냐며 가족 모두가 이사를 가는 것을 반대하셨다. 아버지는 그말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중요한건 가족이 같이 모여사는 것이 아니겠냐 하시면서 모두가 같이 이사를 가길 권했다. 동생 수완이는 그 말에 수긍하면서 또 아직은 좀 어린지라 별다른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지만 수연이는 서울을 벗어난다는 사실이 너무나 싫었다. 그래서 수연은 자주 가족이 다모인 식사시간에 아버지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곤 하였다.
“아빠, 정말 우리 가족 모두 가야만 해요?”
수연의 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수연의 말에 대답을 했다.
“그럼 어떡하니... 나도 서울에 머물고 싶기는 하지만 직장에서 결정이 그렇게 나버렸으니 할수 없구나. 그렇다고 내가 그만두고 여기서 마땅히 할 수 있는것도 없고 또 가족끼리 몇 년동안 생이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니?”
수연은 목소리를 높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빠도 서울의 교육여건이 지방보다 훨씬 나은편이라는건 누구보다도 잘 아시잖아요? 다른 애들 얘기 들어보니 남들은 엄마랑 애들이랑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게 아빠들이 도와준다는데.”
수연의 아버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자 수연의 어머니도 수연의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래요, 우리가 수연이 수완이 공부시키는거 그렇게 까지는 못해도 그정도는 몇 년정도 참 을수 있지 않아요? 우리가 무슨 외국에 애들 보낼 능력이 되는것도 아니고요.”
그러자 아버지는 숟가락을 놓고 조용히 한마디 하신뒤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지금처럼 우리 가족이 같이 모여 식사를 할 수 있는날이 얼마나 된다고 그러는지 모르겠구나...”
수연이는 괜히 심통이나 어머니한테 투덜대기 시작했다.
“나는 가기 싫단말야, 그리고 아빠가 평생 대전에 있는것도 아니잖아? 나도 수완이도 거기 가면 처음이라 적응하는데 고생할텐데.”
그러자 수완은 시큰둥하게 한마디해서 수연에게 뒤통수를 한대 맞았다.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히히히~ 누나는 아빠싫어? 난 아빠랑 같이 있는게 좋다. 친구들도 새로 사귀고 놀면 되지뭐. 아야! 왜때려!”
수연은 화가나서 수완이를 한대 더 때리고 식탁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그래! 싫어! 다싫단 말야! 난 안갈거야! 다 간다고 해도 나는 안갈거야!”
“수연아!”
“누나는 괜히 심술내고 나만 때리고 난리야. 칫!”
수연은 방에 들어가다가 안방의 문이 열린틈으로 아버지를 볼수 있었다. 수연의 아버지는 한숨만 쉬며 창밖을 바라보고 계셨다. 수연은 그 모습이 더 미워져서 방에 들어와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후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 끝나갈 무렵 수연의 가족은 모두 아버지가 근무를 하게될 대전으로 이사를 가게되었다.
수연이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남녀공학중학교 대신 그보다는 약간 떨어진곳에 위치한 여자중학교에 입학하기로 했다. 그 여자중학교에는 아버지와 같은 고등학교 친구가 선생님으로 계신터라 수연의 아버지에게 자기 학교와주기를 부탁했다. 신생학교인지라 나중에 우수한 아이들을 유치하기위해서는 수연이 같은 우등생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수연은 아버지와 함께 전학을 하기 위한 절차를 밟기위해서 그 학교를 방문하였다. 처음 학교 정문에 들어왔을때 수연은 다리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다시는 서울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에 갇혀 버리게 되는건 아닐까 하는생각에 서글픈 감정이 들었고 또 여기까지 굳이 끌고온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아직 방학이고 날씨가 추웠기 때문에 학교에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아직 건물이 지은지 오래되지 않아 깨끗한게 그나마 수연에게 위안이 되었다.
“운환이, 자네 왔나?”
아버지가 교무실을 열자 중년의 새치가 많은 남자하나가 일어섰다. 아버지의 고등학교 친구인 신형섭선생이었다. 둘은 반가운마음에 포옹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게 몇 년만이지? 고등학교 동기모임이후 4~5년은 된 것 같은데.”
“그렇지? 자네나 나나 바쁘기는 똑같지 않나?”
“나는 좀 덜한편이지 자네는 요즘 많이 힘들지 않은가? 요즘 들리는 이야기로는 자네 회사에서 감원을 많이 하고 있다는 듯 한데.”
“그래도 애들 보는맛에 사는거지 뭐. 그 보람 아니면 이짓 하기도 힘들어.”
“따님은 어디 계신가?”
수연이는 교무실 밖에서 쭈삣쭈삣거리며 서있었다.
“수연아 들어와라 여기 선생님께 인사드려야지?”
고개를 숙인재 힘없이 들어온 수연이는 신선생에게 성의없이 인사를 하였다.
“네.. 안녕하세요...”
신선생은 수연의 아버지에게 말을 하였다.
“오호라, 운환이 자네 딸이 똑똑하다고 듣기는 했는데 이렇게 이쁠줄은 몰랐네그려. 자네를 닮은건 절대 아닌거 같고?”
“나 닮으면 안되지, 지 엄마 닮아서 그렇다네.”
수연의 귀에는 어떤말도 좋게 들리지 않았다. 그저 모든게 불만 스러울 따름이었다. 신선생이 수연에게 물었다.
“수연이는 나중에 뭐가 되고 싶니?”
수연은 당연하다는 듯 힘주어 말했다.
“저는 법대에 가서 판사가 될거에요.”
신선생은 의외라는 듯이 대물었다.
“판사라고? 어허, 당찬데? 남자애들 말고는 이런 이야기하는 학생들이 별로 없는데 판사가 되고 싶다니.”
수연은 오기가 나서 신선생에게 따지듯이 대답했다.
“여자라고 판사 못한다는 법이있나요? 저는 열심히 해서 꼭 판사가 될거에요.”
수연의 아버지는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얘는 어렸을때부터 판사가 하고 싶다고 검은 가운하고 법관모를 사달라고 했던 애야. 법관모는 못사고 가운은 사줬는데 집에서 그걸 심심할때마다 거울앞에서 입어보곤 했다네. 애가 그걸 하고 싶다는데 그걸 말릴수는 없지 않겠나?”
신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 말이맞아, 남자애들은 이거하고 여자애들은 이거 하라는법은 없지. 어쩌면 그래서 여자중학교가 남녀공학보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네. 그리고 여기가 개교한지 1년밖에 안되어서 시설도 괜찮은 편이고 게다가 나보다도 훨씬 젊은 선생들이 많아 아이들에게 열정이 대단하지.”
“그래, 내 자네 만을 믿고 이아이를 여기에 전학시키겠네.”
이렇게 해서 수연은 다음 1학기부터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비록 처음이라 서먹서먹 하긴 했지만 신생학교고 새로지은 아파트단지에서 많은 학생들이 와서 반이 많았던터라 사실상 이미 1학년을 다녔어도 서로 모르는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수연이 새로 적응하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수연의 성적은 좋아서 단연 학교에서 가장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다. 게다가 상당히 예쁜편이라 다른 여학생들이 질투할만도 했지만 굳이 그런 티를 내지 않아 다른 학생들과도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 하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겉으로만 그랬지 내심 반친구들을 대단히 무시하곤 했다. 굳이 티를 내서 안좋은 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수연이는 다른 친구들에게 공부도 잘하는데 잘난척 안하고 또 겸손하다는 소리까지 들어서 평판도 매우 좋았다. 어머니도 수완이도 전부다 이런 생활을 맘에 들어했지만 수연은 항상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저녁식사를 할때나 휴일에 같이 식사를 할때에도 얼마 먹지도 않은채 자리를 피하곤 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의 횟수도 계속 줄어갔다. 그렇게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한뒤 얼마후였다.
“수연아 빨리 교무실에 와봐! 전화받어!”
그날 주번이던 정희는 갑자기 뛰어와 교실앞에서 큰소리로 수연이를 불렀다. 책을 보고 있던 수연이는 어리둥절한 나머지 정희만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일이야 정희야?”
정희는 답답하다는 듯 수연이의 손을 붙잡고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너희 아버지가 쓰러지셨대!”
“뭐?”
수연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수연이는 정신이 아득해져 정희의 말이 마치 메아리처럼 들렸다. 아침에도 별탈없이 출근하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시다니, 잔병치레조차도 잘 안하시던분이 갑자기 쓰러지셨다는걸 믿을수 없었다. 교무실문을 열자 주임선생님이 상기되어있는 수연이를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수연아, 진정하고 잘들어라. 지금 아버지께서 쓰러지신뒤 근처 대학병원으로 입원하셨다. 아마 별 탈은 없으실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수업은 이미 다 끝났으니 보충수업과 야간자습은 하지 말고 병원에 가서 아버지를 돌봐드리거라.”
수연은 별 탈없을거라는 이야기에 안심을 하였다. 그러자 시험 생각이 났다. 다음주에 중간고사기간이라 공부를 게을리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에요, 선생님. 별 탈 없을거라니까 안심이네요. 그냥 공부다하고 병원에 찾아갈게요. 중간고사기간도 얼마안남았는데요. 아빠도 제가 공부 잘하고 있기를 바라실거에요.”
그러자 주임선생님은 걱정되는 표정으로 수연에게 물었다.
“그래도 괜찮겠니?”
수연은 걱정은 되긴 했지만 대답을 했다.
“네, 다하고 갈게요.”
교무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희는 수연에게 물었다
“아버지 괜찮으시데? 가봐야 되는거아냐?”
“별탈은 없으시다니 괜찮을거야.”
“정말 괜찮을까... 큰일이네.”
교실에 들어온 수연은 다시 책을 펴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보충수업이 귀에 잘들려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집중해 들으려 했고 자율학습역시 집중해서 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학교 일과를 마치고나서 교문을 나온뒤 아버지가 입원했다는 대학병원을 향해 택시를 탔다. 병원 1층 데스크에 있는 간호사에게 아버지의 위치를 물었다.
“김운환씨는 지금 어느 병실에 계시나요?”
간호사는 힐끗 수연이를 보더니 사무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김운환씨는 지금 응급실에 계시고 면회시간이 지나서 면회가 안됩니다.”
수연이는 당황하면서 다시 간호사에게 물었다.
“저는 김운환씨 딸이거든요? 그래도 면회가 안되나요? 급하거든요”
그러자 간호사는 별 대꾸가 없다가 귀찮다는 듯이 짧게 말했다.
“저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면 응급실이 나와요.”
수연은 간호사의 불친절함에 불쾌함을 느끼며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의 천장에 있던 전등은 갈은지 꽤나 오래된 듯 먼지가 덮여있고 또 그 불빛은 매우 희미해서 조심스럽게 올라야만 했다. 수연은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뭔가 잘못된건 아닐까?’

 

 

 


6. 귀향 (2)
수연의 그때의 기억에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지하철 내부의 불빛은 마치 그때 계단에서 보았던 희미한 불빛처럼 창백했다. 당시에 느꼈던 불안한 감정들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기억속에서 맴돌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일이었다. 수연은 지하철 좌석 반대편 창문으로 비치는 얼굴을 보자 새삼스럽게 자신이 아버지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지금 날 지켜보고 계실까?’
계단에서 내려와 응급실로 가는 복도는 길진 않았지만 조명이 계단보다도 약해서 길게 느껴졌다. 발걸음을 한걸음 한걸음씩 옮길때마다 왠지모를 불안감에 응급실로 통하는 문을 열기가 두려워졌다. 수연은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 문앞에서 심호흡을 몇 번한후 응급실 문을 열었다.
“끼이익...”
“으음.”
수연은 응급실 내부의 매우 밝은 조명 때문에 눈이 부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렸다. 잠시후 그 빛에 적응이 되자 응급실 내부의 상황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 어떡해!”
수연은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잠시 충격을 받았다. 노환으로 힘겹게 숨을 내쉬며 누워 있는 노인들도 많았지만 그 보다는 사고로 인해 응급실에 실려온사람이 훨씬 많았다. 머리가 다 깨진채 숨을 헐떡이는 사람들도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너무나 심하게 다쳤는지 의사들 몇 명이 모여서 그 자리에서 직접 급한대로 수술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곳곳에서 환자의 가족인듯한 몇몇 사람들이 오열하고 있었다. 그중에 너무 정신적 충격을 받아 쓰러진 몇몇 사람들은 주위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옮겨지기도 하였다. 수연은 믿을수 없는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원래 응급실이란 이런곳인가?’
수연은 몇 년전에 가보았던 소아암 병동이 기억났다. 수연이와 같은반이었던 한아이가 백혈병에 걸려 학교에 나오지 못하게 되자 반아이들 모두 몇 명씩 짝이 되어 돌아가면서 면회를 갔던것이다. 수연은 처음에 그 병동에 입원해 있는 아이들이 아프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수 가 없었다. 수연이가 병원에 도착해서 처음 본 광경은 환자복을 입었지만 건강해 보이는 조그만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이었다. 다들 해맑게 웃고 있었고 얼굴 어디에도 아픈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병실에서본 그 아이의 모습도 마찬가지 였다. 머리가 빠진게 창피하다고 모자를 쓰고 있기는 했지만 도대체 어디가 그렇게 아파서 입원한것인지 수연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애의 이름이 뭐였더라...’
수연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것도 아닌데 그 아이의 이름이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답답해졌다. 한편으로 그 아이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 아이는 내가 이름조차 기억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면회를 다녀온 며칠후 담임선생님께서는 그 아이가 하늘나라로 떠났다고 이야기 해주시면서 눈물을 글썽이셨다. 그리고 반아이들도 같이 울기 시작했다. 수연이는 그런 반분위기에 괜히 슬퍼져 눈물이 나기는 했지만 그 사실이 전혀 믿겨지지 않았다. 나중에 그 아이의 병명이 급성백혈병이라는 백혈병중에서도 특이한 병이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갑자기 멀쩡해 보이는 아이가 세상을 떠났다는건 이해 할수 없는 일이었다.
“수연아!”
“누나! 어엉~”
응급실 맨 구석자리에서 누군가가 수연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와 수완이었다. 수연이는 불안한 마음에 설마설마하며 다가갔다. 어머니는 다가온 수연을 붙잡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왜 이제 온거니, 이것아! 조금만 더 빨리왔어도... 흑흑!”
수연은 눈물로 젖어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소리야? 엄마! 아빠가 잘못된거는 아니지? 그렇지? 아니지?”
옆에 있던 수완이도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누나... 왜 이제야 온거야.. 흐흑... 아버지 방금 돌아가셨단 말야!”
수연은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눈에 보이는 모든게 어지럽게 보이고 주위에서 들려오는 통곡소리에 정신이 멍해지기 시작했다. 수연은 믿어지지 않아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 어머니의 옷깃을 붙잡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럴리가! 엄마! 무슨 소리 하는거야! 저거 보란말야! 아빠 멀쩡하잖아! 하나도 다치신데도 없고 멀쩡히 주무시잖아! 왜 거짓말 하는거야! 왜!”
그때 의사하나가 그런 수연이를 뒤로 한 채 아버지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가 하얀 천을 덮기 시작했다. 수연이는 오열하면서 의사를 밀치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의사선생님! 왜 그래요? 그냥 주무시고 계신거잖아요? 왜 아빠를 죽은 사람 취급하는 거에요? 좀 이따가 일어나셔서 집으로 같이 갈거란 말이에요! 뭐하는 거냐구요!”
“수연아!”
“누나! 괜찮아!”
수연이는 그렇게 소리치다가 쓰러졌고 그것이 응급실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으음.”
지하철이 터널에서 빠져나오자 수연의 바로앞 창문을 통해 햇빛이 비쳤다. 수연이는 눈은 뜨고 있기는 했지만 거의 반은 잠든채로 예전의 기억을 회상했기 때문에 갑자기 눈에 햇빛이 비치자 순간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수연은 잠시 눈을 비비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 저 하늘에서 날 보고 계시겠지?’
아버지의 사인은 과로사였다. 아버지는 인사고과에서 밀려 대전지사로 좌천되다시피 오신거라 새로 옮긴곳에서는 더 이상 밀리지 않기위해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셔서 야근하실때가 잦았다. 다행히 회사측으로부터는 위로금등을 비롯해 많은돈을 받을수 있었고 아버지가 생전에 가족 몰래 들어놓으신 보험 때문에 보험회사로 부터도 상당한 금액의 보험금을 받을수 있었다. 그후 가장의 부재로 인한 수연이 집의 경제적인 문제는 별탈없이 해결되긴 했지만 그것은 수연과 남아있는 가족에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했다. 돈을 쓰게 되더라도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아버지의 목숨을 갉아 먹는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수연아, 아빠는 저위에서 우릴 잘돌봐주고 계실테니 걱정말고 너 하던 공부나 열심히 하도록 하렴.”
장례식이 모두 끝나고 아버지를 선산에 있는 장지에 묻은뒤 내려오는 길에서 어머니는 수연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야기를 하셨다.
“그렇게 네가 싫다고 하는데도 아빠가 대전으로 이사가자고 했던건 우리가족의 얼굴을 몇 년이라도 더보고 싶어서였나보구나.”
“그만해 엄마! 흐흑...”
수연이는 그동안 자신이 아버지에게 했던 일들이 너무나 후회되어 눈물을 흘리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흑흑.. 난 왜 맨날 아빠한테 투덜거리기만 했을까... 난 아빠를 정말 좋아했는데 왜 나는 항상 아빠를 차갑게만 대했을까... 너무나 후회돼 엄마.”
“수연아..."
수연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러다가 지하철에 타고있음을 깨닫고 얼른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누가 보았나 안보았나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자신의 근처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또 푼수처럼 울었네. 창피하게... 즐거운 생각만 하면서 살기도 모자란데 맨날 이렇게 청승이라니...’
수연은 가라앉은 달래기 위해 그동안 있었던 이런 저런 즐거웠던 일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또 무언가 기억이 난 듯 팔짱을 낀채로 생각에 잠겼다.
‘근데 도데체 누구일까? 이름도 없고 주소도 없고...’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가을 어느날, 수연이는 2학기가 되어서는 야간자습이 끝나면 학원으로가서 보충수업을 받은뒤 12시가 넘어 집에 들어오는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집에 들어오면 1시간이상은 더 공부를 하다 자곤했다. 수연의 어머니는 수연이가 그렇게 무리하다가 수능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쓰러지는게 아닌가 하고 걱정을 했지만 수연이는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거니까 걱정말라며 어머니를 안심시키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삐이이익~~ 3학년 2반 김수연! 소포가 왔으니 교무실로 와라. 삐이익~~”
교실의 낡은 스피커를 통해 수학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친구들과 점심을 먹은뒤 남은 점심시간동안 문제집을 꺼내풀고 있던 수연은 그 소리에 귀가 아파 귀를 틀어막았다. 수연이는 자기 이름을 들은거 같아서 짝꿍 지연이에게 물었다.
“지연아, 지금 교무실에서 나를 불렀니?”
“너한테 소포가 왔다는데... 어디서 문제집이라도 우편으로 시킨거니?”
“아무리 시간이 아깝다고 해도 설마 문제집까지 우편으로 참 잘 시키겠다~ 이상하네 나에게 왠 소포지?”
“아무튼 가봐, 또 늦게가면 하이에나가 지랄하겠다.”
“하긴 그 하이에나가 소포 뜯어먹을지 모르겠다. 하이에나는 뼈까지도 먹어서 소화 시킨다며? 킥킥! 그나저나 저 스피커 안고쳐주나. 누가 우리반와서 수능볼지 모르지만 듣기 평가할 때 무지 고생하겠다.”
수연은 지연이에게 농담을 한후 교무실로 달려갔다. 교무실에는 수학선생님이 소포를 이리저리 훑어보며 냄새를 맡고 계셨다. 수연은 그 모습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웃음을 참은채 교무실로 들어갔다.
‘냄새 맡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하이에나구나. 에휴~’
수연은 정신없이 소포를 살펴보고 계신 수학선생님에게 다가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어 수연이 왔니?”
수학선생님은 살펴보던 소포를 책상에 놓고 수연에게 말했다.
“수연아, 누가 보낸거니? 보낸사람 이름도 안쓰여있고 이상한 소포네. 냄새를 맡아보니 사탕하고 초코렛 냄새같은게 나는데?”
“선생님은 뭐하러 남의 소포를 냄새 맡아보세요! 가볼게요.”
수연은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서 소포를 빼았듯이 들고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저 선생님은 하이에나가 아니라 변태가 딱 맞아, 무슨 냄새를 그렇게 맡아대는거야, 에이 재수없어!’
수연은 투덜거리면서 소포를 들고오다 자신도 냄새를 맡아보며 안에 들은 것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냄새도 안나는데...’
수연이 교실문을 열고 들어오자 지연이 무척이나 궁금한 듯 기다렸다는 듯이 소포를 빼았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게 뭘까? 흔들어보니 뭐가 들어있기는 한 것 같은데.”
“글쎄, 하이에나는 사탕하고 초코렛 냄새가 난다고 하더라?”
“사탕하고 초코렛? 킁킁! 난 아무냄새도 안나는데... 일단 뭔지 열어보자 궁금해 미치겠다.”
“그래.”
지연은 순식간에 포장을 다 벗겨내었다. 그러자 그안에는 초코렛상자가 하나 들어있었다. 지연이는 놀라운 듯 소리쳤다.
“수연아! 진짜 초코렛하고 사탕이다! 하이에나 정말 개코다! 사람이 아니네!”
“뭐 초코렛!”
그러자 반은 갑자기 술렁이더니 정말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하나둘씩 수연의 자리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수연아 나도 하나만 줘!”
“너는 오늘부터 다이어트 한다며?”
“다이어트? 으흠.. 내일부터 하며 되는거지 뭐~ 하나만도~”
“다 먹고 굴러다녀라~ 이것아”
“나중에 대학가서 미팅할 때 뱃살 삐져나온거 남자가 보면 쪽팔려 하지 않겠냐?”
“이걸 확! 잔소리 말고~ 수연이 하나만~ 이잉~”
“야! 모자란다 반씩 나눠먹자!”
수연이는 초코렛을 하나도 집지도 못한채 밀려났다. 수연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다가 할수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때였다.
“수연아! 상자안에 카드가 들어있어!”
“카드?”
수연은 깜짝놀라 그 카드를 빼앗아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반 아이들 모두 그카드를 보기위해 수연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 카드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아서 모두들 당황했다.
반 아이들은 모두 수연이를 보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어우~ 저 내숭덩어리! 없는척 하면서 실은 다있었네~”
“세상에... 열길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더니 어쩜~”
“그러게 말이야, 수연이 얘가 이럴줄은~”
“누군 좋겠다~ 이런것도 챙겨줄 남자친구도 있고~”
“누구는 팔자도 좋아서 얼굴도 이쁘고~ 난 화이트데이날 내가 사탕을 사먹는다니까? 에휴~”
수연은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으며 말했다.
“아..아니야 얘들아, 그런거 아니야, 정말 누..누가 보냈는지 모른단 말야.”
그러나 그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줄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수연의 주위는 여인들의 수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김수연! 네가 내 매마른 가슴에 불을 지르는구나!”
“넌 불만 지르는게 아니라 기름도 붓고 있다.”
“그러면 내가 부채질 해줄게 킥킥킥!”
“아니 이년이!”
그런 소란스러움속에서 수연은 예상도 못했던 소포에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멋진사람이 이런 선물을 보냈을까 하는생각에 내심 매우 기뻐하는 터였다. 수연이 이런 선물을 받아본건 몇년전 화이트데이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후 수능전날과 성탄절에도 선물이 발송자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은채 수연의 학교에 배달되었다.
‘맞아, 그때도 이렇게 이름이 없는 소포가 집에 왔었지.’
중학교에 입학한지 얼마안된때였다. 아직은 다들 어려 남자친구가 있는 여자아이들은 많지 않았지만 개중에 몇 명은 남자친구에게 사탕을 선물받았다며 자랑하는 아이들도 종종 있었다. 수연은 겉으로는 시큰둥하며 한심하다는 듯 그 아이들을 쳐다보았지만 내심 그 아이들이 부러운건 어쩔수 없었다. 그래서 괜한 심술에 그런 친구들에게 몇마디씩 쏘아 붙이기도 하였지만 수업을 마친후 돌아오는 길은 평소보다 괜히 무거웠다.
‘걔네들은 사탕을 처음 먹어보나? 흥!’
수연은 괜한 심술에 신발을 끌며 집앞까지 걸었다. 그리고 현관문앞에서 신경질적으로 초인종을 부술 듯이 눌러댔다.
“엄마! 나왔어!”
수연의 어머니는 괜히 얼굴이 부어있는 수연이 의아해서 묻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무슨일 있던거니?”
수연은 괜한 심술에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아무일도 없었어! 나 방에 들어갈게!”
수연의 어머니는 그런 수연을 붙잡아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수연은 그럴틈도 없이 방안에 들어와 가방을 던졌다.
“초등학교에 다닐때에는 알아서 이것저것 사탕 가져다 주는 남자애들도 많더니 여자중학교에 오니까 이게 뭐야! 난 사탕한번 못받아본줄 아나? 흥! 근데 저건뭐지?”
수연의 책상위에는 상자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수연은 다가가 그 상자를 살펴보았다. 상자에는 수연의 집주소외에는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았다.
“누가 보낸거지?”
그때 수연의 어머니가 수연의 방안으로 들어왔다. 수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어머니에게 물었다.
“이건 뭐야? 보낸 사람이름도 없고... 뭐지.”
“글쎄다. 아까 아침에 왔는데 나도 뭔지는 모르겠구나. 엄마는 시장에 다녀올테니 그동안 집잘보고 있으렴.”
“알았어 엄마!”
수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포를 조심스레 뜯기 시작했다. 소포를 뜯자 예쁘게 포장된 상자가 나왔다.
“설마... 화이트.. 와아~!”
포장을 뜯어 상자를 열자 많은 종류의 사탕과 초콜렛이 들어있었다. 담겨있는 하나하나 따로 예쁜포장지로 정성스레 감싸져 상자안에 담겨져 있었기에 수연의 눈에는 마치 그 상자가 보물상자처럼 느껴졌다. 수연은 너무나 예쁘게 만들어진 그 상자를 바라보며 과연 누가 보낸건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상자안에 편지나 카드같은 무언가 짐작할만한 흔적이있나 뒤져 보았지만 아무것도 찾을수 없었다.
“누가 보낸걸까...”
수연이 선물을 받은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대전으로 전학을 온뒤에는 이런저런 사건들로 인하여 화이트데이같은 이벤트나 선물같은것을 기억하거나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나 고3때 발송자의 이름없이 수연에게 배달된 3번의 선물은 사춘기동안 잠시 잊었던 순정만화의 주인공같은 상상을 불어일으키긴 충분했다.
“으음.. 어마! 잠깐!”
내려야하는것도 잊은채 생각에 빠져있던 수연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지하철 문이 닫히려는 찰나에 빠져나왔다. 수연은 잠시 한숨을 쉰뒤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요즘들어 왜 이렇게 엉뚱한 생각에 빠져있는때가 많은가 몰라.’
역밖으로 빠져나오자 밝은 햇살이 수연의 눈을 비췄다. 눈이 부시기는 했지만 굳이 피하거나 가리지는 않았다. 아침과 달리 바람이 사라지자 차가운 기온에도 불구하고 살갗에 닿는 햇빛은 따스했다. 수연은 가만히 서서 눈을 감은채 그 따스함을 느꼈다.
‘많이 따뜻해졌어... 이제 정말로 봄이 왔구나...’

 

 

 

7. 재회 (1)
“으음....으음...... 아앗!”
수연은 갑자기 땀을 뻘뻘흘린채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침대 옆에있던 시계는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수연은 핼쓱한 얼굴을 한 채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거울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요즘 몸이 너무 허약해졌나? 한동안 안눌리던 가위에 다눌리다니...”
백열등 빛을 받아 거울에 비친 얼굴은 핏기가 하나도 없어보였다. 아직 동이 트려면 몇시간남았지만 다시 침대에 누우면 가위에 눌려 귓가를 시끄럽게 맴돌던 이상한소리를 또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져서 다시 자는걸 포기한채 방에 들어와 불을켰다.
“오늘이 첫수업인데 시작부터 재수없게 이렇다니... 휴우~”
수연은 가방에 책을 담기 시작했다. 첫수업이라 아직 제대로된 교과서도 없고 제대로된 수업은 없을 것 같았지만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서 훑어볼 요량으로 얼마전에 미리 사놓은 민법책 한권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두꺼운법서는 하나만으로도 가방을 꽉채울 정도였다.
“나중에 제대로 전공수업들을때에는 도저히 가방에 넣어다닐수 없겠군.”
학교측으로부터 입학식날 배부받은 오리엔테이션 책자를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서 어느덧 창밖으로 동이트기 시작했다. 수연은 수완이와 어머니가 행여나 깰까봐 조심조심 걸어나와 욕실로 들어가 씻은후 간단히 토스트하나를 챙겨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먹은뒤에 시간은 새벽 5시 40분에 불과했지만 수연은 가방을 챙겨 현관을 빠져나왔다.
“수완이 저녀석은 이제 고3인데 저렇게 천하태평이라니 저러다가 언제 공부하려는지... 지금이 어느때인데 아직까지 자고 있는거야.”
현관을 나오던 수연은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는 수완이가 영 미덥지 않았다. 자기가 저때쯤에 어떻게 공부했는지 생각을하면 수완이녀석이 한심해보였다. 그래도 심성이 착하고 특별히 말썽을 부리는일이 없는 것 하나로 만족할뿐이었다. 수연이가 대학에 입학하기 약 한달전에 가족모두 서울로 이사를 오게되었다. 어머니는 나이도 많지 않은 수연이 혼자서 서울에 살면서 학교에 다니게 하기는 너무 불안했다. 그리고 곧 고3이 되는 수완이 서울로 다시 가게되면 적응이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는 했으나 워낙 낙천적인 성격이라 수완이도 그다지 불만없이 이사에 찬성했다. 무엇보다도 남편이 세상을 떠난곳에서 굳이 더 머무르고 싶지도 않았다. 이래저래 이유가 생기게 되어서 수연의 가족은 다시 서울로 이사를 하게되었다.
“옷 좀 더 껴입고 올걸 그랬나? 너무 춥네.”
수연은 옷깃을 여미며 지하철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직은 이른봄인데다가 새벽이라 숨쉴때마다 드나드는 공기가 결코 따뜻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공기는 잠을 많이 자지 못해서 약간은 멍했던 정신을 깨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차가운 공기가 그리 싫지많은 않았다. 오히려 지하철을 타자 열차안의 따뜻한 공기가 아직 졸음이 덜깬 수연을 괴롭혔다. 너무 따뜻해서 그냥 좌석에 앉아 무작정 자고만 싶었다. 지하철은 첫차라 좌석이 많이 비어있었지만 앉아있는 사람들의 반이상이 눈을 감은채 자고 있었다. 아예 코까지 고는 사람부터 심지어 좌석에 벌렁 누워있는 사람도 보였다. 그리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수연도 아무도 없다면 그냥 좌석에 누워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냥 앉아서 잘까? 어차피 2호선은 순환이니 자도 엉뚱한데 가서 내리지는 않겠지. 설마 내가 이거 타고 한바퀴 돌을만큼 정신없지는 않을테고. 게다가 수업이 시작하려면 2시간도 넘게 남았으니... 그냥 20분정도만 눈을 감다 일어나지 뭐.’
수연은 좌석옆기둥에 머리를 기댄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너무도 빨리 잠들어버렸다. 너무 빨리 자신이 잠든것에 놀라 눈을 떠보니 건물이 하나보였다. 낯선건물이 아니었다. 바로 수연이 졸업한 초등학교 건물이었다. 주위를 돌아보던 수연은 자신이 약간 작아졌다는걸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배경이 바뀌기 시작했고 자신은 어느 교실안 책상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수연의 주위로 많은 어린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어? 여기가 어디지?”
수연은 놀랐지만 그것도 순간적인 생각일뿐 갑자기 자신도 낯설지 않은 이분위기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수연은 13살 6학년아이가 되어있었다. 앞에는 오징어같이 생긴 외계인 선생이 여러개의 발에 분필을 집은채 칠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외계인 선생은 알아들을수 없는말로 아이들에게 질문을 했는데 아이들은 하나같이 잘 알아듣는다는 듯이 대답을 하는것이었다. 수연은 모든게 신기했으나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렇게 수업이 끝나자 외계인 선생은 갑자기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쉬는시간이 되었다.
수연은 창문을 열어 바깥을 바라보았다. 쉬는시간을 틈타 시끄럽게 공을 차고 노는 남자아이들이 보였다. 그리고 교실안을 잠시 돌아보자 딱지치기를 하는 아이도 있고 시끄럽게 재잘거리는 여자아이들의 무리도 보였다. 다시 창문밖을 돌아보자 운동장은 사라지고 온갖색깔의 꽃이 핀 화단이 보였다. 그리고 한 남자아이가 화단에 혼자서 물을주고 있었다.
‘저 아이는 누구지? 왜 혼자서 화단에 물을 주고 있는거지?’
수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아이가 누군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수연의 어깨를 누가 두드리기 시작했다. 누군지 돌아보자 통통한 얼굴의 남자아이 하나가 자신을 쳐다보며 부르고 있었다. 같은반아이인 홍성대였다. 성대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수연의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를 않았다.
“김수연! 김수연! 김수연!”
그러자 갑자기 수연의 주위에 있던 모든 것이 암흑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수연은 놀라서 어쩔줄 모르는데 앞쪽에 무언가 빛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 빛은 점점 커져갔다. 그 빛을 견디지 못한 수연은 눈을 손으로 가린채 찌푸렸고 어느새 그 빛에 적응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자 앞에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며 깨우는걸 볼수있었다. 수연의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있었다.
“야! 너 김수연 맞지?”
수연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깨운사람을 눈을 비비며 바라보았다. 꿈에서본 성대와 비슷해보였다. 통통한 얼굴과 통통한 몸매. 수연은 아직 상황파악이 안되는지 그 남자에게 질문을 하였다.
“저기.. 누구세요?”
“나야나! 초등학교 6학년때 같은반이었던 홍성대야!”
그제서야 수연은 눈을 크게뜨고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까 깜빡 잠들었을때 꿈에서 보았던 성대였다.
“어어~ 정말 성대구나. 반갑다! 몇 년만이니?”
성대는 그제서야 알아본 수연이 반가운지 웃으며 대답했다.
“만 7년하고도 1달정도지난 것 같구나. 음하하하!”
수연은 반가운것도 잠시 깜짝놀라 성대에게 물었다.
“성대야! 지금 몇시니?”
“으음.. 8시 40분인데 왜?”
수연은 깜짝놀라 소리를 쳤다!
“8시 40분? 세상에 수업들어야 되는데 지금 무슨역이니?”
성대는 그 모습이 처음에 당황스러웠지만 우스운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두역만 더지나면 행당대 역이야. 그리고 지하철역이 학교바로 옆이니 안늦어 걱정하지마. 너도 이번에 나와 같이 입학했지? 얼마전 입학식에서 널 스쳐가면서 보았어. 나도 너랑 같은과가 되었단다.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신기한데? 저번에 스쳐보았을때에는 긴가민가 했는데 말야. 참! 너 여기서 한참졸은거니?”
“아...아니, 그건 아니고 너무 피곤해서 깊이 잠들었나봐.”
수연은 창피한마음에 첫차를 타고 한바퀴를 돌았다는말은 차마 할 수가 없어서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수연아 가방 챙겨. 이제 곧 내려야지. 부지런히 가면 제시간에 도착할수있을거야.”
“그래 알았어.”
수연은 성대가 무척 반가웠다. 신기하게도 아까 꿈에서 본 성대를 이렇게 만나게되고 또 같은과가 될줄은 생각도 못했다. 학교에 입학한 것 까지는 좋았지만 아는 사람이 없어서 내심 걱정을 했는데 내심 그런점에서 마음이 놓였다. 역에내리자마자 성대는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성대야, 누굴 찾는거니?”
성대는 계속 주위를 살피면서 말했다.
“응. 홀쭉이 젓가락 같은 새끼! 아니 미안... 성문이 그 젓가락 같은 친구랑 같이 탔는데 안보이네. 아까 지혼자 의리없게 자리에 앉았는데 그 이후로 사람이 너무 많이 타서 서로 떨어졌거든. 어라? 푸하하하하하”
수연은 갑작스런 성대의 너무나도 커다란 웃음에 놀라 물었다.
“무슨 일이야?”
“저 멍청한놈! 크하하하! 저녀석 지하철에서 못내렸잖아! 의리없는놈은 저렇게 당한다니까 흐흐흐! 졸다가 못내렸나 보군.”
수연은 성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한 삐쩍마른 남자하나가 유리문을 두드리며 성대를 다급하게 쳐다보고있었다. 수연은 순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괜찮아. 가자 수연아. 어차피 저녀석은 공대라 우리랑 같이 안가도돼.”
“그래도. 푸훗! 괜찮은거야?”
“다음역에 내려서 걸어오던 택시를 타고오던 알아서 하겠지 뭐. 저녀석은 당해도 싸지뭐. 흐흐흐! 그나저나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다.”
성대는 몸집으로는 설명이안되는 날렵한 몸짓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성대야! 같이가!”
“오 이런! 깜빡했네. 내 평소걸음이 몸집과는 별개로 빠르거든. 크크!”
성대는 약간 속도를 늦춘채(?) 수연과 함께 법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수연은 두꺼운 민법책을 가방에 넣고 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던 것이다. 성대는 수연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수연아! 가방 무겁니?”
수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근데 이 학교는 뭐이리 언덕과 계단이 많은거야. 휴우~”
성대는 수연의 가방을 뺏어들었다. 생각보다 상당히 무거웠다.
“뭔데 이렇게 무거워? 우리 교과서도 받은거 없는데말야.”
“그냥 수업끝나고 훑어보려고 법책 한권 가져왔어.”
“벌써 그 책을 봐! 세상에나.... 담엔 니가 들거라! 오늘만 내가 들어주마. 크크크~”
성대는 혀를 내두르며 가방을 두개를 든채 움직이기시작했다.
“아무튼 오늘이 첫수업이자 또 오랜만에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는군! 반갑다! 난 이번에 입학한 법대 홍성대다! 잘부탁한다!”
성대는 웃으면서 나름대로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자 수연은 힘이 드는지 말대신 미소를 지어 답했다. 성대는 심호흡을 한번한후 기분좋은둣이 수연에게 말을 걸었다.
“날씨가 정말로 좋은걸! 벌써 봄은 봄인가보다. 아침마다 쌀쌀하기는 해도 개나리꽃들중 에 성급한 녀석들은 벌써 꽃을 핀걸 보면말이야.”
 

 

 


8. 재회 (2)
“헉헉~ 수업시작하려면 10분정도 남았네. 수연아, 가방이 무겁긴 무겁구나. 아니 내가 살을좀 빼야겠군. 학교만 다녀도 그냥 살이 빠질 것 같다.”
“그러게 살을 빼야겠어. 푸흣~”
성대는 힘이드는지 벌개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수연에게 말했다. 수연은 그말을 듣자 중학교때 몰래 보았던 만화책이 생각났다. 나름대로는 내숭이 심했던터라 만화책을 안보는척했지만 동생 수완이가 빌려다놓은 만화책을 가끔 몰래 들여다보곤 했다. 그때 봤던 만화책중 하나인 ‘드래곤볼’에 나온 뚱뚱한 ‘마인부’라는 캐릭터가 떠올랐다. 문득 성대가 그 ‘마인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내얼굴에 뭐가 묻었니?”
“아니 그런건 아니고... 얼른 자리를 잡아야겠다.”
수연은 빈자리를 찾아보았다. 평소습관대로 앞자리에 앉으려 했지만 이미 많은 학생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연은 괜히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다들 공부에 미쳤나봐. 왜 앞자리에 앉아있지?”
그러자 성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수연을 쳐다보며 말했다.
“야 그러면 너도 마찬가지지~ 앞자리 찾던거 아니었어? 내기억에는 너도 항상 맨앞자리에 앉으려 했던거 같은데. 키가커서 그냥 중간쯤에 앉았던거지 말야. 크크크~ 그러고보니 너는 그이후로 키가 별로 큰 것 같지는 않다. 그때는 무척 컸던거 같은데. 그래도 너는 살은 안쪘잖아. 세상은 불공평하다니까? 누구는 아무리 먹어도 살안찌고 키만 크고 나같은 사람은 많이 먹지 않고 물만마셔도 살이 찌니말야. 거참~”
“정말 많이 안먹고 물만먹어도 그래?”
성대는 잠시 움찔하다가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그건... 그게 아니라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암튼 자리나 잡자. 저기 중간쯤에 자리가 비었네. 거기 앉자.”
성대는 자리에 앉자마자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이 자리좀 봐. 이래서 어디 우리나라가 선진국, 복지국가 소리를 듣겠어? 책걸상이 합쳐진자리중에 왼손잡이를 위한 자리를 본일있니? 이럴바에 차라리 고등학교책상이 더 나은편이지. 나같은 왼손잡이는 글씨도 쓰기 힘들다니까? 게다가 가끔 악수할일 있어도 낭패더라구.”
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게. 여길 보니 휠체어를 탄 학생들은 학교오기도 힘들겠더라. 가뜩이나 언덕도 많은편인데.... 교수님 오셨나보다!”
강의실문을 열고 들어오는 중년의 신사가 하나있었다. 그가 들어오자 강의실의 분위기는 조용해졌다. 그러자 중년신사는 순간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보다가 빈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그러자 또다시 주위는 웅성웅성 거리며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수연은 신기한 듯이 바라보는 그눈길들이 그렇게 좋아보이진 않았다.
‘아빠도 나이가 드신후 뒤늦게 야간대학을 다니셨는데 그때 강의실 분위기도 이랬을까? 아빠는 그때 어떤 기분이 드셨을까?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 같지 않았을까?’
그렇게 웅성거리는 주위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수연은 맨뒷자리를 바라보던중 멈칫했다. 낯익은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 남학생은 고개를 숙인채 책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분명히 수연은 그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누구지...”
“누구말야? 아는사람있니?”
성대는 수연에게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수연은 손가락으로 뒷좌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고개를 숙인채 책을 보고있는 남학생말야.”
“어디어디? 저기 어디? 이런 교수님 오셨나보다. 이따가 얘기해줄래, 수연아?”
“어... 그래.”
머리가 하얗게 샌 교수가 강의실 앞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단 주위를 둘러보며 웅성거리는 분위기를 진정시킨뒤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러분들의 첫수업이군요. 저도 35년전 처음 대학에 들어왔을때가 생각이납니다. 그때는 중학교 고등학교나 대학교나 별로 분위기가 다르지 않았습니다. 중학교도 남자중학교, 고등학교 남자고등학교, 대학교야 남자대학교는 없지만 과가 그런지 여학생이 단 3명밖에 없더군요. 공대와 더불어 사실상 남자대학교이었습니다.”
“하하하하~”
학생들은 그말이 우스운 듯이 웃기시작했다. 교수는 그런 학생들을 미소지으며 바라보다가 진정이 된뒤에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요즘은 좀 많이 변한 것 같군요. 모교에서 강의를 20년간 해왔는데 그 20년간 매년 여학생 비율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전히 남학생의 비율이 높기는 하지만 여학생들이 더 공부를 열심히해요. 게다가 사법시험에서도 여학생들이 몇년째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상당히 우수한 성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여학생들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그런의미에서 저는 교수로써가 아닌 여러분의 같은과 선배로써 부탁을 드립니다. 남학생 여러분! 여학생들에게 잘해주세요.”
“네에!!”
“하하하핫~ 까르르~”
강의실의 몇몇 남학생들이 큰소리로 대답을하자 얼굴을 붉히는 여학생들도 있었고 같이 따라웃는 학생들도 있었다. 교수는 다시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진정시킨뒤 말을 꺼냈다.
“일단 첫수업이니 출석을 불러야겠죠? 출석을 부르겠습니다. 각자 이름이 불려지면 손을 들고 저를 한번씩 바라봐 주시기 바랍니다.”
교수는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교수는 손을 든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각인시키려는 듯 한참을 바라보며 출석을 불렀다.
“김수연 학생!”
“네.”
수연은 거의 처음에 이름이 불렸다.
“홍성대 학생!”
“네~!”
주위가 다시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푸하하~ 홍성대!”
“왜 홍성대가 어때서?”
“수학의 정석 홍성대도 모른단 말이야?”
“내가 배게 삼아 자던 그책? 크크크”
“난 개념원리를 배게 삼아 잤는데?”
교수가 성대를 바라보며 한마디를 던지자 주위는 다시 웃음바다가 되었다.
“자네가 바로 수학의 신 홍성대인가? 나도 소시적에 그책을 봤었다네.”
“푸하하하하하~~”
성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휴우... 그 별명이 나에게서 떨어지기는 다 틀렸군. 제길. 에휴~’
교수는 성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다가 다시 출석을 부리기 시작했다.
“박정희 학생”
“네~”
한 여학생이 손을 들며 낭랑하게 대답했다. 그 여학생의 옷차림은 아주 볼만했다. 구제 청바지에 빵모자와 여러색깔로 브리지를 한 머리. 도저히 강의실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교수는 다시 장난기어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각하께서 여기 어인일이십니까?”
“하하하하하하하!!”
그 여학생은 별로 부끄럽지는 않은지 한번 미소를 짓다가 손을 내렸다. 수연은 그 여학생을 바라보고 누군가를 떠올렸다. 수연은 생각이 난 듯 입을 열었다
“설마 중학교 동창 박정희?”
“누군지 알아?”
성대는 궁금한지 또다시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응. 중학교때 같은반이었던 아이야. 상당히 친하게 지냈었어. 그때는 정말 얌전한 아이였는데 어떻게 저렇게 바뀐거지? 딴사람같아.”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데 뭐.”
얼굴을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보며 출석을 불러서 그런지 교수의 출석부르기는 10분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박대혁 학생”
“네.”
“자네는 왜 맨뒤에 앉아있나? 다음수업부터는 왠만하면 앞으로오게.”
대혁은 별다른 표정변화없이 대답한채 다시 고개를 숙였다.
“네.”
성대는 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말한게 혹시 저 박대혁이란 녀석이야?”
“응.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억안나? 6학년때 같은반이었잖아?”
수연은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어렸을때 교실에서도 항상 저자리에 조용히 앉아있던 남자아이. 성대는 그런 대혁을 바라보며 중얼 거렸다.
“저녀석은 어릴때도 저자리더니 지금도 저자리네. 거참... 이해할 수가 없어.”
수연의 기억속에 대혁은 그냥 조용한 아이였다. 다만 한가지 열심히 하는게 있었다면 다들 하기 싫어하는 환경미화나 화분가꾸기. 덕분에 한여름에도 화단의 꽃잎이 마르는일은 없던 기억이 났다. 대혁이랑 이야기를 해본것도 여름방학때 잠시 학교근처를 들렀다가 방학때도 화분에 물을 주고있는 대혁이 하고 신기해서 말을 몇마디 걸어본 것 외에는 전혀없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있으나 없으나 존재감이 없던 아이였다. 성대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거리며 말했다.
“신기하지 않니? 6학년때 같은반인 친구가 몇 명이 된다고 이렇게 다시 같은과에서 동기로 다시 만나게 되다니말야. 너는 중학교 동창도 있다며? 세상은 참 좁아. 사람은 죄짓고 못산다는 말이 맞는거 같아. 언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지 누가 알았겠니?”
 

 

 


9. 전환 (1)
“언니, 대학에 들어가면 고등학교와 뭐가 다른게 무엇인거 같아?”
“맞다. 오늘 첫수업이었지? 내가 보기에 가장 차이나는점은 이전과는 비교도 안되는 자율성이 주어진다는 것 그리고 사람사이에 관계가 맺는 방법이 달라진다는 것 막상 생각해내려니 잘떠오르지는 않지만 그 두가지가 가장 크게 달리지는 것 같아.”
“어떻게?”
수연은 오랜만에 집으로 놀러온 사촌언니 세연과 함께 다과를 먹으며 몇시간째 수다를 떨었다. 수연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오려고 했으나 사촌언니가 집에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수업이 끝난뒤 바로 집에 온터였다. 둘은 지겹지도 않은 듯 앞에 놓인 사과가 누렇게 변색되도록 쉴새없이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는중이었다. 비록 오랜만에 만났지만 어릴때부터 허물없이 서로 지낸터라 서로 잘통하는 사이였다. 수연은 이런저런 이야기중에 대학생활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하여 세연에게 묻는중이었다. 얼마전 졸업을 하고 취업에 성공한 세연은 이제막 대학에 들어간 수연을 보니 새삼 자신의 신입생때가 생각나고 또 한편으로는 대견한지라 이것저것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세연은 수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채 대답했다.
“너도 학교 선생님들이나 졸업한 선배들에게 들어서 잘알겠지만 누가 뭘 하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게 가장 장점이기도 하지만 단점이지. 그래서 1학년때에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다 1년을 보내는친구들도 많아. 특히 남자애들은 1학년때 마치 그동안 못놀은 한을 풀듯이 놀다가 다음해 폐인처럼 군대에 가는게 거의 정석화 되어버렸고... 그러다보니 여유를 가지며 놀더라도 약간은 학업에 신경써주면 수업 대부분이 교양인지라 그리 어렵지 않게 학점을 딸 수 있어. 이말을 매년 신입생환영회에서 붙잡고 해주어도 듣는친구들은 별로 없더라구. 푸훗~”
“나도 그럴까? 흐~”
수연은 장난치듯이 재미있는 표정을 지으며 세연을 향해 웃었다.
“수연이는 평소 행실로 보건대 그렇지는 않을거 같고 잘할 것 같아. 다만 걱정되는건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상당히 스트레스가 되는경우가 많은데 그런데에서 상처 받지 않을까가 걱정이네.”
“왜?”
“대학생활은 절대 TV에 보이는 시트콤이 아니야. 의외로 그럴거라 생각하고 들어오는 친구들이 많더라구. 비유를 하자면 마치 모래알같아.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지만 각각의 개인들은 참으로 고독한거야. 너도 며칠만 생활해보면 무슨소리인지 알게될거야.”
“그래? 아직난 잘 이해가 안돼. 똑같이 고등학생를 졸업하고 모여서 다시 같이 모인건데 크게 달라질게 있을까?”
세연은 수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설명으로는 도저히 표현할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지. 악보에 그려진 음표와 기호만으로 유행가에 표현되는 감정을 전부 표현할수 없듯이 겪어 보면 알게될거야. 좀 끈끈한 관계를 원한다면 동아리활동도 좋은방법이야. 결국 졸업하고 나니 동아리 사람과 몇몇동기만 남는 것 같아.”
“언니는 무슨 동아리 활동을 했었는데?”
“난 영어회화 동아리활동을 했었어. 동아리활동이 학업에 도움이 안된다는 생각을 하는 신입생도 있는데 나같은 경우는 동아리가 취업에 많은 도움을 주었어. 영어실력을 쌓게 해준 것 뿐만 아니라 마침 동아리 선배가 내가 취업한 회사의 인사과에 있었거든. 그것도 상당히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
“그렇구나... 난 오늘도 어제처럼 그냥 법책 한권을 가방에 넣고 수업이 끝난뒤 도서관으로 가려고 했거든.”
“오우! 그것 너무 위험한데. 아무리 요즘 고시를 준비하는 연령이 빨라진다고는 하지만 1학년 한해마저도 그렇게 보내버린다는건 너무 가혹한 것 같아. 물론 학업을 무시하라는 소리가 아냐. 다만 돌이켜보면 졸업한 선배들 이야기도 들어보면 다들 1학년때는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 같더라구. 그리고 1학년을 좀 빡빡하게 보낸선배나 동기들의 경우 상당히 아쉬워 하는걸 보면 말야. 나역시 1학년때 동아리활동과 엠티때 놀러간일들은 대학생활동안 가장 즐거웠던 추억인걸?”
“그렇구나...”
그날밤 수연은 잠이들기전에 많은 생각에 잠겼다. 한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생각에 잠겨있던 수연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미리 챙겨놓은 가방에서 두꺼운 법책을 꺼낸뒤 닫고 가방을 맨 채로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녀보았다. 몇분을 그렇게 방안을 돌다 가방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침대옆 탁상시계의 알람시간을 7시 30분으로 늦추었고 곧바로 잠이들었다. 잠든 수연의 얼굴은 무척 편안해 보였다.
“어이! 김수연~”
수업 때문에 강의실로 발걸음을 하던 수연의 뒤쪽 멀리에서 성대가 손을 들며 부르고있었다. 수연은 성대가 오기까지 기다렸다. 성대의 옆에는 키가 크고 홀쭉한 마치 젓가락같은 남자가 서있었다.
“오늘은 힘안드나 보네? 어제는 힘들다고 난리더니 말야. 어떻게 나보다 팔팔하냐! 에휴 이 놈의 학교는 뭐이리 언덕이 많아.”
“응, 오늘은 가방에 책이 없거든.”
“어라?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건감? 이상한 일이네. 거 안하던 짓 하면 뭐가 뭐시기 된다는데... 으흠.”
수연은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쏘아보았다.
“뭐라구?”
“아.. 아냐! 헤헤. 참! 이 친구는 어제 잠시 보았지. 이름은 송성문이란놈인데 영어는 잘못해 킥킥! 지하철에 갖혀서 못나왔던 그 바보녀석이야. 크크크. 앗! 이자슥이 왜때려! 법대로 하자고! 아앙~”
수연은 어제 다급하게 지하철의 닫힌문을 두들기던 성문이 떠올랐다. 수연은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성문에게 말했다.
“푸훗~ 으음.. 안녕하세요. 전 김수연이라고 해요. 성대와는 초등학교 동창이에요.”
성문은 정색을 한뒤 수연에게 말했다.
“성대가 이렇게 미인을 알고 있을줄이야! 오오 홍성대~ 의외인데! 전 성대녀석 고등학교 동창인 송성문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공대에 입학했구요. 이 돼지녀석 말대로 영어를 잘못하긴 하지만 이 자슥은 나 영어못하는것보다도 더 수학을 못해요! 이 녀석의 숫자개념은 이진수에요. 하나, 둘 그다음은 많다. 킥킥!”
“야야~ 어여 수업들어가라! 어제 수업늦게 들어가서 찍혔다며? 킥킥”
성문은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교수님이야 그렇다쳐도 이미 같은반으로 분반된 녀석들에게는 얼굴 다팔렸다. 교수님이 앞에 나와서 노래를 부르라잖아. 쩝.”
성대는 킥킥거리며 수연에게 말했다.
“이 녀석 생긴건 이래도 의외로 노래를 잘한다. 고등학교에서도 밴드부 보컬을 했었어. 노래하나는 죽이지. 근데 노래말고는 저능아야. 어떻게 대학왔나 몰라. 킥킥!”
“정말 노래를 잘하니? 멋있네.”
“문제는 나머지는 저능아라는것이지. 킥킥! 아! 저 자식이!”
“메롱~”
성문은 성대가 한참 이야기 하는사이에 머리를 한대 때린뒤에 도망가기 시작했다. 성대는 어이없이 쳐다보다가 투덜거린뒤 수연과 함께 법대로 향했다.
“에휴~ 내가 뛰어서 저놈을 잡을수는 없고 복수는 다음기회로 해야겠군.”
“그래도 둘이 무척 친한 것 같은데.”
“참 재미있는 관계야. 고등학교때 한번도 같은반이 된적이 없었거든. 하지만 1학년때 둘다 학교 밴드부에 들어서 활동하느라 같이 지낸시간은 뭐 고등학교 3년내내야.”
“너도 밴드부 했었니?”
“응. 난 베이스기타를 쳤어.”
“와~ 정말?”
수연은 기타를 들고있는 성대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상상속의 기타를 잡고있는 성대의 모습은 매우 우스꽝스러웠다. 기타가 마치 장난감 크기같다는 생각이 들자 웃음이 나왔다.
“푸훗!”
성대는 어리둥절해 하며 수연을 쳐다보았다.
“왜 안믿겨지니?”
“아니 믿기는 믿는데 그냥 너한테 기타가 너무 작을거 같아서.”
“놀리는건 성문이하나면 족하다. 에휴~ 그리고 기타랑 베이스기타랑은 좀 달라.”
“어떻게 다른데? 기타는 똑같은거 아니니?”
성대는 마치 대단한 장인이라도 된 듯이 폼을 잡은채 나지막히 이야기하였다.
“으흠~ 어떻게 다르냐면 베이스기타는 현이 4개고 기타는 6개야. 흔히 베이스라고 불러. 베이스기타는 박자를 맞추고 음악을 받쳐주는데 중요한 악기야. 드러나는게 별로 없어서 그렇지. 모양을봐도 기타보다 좀 길어. 혹시 TV에서 재즈연주같은거 본일없니? 거기서 무지큰 첼로같이 생긴 악기를 손가락으로 둥둥거리는 연주자가 반드시 있어. 그 악기가 베이스야.”
“네가 다루는 악기가 그렇게 크니?”
“그렇진 않아. 일렉트릭베이스는 기타 몸체이 붙은 픽업이라고 하는곳에서 현의 울림만 받아 앰프를 통해 증폭을 시켜야만 소리가 나거든. 일렉기타도 마찬가지고.”
“뭔지 모르지만 무지 어려운거 같아.”
“아냐 어렵지 않아. 그냥 생소해서 그런 것 뿐이야. 음악 잡지 몇 번만봐도 뭔지 금방 아는건데 뭐. 서태지가 처음에 베이스기타를 치게된계기가 무척 재미있어. 악기점에 기타를 사려고 들려서 하나를 들고나왔다더라. 근데 그게 베이스기타였대. 그래서 베이스기타를 쳤다더라.”
수연은 무척 신기한 듯이 성대를 쳐다보았다.
“그래? 참 재미있네.”
“혹시 악기다루는거 있니?”
“어렸을 때에 피아노를 배웠었는데 몇 년동안 쳐본적이 없어서 지금은 잘못쳐.”
“그러면 혹시 너 동아리에 가입할 생각없니?”
“동아리? 무슨동아리? 밴드부?”
“응, 나도 대학에 들어오면 성문이와 밴드부에 들어가려고 했거든. 피아노를 다뤘다면 밴드에서 건반연주를 할수있는데.”
“내가? 난 그럴 실력이 안되는데.”
“아냐! 그렇지 않아. 조금씩 같이 모여서 연습하다 보면 다들 빨리 늘어. 너도 금방늘걸? 그리고 넌 피아노를 다루어보았으니 조금만 하면 쉽게 예전처럼 칠수있을테고.”
수연은 망설였다.
“아니... 좀더 생각해보구...”
“그러지말고 한번 같이 해보는게 어떠니. 다음에 동아리 모집광고가 보이면 한번 같이 가보자. 일단은 수업 시작할때가 되었으니 들어가봐야지. 한번 잘 생각해보렴. 나도 고등학교때 가장 즐거웠던 기억이 밴드부에서 활동할 때 기억인 것 같아. 그래서 좋은 친구도 얻고. 성문이가 착해서 그런게 아니라 내가 그 드러운놈 성격 받아줘서 친해진거지만 뭐~ 킥킥!”
수연은 어제 사촌언니와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성대와 함께 법대로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그래도 혼자서 아무동아리에나 가입하겠다고 찾아가는것보다는 아는사람이 같이 가는것도 좋지 않을까?’
수연의 유일한 취미는 음악감상이었다. 고등학교에 다닐때에도 쉬는시간이나 식사이후 남는시간에는 눈을 감은채 이어폰을 꼽고 잠시 음악을 감상하는게 거의 유일한 휴식이었다. 망설이긴 했지만 거의 성대와 함께 가보기로 맘을 정했다.
“성대야? 근데 학교에 밴드부가 있니?”
“설마 밴드부가 없는 대학이 있겠니! 대표적인 동아리, 동아리의 로망하면 밴드부인데 성문이와 같이 어떤밴드부가 괜찮은지 알아보려구. 너두 관심이 있나보구나.
수연은 그저 대답없이 미소만 지은채 발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수연의 머리를 스치며 불기시작했다.
‘바람이 정말 따뜻해졌어...’

 

 

 

10. 전환 (2)
“언니가 말했던게 바로 이런걸까?”
“무슨이야기야?”
수연은 정희와 수업이 시작되기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서로 중학교 동창인 둘은 첫수업에서 출석을 부를때 이미 서로의 존재를 알았지만 수업만 끝나면 모든 학생들이 다들 자리에 일어나 급하게 나가는터라 만나려해도 놓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신입생환영회에서야 겨우 재회했다. 수연은 정희의 파격적인 의상들에 놀랐지만 정희는 그저 이렇게 한번 입어보고 싶었을뿐이라며 웃을따름이었다. 대화를 나누어보니 정희는 약간 활달해졌을 뿐이지 중학교때와 그리 많이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수연과 정희는 신입생환영회에서 많은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미 입학전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미리친해져서 붙어다니는 무리도 있었지만 많은 신입생들이 동기의 얼굴을 한꺼번에 보며 통성명을 한건 며칠전 신입생 환영회가 처음이었다.
“사촌언니가 그런말을 해줬거든. 대학은 사람은 많아도 외로운곳이라고 말야. 그런 것 같지 않니? 강의실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또 서로 친하게 지내는학생들도 많은 것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왠지 뭔가 어색해 보여. 우리도 며칠이 지나서야 서로 만났잖아. 그것도 수업이 아니라 신입생환영회라는 자리에서말야. 다들 시간되면 일어서서 이리저리 사방으로 흩어져버려. 언니가 말한 모래알이라는 표현을 이제 알것만 같아.”
정희는 턱은 한손으로 괸채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긴 술자리에서 통성명한 애들도 꽤있었거든. 같이 뭐 한잔마시고 이야기도 즐겁게 잘했어. 그런데 다음날 내가 인사를 하니까 반갑게 인사를 받는애들이 많지 않아서 당황했어. 심지어 피하는 애들도 있었어. 왜들그러는거지? 이해 하기가 힘들어.”
“야야! 너희들은 그래도 그런 철학적인 이야기를 할 상황인지 모르지만 난 아냐. 몸이 개판이야 개판. 에고고~~”
“성대야, 밤새고 온거니 눈이 탱탱 부었네?”
성대가 피곤한 듯이 강의실의자에 철퍼덕 앉더니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성대도 정희와 신입생환영회에서 통성명을 한터였다. 마침 환영회에서 정희 역시 음악을 좋아하고 고등학교때 밴드부에서 드럼을 쳤었다는걸 알고 같이 밴드동아리에 들자고 꼬신터였다. 물론 정희는 흔쾌히 승낙했다.
“어제 신입생환영회에서 만난 녀석들 몇몇이랑 술을 같이 먹었거든. 아 근데 몇몇 녀석 은근히 괘씸하더라구. 물론 죽이 맞아서 같이 잘먹는 녀석이 있었어. 근데 몇몇녀석은 술도 안마시면서 나한테만 술을 계속 권하더라구. 내가 그래도 몇잔 받았으니 녀석들한테도 술을 따르는데 한잔도 안받고 술병을 뺏어서 날주는 녀석이있는가 하면 자기가 받아논 술까지 나한테 주는거야! 술을 주는 것 까진 좋다이거야. 나도 먹기싫은 사람, 달라고 안한사람한테 굳이 술먹으라고 권하지 않거든. 먹기싫으면 안먹는거지. 왜 그렇게 얍실하게 빠져나가나 몰라. 안주는 다 먹더니 슬슬가봐야 된다면서 돈도 안내고 사라지더라구. 그렇게 서서히 몇 명씩 사라지더니 나중에는 3명밖에 안남더라. 남자새끼들이말야. 그나마 한놈은 내가 억지로 전화해서 불러낸 성문이였지. 그녀석들이랑 밤새 이야기하며 마시느라 이꼴이 되어버렸군. 꺼억!”
“야야~ 어디다가 트림이냐. 아유~ 냄새!”
수연이와 정희는 코를 틀어막았다. 성대는 머리를 긁으며 미안한 듯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하하~ 미안미안! 에휴~ 이제 이렇게 먹지 말아야겠군. 참 이따가 둘다 나와 같이 밴드부에 가보자. 괜찮은곳을 성문이와 수소문해 알아보고 방문해보았어.”
정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성대를 붙잡고 물었다.
“어디어디? 이 학교 밴드는 여러개라고 들었는데 DMZ인가하고 카리스마, 울랄라브라더스, 그린터틀, 터틀리카등등 여러개라고 들었는데.”
성대는 신기한 듯이 정희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와우! 잘 알고있네. 근데 DMZ는 우리가 아는 그 DMZ가 아니라 단무지의 약자라더라.”
“그럼 그린터틀과 터틀리카는?”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린터틀(Greenturtle)과 터틀리카(Turtlica)는 원래 터틀스(Turtles)라는 밴드였대. 그런데 밴드내부에서 서로 음악적으로 내분이있어서 서로 갈라진건가봐. 골수 메탈을 하려는 회원들과 그런 것 없이 서로 하고 싶은걸 인정하려는 회원들끼리 갈려서 골수메탈쪽은 터틀리카가 되었고 나머지는 그린터틀이된거지. 물론 둘의 사이는 않좋지. 안좋기 보다는 터틀리카쪽이 그린터틀을 싫어하는 것 같아."
수연과 정희는 이해할수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성문이랑 나랑 둘이서 그곳들을 모두 다 돌아보며 오디션을 봤어. 둘다 실력은 그다지 나쁜편은 아니라 서로 끌어들이려고 하더라. 밴드동아리들이 다들 신입생 모으려고 혈안이야. 밴드부특성상 금방금방 신입생들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금방금방 힘들다고 나가나봐. 다들 나름대로의 환상을 가지고 들어오는데 막상 오면 그게 아니거든. 기타는 맨날 크로매틱과 스케일연습만 죽어라 시키지. 드럼은 고무판만 치고있지. 그러니 심심하고 힘들다고 다 나가버린다는거야. 그래도 정희는 밴드에서 드럼을 쳤고 또 수연이는 밴드경험은 없지만 이전에 피아노를 친경험이있어서 크게 어렵지는 않을거야. DMZ와 카리스마, 터틀리카는 메탈음악 전문 밴드동아리라 너희들이 좀 거부감을 가질수도 있을 것 같고 그냥 가장 편안한 분위기는 그린터틀쪽인거 같아.”
정희가 물었다.
“그럼 울랄라브라더스는?”
성대는 눈을 반쯤 감은채 이야기했다.
“거기 남자만 뽑는데. 헐~”
“어머~ 세상에. 무슨 음악을 하길래.”
성대는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난 무슨 익스트림계열 음악을 하는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원래는 밴드였대. 이것저것 쇼를 많이 보여줘서 인기있는 밴드였는데 이제는 아예 차력으로 나가나 보더라. 그래서 명목상 밴드를 뽑기는 하는데 들어오면 다들 차력을 훈련시키는 것 같더라. 그러니 여자를 안뽑을수 밖에. 그래서 밴드이름도 울랄라였는데 이제는 아예 울랄라브라더스가 된거라더라. 사실상 밴드가 아니야. 그냥 배경음악틀고 차력을 하는 팀이되어버렸어.”
정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소리를 내며 말했다.
“헛! 정말 웃기는 동아리네.”
“수연아 이따가 같이 가볼생각있니? 밴드자체의 분위기도 차분하고 초보한테도 편해보이는 분위기더라. 게다가 밴드에서 여자회원은 100%환영에 VIP대우다. 그리고 둘다 미인이니 대접받는건 따논당상이구 말야. 굳이 공연하라고 연습을 강요하는 것 같지도 않고. 휴게실삼아가서 음악감상만해도 괜찮을분위기야. 오히려 밴드부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정도로말야. 그런데 재미있는건 우리학교에서 가장 출중한 실력을 가졌고 할때되면 다들 알아서 하는밴드가 그린터틀이라는거야. 고등학교때 밴드부 선배들한테 맨날 기합받았던거 생각하면 참 생소한분위기인데말야. 나도 무척 궁금해. 그 비결이 무엇인지말야. 어떠니?”
수연이와 정희는 미인이라는 말에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면 이따가 수업이 끝나고 같이 가보도록 하자.”
수업이 끝난후 수연,정희는 성대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대를 따라 몇분간 걸으니 노천극장이 보였고 그곳을 따라 몇몇 동아리 방들이 밀집해있었다. 정희는 그게 이상해보이는지 성대에게 물었다.
“성대야, 밴드동아리들은 모두 여기에 모인거야?”
“아무래도 그렇지, 동아리가 강의실 근처에있으면 악기소리 때문에 시끄러울거 아냐. 그래서 대부분 대학교 밴드들은 노천극장근처에 많아.”
“어이~ 돼지! 어라! 둘이나 더 모시고 왔잖아? 재주 좋은데? 너 나중에 피라미드 다단계해도 잘하겄다? 킥킥!”
미리 근처에 도착해있던 성문이 성대를 보며 소리질렀다.
“이 회초리 같은녀석. 쓸데없는소리 그만하고 소개부터 하마. 여긴 저번에 보았던 수연이고 또 같은과 동기인 정희야.”
정희가 먼저 성문에게 인사했다.
“성문씨죠? 성대한테 말많이 들었어요. 고등학교 동창분이시라구요?”
“말많이 들으셨다구요? 허헐~ 너 이 돼지같은놈 내욕얼마나 한거야? 그냥 말놓으세요. 뭐 다같은 새내기끼리 남사스럽게 왠 존댓말.”
정희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그만하고 일단 들어가보자. 근데 동아리방안에서 오디션을 보고있는거야? 기타 잘치네 누군지 몰라도 말야.”
성문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게 말야. 나도 그럭저럭치지만 저안의 녀석한테는 도저히 안되겠는걸? 다른 사람은 이렇게 길게 오디션 안하는데 저안에 기타치는 녀석은 꽤 오랫동안하네. 일단 들어가보자.”
수연이와 일행들 모두 동아리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앞에는 한창 누군가 기타를 치고 있고 그 기타를 선배인듯한 사람들이 주의깊게 바라보고있었다. 그런데 성대가 깜짝놀란 듯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연아! 저거 대혁이잖아?”
“어! 정말 대혁이네.”
수연도 놀란 듯 기타를 치고있는 대혁을 바라보았다. 수연이와 성대는 대혁이와 이야기를 나눌기회가 거의 없었다. 신입생환영회에서도 보지못했고 수업시간에도 역시 이야기를 할만한 기회가 없었다. 성문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저 기타소리가 대혁의 솜씨였다니. 의외인걸? 그리고 대단한걸?”
대혁의 기타연주가 끝나자 선배들은 박수를 치며 대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박대혁! 우리동아리에 들어온걸 환영한다! 마침 메인기타가 군대를 가느라 빠져서 걱정이었는데 1학년이긴 하지만 바로 메인으로 써도 손색이없겠어.”
대혁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단하지도 않은데요. 그런 평가를 받다니 부끄러워요.”
성대가 박수를 치면서 대혁에게 다가왔다.
“정말 오랜만인걸 몇 년만이지? 반갑다 대혁아. 나 홍성대다.”
대혁은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반갑다.”
“대혁아 또 반가운 손님이있다. 같은과가 되면서도 그리도 무심했냐 우리가 못찾으면 너라도 좀 와서 말좀 걸지 말야. 6학년때 같은반이었던 수연이도 동아리 가입하게 되었다. 이렇게 다들 만나게 되는군!”
대혁이 수연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반가워. 정말 오랜만이네.”
“그래 나도 반가워.”
그때 뒤에서 선배하나가 다가왔다.
“성대야 네가 끌고온 분들이냐!”
성대는 자랑스러운 듯이 턱을 쳐들으며 말했다.
"네! 선배님 제가 모두 모시고 왔지요. 하하하!“
그 선배는 수연이와 정희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미 성대가 데리고 온다고 해서 이름은 들었습니다. 왼쪽분이 김수연 오른쪽분이 박정희씨죠? 저는 현재 그린터틀의 회장을 맡고있는 조필국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악기몰라도 됩니다. 오면 우리가 가르쳐 주니 걱정하지마시구요. 우린 악기에 관계없이 음악에 대한 열린마음과 열정을 가지신분들을 환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자회원들은 오디션 안봐도 가입입니다. 어이 빨리 회원명부가져와. 이분들은 VIP야! 맘바뀌기전에 명부에 적게!”
그러자 정희가 갑자기 발끈하며 말했다.
“전 오디션 안보고 들어올수 없어요! 들어오려면 제대로 시험받고 들어오겠어요!”
그리고나서 드럼이 세팅된 자리로 가서 스틱을 잡은뒤 드럼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필국은 감탄하며 정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실력도 기본이 되어있는 것 같고 조금만 노력하면 공연에서 정말 잘하겠는데! 무엇보다 그 태도가 무척 맘에들어! 합격! 야 빨리 치킨집에 치킨좀 시켜라! 오늘 기분좋아서 다같이 뭣좀 먹어야겠다!”
정희로 인해 동아리방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다들 웃으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바라보며 수연은 얼마전 사촌언니 세연이 주었던 휴대폰 장식 펜던트를 꺼내보았다. 펜던트에는 이탤릭체로 알파벳이 적혀있었다. 수연은 그 펜던트를 손에 꼭쥐며 펜던트에 새겨진 글자를 눈을 감은채 속으로 속삭였다.
‘Carpe Diem...'

 

 

 

11. 봄이 오다
“수연아! 이리와봐 개나리가 폈어!”
“정말? 벌써 개나리가 핀거야?”
정희는 노랗게 핀 무리지어 피어오른 개나리가 신기한 듯이 그 꽃잎을 쓰다듬으며 수연을 불렀다. 수연도 매년 보는 소박한꽃이지만 새삼 개나리꽃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수연은 개나리잎을 만지며 정희에게 말했다.
“개나리꽃이 유난히 많은 것 같아.”
“응, 개나리가 교화라고 하더라.”
“그래?”
“작년에는 이맘때에는 이 꽃이 예쁜줄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개나리가 정말로 예쁘다.”
수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작년 이맘때에는 꽃을 바라볼 여유보다 공부에 대한 부담이 심했잖아. 그러니 꽃이 예쁜지 뭐가 예쁜지 눈에 들어왔겠니?”
“하긴... 그렇지?”
한참 꽃을 들여다보던 정희가 수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수연아, 저기 봐봐. 저거 대혁이 아니니?”
정희가 가리킨 방향을보니 대혁이 있었다. 대혁은 개나리꽃을 유심히 바라보며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정희는 개나리보다 대혁이가 더신기한지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의외네... 저렇게 꽃사진도 찍고. 생긴건 전혀 그렇게 안보이는데 말야.”
수연은 그모습을 보자 문득 초등학교때 대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실 대혁이 자체가 원래 말수가 적었고 존재감이없었기에 이야기를 나눌기회도 거의없었다. 대혁이에 관한 기억은 환경미화를 도맡아 했다는것과 누가 시키지 않아도 화단에 물을 꼬박꼬박 줬다는 것 정도였다. 그래서 사진을 찍고있는 모습도 그리 의외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정희는 수연이의 손을 붙잡아 끌면서 말했다.
“수연아, 대혁이한테 가보자. 되게 신기하네.”
“야~ 손좀 놓고가~ 아프단말야~”
“알았으니 얼른 따라와.”
수연과 정희는 한참 사진을 찍고있는 대혁에게 다가갔다. 대혁은 누가 온지도 옆에 다가왔는지도 전혀 모르는채 사진찍기에 열중하고있었다. 정희는 대혁의 등을 손가락으로 치면서 말을 걸었다.
“대혁아, 뭐하니?”
그제서야 옆에 수연과 정희가 온 것을 알게된 대혁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 지금 개나리 사진찍고있었어.”
“카메라 한번 구경해도 되니?”
대혁은 목에걸고있던 카메라를 정희에게 건네주었다.
“와아~ 이거 디지털카메라네? 비싸겠다.”
“아니야, 요즘은 많이 싸져서 그렇게 비싸지 않아.”
“그럼 이거 니가 찍은 사진들 지금 볼수 있니?”
그러자 대혁은 카메라의 버튼을 몇 개 누르더니 수연과 정희에게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수연은 감탄하며 말했다.
“와아~ 사진 정말잘찍네! 개나리가 정말 예쁘게 찍혔다.”
대혁은 쑥쓰러운 듯이 머리를 긁으며 천천히 말했다.
“아냐. 이건 액정화면이 작아서 자세히 볼수는 없고 모니터로 봐야만 알수있어. 개나리꽃 정말 예쁘지않니? 대단한 향기를 가지지도 화려한 모양을 가지지도 않았지만 보아도 보아도 질리지 않잖아. 그리고 개나리는 모든게 소생하는 봄을 가장 먼저 알려주잖아."
“그렇게 말하니 무슨 음유시인같다 얘. 그래도 사진이 잘찍혔으니 이렇게 잘보이는거지 안그래?”
정희는 신기한 듯이 액정에 비치는 사진을 보았다.
“개나리 말고 다른꽃도 있네. 뭔지는 알겠는데... 뭐지?”
대혁은 액정을 가리키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응. 이꽃은 목련이야. 봄이되면 가장 먼저 피는꽃들이 목련하고 개나리야. 그리고 나서 살구꽃이 피고 벛꽃이 피고 들판에는 제비꽃도 피어오르고.”
“와아~ 꽃에 대해 정말 잘 아는구나!”
정희는 신기한지 대혁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대혁아, 그럼 수연이와 내사진도 찍어줄수 있니?”
“물론. 개나리꽃 근처에가서 포즈를 잡아봐.”
정희는 수연을 끌고 개나리꽃이 활짝핀곳앞에 섰다. 대혁은 가방에 들어있던 삼각대를 꺼내 카메라를 고정시킨뒤 카운트를 셌다.
“이제 찍을께. 하나, 둘, 셋! 잘 찍혔어.”
정희는 카메라로 달려와 액정을 확인했다.
“수연아, 우리 둘다 잘찍혔다. 히히~ 이거 컴퓨터로 편집해서 더 이쁘게 만들어줄수는 없니? 헤헤~”
대혁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냥 찍을줄만 알지 컴퓨터로 편집은 잘못하는데. 그래도 다음번에 익히면 편집해볼게.”
“고마워 대혁아. 참! 수연이랑 나랑 독사진도 한 장씩 찍어줘.”
정희는 개나리앞으로 달려가 포즈를 취했다. 정희는 사진을 찍은뒤 수연을 카메라 앞에 끌어다 놓았다. 수연은 쑥쓰러운지 우물쭈물했다.
“수연아, 좀 자연스럽게해봐. 무슨 졸업사진이나 주민등록증처럼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니? 얼굴좀 펴봐~ 얼레리꼴레리~”
수연은 정희의 호들갑이 우스꽝스러워 보여서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사이에 대혁은 카운트를 세고 사진을 찍었다.
“수연아, 다 찍었어. 확인해 볼래?”
“어디어디?”
정희는 마치 자기 사진을 찍은 듯 카메라 액정을 들여다 보았다. 액정에 보이는 수연의 표정은 무척 자연스럽게 웃고있었다.
“에에? 수연이 완전히 연기자네. 아까는 표정도 없이 카메라앞에 서있더니 언제 이렇게 표정관리 한거야. 앙?”
수연은 정색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무슨소리니? 니가 웃겨서 그런건데!”
“그래도 인상쓰고 찍은것보다 웃고찍은게 훨씬 보기 좋다 뭐! 메롱~ 대혁아 고마워. 근데 어떻게 하면 나중에 사진을 볼수있어?”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거나 아니면 사진처럼 인화를 할수도 있어?”
정희는 신기한 듯이 물었다.
“이런 디지털카메라도 사진을 뽑을수 있니? 똑같이?”
“응, 프린터로도 찍을수는 있지만 그보다는 인화업체를 통해 뽑으면 더 좋아. 요즘은 일반사진관도 디지털로 이미지를 처리하는곳이 많거든. 뿐만아니라 인터넷 인화업체에 사진파일을 보내면 인화를 해서 집으로 보내줘. 가격도 일반사진과 거의 차이도 없고 서비스도 빠른편이야.”
“그러면 이 사진들을 다음에 수연이하고 나한테 메일로 보내줄수 있니?”
“물론이지.”
“지금은 길가니까 좀 그렇고 다음 수업시간이나 동아리방에서 메일을 적어줄게. 다음번에 꼭 보내줘.”
“그래 알았어.”
“고마워 대혁아. 내일 수업때보자.”
“그래 너희들도 잘가구.”
정희는 대혁과 헤어진후 수연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박대혁... 정말로 의외인걸? 저렇게 사진찍는걸 취미로 할줄은 몰랐네. 거기다가 저번에 동아리 오디션때 보았잖니? 생긴것과는 전혀 다르게 기타도 잘치고 말야. 난 그냥 항상 말없이 조용히 있길래 별 관심이없었는데 다시봤어. 참! 대혁이랑 너랑 초등학교때 같은반이었다면서? 이야기좀 해줄래?”
수연은 자신도 별로 아는 것이 없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같은반이긴 했는데 이야기를 나누어 본적이없어서 별로 기억이 없어 기억이라곤 항상 환경미화를 도맡아 했다는것, 항상 교실건물 뒷편 화단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꽃에다가 물을 꼬박꼬박 주었다는것정도야. 아까 대혁이랑 이야기 해본게 여지껏 가장 길게 이야기 해본 것 같아.”
“그러니? 그래도 처음보다 상당히 느낌이 괜찮고 맘에 드는걸?”
수연은 눈을 가늘게 뜬채 정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혹시 대혁이가 맘에 드는거 아니냐?”
“얘는 무슨소리니? 얼마나 봤다고 맘에 들기는... 그냥 느낌이 좋을뿐이야. 말도 많지도 빠르지도 않고. 솔직히 성대나 성문이 걔네들은 재미있고 편안하긴 한데 말야 그거 이상은 그다지... 히히! 그리고 동아리에 잘생긴 애들도 꽤있더라. 이번에 기타로 새로 들어왔다는 지훈이란 애도 멋지고. 키보드로 들어온 형석이란 애도 괜찮고. 걔네들 무슨과라고 했지? 지훈이는 의대라고 했고 형석이는...”
“연극영화과라더라. 나도 피아노를 잘치는건 아니지만 언뜻 치는걸보니 상당히 잘치던걸? 내가 못쳐서 그런건지 몰라도 말야.”
“베이스는 성대혼자만 들어온거 같더라. 게다가 왼손으로 치더라.”
“응 성대 왼손잡이야. 저번에 성대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베이스가 원래 튀는파트가 아니래. 아무래도 그래서 지원자가 적었던거 같아.”
“아무튼 대혁이가 기타를 정말 잘치긴 잘치더라. 나 고등학교때 했던 밴드애들은 다들 열정만 있었지 실력은 별루 였는데.”
수연은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정희를 바라보며 말한뒤 슬금슬금 정희에게서 멀어졌다.
“얘 정말 대혁이한테 관심있나... 관심있는거지? 그렇지?”
정희는 팔팔뛰며 수연을 쫓기 시작했다.
“뭐라구? 야! 김수연! 너 이리와~ 그런거 아니라니까? 너 이리안서!”
가던길을 멈춘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대혁은 둘이 노랗게 핀 개나리꽃과 정말 잘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카메라를 꺼내 그 모습을 찍은뒤 발걸음을 돌렸다.

 

 

 


12. 화이트데이 (1)
아침, 저녁마다 쌀쌀한바람이 불곤했지만 3월 중순에 접어든 캠퍼스는 완연한 봄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목련과 개나리등의 꽃들도 봄을 알리고 있었지만 여학생들의 화사한 옷차림이야말로 본격적으로 다가올 봄의 싱그러움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캠퍼스를 호기심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새로입학한 몇몇 여학생들의 어색한 화장기는 눈에 거슬리기보다 오히려 귀엽게 보였다. 정희도 그런 신입생중 하나였다.
“수연아, 화장을 살짝해보았는데 영 어색하지? 그치?”
정희는 연신 손거울에 얼굴을 비치며 투덜거렸다. 수연은 정희의 그런 모습이 우스꽝스러운지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것만 같았다. 정희는 수연의 그런 모습에 뽀로통해져 더욱 투덜거렸다.
“너까지 내가 이상하게 화장했다고 웃는거니? 앙~!”
“그게 아니고 니가 니 모습을 손거울이 아니라 전신거울로 봐봐. 구제바지에 청자켓에 당장 어디 일이라도 갈사람같은 모습인데 손거울 쳐다보며 투덜거리는걸 보니. 재미있어서 그래.”
정희는 불만스럽긴 했지만 자신의 모습을 보니 웃길만도 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희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호들갑 스럽게 말했다.
“맞아맞아! 어제 남대문시장에 갈일이 있었거든?”
“또 구제 바지 사러간거야?”
“어떻게 알았어? 아무튼간에 말야. 많은 남자들이 그걸 사느라 정신이 없는거야.”
“뭘?”
정희는 답답한지 수연에게 물었다.
“오늘이 무슨날인줄 몰라?”
수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아~ 오늘 화이트데이지.”
“그래서 남자들이 사탕부터 초콜렛까지 이것저것 많이 사가는거 있지? 에휴~ 부럽네. 나는 언제쯤 받아볼까?”
정희는 한숨을 쉬던중 저 멀리 앞에 성대와 성문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야! 영어수학! 니네들 어디가는거야?”
성대와 성문은 잠시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다가 정희와 수연을 발견한뒤 그녀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수연은 재미있는지 정희에게 속삭였다
“근데 쟤네들 바로 알아듣네. 그동안 많이 당했나봐. 히히!”
정희도 맞장구치며 킥킥거렸다. 그때 마침 다가온 성대가 말했다.
“너네 뭐 좋은일있어? 왜 웃고들 난리들이냥.”
“아니 뭐 대단한건 아니고... 둘이 어딜 가는거야?”
“우리는 동아리방에 가보려고. 잘됐다! 너네도 같이 가자.”
정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수연에게 말했다.
“뭐 우리도 수업 다끝났고 그냥 이리저리 배회하던차인데 잘되었네. 수연아, 동아리방에 가보자.”
“가도될까?”
그때 성문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조그만 막대 사탕이었다.
“너희둘 받거라~ 오늘 화이트데이 특별선물이다.”
그러자 정희가 사탕을 보더니 투덜거렸다.
“엥! 내 최초의 화이트데이 선물이 이 막대사탕이란 말야~ 에휴... 박정희 너도 다 갔구나.”
성문은 그모습을 보고 어이없는지 사탕을 가리키며 나름대로 울분을 토로하였다.
“어허! 이게 어떤 사탕인줄 알아? 칼로리가 전혀없는 다이어트 사탕이란 말야! 사탕을 먹고 싶어도 살 때문에 못먹는 고민을 해결해주는 신비의 사탕인데말야! 각하께서 이걸 몰라보시다니 어허! 통재라~”
그러자 성대가 그 사탕을 맛있겠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성문씨~ 안받는다잖아. 그냥 나한테 넘기셔~”
“허허! 그런 끔찍한 소리를!”
그때 정희는 할수 없다는 듯이 사탕을 낚아챘다.
“알았어 알았어~ 내 그정성에 감동하여 미약하긴 하나 고맙게 받아두지. 맛있게 먹으마!”
수연도 성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성문에게 질문을 했다.
“너희들 발렌타인데이때 초콜렛받았니?”
성문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그럼 그럼~ 내 이래보여도 고등학교때 밴드 공연 때문에 은근히 인기가 좋았다니까? 자주 받았었지. 음하하하하! 근데 이 돼지녀석은 내가 받으면 뺏어먹느라 정신없었지. 킥킥”
“성대야 정말이야?”
“흐흐~ 난 발렌타이날에는 항상 가게에 가서 초콜렛을 사먹곤 했었지.”
정희는 불쌍하다는 듯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성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런~ 가엾은 것. 내년에는 내가 한개 꼭 사주마.”
성대는 정희의 손을 슬쩍 피하며 말했다.
“허허! 무슨소리! 중요한건 초콜렛이지! 진정한 승자는 초콜렛을 받은자가 아니라 초콜렛을 먹은자라는 것을 모르다니! 성문이 저녀석은 아무리 많이 받았어도 대부분 내가 먹었으니 진정한 승자는 내가 아니겠는가? 크하하!”
그말에 모두들 한심한 표정으로 성대를 쳐다보았다. 성대는 그런 분위기가 뜨끔했는지 분위기를 바꾸기위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오늘 동아리 회원 모집 마지막날 아니냐?”
“그러게 말이다 돼지야. 특히 베이스 파트는 너말고는 아무도 없지않냐? 고생좀 하겠구나.”
“허허! 무슨소리! 음악에서 베이스가 얼마나 중요한건지 너무들 모르고 있어. 보컬이야 특별히 악기다루는 기술없어도 되고 기타야 워낙들 많이치고 드럼도 처음 배울때 쉬워서 많이들 해서 그런지 베이스의 중요성을 너무도 몰라. 다들 말야 주목받는역할만 할라고 그러지. 나같은 선구자야 말로 진정한 음악인이라니까? 알았는감?”
“알았으니 동아리방이나 가자, 돼지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티격태격하던 일행은 동아리방 앞에 도착했다. 동아리방에서는 기타솔로 연주소리가 들리고있었다. 성대와 성문은 그 소리를 유심히 들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야 돼지야, 대혁이가 치고있는거냐?”
“아닌거 같은데. 대혁이랑 기타 톤이 좀 다르잖아.”
“누군지 몰라도 꽤잘치는데? 누가 가입하려고 오디션 보고있나?”
동아리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누군가가 선배들앞에서 기타를 치고있었다. 수연이는 유심히 보다가 소리쳤다.
“어! 쟤는 형우인데.”
“아는 사람이야?”
정희의 물음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가 고3때 단과학원을 다닐때 같이 수업을 들었었거든. 그래서 잘알고 있어. 다른학교로 간줄 알았는데 우리학교로 왔네?”
“그래?”
오디션중이던 형우의 연주가 끝난뒤 선배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형우에게 다가갔다.
“와우! 가뜩이나 메인기타가 공석이라 걱정이었는데 얼마전 들어온 대혁이에다가 지훈이 그리고 이 친구까지 걱정 안해도 되겠는걸?”
“그린터틀의 마지막회원으로 가입한걸 축하한다!”
형우는 기타를 내려놓은뒤 수연에게 다가왔다.
“수연아 오랜만이네?”
“응, 수능을 치른뒤 처음이구나. 우리학교로 온줄은 몰랐어.”
“난 경영대에 들어왔어. 참 잠깐만 기다려봐.”
형우는 근처에 있던 커다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안에는 포장된 여러 가지 선물들이 보였다.
“여기 계신 여자분선배및 동기분 모두 화이트데이 축하드립니다!”
그러면서 동아리의 모든 선배들을 비롯한 여학생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었다. 다들 예상치도 못한 형우의 선물에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성문은 그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휴우... 난 수연이 정희줄 막대사탕만 샀는데. 저 녀석은 준비성 하나는 철저한걸? 벌써부터 사랑받을 조짐이 보이는구나.”
“킥킥, 이 젓가락같은놈아. 역시 저 녀석이 너보다는 한수위인 것 같구나. 흐흐흐~ 저 녀석얼굴좀 봐라. 킹카아니냐~”
“니 얼굴과 몸매나 신경써라. 이 돼지같은놈아~”
수연은 형우에게 물었다.
“며칠동안 신입회원이 없었는데 어떻게 알고 가입한거니?”
“지훈이가 고등학교 동창녀석이거든. 마침 밴드에 관심도 있고 기타치는게 취미긴 하지만 실제 밴드경험을 해본적이 없어서 말이야. 그래서 가입하려고 찾아왔어.”
“지훈이? 아... 기타파트에 새로 들어온애?”
“응, 그 녀석이 친구거든. 여기 동아리와 너희들 이야기를 해주더라. 그래서 가입했어. 이따가 잠깐만 같이 이야기 할래?”
“무슨 이야기?”
“이따가 잠깐 둘이 할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잠깐만 기다려줘.”
수연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형우를 바라보았다. 그때 정희는 수연의 옆구리를 쿡쿡찌르며 말했다.
“오오~ 김수연 좋겠네~ 잘해봐!”
“야! 박정희! 그런거 아니라니까!””
수연은 당황한 듯 정희를 쳐다보며 손을 내저었다. 성대는 그 모습을 보며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어~ 형우라고 했지? 저녀석 재주도 좋은걸. 벌써부터 작업인가?”
“이 불쌍한 돼지야, 니가 재주가 없는거지. 킥킥! 아무튼 우리는 이왕온거니 연습이나 하도록 하자.”

 

 

 

 


13. 화이트데이 (2)
수연과 형우 둘은 잠시 동아리방에서 빠져나왔다.
“무슨일인데 그러니, 형우야?”
“잠깐만 기다려봐.”
형우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수연에게 건냈다. 역시 포장된 상자였는데 아까 수연이 받은 사탕상자보다는 큰 상자였다.
“이게 뭐니?”
“뭐기는, 화이트데이 선물이야.”
“어? 서..선물?”
수연은 선물상자를 받고 얼떨떨한 나머지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형우는 열어보라는 듯이 상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안 열어 볼거니?”
“으..응.”
수연은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뜯기 시작했다. 상자 안에는 예쁜 장식과 더불어 수많은 초코렛, 사탕들이 들어있었다. 그 모습에 수연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이 나왔다. 그리고 왜 형우가 이런 선물을 주는지 궁금해졌다.
“세상에... 받아서 고맙고 좋기는 하지만.. 왜 나한테 이걸?”
그러자 형우는 벽에 기댄채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수연을 향해 눈을 씽긋거리며 입을 열었다.
“뭐긴~ 이렇게 다시 만나니 반가워서 그런거지. 인연이란게 있긴 있나보다. 다시 이렇게 서로 만나게 되는걸 보면 말야. 그거 쉽지는 않은거잖니?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가워.”
형우는 수연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당황스러워하던 수연은 얼떨결에 형우의 손을 붙잡았다. 붙잡은 형우의 손에서 힘이 느껴져 당황스러웠다. 그때 동아리방문을 열고 정희가 나타났다.
“메에에롱~ 뭐야? 본지 얼마나 되었다고 작업에다가 선물이야? 수연이는 좋겠네~ 거기다가 벌써 손도 잡고? 진도 너무 빠른거 아냐? 이렇게되면 둘이 동아리 최초의 CC가 되는거야? 킥킥~”
당황한 수연은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얘는 지금 무슨소리야~ 그런거 아니라니까!”
그때 성대와 성문이도 동아리문을 슬쩍 빠져나와 박수를 치며 환호를 질렀다.
“유후~ 벌써 동아리 신입생중에 첫 CC가 나오다니 이거 너무 빠른거 아냐?”
성대가 성문에게 장난스럽게 질문했다
“CC가 뭐의 약자인지 아냐?”
“뭔데?”
주위를 둘러보던 성대는 눈치를 보다가 그냥 뒤돌아 동아리 방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야이 돼지야~ 뭔데?”
성대는 성문의 허리를 쿡쿡 찌르며 귓속말을 했다.
“암튼 말하면 그리 좋은 말은 아니라서 말이야. 크크~ 이따 이야기 해줄게~”
둘은 티격태격 거리며 동아리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정희는 고개를 저으며 한마디를 내뱉듯이 말했다.
“저 바보 녀석들! 혹시라도 저것들이 CC가 되면 내손에 장을 지진다. 킥킥! 그러면~ 암튼 이제 둘이 정말 CC되는거야?”
수연이는 얼굴이 빨개진채 당황스러워서 아무말도 못한채 손만 내저었고 형우는 그냥 미소만 지으며 정희를 바라보았다. 수연은 그 분위기가 너무나 어색한 나머지 뒤돌아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럽던 정희는 수연을 향해 소리쳤다.
“야! 김수연! 아무리 급해도 받은 선물은 챙기고 가야할거 아냐~”
그 소리를 들은 수연은 잠시 멈춰 뒤를 바라보다가 쭈삣쭈삣 거렸다. 그러자 형우는 상자를 들고 수연에게 달려갔다. 수연은 여전히 얼굴만 빨개진 채로 형우를 바라보지 못했다.
“그래도 내가 나름대로 정성들여 가져온건데 그냥 버리고 갈거니?”
수연은 상자를 받아들더니 다시 얼굴만 빨개진채 뒤돌아 도망가기 시작했다. 한참 앞만 보고 달려 오다보니 어느새 지하철역근처에 와있었다. 역근처에는 많은 여학생들이 지나다녔다. 다들 하나같이 손에 꽃이나 사탕바구니를 든채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수연의 선물이 유난히 컸다. 지하철들 기다리는 동안에도 오가는 여학생들은 한번씩 수연의 선물상자를 쳐다보면서 지나갔다. 처음에는 그런 눈길들이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으나 점점 그 눈길들에 익숙해지자 수연은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지하철 좌석에 앉아서도 왠지 모를 뿌듯함에 그 선물상자를 꼭 껴안았다. 지하철내부를 오가는 사람들의 관심어린 눈빛도 싫지는 않았다. 수연은 고3때 형우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를 생각하려 눈을 감았다.
‘학원에서도 참 인기있던 애였는데’
고3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될 무렵 공부하는 만큼 수학점수가 잘 안나오지 않아 고민하다가 학원을 다니기로 생각한 후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단과학원에 등록했다. 강의가 좋다는 소문이 많이 퍼진 학원이라 그런지 야간자습까지 마친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들이 등록해 수강하고 있었다.
‘확실히 형우가 돋보이긴 했었지...’
방과후 늦은 시간의 학원생활은 피곤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신선했었다. 항상 자신과 같은 여학생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대부분인 여고생활의 따분함보다는 별다른 일이 벌어지는 것은 따로 없지만 초등학교이후로 오랜만에 남학생들과 수업을 듣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학교에서 왈가닥이던 여학생들이 학원에 와서 내숭을 떠는 모습도 재미있었다. 물론 남학생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말이다. 그때를 회상하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긴, 쉬는시간에 화장실서 거울보는 애들도 많았었지.’
여학생들은 대부분 여고에서 온 학생들이라 쉬는 시간에 모이면 수다의 주제는 같은 학원에 수강중인 남학생들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 이야기 가운데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는 남학생은 단연 형우였다. 주기적으로 치르는 학원 모의고사에서도 성적이 매우 좋았을 뿐만 아니라 잘생긴 외모덕택에 형우에게 관심을 보이거나 몰래 편지 혹은 선물을 가져다 놓는 여학생들이 많았다. 사실 수연도 따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형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건 사실이었다.
‘나에게 관심이 있는건가?’
수연은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이 선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하는가에 대해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에 형우를 보게 되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만 할지도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수연은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려 잠깐 학원을 다녔던 터라 그 이후로 형우의 소식을 듣질 못했었다. 그리고 따로 형우의 소식을 알아본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않게 대학교에 진학하여 만나게 되어서 반갑긴 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부담감이 더해갔다. 그런 고민이 들자 수연은 한숨이 나왔다.
‘다음에 형우를 보면 뭐라고 말해야 하나... 형우야 안녕? 그때 선물 잘 받았어. 고마워 이렇게 말해야 하나? 너무 어색할 것만 같은데 다들 선물 받은걸 보았으니 옆에서 놀려대거나 괜히 이상한 바람만 잡을테고 뭐라 말해야 좋을까... 어맛! 도착했네! 어떡하지!’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보니 어느새 지하철은 집근처 잠실역에 도착해 출입문이 열리고 있었다. 문이 닫힐때 쯤에서야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 것을 알게된 수연은 허둥지둥 일어나 빠져나가려했지만 문은 닫히고 말았다. 수연은 주위의 눈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알고 얼굴이 빨개졌다. 수연은 고개를 숙인채 천천히 걸어서 원래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 앉으려 했지만 이미 그 자리는 뚱뚱한 아주머니가 차지하고 있었다. 며칠 전 아침에 성문이가 지하철에서 못 내려서 당황하던 모습이 생각이 났다. 그때 성문이도 참 바보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자신도 똑같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 창피한 기분이 들어서 숨고 싶어졌다. 다음역까지 도착하는 2분여의 시간이 마치 2시간처럼 느껴졌다. 다음역에 도착후 지하철에서 내리자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좀더 걸어서 집에 가야겠네. 이게 무슨 꼴이야.”
집으로 향하는 길은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평소에도 놀이공원이 근처에 있어서 붐비는 곳이긴 했지만 오늘은 화이트데이라 그런지 유난히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중에서도 연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많은 연인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같거나 비슷한 옷을 입고 있어서 누가 보아도 연인임을 알기 충분했다. 수연은 저렇게 자신도 나중에 사랑하는 남자와 걷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연은 잠시 멈춰서서 선물상자를 바라보았다.
‘어떤 의미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좋은 의미로 받아 들이는게 좋겠지?’
수연은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을 꺼내 달려있는 장식용 펜던트를 바라보았다. 햇빛에 반사된 펜던트는 유난히 반짝였다.
‘Carpe Diem... 그래. 굳이 지금 이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잖아? 지금 이런 고민이 내일을 벌어질 일들을 책임져 줄 수는 없어. 오늘 많이 먹은 식사가 내일의 배고픔을 대신해 줄 수는 없듯이 말야. 내일은 오늘과는 또 다른 얼굴로 나를 맞이할 테니까.’
수연은 주먹을 한번 꼭 쥔 뒤 다시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평소보다 매우 가볍게 느껴졌다.


 

 

 

 

 

14. 트라우마 (1)
“새내기들이 들어왔는데 제대로 한번 회식도 못했네? 오늘은 다들 모여서 회식이나 가는게 어때? 뭐 먹을건지는 신입들이 정하거라. 정하면 바로 나간다~”
동아리회장 필국의 말에 다들 연주하거나 연습하던걸 멈추고 환호를 질렀다. 그때 성대가 베이스를 내려놓으며 한마디 했다.
“그동안 배에 기름칠도 못한지 꽤 된 것 같은데 고기나 구워 먹으러 가는게 어떨까?”
그러자 정희는 드럼스틱으로 성대의 배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그럼 이 뱃속에는 뭐가 들어있는 건데?”
성문역시 옆에서 정희의 말을 거들었다.
“그럼 그살은? 그살은 뭘로 만들어진 건데? 그 뱃속에 들은건 뭔지부터 밝혀라!”
성대는 배를 탁탁 두드리면서 말했다.
“뱃속에 뭐가 들다니? 내가 무슨 닝기리 쌍봉낙타라도 된다는 소리냐? 배에 인격도 없는것들이 내 배에 대해서 논하기는. 불쌍한 중생들이여. 아미타불~”
그때 기타를 챙기고 있던 지훈이 한마디 했다.
“그거 말고 그냥 맥주나 한잔 마시는게 어떨까? 맥주가 시원하고 좋잖아. 고기 구워먹으면 어차피 소주 마셔야 할테고 못마시는 애들도 꽤 있을텐데.”
이들의 말을 듣고있던 필국이 끼어 들어와 말했다.
“그러면 고기를 구워먹고 소주한잔 한뒤에 호프집에 가서 맥주 마시면 되겠네. 안그래? 참고로 우리 동아리는 못 마시는 사람한테 억지로 술 강요하고 그러지 않으니 부담 가지지 말거라. 먹을사람은 알아서들 마시고. 단 주사 부리는건 금물이다! 그거 말고는 맘대로들 놀아라~!”
정희도 신나는지 소리쳤다.
“그 다음에 노래방으로 콜! 어때요?”
성대와 성문이도 신이 나는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Yeah~~~~~!”
해는 져서 어두워졌지만 학교 근처의 거리는 이제부터 시작인 듯 저마다 간판에 불을 켜고 손님을 맞으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연은 여기저기서 꽃을 피우는 캠퍼스의 풍경도 보기 좋았지만 해가 진후 북적이는 활기찬 거리도 그에 못지않게 맘에 들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가지는 회식자리인지라 기대되기도 하였다. 형우가 그때 수연에게 말을 걸어왔다.
“여기는 무슨 음식이 유명한지 아니?”
수연은 따로 무엇이 유명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형우는 화이트데이날 선물을 준 이후에 수연에게 특별한 행동이나 태도에 대한 변화 같은 것은 없었다. 평소와 그다지 다를 바 없었고 수연역시 주위에서 CC니 어쩌니 해도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는터였다.
“이 근방은 생고기집과 곱창이 유명하다고 하더라.”
그때 성대가 그들을 향해 뒤돌아보며 말했다.
“여기 말야? 생고기집이 유명하지. 예전부터 자주 왔던 곳이라 그리 낯설지는 않구만. 맨날 와도 좋을 것 같아. 킥킥~”
성문이 한심하다는 듯 성대를 바라보며 말을 던졌다.
“조심해라. 여기가 네 인생에 종착역일수 있다. 오늘 회식 재료가 사실은 너를 잡아서 나올거거든.”
그러자 정희가 성대의 뺨을 손가락으로 한번 훑더니 맛을 보았다.
“재료로 부적합한 것 같다. 맛이 갔어. 먹을게 따로 있지. 성문아 참아라~ 히히~”
성대는 그래도 별 상관없는지 그냥 하하 웃어넘길 뿐이었다.
“어째 내가 물어보지 않으면 먼저 말도 안하는거냐? 으응? 그래도 정말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인데 말야.”
형석은 대혁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러자 대혁은 살짝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동창은 무슨... 졸업도 못했는데 무슨 동창이냐.”
형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쉬며 말했다.
“졸업을 못했건 같은반 이었으면 동창인거지 안그래? 아무튼 다시 말하지만 이렇게 여기서 다시 만나 반갑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지훈은 궁금한지 대혁에게 물었다.
“졸업을 못했다니? 무슨소리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치렀던거야?”
대혁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형석이 말했다.
“암튼 말하자면 좀 사정이 길어. 나도 이 녀석 학교 떠난 후로 전혀 소식을 못듣다가 대학와서 처음본거니까. 저 녀석이야 워낙에 엑스파일이라 말야.”
그때 필국이 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자~ 도착했다. 여기로 들어오면 된다. 어서들 들어와!”
식당의 공기는 이미 고기가 타면서 나온 연기로 자욱해져 있었고 이곳저곳에서 고기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들어온 이들에게 나쁘게 느껴지기 보다는 더욱 분위기를 주는 것 같았다. 들어오자 성문이 먼저 기분이 좋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모름지기 식당은 시끌벅적하면서 정신없어야만해. 그점에서 이곳은 만점이군!”
식당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동아리회장 필국에게 다가와 반갑다는 듯 인사를 건냈다.
“아이구~ 학생! 오랜만이네! 이번에는 많이도 데리고왔네? 후배들이야?”
필국은 뒤따라온 후배들이 든든하다는 듯 가슴을 내보이며 말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후배들이지요. 오늘은 고기좀 많이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알아서 주시지요. 하하~”
그러자 식당 주인은 깔깔 웃으면서 대답했다.
“몇명인지 대답이나 해야 감을 잡지? 안그래?”
그러자 필국은 성대에게 말했다.
“가장 많이 먹게 생긴 니가 얼른 몇 명인지 세어보거라!”
성대는 그말에 뭐가 자랑스러운지 기분좋다는 표정으로 하나하나씩 세어나갔다.
“다 합쳐서 모두 11명인데요?”
필국은 다시 하나하나 세어보다가 성대의 뱃살을 꼭 붙잡고 씨익 웃었다.
“이 녀석아~ 12명이잖냐?”
성대는 아프다는 듯이 뱃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럴리가요? 11명 맞잖아요? 술도 안드셨는데 취하셨어요?”
그러자 필국은 음흉한 표정으로 성대에게 얼굴을 가까이 한 채 말했다.
“너는 2명으로 쳐야하지 않겠냐? 킥킥”
“푸핫!!”
모두들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자아내었다. 필국은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여기 12인분요! 딱 12인분 주시면 서운한거 아시죠? 알아서 주십시오~ 이번에 신입생들에게 잘아는 집이라고 데려왔는데 선배 체면은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주인 아주머니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어대며 말했다.
“아휴~ 걱정 붙들어! 알아서 줄터이니 실컷들 먹으라구!”
곧이어 상은 차려졌고 고기가 상에 날라졌다. 가장 신난듯한 성대가 환호성을 지르며 소리쳤다.
“야호! 이거 12인분 맞어? 두배는 되겠는걸! 흐흐흐흐!”
필국은 성대의 뒤통수를 한대 치며 대답했다.
“그럼 구워! 그리고 다들 잔은 한잔 씩 채우도록! 안마시는 후배분들도 첫잔은 그냥 채우도록 해. 그래야 건배는 할거 아니냐!”
두 테이블로 나누어진 고기판은 각자 맛있는 소리를 내며 익어갔다. 어느정도 고기가 익자 필국은 일어나 소리쳤다.
“우리 그린터틀의 무궁한 영광을 빌며! 이번에 들어온 새내기들 모두 환영한다! 건배!”
그러자 모두들 잔을 들며 소리쳤다.
“건배!”

 

 

 


15. 트라우마 (2)
고깃집에서 첫 번째 회식을 마친 뒤 모두다 밖으로 나오자 필국은 입을 열었다.
“자~! 다들 배부르게 먹었나?”
그러자 소주 몇 잔을 마신 뒤 얼굴이 벌개진 성대가 소리쳤다.
“네~! 배터지게 먹었습니다.”
필국은 성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새내기들 의견도 좀 듣고해서 1학년중에 부장을 뽑으려 했는데 네가 목소리도 가장 크고 가장 많이 먹으니 내 직권으로 널 1학년 부장으로 임명한다.”
“뭐라구요? 그런게~~엡! 우욱!”
필국은 더 무언가 말하려는 성대의 입을 틀어막고 물었다.
“니들도 모두 이 녀석을 1학년 부장으로 임명하는데 이의없지?”
그러자 모두 한마디로 외쳤다.
“네~~~!”
그 모습이 만족스러운 듯 필국은 다시 성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은 네가 부장으로 임명도 되었고 하니 동기들을 잘 책임지도록 해라.”
성대는 놀라서 되물었다.
“제가요? 선배님들은요?”
필국은 새내기들을 한명씩 훑어보며 말했다.
“물론 선배들이 따라가서 일일이 챙겨주는 것도 좋지만 선배보다는 아무래도 너희 동기들이 앞으로 가장 편하게 지낼 녀석들이다. 그리고 대충 술 마시는 것 보니 술꼬장을 부리거나 특별히 사고 칠 사람은 없는 것 같아서 안심이다. 선배들은 여기까지 맡으련다. 다음에 마시면 끝까지 같이 마시겠지만 오늘은 너희들끼리 앉아서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며 알아가는게 좋지 않을까 싶다. 그러자면 아무래도 선배들이 피해주는게 좋겠지? 이미 아는 호프집에 자리를 잡아놓았으니 그리로 가거라. 그리고 각자 돈 걱정 하지 말고 마시고 먹고 싶은대로 맘껏들 시켜라. 돈은 1학년 부장에게 넉넉하게 맡겨 놓을테니 알아서들 지지고 먹고들 해라. 성대야 잘 알아서 챙기거라!”
당황해하는 성대를 뒤로 하고 동아리 선배들은 발걸음을 돌렸다. 졸지에 부장이 되어 멍하니 선배들의 뒷모습만 바라보던 성대의 어깨에 성문이가 손을 올리며 말했다.
“부장, 뭐하냐? 얼른 가야지?”
그 말에 뒤돌아서던 성대는 한 사내와 어깨가 스쳤다. 성대는 별 생각없이 바로 길을 재촉했으나 어깨를 스친 사내는 성대를 불러서 세웠다.
“야! 이새꺄! 눈을 폼으로 달고 다녀 눈깔의 먹물을 홀랑 빼버릴까 보다. 확!”
“뭐.. 뭐라구요?”
성대는 순간 화가 났지만 큰 덩치에 짧은 머리에 가죽점퍼를 입은 험상궂은 모습에 주눅이 들어서 몸만 부르르 떤채로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때 대혁이 앞으로 다가와 그 사내에게 말했다.
“너는 눈깔이 얼마나 제대로 달려서 피하지도 못했냐? 어디 할짓이 없어서 거리에서 양아치 짓이야? 생긴거나 쫄바지에 폴로티에 입은 꼬라지 보니까 쌩 양아치 껀달새끼아냐?”
그 사내는 체격도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 대혁이 덤비자 어이없는지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너 이새끼 죽고싶어? 좆만한게 미쳤나?”
그러자 대혁은 헛웃음을 짓더니 멱살을 풀고 가방을 열은뒤 책을 하나 꺼내 그 사내에게 던진 후 소리쳤다. 그 사내는 갑자기 날아온 책을 피하고 놀란 얼굴로 대혁을 쳐다보았다.
“병신새끼! 돈 많어? 갑부야? 법치국가에 아직도 이런 개 또라이 새끼가 있네. 글이나 읽을줄 아냐? 그 소법전이나 뒤져서 읽어보고 쳐라! 쓰레기 새끼같으니! 그리고 주위에 증인도 많네? 치려면 쳐봐 이 개새꺄! 나잇살은 똥구멍으로 쳐 먹었냐? 그럼 방구는 트림이겠네. 병신새끼! 어디 길거리서 양아치 짓이야?”
점점 소리가 커지고 주위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부담스러운지 그 사내는 한참 식식거리다가 욕을 내뱉으며 가던 길로 다시 사라졌다. 일행은 방금전 대혁의 모습이 너무도 낯선지라 한참 말없이 대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쑥쓰러운지 머리를 긁고 말했다.
“가던 길로 가야지?”
필국의 말대로 이미 그들이 도착한 호프집에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각자 자리를 잡고 앉자 성대는 특별히 무슨 안주가 먹고 싶은지 모두에게 물어본 후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들 아직도 방금전 대혁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다들 말없이 쳐다만 보고 있었다. 눈치를 살살보던 성대는 큰소리로 주문을 했다
“여기요! 맥주 3000cc 2개 그리고 요거 스페샬로 주세요!”
그러자 정희가 눈을 치켜뜨며 성대에게 말했다.
“야! 과일시킨다고 했다가 왜 삼천포로 빠져?”
성대는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부장 직권이다. 메~~롱! 꼬우면 네가 부장 해라~”
성대와 정희가 그렇게 옥신각신 하는 사이 각자 잔에는 맥주가 채워졌고 어느새 안주가 주문해 도착했다. 성대가 잔을 들고 일어나 외쳤다.
“뭐 긴말 할건 없고, 아까 대혁이 녀석한테 고맙고 암튼 그냥 건배!”
“건배!!!”
건배를 마치고 다들 맥주를 한모금 마실때쯤 되자 갑자기 대혁이 일어나 말했다.
“미안한데, 아르바이트를 하는게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다. 정말 미안하다.”
형석이 매우 아쉬운 듯 말했다.
“고등학교 이후 만난적도 없고해서 오늘은 이것저것 궁금한 것도 많고 이야기 해보고 싶었는데 벌써 가면 어쩌냐? 빠질 수 는 없는거야?”
대혁은 미안한 듯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아무튼 정말 미안하다. 다음에는 미리미리 빼도록 할게. 다들 정말 미안하다.”
다들 아쉬운 듯 한마디씩 말했다.
“에휴...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그래 잘 들어가고 알바 잘하구~”
“담에도 빠지면 그때는 재미없을거다!”
대혁이 빠져 나가게 되자 다들 아쉬운지 한동안 말없이 맥주만 홀짝홀짝 마시던 중 지훈이 입을 열었다.
“근데 아까 형석이하고 대혁이가 이야기 하는걸 얼핏 들어보니 대혁이가 자퇴하고 검정고시로 들어왔다구?”
성문은 신기하다는 듯이 지훈을 쳐다보며 말했다.
“난 네가 말을 못하는 줄 알았는데 말 잘하네? 근데 왜 그동안 별 말 안한거여? 너도 대혁이과냐?”
그때 형석이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좀 이야기 하자면 길어. 나중에 굳이 대혁이한테 내색은 하지 말어. 고등학교 2학년말쯤에 사건이 한가지 있었어.”
성대가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뭔데 뭔데! 무슨 사건?”
형석은 주위를 한번 훑어본뒤 천천히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너희들도 봤겠지만 대혁이 녀석 기타 잘 치잖아. 고등학교때도 학교에 기타를 메고 다녔었어. 쉬는시간이 되면 혼자서 기타줄 튕기고 그렇다고 마땅히 학교 밴드 동아리를 활동한것도 아니었거든. 뭐 맨날 뒷자리에 앉아서 수업도 듣는둥 마는둥 그렇다고 주위 친구들하고 이야기를 자주 한것도 아니고 아무튼 독특한 녀석이었어.”
성대는 손을 턱에 괴며 중얼거렸다.
“초등학교때도 괴짜였는데 고등학교때는 더 괴짜였군...”
형석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남자고등학교 나온 녀석들이면 잘 알겠지만 꼭 교실 뒤쪽에 문제학생이나 소위 일진들이 자리잡고 애들 삥뜯고 그랬잖아?”
그러자 성대를 비롯한 남학생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형석의 목소리 톤이 살짝 높아지고 속도도 빨라졌다.
“그런데 어느날 사건이 터진거야!”
성대는 말을 더욱 재촉했다.
“뭔데? 무슨 사건?”
형석은 맥주를 한모금 마신뒤 다시 말을 이었다.
“보통 뒷자리에 앉은 일진들이 뭐라 하면 다들 겁내고 약한 친구가 삥뜯겨도 외면하고 뭐 보통 그랬잖아. 대혁이가 일종의 전쟁을 벌인거지.”
순간 다들 가슴속이 살짝 뜨끔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들 역시 굳이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외면했고 시비가 들어오더라도 그냥 굽혔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정희가 마치 멋지다는 듯 소리를 쳤다.
“아까도 대혁이 녀석 멋지던데! 혹시 고등학교때도 정의의 사도 같은거였어?”
그러자 형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슨 정의의 사도나 그런건 아니고 그 녀석도 뒤에서 일진들이 설치던 말던 신경도 안썼고 참견도 안했어. 그냥 방관자 였을뿐이지. 그런데 일진중 한 녀석이 대혁이가 괜히 맘에 안드는지 시비를 걸고 한대 치는 사건이 있었어. 하긴 평소 일진들이 뭐라하든 쪼는 기색도 없고 신경도 안쓰고 도도한게 지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나보지. 한대 맞고나서 대혁이가 걸상을 들더니 그 녀석을 찍어 버리더라구.”
“허걱!”
“그리고 가지고 있던 도시락부터 봉걸레 자루까지 이것 저것 다들고 그녀석을 치려고 하는데 일진들이 모두 모여서 대혁이를 떼어내고 패고 아무튼 그런 사건이 있었어. 그리고 그 이후부터 계속 일진녀석들이 대혁이에게 시비를 걸더라구. 아무튼 그 이후 대혁이 학교생활이 많이 피곤해졌지. 사실 대혁이 잘했다고 시원하다는 애들도 많았거든? 그런데 뒷자리 일진 들이 무서워서 그런 내색은 못하고 대혁이는 완전히 고립되어 버리고 만거야. 어찌보면 나 역시 속시원 했으면서도 대혁을 외면했기 때문에 책임이있다고 할 수 있고. 아까 만약 나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대혁이처럼은 못했을거야.”
한참 이야기를 듣던 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으흠.. 그런일이 있었군... 그래서 힘들어서 자퇴를 했구나.”
그러자 형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목이 마른지 맥주를 한모금 더마시고 이야기를 이었다.
“그런건 아니고 며칠뒤 더 큰 사건이 터져서 대혁이가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어.”

 

 

 

 

 


16. 트라우마 (3)
성문이는 놀란 듯 물었다.
“지금 이야기만도 큰 사건인데 더 큰사건이라고?”
형석은 몸이 더운지 연신 손으로 부채질하며 말했다.
“사실 이건 대충은 알았지만 나중에 대혁이가 자퇴를 하게된 후에 자세히 알게 되었어.”
그 말에 다들 조용히 형석의 입에 시선을 집중했다.
“아무튼 아까 사건이 있은지 며칠후 대혁이도 갑자기 학교에 안나오고 일진녀석중 몇몇도 학교에 안나오는일이 생겼지. 안나온 일진녀석들은 전부다 크게 다쳐서 병원에 입원을 했고 그렇게 만든게 대혁이라는말에 학교가 발칵 뒤집혔어.”
성대는 침을 꼴딱 삼키며 물었다.
“대혁이가 몽땅 다 팬거야?”
형석이는 목이 계속 타는지 맥주를 마시다 얼음물 마시다를 반복하며 이야기했다.
“대혁이 체격을 봐서 알겠지만 뭐 싸움 잘하게 생긴것은 아니잖아. 나중에 알고보니까 어느날 저녁에 날잡고 일진녀석들 집을 하나씩 돌아다니며 전화를 해서 불러낸뒤에 각목같은걸로 죽지 않을만큼 사정없이 쳤던 모양이더라구. 그렇게 그날저녁동안 몇몇을 불러내서 그 지경을 만들어놓아 버린거야.”
“세상에...”
“나중에 일진들 부모들이 학교로 찾아와 당장 대혁이를 퇴학시키고 소년원에 쳐넣으라는둥 난리도 아니었어. 아무튼 더 재미있는건 그런걸 보고 반녀석들도 느낀게 있었는지 자기들이 얼마나 삥뜯기고 맞았고 또 다치고도 말을 못했는가 이런걸 단체로 선생님들께 알리게 되었어. 그때 학교에서는 어떻게든 감추려 들고 난리도 아니었었지. 대충 일진들의 그간 행적이 낱낱이 드러나자 일진녀석들 부모도 더 이상 뭐라 하지못하고 병원비받고 합의하고 이런선에서 끝나는걸로 마무리 지으려 했는데 대혁이가 그냥 자퇴를 해버리더라구.”
한참을 말없이 듣고만 있던 수연은 듣고 안타까우면서도 놀라운지 한숨쉬며 말했다.
“휴우... 그래도 어떻게 아까는 그리도 딴사람으로 변한거지?”
한참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형우가 입을 열었다.
“대혁이가 트라우마 비슷한걸 가지고 있나보군”
성대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트라우마? 그게 뭔데?”
형우는 말했다.
“그러니까 과거에 크게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거나 아니면 마음의 상처들로 인해서 어떤 일에 유난히 과민반응을 보이거나 회피를 한다거나 뭐 이런 증상을 일컫는 말이야. 엘리베이터에 갇혀서 몇 시간동안 고생한 경험이 있는데 나중에 그와 비슷한 폐쇄적인 환경에 노출되면 더욱 공포를 느끼게 되는것도 일종의 트라우마라 할 수 있고. 일종의 자기 방어적인 행동같은거야. 예전에 우리가 배웠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나 일렉트라 콤플렉스도 일종의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어”
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러면 일종의 정신병인거야?”
그러자 지훈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증세가 심하면 정신병이긴 하지만, 사실 트라우마는 다들 크거나 적거나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아. 대혁이는 아까도 유난히 그런상황에서 과민반응을 보이고 다른 사람처럼 되는건 고등학교때 혹은 그 이전에 겪은 나름대로의 상처 때문에 과민반응을 보인게 아닌까 싶어. 자퇴까지 할 정도였다면 표현은 안했겠지만 상당히 큰 상처였겠지. 그래도 아까같은 상황을 가지고 트라우마라는 말까지 쓰기에는 좀 그렇지 않나?”
그러자 성대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나 역시도 트라우마가 있긴 있는 것 같아. 어릴 때 한강 부근 잔디밭에서 놀다가 경찰들이 익사해 죽은 사람을 꺼내는 걸 본적이 있어. 아마 강에 뛰어들어 자살한 사람이었겠지. 아직도 그 시체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나. 아무튼 그 이후로는 위험한 것도 아닌데 아래가 잘 보이지 않는 탁한 강이나 깊은 물만 보면 몸서리 치곤해. 이런 것도 일종의 트라우마라 할 수 있을까?”
한참을 말없이 듣기만 하던 수연이 처음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별다른 생각 없이 맘껏 마시고 떠드는 것도 일종의 트라우마가 아닐까? 답답했던 고등학교 생활로 인한 압박의 표출 같은.”
그러자 정희가 물었다.
“그럼 세상에 트라우마가 아닌게 어디있니? 얘도 참 싱겁기는~”
곰곰이 생각을 하던 성문이 입을 열었다.
“신촌이나 대학로에서 밤마다 수많은 대학생들이 술 마시고 떠들고 술집에서는 큰소리치고 대학생이니 뭐니 하는데 생각해봐. 잘났다고 설치며 노는데 따지고 보면 그들이나 우리나 불과 몇 달전 아니 고등학교 내내 그냥 말없이 하라는 대로 공부나 하면서 학교만 묵묵히 다니던 범생이나 다름없었잖아? 언제부터 그렇게 잘 놀았다고 말야. 웃기지도 않아. 나도 가끔 대학생들이 학교앞이나 어디서든 대학생입네 하면서 설치는거 그리 좋아보이진 않아.”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형석은 손을 내저은 뒤 맥주잔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야야~ 이거 너무 내가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서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었군. 원래 이거 서로 다시 한번 소개하고 잘 알아가자고 선배들이 피해서 만들어 준 자리잖아! 자 이제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자고! 나부터 소개한다. 난 키보드 파트로 들어온 연극영화과 김형석이다! 아까 나간 대혁이는 법학과 박대혁이고 기타인건 다 알지?”
그러자 성대도 껄걸 웃으면서 잔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난 베이스 파트로 들어온 법학과 홍성대지롱! 뭐 법대생 같이 안 생겼다고 우기면 할 수 없지만 아무튼 소속은 법학과가 맞다. 하하~ 내가 부짱이니 독재를 해도 시비 걸지 말도록! 헤헤~”
성문이도 잔을 들고 일어나 외쳤다.
“나는 보컬로 들어온 전자전기컴퓨터 아무튼 과 이름은 길어서 복잡해서 나도 말이 꼬이고! 그냥 송성문이다!”
정희도 잔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난 다들 알다시피 드럼으로 들어온 법학과 박정희다. 소개 더 필요없지?”
형우도 잔을 들고 일어났다.
“나는 기타로 들어온 경영학과 이형우다. 앞으로 다들 잘해보자구!”
지훈이도 잔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나도 형우처럼 기타로 들어온 의예과 최지훈이야. 난 기타를 잘몰라 배우고 싶어 들어왔으니 못한다고 구박하지마. 이제 다들 일어난거야?”
모두의 눈이 수연에게 쏠렸다. 수연은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일어났다.
“난 법학과 김수연이라고해.”
그러자 정희가 야유를 보내며 말했다.
“에~~ 저거 동기들 사이에서까지 내숭 떨거야? 잔은 안들거야?”
수연은 당황스러운지 한참 잔을 찾으려 두리번거리다가 잔을 들었다. 그리고 눈을 한번 딱감았다 뜬 뒤 다시 말했다.
“난 건반으로 들어온 법학과 김수연이야. 일부러 내숭떨려고 한건 아니고 이런 분위기가 그냥 낯설어서 그런거니 이해해줘. 다들 만나서 반가워!”
모두가 일어 섰다는걸 확인한 성대는 잔을 높이 들고 외쳤다.
“자 우리의 사랑과 정력을 위하여!”
다들 눈을 크게 뜨며 성대를 바라보았다.
“아하하~! 농담한거야~ 농담가지고 말야. 킥킥! 유머는 유머일뿐~! 자 위하여!”
그러자 모두들 즐거운 듯이 외쳤다.
“위하여!!!!”
모두들 한 모금씩 마시고나자 정희가 말했다.
“다들 마시고 노래방으로 콜! 어때?”
성문이는 좋다는 듯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
“좋지!”
맥주를 마시고 빠져 나온 뒤 일행은 근처 노래방에 방을 잡았다. 들어오자 맨 먼저 정희가 노래 목록을 붙잡아 들고 열심히 뒤지기 시작했다. 성문이는 가소롭다는 듯이 정희를 한번 바라보고 리모콘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란 정희는 성문이에게 물었다.
“뭐야? 노래방 죽돌이야? 번호를 외우고 사는거야?”
그러자 성문이는 마이크를 잡고 일어서서 말했다.
“고수는 목록 따위는 뒤지지 않는다. 하하하~”
성대는 예약된 노래 제목을 보더니 지겹다면서 성문이에게 소리쳤다.
“또 오버나잇 센세이션이 오프닝 곡이냐? 이제 지겨워~ 딴 걸로 오프닝 좀 해라!”
시끄러운 반주가 시작되자 성문은 성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오프닝에서 이거 만큼 시원한건 없잖냐. 안그래? 벌써 시작이잖아! 이야아~~!”
성문이는 길게 샤우트를 지른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시원한 소리였다. 다들 성문의 노래에 놀란 듯 감탄했다. 형우가 말했다.
“오오~ 이거 괜찮은걸? 나중에 이거 카피해도 괜찮겠네? 이거 반주는 몰라도 보컬 제대로 카피하는 녀석들 별로 없는데 아무리 노래방 마이크에 에코가 많이 걸려있어도 저 정도면 어디가서 빠지는 보컬은 아니겠어!”
그러자 성대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저 녀석이 그래도 고등학교에서 같이 밴드할 때 꽤나 유명한 녀석이었지. 후후”
정희는 한심하다는 듯 성대에게 말했다.
“근데 네가 왜 자랑스럽냐. 네가 부르냐?”
모두가 즐거워 보였다. 저런 악의 없는 말싸움도 너무나 유쾌해 보였다. 수연은 사실 이런 모임이 약간은 두려웠다. 여럿이 어울려 이렇게 아무런 고민도 없이 즐거웠던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잘나지 않았다. 그래서 두려웠었다. 자신이 이런데 에는 익숙지가 않다는 걸 보여주기가 부끄러워서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때마다 익숙지 않아 생겼던 부담은 점점 사라지고 지금은 그저 즐겁기만 했다. 첫 번째 동기모임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17. 첫 MT (1)
가끔씩 반갑지 않은 추위가 찾아오곤 하던 3월 초봄이 지나자 마치 이날을 기다렸다는 듯 곳곳에서 봄꽃들이 일제히 만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벚꽃으로 유명한 여의도 윤중로 거리는 꽃을 구경하러온 이들이 많았다. 수연과 정희는 오후 수업이 휴강이라 집에 바로 가기는 시간이 남고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길에서 우연히 윤중로의 벚꽃이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오전수업이 끝나자마자 지하철을 타고 여의도에 와서 벚꽃들을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참을 입을 벌리며 구경하던 정희는 멍하니 말을 했다.
“와아~ 세상에 이 꽃들 전부 언제 핀거야...”
수연이도 신기하다는 듯 나무에 가득달린 꽃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계절이나 자연은 참 신기하지 않아? 몇 월 며칠이란 경계가 따로 없는 것 같은데도 어느순간 보면 모든게 바뀌어 있어. 그걸 보면 하지, 동지, 경칩등 24절기를 만든 옛날 사람들도 참 대단한 것 같아.”
한참을 입만 벌리며 꽃들을 쳐다보던 정희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근데! 벚꽃은 일본국화 아니야? 우리가 이거 보면서 이렇게 좋아해도 되는거 맞아?”
그러자 수연이는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일본은 우리나라처럼 국화란게 따로 없대. 굳이 국화라고 따지자면 가을에 피는 국화있지? 그걸 일본의 국화라고 보면 된다더라.”
정희는 어리둥절한지 다시 물었다.
“국화가 일본의 꽃이라고? 또 굳이 따지자면 이라니... 무슨소리야?”
수연이는 벚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본 왕실의 상징이 국화래. 일본인들이 벚꽃을 좋아하긴 하지만 굳이 국화라고 내세우자면 일본 왕실의 꽃인 국화겠지. 거기다가 일본왕실은 일본이 처음 생길 때부터 한번도 핏줄이 바뀌지 않아 만세일계라고 부를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하니까. 실제권력은 오랫동안 막부가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일본 왕실의 맥은 잠깐 남북국 시대라는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분열도 안했고 끊어지지도 않은 채 이어져왔거든.”
수연의 설명에 놀란 정희는 감탄하며 말했다.
“오오~ 대단한데? 언제 그런 걸 알게 된 거야? 벚꽃이 일본국화가 아니구나. 그건 오늘 제대로 하나 배웠네. 참! 수연아. 너 동아리 방문에 붙어있던 공고문 봤어?”
수연이는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못봤는데... 뭐가 쓰여 있었어?”
정희는 생각만해도 기분 좋다는 듯이 말했다.
“중간고사가 끝난 다음에 대천으로 MT를 간대!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근데 MT가 마운틴의 약자 아냐? 왜 바다로 가는데 MT지?”
수연이는 황당한 듯 정희를 바라보았다. 정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MT가 Mountain의 약자가 아니야?”
수연이는 허탈한 듯 말했다.
“나는 네가 장난 치는 줄로만 알았는데 정말 모르는 거였어? MT는 Membership Training의 약자야. 에휴~”
그러자 정희는 또 무엇이 궁금한지 물었다.
“그럼 하나만 더 물을게! MC는 마이크의 약자 아니었어?”
수연은 잠시 정신이 멍해지며 말을 더듬었다.
“그...그.. 그건 Master of Ceremony의 약자야.. 너 때문에 나까지 헷갈리잖아. 헤에...”
정희는 뭐가 그리 좋은지 깔깔거리며 말했다.
“정말? 히히! 그랬구나~ 너 정말 똑똑하구나! 어떻게 그런걸 다 아는거야? 난 정말 엠티가 Mountain의 약자인줄 알았지. 킥킥! 오늘 벚꽃에다가 엠티에 많은걸 배우네! 앞으로 네가 내 전임교수 해줘~ 놀아줘~”
수연이는 허탈한 듯 한숨쉬며 말했다.
“너 어떻게 대학교에 들어왔니....”
그로부터 얼마 후 중간고사가 끝나고 엠티출발일이 되었다. 동아리 회장 필국은 1학년중 엠티에 참여하지 않는 회원들은 모두 제명 시켜버리겠다는 엄포를 놓은 터라 끝까지 아르바이트 때문에 어렵겠다던 대혁도 필국의 협박에 못 이겨 엠티 참가자 명단에 이름을 실었다. 미리 동아리방 앞에 와서 짐들을 챙기고 장을 본 물품들을 점검하던 성대는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내 저번 회식때 1학년 부장 맡으라던 걸 별 생각 없이 맡은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 장보러 갈 때에 무조건 참가에 두시간정도 일찍 와서 짐 챙기고 이 개뼉다구같은 성문이 녀석은 같이 온다더니 늦잠자느라 아직도 안오고. 아~ 이런 입춘제길!”
“뭘 투덜거리고 난리부르스냐~ 이 녀석아!”
“우헉! 누구?”
누군가가 성대의 뱃살을 움켜쥐며 말했다. 동아리 회장 필국이었다. 성대는 놀란 듯 물었다.
“형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그러자 필국은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만 온게 아니라 동아리 임원들 모두 미리 도착했다 이 녀석아~ 투덜거리기는. 임원이면 그 정도는 일찍 와야지 안그래?”
뒤돌아보니 필국의 말대로 동아리 임원급 선배들인 부회장 병희, 총무 상균을 비롯한 몇몇 선배가 오고 있었다. 또 그뒤로 성문이를 비롯한 1학년 남자회원들 모두가 졸린 눈을 비비며 오고 있었다.
“필국이형 어떻게 된거에요? 쟤네들까지 일찍 오고?”
필국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1학년 남자들은 무조건 일찍 오라고 새벽에 전화했다. 일찍 안오면 무조건 서해바다에 던지고 또 모임 예정시간보다도 늦게 오면 갯벌에다 묻어 버린다고 협박 좀 했지.”
하품을 하며 눈꼽을 떼는 성문의 모습을 본 성대는 매우 기분이 통쾌했다. 필국은 다 모인 것을 확인한 뒤 소리쳤다.
“자! 각자 잘들 챙겼지? 좀 있으면 우리가 전세낸 버스가 한대 올거다. 거기다가 모두 싣는다. 다들 빠진 것 없나 잘 체크하고!”
짐을 빠짐없이 챙긴 것을 확인할 때쯤 전세버스가 도착했다. 필국은 다시 소리쳤다.
“모두 다 짐을 싣는다! 실시!”
어느덧 버스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대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남자들은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개중에 빨리 잠든 성대같은 경우는 코까지 골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 모습에 정희는 수연에게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남자들이 뭐 이렇게 힘들이 없어! 고속버스타면 노래부르고 시끄럽게 놀면서 가는게 당연한거 아냐?”
그러자 정희의 뒷자리에서 잠을 청하던 형석이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필국이형이 일찍 안오면... 갯벌에 묻어버린다고... 협박해서... 일찍부터 나와 준비했어... 너희들도 일찍 일어나서 와보지 그랬냐... 아함~!”
근처에서 잠을 청하던 성문이도 졸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이놈의 학교는 가뜩이나 남자가 많은데 동아리도 남자들만 가득하고 남자중학교에 남자고등학교에 거기다가 남자대학교... 끔찍하구나....”
그렇게 몇몇을 제외한 남자들은 모두 잠이 들고 말았다. 계속 창문 밖을 바라보던 수연은 갑자기 정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정희야, 바깥좀 볼래? 저기 바다가 보여.”
살짝 잠이 들려하던 정희는 그 소리에 놀라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어디어디? 정말 저기 바다가 보이네? 이야! 금방 도착하네!”
마침 그 소리를 들은 부회장 병희는 둘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제 막 서해대교에 왔나보네?”
“서해대교요?”
“응,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지. 이제 서해대교인걸 보니 아직도 한참 가야 대천이 나와. 매번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서해대교... 정말 길구나...”
그 말을 들은 수연과 정희는 감탄하며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가까이 보이는 바닷물위로 햇살이 반짝였다. 다리가 생각보다 너무 길어서 마치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수연이는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바다를 본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예전에 아빠가 있을 때 가족끼리 몇 번 와보고 몇 년이나 지난 걸까... 저 푸른빛 정말 오랜만이야.’
수연이는 가족끼리 바다에 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일이 떠올랐다.
밤에는 모래에 폭죽을 세우고 하늘로 쏘아 터뜨리기도 했었다. 아버지가 바다근처 백사장에서 번개탄을 피워 구워주셨던 대하구이가 생각났다. 아버지는 새우의 몸통은 모두 동생 수완이와 자기한테 떼어주고 머리만 드시곤 하셨다. 아버지는 머리가 가장 맛있는 별미라면서 딱딱한 새우더듬이나 다리에 입술을 찔려가면서 씹어 드셨다. 그게 정말 별미일지는 몰라도 생각을 하면 할수록 너무 가슴이 아팠다. 수연의 기억에 아버지는 회를 무척 좋아하셨다. 개불이라는 지렁이같이 징그럽게 생긴 녀석을 회를 쳐서 씹을수록 맛있다며 초고추장에 찍어 드시던 아버지 모습이 생각났다. 그때는 그 모습이 그렇게 징그럽고 싫었는데 지금은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그렇게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수연의 눈에 멀리 ‘대천’이라는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필국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자! 이제 다들 일어나 준비해라! 대천 IC에 도착했다!”

 

 

 

 

18. 첫 MT (2)
대천 IC로 들어온 버스는 시내를 가로질러 목적지인 임해수련원으로 향했다. 철이 철인지라 시내에는 그리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는 않았다. 성대는 부회장 병희에게 물었다.
“잠잘곳은 그냥 민박집이나 여관을 잡지 왜 임해수련원으로 잡았어요? 애들 극기훈련이라도 시키시려구요? 아! 아파요~!”
병희는 성대가 귀엽다는 듯 볼을 잡아 당기며 말했다.
“네가 아직 잘 모르는구나. 여럿이 올거라면 임해수련원을 잡고 오는게 훨씬 싸다는걸 말야. 게다가 가격에 비해 방도 상당히 크고 왠만한 취사시설은 다 되어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임해수련원이라는 말답게 대부분의 임해수련원들이 바닷가 바로 근처에 있어서 백사장에 가서 바다구경을 하거나 혹은 횟집을 가건 어디를 놀러가건 무척 용이한 편이지. 앞으로 네가 군대 다녀와서 동아리 회장 되면 참고하거라.”
성대는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마침 버스는 임해수련원 부근에 도착했고 필국은 다들 짐을 챙기고 내리라며 소리쳤다.
“자! 다들 짐 챙기고 버스 아래에 실은 맥주나 그 밖의 음식들도 다 챙겨라!”
병희의 말대로 과연 임해수련원은 바닷가 바로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건물의 앞으로는 방풍림으로 조성이 된 듯한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나무들은 매우 곧게 자라서 방풍림이란 느낌보다는 수목원의 느낌이 강했다. 정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팔을 벌려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이야~~ 공기 너무 좋다. 버스안 공기는 너무 칙칙해. 수연아, 저기 파도 소리 들리지?”
수연은 바닷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방풍림너머로 출렁거리는 바닷물이 보였다. 정말 시원해 보였다. 수연은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와아~ 정말 오랜만에 바다를 봐.”
짐을 모두 내린 것을 확인한 필국이 말했다.
“다들 짐을 챙겨서 우리가 묵을 방으로 들고 간다. 얼른 하나씩 들고 오거라~ 방위치는 어딘지 모를테니 나를 따라오도록 하고!”
어느 정도 짐들이 정리가 되자 필국은 모두들 모이게 한뒤 말했다.
“점심은 아까 대충들 버스 안에서 주문한 김밥을 먹었을테고 또 시간도 점심을 더먹기는 어설프니 이따가 저녁때나 푸짐하게 먹도록 하자. 그동안은 바닷가 구경들 맘껏하거나 알아서들 놀다가 오후 6시까지 들어와.”
그러나 성대가 허기가 지는지 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필국이형! 전 배가 너무 고픈데요?”
필국은 성대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굶어!”
어느덧 시간은 6시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수연과 정희는 백사장을 걷다가 멍하니 바다만 보며 모래에 홀로 앉아있는 성대를 발견했다.
“성대가 왜 저러고 앉아 있는거지?”
정희는 성대에게 다가가 물었다.
“왜 홀로 앉아 고독을 씹고 있는거야?”
성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배고파서 움직이면 더 소화되어서 더 배고플까봐 앉아있었다. 왜!”
정희는 성대를 놀리면서 말했다.
“에에~ 아까 필국이 오빠가 굶으라고 해서 삐진거야? 소심하기는 킥킥!”
그러자 성대는 정말로 기분이 상한 듯 아무말없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임해수련원쪽으로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희는 당황스러워하며 수연이에게 말했다.
“쟤 정말 배고파서 삐졌나봐. 그게 가능한일이야?”
수연은 힘없이 걸어가는 성대의 뒷모습이 왠지 안쓰러워 보였다.
“뭔가 다른 일이 있을거야. 우리도 얼른 돌아가자.”
임해수련원 정문앞에서 담배를 피며 서있던 총무 상균은 힘없이 걸어오는 성대를 보고 화를 내며 말했다.
“너는 뭔데 이제 오는거야! 다들 일찍 와서 준비하고 있는데 선배가 선배 같지 않냐? 얼른 따라 들어와!”
가뜩이나 기분이 꿀꿀했던 성대는 그 말을 듣자 더욱더 기분이 상했다.
‘제길! 선배들은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맨날 나만보면 장난걸고 일시키고 또 오늘은 굶으라면서 화내다가 늦지도 않았는데 늦었다고 화내고! 확 탈퇴를 해버릴까.“
상균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하늘소! 하늘소!”
성대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미친거 아냐?’
그러나 방 내부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러자 상균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뒤따라오던 성대에게 말한뒤 취사실로 향했다.
“넌 빨리 들어가서 냄비하고 이것저것 챙겨와. 다들 저녁 준비하러 갔나보다.”
성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방안은 너무 어두웠다.
“뭐야? 아직 이렇게 어두울 때가 아닌데 방이 왜 이리 어두워?”
성대는 불을 키려고 스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 성대에게 무언가 날아들었다. 날아든 무언가가 성대를 감싸고 또 누군가가 성대를 들어서 넘어뜨렸다. 그리고 마치 멍석말이를 하듯 어디선가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성대는 아파서 소리를 질렀다.
“아! 아! 나 죽네! 살려줘! 아아아아~~”
성대는 가뜩이나 기분이 꿀꿀한데 이렇게 얻어맞기까지 하자 서글프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맞자 누군가가 성대를 감싼 것을 풀기 시작했다. 성대의 눈으로 형광등 불빛이 들어와 눈이 부셨다. 그리고 자기를 감싼 것이 이불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여기저기서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성대는 놀라서 주저앉아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때 필국이 다가와 말했다.
“성대야. 생일 축하한다!”
그러자 성대의 귀로 여기저기서 통기타 반주소리와 함께 생일 축하노래가 들렸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얼굴도 못생긴게 왜 태어났니~”
방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케이크가 놓여있었다. 성대는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제 생일인줄 어떻게 알고?”
그때 마침 방으로 들어온 상균이 말했다.
“어떻게 알긴? 입회원서에 생일 다 쓰여 있잖어? 그거 보고 알았지. 오늘 생일빵이 맘에 드냐?”
필국은 성대를 바라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 녀석 정말로 속더라. 순진한 녀석 같으니. 저기 형우나 형석이 지훈이, 성문이, 대혁이 같으면 벌써 알아챘을 것을 끝까지 모르고 말야. 생일 축하한다 성대야!”
성대는 너무 감동을 받았는지 뺨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형우와 지훈이 가냘픈 목소리로 음흉하게 말했다.
“어라? 이 녀석 지금 생일빵이 끝난걸로 착각하고 있나봐?”
“그런가봐~ 흐흐~”
성문이 성대를 향해 씨익 웃으면서 케이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성대의 얼굴을 향해 케이크를 던졌다.
“자! 파이날 카운터다! 받아라 돼지야!”
성대는 날아드는 케이크를 발견하고 용케 피했다. 그러나 케이크는 마침 들어오던 정희의 얼굴에 정면으로 박혔다. 깜짝놀란 성문은 정희의 얼굴에 박힌 케이크를 천천히 치웠다. 한참을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희는 갑자기 얼굴의 크림을 닦더니 성문에게 달려들었다.
“끼야아!!”
“미안해! 고의가 아니었어~! 살려줘!”
성문은 정희를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정희는 성문을 쫓아가면서 얼굴에 묻은 크림을 근처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묻히기 시작했다. 그러자 방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모두 서로 도망을 다니며 한참을 뛰어다니다가 지쳐서 방안에 주저앉고 말았다. 숨을 고르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 다들 또 다시 한참을 웃기 시작했다.
수연은 이렇게 걱정 없이 기분 좋게 웃어본 일이 얼마만인가 생각해 보았다. 너무도 오랜만이라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앞으로는 항상 이렇게 기쁘고 행복한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정말 행복한 저녁이야...’

 

 

 


19. 진실게임(1)
한바탕 시끄럽던 성대의 생일축하가 끝나고 저녁식사도 끝나자 선배들은 방구석에 모여 이불을 펼치고 화투를 치기 시작했다. 정희는 그 모습을 보고 수연이에게 귓속말을 했다.
“선배들 너무 아저씨 티를 내는 것 아냐?”
“동아리에 여자선배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그렇겠지 뭐.”
“처음부터 여자선배들이 없던걸까? 아니면 들어왔다가 칙칙해서 나간걸까?”
“하긴 우리 처음에 들어올 때 선배들이 오디션은 고사하고 입회원서부터 허겁지겁 들고 왔었잖아.”
이들 말대로 동아리에 여자회원이라곤 수연과 정희 둘뿐이었다. 전에 선배들 말로는 대략 3년만에 처음으로 들어온 여자회원이라는 것이었다. 그때 성대 툴툴거리며 다가와 말했다.
“저기서 고스톱에 끼려다가 애들은 가라면서 쫓겨났다.”
수연이는 주위에 남자동기들이 아무도 없다는 걸 발견하고 성대에게 물었다.
“다들 우리만 빼놓고 어디간거야?”
정희도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까 네 생일 파티도 우리는 모르게 준비하더니 이번에도 수연이와 나만 빼놓고 다들 어디로 간거야?”
성대는 실실 웃으며 창문 밖을 가리켰다.
“저기서 다들 캠프파이어를 준비하고 있었지. 그럼 너희들이 준비하려고 그랬어? 다들 나가보자. MT의 로망은 캠프파이어 아니겠어? 여기는 일단 선배들이 고스톱삼매경에나 빠지게 내버려두고 나를 따라서 백사장으로와.”
해가져서 어두워진 바다위로 달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까 낮보다도 밤에 사람들이 더 많이 있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울렸고 폭죽이 터진 하늘에는 형형색깔의 빛들이 새겨졌다. 수연의 입에는 감탄사가 저절로 새어나왔다.
“정말 멋지다...”
그 말을 들은 성대가 뒤돌아 수연이를 보며 말했다.
“멋져? 그러면 우린 더 멋있는 것을 보여주지. 기대하시라~”
백사장에는 이미 모두들 모여 불을 피우기 위해 쌓아놓은 나무주위로 둥글게 앉아있었다. 수연이와 정희도 그 사이에 들어와 모래위에 앉았다. 성대는 앉아있는 모두에게 잔을 하나씩 나누어 주고 맥주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의 잔에 맥주가 차자 성대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그리고 라이터를 켜면서 말했다.
“너희들 영화 콰이강의 다리 봤냐? 거기 보면 이 지포라이터를 켜서 던지는 장면이 나오잖아. 자 이제 멋지게 불을 피워보자구!”
그러자 성문이 성대를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야! 그 라이터 정말 던지려고? 너 그게 얼마짜리인지 알고 하는 소리야? 그거 던지면 이따가 저 불에 널 던져 버릴테다!”
성대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자식 소심하기는~ 히히! 여기 신문지 준비해왔다. 여기다 붙여서 불을 피울테니 쫌생이 같이 굴지마 자슥아. 어~ 어어어! 어라!!!”
신문지에 불을 피우던 성대는 생각보다 너무 빨리 타는 신문지에 놀라 라이터를 놓치고 말았다. 놓친 라이터는 휘발유를 뿌려놓은 장작위로 정확히 날아갔다. 그리고 나무들은 순식간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걸 지켜보던 지훈은 어이없는 듯 말했다.
“콰이강의 다리 속편이군...”
자신의 라이터가 타들어가는걸 보고 성문은 성대를 향해 절규했다.
“야이! 개시끼! 아니 돼지새끼야! 그게 얼마짜리인줄 알아! 그거 지포라이터 등급에서도 B급 짜리야! 지포라이터계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이거늘 감히 내 보물가지고 영화를 찍어!”
성대는 슬슬 뒤로 피하며 손사래를 쳤다.
“야야~ 미안해~ 내가 나중에 B급! 아니 A급으로 사줄게~ 제발 오늘은 살려주라~”
한참을 식식거리던 성문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체념을 하면서 말했다.
“저 녀석 생일을 재삿날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나중에 꼭 좋은걸로 내놓아라.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지. 얘들아 저 돼지 넘어뜨려.”
그러자 성대의 근처에 있던 형석이가 성대의 뒤를 붙잡고 대혁이가 다리를 들었다. 형석이가 힘든지 소리쳤다.
“야! 이 녀석 너무 무거워! 다들 도와줘~~!”
그러자 모두들 모여 성대를 어깨위로 들어올렸다. 당황한 성대가 소리쳤다.
“얘들아! 아니 동기님들~ 뭐 하시려구요!!!”
성문이가 성대를 향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의 마지막 생일빵이다! 이 녀석 저기 바다로 던져버려!”
그러자 모두들 성대를 들쳐매고 바다를 향해 달렸다. 성대는 살려달라 소리쳤다. 그러자 성문이는 코웃음 치며 말했다.
“자슥 돼지 멱따는 소리하고 앉았네. 얘들아! 던져!”
“하나~”
“제발!”
“두울~”
“플리이이이이즈!!!”
“셋!”
“으아아아아아~~”
“첨벙!!”
여럿이 달려들어 바닷물에 던지자 육중한 몸의 성대도 어쩔 수 없이 처참하게 바닷물에 잠기고 말았다. 성문이는 통쾌한지 손을 털며 말했다.
“자~ 이제 돌아가자 얘들아.”
그때 바닷물에서 일어난 성대가 형석이에게 다가와 붙잡으며 말했다.
“네가 가장 먼저 나를 잡았겠다?”
“어! 뭐하는짓이여! 으아!!”
성대는 형석의 몸을 끌어안고 바닷물에 넘어졌다. 그러자 형우는 배를 붙잡고 웃으며 형석에게 다가갔다.
“이 녀석은 절대 혼자 안 죽는 거머리 같은 녀석이군. 어? 어어! 으아!”
순간 누군가의 손이 형우의 발목을 붙잡아 넘어뜨렸다. 형우역시 보기좋게 바닷물에 잠겨버리고 말았다. 성대가 물에서 스르륵 일어나 음산하게 말했다.
“내가... 왕년에 물귀신이었지. 흐흐!”
그때 형석이와 형우도 물에서 스르륵 일어나 고개를 숙인채 팔을 앞으로 내밀며 음산하게 말했다.
“나도 오늘부로 물귀신이 되었지. 흐흐!”
그 모습을 본 대혁이가 무거운 표정으로 짧게 외쳤다.
“튀어!”
물귀신(?) 셋은 도망가는 그들을 향해 외쳤다.
“어딜!”
순식간에 백사장은 쫓고 쫓기는 살육의 현장(?)으로 변해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렇게 몇분이 지나자 물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모래에 앉아 숨을 고르던 성대가 추운지 덜덜 떨며 말했다.
“춥다... 가서 불이나 쬐자...”
모두들 캠프파이어 주위로 옹기종기 모여 앉아 불을 쬐기 시작했다. 한참을 말없이 불을 쬐던 중 정희가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말했다.
“우리 이러고 있지 말고 게임이나 하는거 어때?”
“무슨 게임?”
정희는 주먹을 꼭 쥔채 씨익 웃으며 말했다.
“진실게임!”
“그럼 규칙은 어떤식으로 할건데?”
정희는 소주를 한손에 한병씩 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누가 걸릴지는 369게임으로 정하는거야. 그래서 걸리는 사람에게 질문을 해서 뭐든지 물어보는거야. 단 질문은 한번 걸리면 딱 한가지만! 반드시 솔직하게 대답하여야 하고 질문에 도저히 대답을 못하겠으면 벌칙으로 소주를 한잔씩 깡소주로 마시는거야. 그리고 소주잔은... 뭘로 할까..”
정희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종이컵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종이컵을 들고 말했다
“이 잔으로 하는거야. 어때? 재미있지 않겠어?
성대는 정희말에 감탄하며 말했다.
“오오~~ 잔이 좀 부담가긴 하지만... 그거 재미있겠는데? 정말 재미있겠다! 오늘 다들 각오해라! 내가 왕년에 369짱이었다! 오늘 다들 까발려주마!”
성문이가 한심한 듯 쳐다보며 말했다.
“저건 지가 뭐를 하던 다 짱이랴~ 아무튼 게임 재미있겠는걸? 다들 오케이?”
주위를 한번 둘러본 성대가 말을 이었다.
“자 이제 시작이다! 내가 부장이니 나부터 시작하지! 킥킥!”
“어! 저 치사한 녀석!”
성대는 주위의 야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게임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나를 기준으로 왼쪽으로 돈다! 시작한다!. 삼육구! 삼육구! 삼육구! 삼육구! 일!”

 


 

 

 


20 . 진실게임 (2)
369게임이 시작되자 모두들 머릿속으로 숫자에 집중을 해가며 게임에 임했다. 성대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게임에 집중했다. 숫자와 박수소리 말고는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것들이 내가 이거에 관해서는 얼마나 고수인지를 모르는 모양이지? 무슨 질문을 할까~ 룰루룰루~ 오~ 베이베!’
게임은 생각보다 오래 끌었다. 다들 서로 눈치만 보며 누군가 걸리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삼십일!”
“삼십이!”
“삼십삼!”
순간 모두의 눈은 삼십삼을 외친 사람에게 향했다. 성대가 자신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걸린거야?”
성문이가 실실웃으며 말했다.
“그럼 누가 걸렸냐? 삼육구짱이라며? 킥킥”
성대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무슨 질문이 올까는 별로 두렵지 않는데 내가 삼육구에서는 무적이건만 첫빵으로 깨진게 한이로다..”
그러자 성문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자~! 저녀석 한탄하는건 신경 끄시고! 질문 할 것 있으면 아무나 하거라.”
그리고나서 바로 성문이는 성대에게 질문했다.
“지구에 온 목적이 뭐냐?”
“푸핫!”
“흐흐!"
성대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소주를 종이컵에 따른뒤 한번에 마셨다. 성문이는 의외의 반응에 놀란듯 말했다.
“허헉! 말을 못하고 소주를 원샷하다니... 너 정말 외계인이었냐? 다들 멀더와 스컬리좀 불러와! 이거 비상사태야!”
얼굴이 벌개진 성대는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실수는 한번 뿐이다! 다들 각오해라! 시작한다! 삼육구, 삼육구! 삼육구, 삼육구! 일!”
“이!”
“짝!”
“짝!”
정희가 바로 걸리고 말았다. 정희는 허탈한지 손바닥을 살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힘없이 말했다.
“질문해...”
지훈이가 실실 웃으면서 물었다.
“각하~! 첫키스는 언제 해보셨나요?”
그러자 정희는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어서 말해봐~~ 아니면 술 한잔 따라 마시던가~ 히히!”
정희는 힘이 빠진 듯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한번도 없어...”
그러자 다들 짓궂게 묻기 시작했다.
“정말이야? 사실이야?”
“리얼리?”
정희는 짜증내며 소리를 지른뒤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없다니까!”
바로 옆에 있던 성문이는 놀란 듯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각하 성질 대단하시네. 허헐~”
그때 성대도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며 힘없이 말했다.
“나도 없어...”
“너는 있는게 이상한거고. 킥킥!”
그렇게 한참동안 게임은 계속되고 수많은 질문들이 오고갔다. 질문에 대한 대답도 많은 만큼 술병의 술도 덩달아 줄기 시작했다. 그 술의 반은 정희의 입으로 들어갔다.
“사십이!”
“사십삼!”
성대의 왼쪽 두번째에 있던 형우가 처음으로 걸렸다. 마침 약간 술에 취해 있던 정희가 씨익 웃으면서 형우에게 질문했다.
“너 우리들 중에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있지?”
한참을 생각하던 형우가 입을 열었다.
“있어.”
“오오~~~”
정희는 더욱 음흉하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누군데~~?”
그때 성대가 끼어들어 말했다.
“자자~ 질문은 한번에 하나씩! 다시 게임 시작한다! 삼육구! 삼육구!”
수연은 얼굴이 괜히 빨개지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궁금했다.
‘혹시 나를 말하는 건가? 지난번에 나에게 선물을 주긴 했지만 그 이후로 특별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일!”
“이!”
“삼!”
형우가 또 걸렸다. 그러자 형석이가 손으로 형우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너 일부러 그런거지? 저 너무나도 용의주도한 녀석! 히히! 어서들 질문해라!”
정희가 형우에게 또 질문했다.
“혹시 성이 김씨니?”
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눈이 수연에게 쏠렸다. 수연은 너무 부끄러워서 어디론가 숨고만 싶었다. 그때 성대가 하늘을 쳐다보며 의뭉스럽게 말했다.
“김씨? 취향도 특이하네~ 형석이를 좋아한단 말야? 커밍아웃이야?”
그러자 형석이 정색을 하며 소리쳤다.
“무슨소리!”
성대가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자아~자! 다시 또 삼육구 시작해야지? 삼육구! 삼육구! 일!”
“이!”
“삼!”
형우가 또 걸렸다. 누가 보아도 일부러 걸리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때 지훈이가 웃으며 질문했다.
“정희는 아니지?”
형우는 한번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이는 너무 부끄러워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정희가 수연이를 붙잡으며 웃었다.
“김수연! 어딜가? 게임을 끝내야지~ 히히!”
성대는 다시 주위를 돌아보며 소리를 쳤다.
“이제 마지막 게임이다! 삼육구! 삼육구! 일!”
“이!”
“삼!”
또 다시 형우가 대답했다. 이번에는 성대가 킥킥 웃으면서 질문했다.
“형우야~ 마지막 질문이다! 여자지?”
형우는 또 다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눈은 수연에게 향했다. 그때 성문이가 수연이를 향해 소리쳤다.
“수연아! 이제 게임 끝났는데 소감을 말해야지?”
수연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았다. 주위의 눈이 모두 자신에게 향하자 수연이는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나..난.. 잘 모르겠어...”
정희는 수연이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말했다.
“모르긴 뭘 몰라~! 형우가 너 좋아한다는 소리 아냐? 아직도 모르겠어??”
수연은 당황스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정말 모르겠어. 화이트데이때 형우가 나에게 선물을 주긴 했지만 그 이후로 나에게 별다르게 이야기 했던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많이 당황스러워.”
그때 형우가 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너에게 선물을 주고 마음을 표현한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러자 정희가 형우에게 물었다.
“그러면 화이트데이 이후 또 뭔가를 건넨적이 있단말야? 저 내숭덩어리! 또 뭘 받았던 거야?”
수연이는 당황한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냐! 난 그 이후로 형우에게 어떤 것을 받은 일도 특별한 이야기를 들은 일도 없어. 정말이야!”
그러자 모두의 눈이 형우에게 집중되었다. 형우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화이트데이날 이후로 준적은 없지만 그전에 선물을 몇 번 주었던 적이 있는데 수연이는 기억이 잘 안나나 보네?”
수연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소리쳤다.
“혹시 이름 없이 작년 성탄절에 선물을 보냈던 사람이 너였니?”
형우는 미소를 지은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기 시작했다.
“난 성탄절만 선물을 주었던건 아닌 것 같은데? 작년 가을에도 한번 보낸 것 같고 수능전날에도 한번 보냈던 것 같은데?”
수연이는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수연이는 말을 더듬으며 형우에게 묻기 시작했다.
“저...정말.. 네가 보냈던거니? 그런거니?”
형우는 웃으면서 수연의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휴우~ 이제야 속이 다 시원하네. 그동안 너에게 얼마나 그 사람이 나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는지 몰라. 겉은 태연하려 노력하는데 속은 얼마나 타들어가던지 말이야. 사실 MT에 와서 개인적으로 고백을 하려 했었지만 이렇게 고백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 사실 이 대학에 들어온 계기도 네가 원서를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야.”
성대는 그 말을 듣고 감탄한 듯 입을 벌린 채 혼잣말을 했다.
“이야... 정말 대단한 러브스토리군. 정말 대단해...”
그때 정희가 수연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야! 왕내숭! 고백을 받았으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게 예의 아니냐! 얼렁 대답해~”
수연은 한참을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기다가 깨를 들었다. 모두의 눈은 수연에게로 향했다. 그때 성대가 수연에게 물었다.
“김수연양! 받아들일거면 고개를 끄덕이고 아니면... 뭐 그건 알아서 하고! 오늘 진실게임의 결론은?”
수연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다가 말없이 미소를 지은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모두들 일어나 환호하기 시작했다.
“이제 둘이 그린터틀 1학년 공식 커플이 된거야?”
“축하한다! 이형우! 너의 이야기는 남자로써도 정말 멋있었다!”
“이거 가만히 있으면 안되는거 아냐? 그 다음은 둘이 알아서들 하라구!”
형우는 수연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수연이의 눈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수연이를 껴안았다. 그들 주위로 환호와 박수소리는 점점 더해만 갔다. 그리고 어디선가 이들을 축하하기라도 하는 듯 수많은 폭죽이 하늘로 날아올라 터지며 밤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21. 새벽바다 (1)
아직 동트기전인 이른 새벽. 수연은 밤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뒤척이다 한참 만에 잠이 들었다. 하지만 깊이 잠들지는 못한터라 여기저기서 코고는 소리에 잠이 완전히 깨고 말았다. 수연은 시계를 바라본 뒤 눈을 비비며 한숨을 쉬었다.
“휴우... 이제 겨우 5시반이네...”
다시 잠을 청하려 누웠지만 몸에 쌓인 피곤과는 별개로 정신은 맑았고 잠은 들지 않았다. 어젯밤에 벌어진 일들이 모두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어제 일들이 정말 있었던 일일까?’
수연은 볼을 꼬집으며 어제 벌어진 일들을 생각했다. 성대의 생일, 캠프파이어, 진실게임, 형우의 고백... 모든 것이 생생했다. 창문을 통해 비치는 새벽빛 너머로 형우의 잠든 모습이 보였다. 어제 밤부터 서로 달라진 관계 때문인지 형우의 아무렇게나 잠든 모습조차도 수연의 마음속에 뚜렷하게 각인되었다. 수연은 문득 새벽바다의 모습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혹시나 잠든 사람들이 깰까봐 천천히 일어나 점퍼를 어깨에 걸치고 조심스럽게 문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다시 되돌아 이불을 팽개치고 자고 있는 형우에게 다가가 이불을 도로 덮어준 뒤 건물 밖으로 나왔다. 아직은 많이 쌀쌀한 듯 수연이는 옷깃을 여미며 바닷가로 향했다.
‘새벽에는 정말 춥네, 괜히 나온건가?’
이 시간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으리라 생각한 수연은 생각보다 사람들이 백사장에 많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들렸다.
“이이야~~~~! 꺄아아아!!!”
“우와~~~악! 켁켁켁!”
고함소리가 들릴 때마다 사람들은 그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수연이도 놀라서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자 두 사람이 바닷가 근처 절벽위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좀더 절벽 가까이 다가가자 수연이는 그들이 누구인지 식별할 수 있었다. 성대와 성문이었다. 수연이는 어이가 없어 왜 소리를 지르고 있는지 묻기위해 절벽에 올랐다. 한참 소리를 지르던 둘은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보았다.
“수연아,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수연이는 피곤한 듯 하품을 한번 한 뒤 말했다.
“피곤한데 잠도 잘 안들고 그냥 새벽 바다나 구경하고 싶어서 나왔어.”
그러자 성대가 킥킥 웃으면서 말했다.
“임자있는 아녀자가 외간남자 앞에서 하품이나 하면 쓰나~ 킥킥! 형우랑 같이 나오지 왜 혼자 나왔어?”
그 말에 수연이는 부끄러운지 잠시 입을 가리다 손을 내리고 말을 이었다.
“피곤한지 깊이 잠든 것 같아서... 그런데 너희들 왜 여기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거야?”
성문이는 목을 가다듬으려는 듯 몇 번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보컬의 생명은 목! 이렇게 아침에 시원한 바다를 바라보며 맑은 공기를 마신 뒤 사자후를 한번 지르면 호연지기가 절로 솟아나지! 이야아아~~!”
수연이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성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넌 왜 소리를 지르는거야?”
성대는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나도 한번 질러보고 싶었어~”
그러자 성문이는 성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는 삑사리에 돼지 멱따는 소리는 그만하고 그냥 바다나 감상하거라. 이야아아~~!”
성대는 그 모습을 보고 질 수 없다는 듯 주먹을 쥔뒤 말했다.
“웃기지마라! 우와아아아~~~~악! 케엑! 켁!”
성문이는 그 모습이 안쓰러운지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거참~ 안돼는 것 가지고 무쟈게 애를 쓰네. 그냥 가서 베이스나 쳐라. 그렇게 소리지르다 성대결절 때문에 입원하겠다.”
어디선가 누가 피리를 부는 듯한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성대는 목이 아픈지 한참 켁켁거리다 그 소리에 집중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이 멜로디는 대황하인데? 누가 부는거지?”
성문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성대에게 물었다.
“대황하? 그게 뭔데?”
그러자 성대는 성문을 향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이 무식한자식 같으니 이제 헤비메탈은 좀 그만 듣고 골고루 듣고 살아라. 명색이 밴드 보컬이란 자식이 이렇게 무식해서야. 저거 일본의 노무라 소지로라는 아티스트가 연주한 오카리나 연주곡이야. 한번도 못 들어 보았냐?”
성문이는 전혀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멜로디는 어디선가 들은 것 같긴 한데 오카리나는 한번도 구경 못해보았어.”
셋은 멜로디가 들리는 곳을 향해 귀를 기울이며 말없이 연주를 들었다. 성대와 성문이는 감탄한 듯 입을 열었다.
“바닷가에서 저 음악을 연주하는걸 들으니 분위기 죽이는군... 이 기회에 오카리나를 하나 사다가 연습해볼까...”
“네가 저 음악을 연주한다고 생각하니 전혀 매치가 안되긴 한다만 이렇게 바다에서 들으니 정말 멋지군...”
수연이는 무언가 발견한 듯 둘에게 소리쳤다.
“저기 서서 무언가 불고 있는 사람 혹시 대혁이 아니니?”
“어디?”
“어? 정말 그런 것 같은데?”
성대는 바닷물과 백사장이 만나는 지점에 누군가가 서서 무언가를 불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성문이는 한참을 살펴보다가 나즈막히 말했다.
“정말 대혁이가 맞는데...”
“저 녀석 정말 별난놈이구만. 어딜 가서 뭘 하든 독특한 녀석이야.”
“가보자! 녀석 저런 것도 불 줄 아는 재주가 있었단 말이야?”
셋은 절벽에서 천천히 내려와 오카리나를 불고 있던 사람에게 향했다. 성문의 말대로 오카리나를 불고 있던 사람은 대혁이었다. 성대는 박수를 치며 다가가 대혁에게 말했다.
“아까 대황하를 불은 사람이 정말 너야?”
대혁이는 성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문이는 감탄하며 대혁에게 물었다.
“하아~ 이 친구 정말 괴짜네. 대황하인가 뭔가 말고 또 다른것도 들려 줄 수 있어?”
“응, 안 그래도 다른곡들을 불을까 생각 중이었어.”
대혁은 오카리나를 들어 입에 물고 불기 시작했다. 성대는 또 다시 감탄하며 말했다.
“오오... 이번에는 타이타닉 주제 음악이네? 원래 아이리쉬 휘슬로 시작하는 곡인데 오카리나로 불으니 이것도 정말 괜찮은데? 대혁아! 나중에 공연하면 너 솔로로 오카리나 한번 불어라. 이거 불면 정말 대박이겠다!”
수연이는 성대에게도 놀란 듯 물었다.
“와아~ 오카리나에 아이리쉬 휘슬에... 이것저것 정말 많이 알고 있네? 어떻게 그걸 다 아는거야? 대혁이도 신기하지만 너도 참 신기해.”
성대는 옆구리에 손을 댄채 가슴을 펴며 으쓱거렸다. 그러자 성문이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수연에게 말했다.
“저거 다 잡지식이야. 저 녀석 깊이 아는 것은 하나도 없어. 히히! 고등학교 다닐 때에도 수업시간에 교과서 대신 음악잡지 읽다가 걸려서 혼난게 한 두 번이 아닌 녀석이야 그러니 모를래야 어떻게 모르겠어. 킥킥!”
그러자 성대와 성문이는 서로 또 티격태격 말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수연이는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다 대혁에게 다가가 말했다.
“오카리나 한번 구경 시켜 줄 수 있니?”
대혁이는 말없이 목에 걸려있던 오카리나 두개를 빼서 수연이의 손에 들려주었다. 수연이는 오카리나의 모양이 신기한지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무슨 오리처럼 생겼네. 그런데 오카리나를 왜 두개나 가지고 있는거야? 둘이 무슨 차이가 있어?”
대혁이는 수연이에게 오카리나를 도로 받아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카리나라는 말 자체가 이탈리아어로 거위새끼라는 뜻이래. 이름답게 생긴 악기야. 왜 두개를 가지고 있냐면 오카리나는 표현 할 수 있는 음역대가 한정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또 악기마다 기본적인 조성도 틀려. 이 큰 오카리나는 알토C 음역을 내고 작은 녀석은 소프라노 G음역을 가지고 있어. 알토와 소프라노 오카리나중에서 각각 가장 무난한 음역대를 가진 녀석들이야. 그래서 음역이 오카리나 하나로는 표현될 수 없는 곡들은 몇 개의 오카리나를 가지고 번갈아가며 연주를 하기도 해. 아까 연주했던 대황하도 오카리나 한개로는 연주 할 수 없어서 이렇게 두개를 가지고 연주해야해.”
옆에서 대혁의 설명을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성대가 물었다.
“아아~ 근데 그거 얼마면 사?”
성문이는 한심한 듯 성대의 머리를 한대 쳤다. 그러자 둘은 또 다시 티격태격 말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수연이는 그 둘을 뒤로한 채 대혁에게 말했다.
“음역이 제한되어 있다면 생각보다 일반적인 음악들을 표현하기에 뛰어난 악기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러자 대혁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점이 불편하긴 하지만 오카리나는 다른 악기에는 없는 이것만의 매력이 있거든.”
“어떤?”
대혁이는 오카리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 녀석은 자연의 소리를 내거든.”

 


 

 

 

22. 새벽바다 (2)
수연이는 의아해하며 대혁에게 물었다.
“자연의 소리? 그게 무슨 뜻이니?”
대혁은 오카리나를 손등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이 소리 들리지? 오카리나는 흙을 구워서 만든 악기야. 모든 생명의 근원이자 마지막인 흙으로 만들어진... 오카리나의 기원 역시 선사시대 이상으로 오래 거슬러 올라가. 인류 최초의 악기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니까. 어떻게 보면 이 녀석이 자연의 소리를 낸다는 것은 당연한 건지도 몰라.”
대혁이는 작은 오카리나를 수연에게 건냈다. 수연이는 신기한지 오카리나를 두드려 보았다. 그러자 옆에서 성문이와 한참 말싸움을 벌이던 성대가 대혁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녀석은 어릴 때에도 애늙은이처럼 말하더니 이제는 완전히 철학자 같은 소리만 하네! 수연아! 우리나라에도 오카리나와 비슷한 악기가 하나있어. ‘훈’이라고 하는 녀석이 있지. 그것도 흙으로 만들고 연주하는 방법도 오카리나랑 비슷하지. 자랑스러운 우리나라지. 그리고 소리는... 어헉! 켁!”
그때 성문이는 성대의 목을 붙잡아 헤드락을 걸며 말했다.
“이 자슥이 잡지식가지고 또 잘난척 하네! 어제처럼 바다에 던져주랴?”
대혁은 둘의 말싸움을 뒤로하고 수연에게 말했다.
“우리나라의 훈이라는 악기도 아마 오카리나와 기원이나 원시적인 형태는 거의 동일할거야. 다만 소리의 차이라면 오카리나는 좀더 맑고 밝은 소리를 내는 반면 훈은 좀 어둡고 낮으면서도 약간은 탁한 소리를 내는 편이야. 한국의 오카리나라고 할 수 있는 훈보다 이 오카리나가 좀더 많이 대중화가 되었던 것은 아무래도 맑은 소리와 또 훈보다는 연주가 편해서이지 않은가 싶어. 그리고 오카리나의 기원은 유럽이지만 지금은 일본이 이 분야에서는 더 유명하고 대황하를 연주한 노무라 소지로처럼 유명연주자도 많이 있어.”
한참 성문이와 티격태격 거리던 성대가 다시 수연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본이 은근히 그런게 좀 많아. 혹시 오르골이라는 악기 아니? 그것도 오카리나와 비슷한 케이스인데 말야.”
그러자 성문이는 잠시 말싸움을 멈추고 성대를 보며 이야기 했다.
“오르골? 나 그거 소리 무척 좋아하는데? 그거에 대해서도 알고 있냐?”
그러자 성대는 성문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여튼 사람은 배워야혀. 이 무식한 시끼는 알지도 못하면서 나에게 잘난 척 어쩌고나 하고 말야.”
“하! 이 새끼는 한번 띄워주니 또 지랄이네!”
“모르는 걸 알려준다는데 왜 나한테 지랄이야!”
둘은 또 다시 말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수연이와 대혁이는 그들의 싸움을 외면한 채 이야기를 계속 했다.
“대혁아, 오르골이 뭔지 아니?”
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름은 생소할지 몰라도 그 소리는 아마 많이 들어보았을 것 같은데? 선물상자나 보석상자 같은걸 열다가 자주 들어보았을 거야.”
수연이는 곰곰이 생각을 하다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아! 선물 상자 열면 나오는 맑은 소리! 그것도 따로 악기가 있는 거니? 이번에 처음 들어.”
사실 동아리에 들어왔어도 악기라고는 음악시간에 쓰던 리코더, 단소 등이나 어릴 때 배웠던 피아노정도만 아는 수연에게 오카리나나 오르골 같은 생소한 악기 이야기는 정말 흥미롭고 신기했다. 대혁은 눈을 크게 뜨며 바라보는 수연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진짜 오르골 소리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을 거야?”
“그럼 그건 오르골이 아니라는 거니?”
“맞다고도 또 아니라고도 할 수 있어.”
“그게 무슨...”
“오르골은 상당히 까다로운 악기야. 테엽을 감아 놓으면 안에서 조그만 원통이 회전을 해. 그 원통의 표면에는 여기저기 돌기가 달려있는데 그 돌기가 안에 음표별로 배열된 울림쇠를 진동시켜서 소리를 내는 원리야. 원통의 크기는 한정된 편이라 기껏해야 몇 마디 정도만 음악을 연주할 수 있어. 또 오르골은 원통안에 내장된 한 음악밖에 연주를 못해. 게다가 상당히 작고 정밀하게 돌아가는 악기인지라 가격이 비싼편이야. 그래서 대부분 오르골 소리가 나는 선물상자들은 단가가 싼 전자회로를 이용해서 흉내를 내는 것들뿐이야. 아마 진짜 오르골소리는 거의 못 들어 보았을 거야.”
“그렇다면 별로 쓸모없고 돈만 많이 드는 악기네?”
“꼭 그렇진 않아. 처음에 오르골이 만들어진 건 시계산업이 발달한 유럽중부 스위스지방이야. 당시 시계산업은 그때 기술수준으로는 대단한 정밀도와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었는데 그 사람들이 처음 오르골을 만들었다더라. 지금도 스위스는 시계로 유명하잖아. 테엽으로 정밀하게 돌아가는 시계나 오르골 둘 다 기술적으로는 통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특유의 맑은 소리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천상의 소리라며 사랑을 많이 받았나봐. 하지만 축음기의 등장 이후 음향 기술의 발달로 오르골은 점점 사라지게 되었어. 그건 당연한 것이지. 하지만 이후 20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했어.”
“그렇다면 다시 인기를 끈 이유가 있었겠네?”
“사실 마땅한 이론도 설명할 근거도 과학적인 것은 없지만 누구나 전원에서 사는 것을 꿈꾸잖아. 일종의 인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향수라고 생각해. 동아리방에서 보았겠지만 신디사이저 하나만으로도 다른 악기가 필요없을 정도로 수많은 소리를 만들어낼 수가 있어. 신디사이저 역시 그 이전에는 멜로트론이라는 악기가 있었어. 건반을 하나 누르면 소리가 녹음된 테이프가 돌아가서 소리를 내는 원리였어. 지금 생각하면 대단히 원시적인 구조지. 그 역시도 신디사이저의 등장으로 인해 거의 쓰이지 않다가 요즘 들어 그걸 다시 쓰는 음악인들이 나타나고 있어. 지금도 3~40년전 아트락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들으면 매우 신비로운데 그 신비로움 이면에는 멜로트론이라는 악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거든. 그밖에 기타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류트도 요즘 다시 현대음악에서 쓰이고 있고 혹시 피아노를 치면 알지 모르겠지만 하프시코드라는 악기에 대해 알고 있니?”
수연은 잘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성대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프시코드 역시 마찬가지야. 피아노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클라비어라는 악기가 나오고 그 이후 하프시코드라는 악기가 나오고 그다음이 현재의 피아노야.”
“난 전혀 몰랐어. 클라비어라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그냥 피아노랑 같은 말 인줄로만 알았거든”
“클라비어는 흔히 건반악기를 총칭하는 말로 쓰이곤 해. 초기의 피아노라 할 수 있는 클라비어는 음량이 작고 또 벨로시티 즉 강약이 조절이 안되어서 불편했거든. 피아노는 건반을 누를 때 손가락으로 힘의 강약을 조절하면 음량이 달라지지만 클래비어는 그게 되지 않았거든. 그래서 그 다음으로 보완되어 나온 악기가 하프시코드야. 또 다른 이름으로 쳄발로라고도 불려. 하프시코드는 마치 기타를 피크로 치는 것 같은 원리이기 때문에 클래비어에 비해서 음량이 확실히 커졌어. 그런데 하프시코드역시 강약의 조절이 되지 않아서 나중에 표현력이 훨씬 커진 피아노의 등장으로 밀리기 시작했어. 하지만 하프시코드 역시 특유의 청명한 소리 때문에 요즘 들어 연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 아까 성대가 말한 아이리쉬 휘슬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되고. 요즘 오카리나가 예전에 비해 많이 인기가 있는데 그 역시 사람이 본래 지닌 자연이나 오래전 기억의 향수 때문이 아닐까 싶어.”
말싸움을 멈추고 대혁이를 바라보던 성문이가 성대에게 말했다.
“너도 알려면 수박 겉핥기만 하지 말고 좀 저렇게 알아라. 이 사이비 돼지새끼야.”
“지는 좆도 모르는게 더 말이 많어! 새벽부터 소리나 빽빽 질러대고 네가 닭이냐?”
“내가 닭이고 넌 돼지면 여긴 동물 농장이냐?”
둘의 말싸움은 재개되었다. 그 사이 해는 수련원 건물 너머에서 떠올라 바닷가를 비치기 시작했다. 성대가 허탈한 듯 말했다.
“왜 해가 저기서 떠오르냥? 난 바다에서 해뜨는 것 좀 보려 일찍 나왔는데.”
그러자 성문이가 어이없는 듯 성대의 머리를 한대 치며 말했다.
“야? 너 정말 빙신이가? 해가 서쪽에서 뜨냐? 여기가 동해냐? 정말 바다에 해뜨는거 보려고 나왔냐? 동해가서 해지는 것 볼거냐?”
“그런가...... 근데 왜 자꾸 아까부터 날 때리고 지랄이야!”
수연이와 대혁이는 둘을 포기했다는 듯 발걸음을 돌려 수련원으로 향했다. 수련원으로 향하는 길에서 어제 타다 남은 캠프파이어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안에는 아직 덜 태워진 장작에 불씨가 남아 타고 있었다. 수연이는 그 불씨가 신기한지 한참을 바라보며 대혁에게 말했다.
“어제도 한참 탔었는데 아직도 타고 있네. 정말 오래간다...”
대혁이도 그 불씨를 바라보며 수연에게 이야기했다.
“형우와도 저 장작처럼 사랑하도록 해.”
수연이는 의아한지 대혁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장작처럼 사랑하라니? 무슨 소리야?”
대혁이는 계속 불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기름처럼 한번에 확 타올라서 곧바로 사그라드는 사랑은 하지 말고 형우와 둘이 저 장작처럼 은근하게 오랫동안 이어가는 사랑을 했으면 좋겠어.”
수연이는 대혁이의 옆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대혁아.”
성대가 뒤따라오며 소리쳤다.
“이봐! 둘이 그렇게 오래 붙어서 이야기하고 있으면 형우한테 꼬지른다!!! 둘이 뭐하고 있는겨? 수연아 벌써 바람났냐?”
그러자 수연이는 발끈하며 소리쳤다.
“성대! 너 죽어!”
성대의 옆에서 따라오던 성문이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이제 수연이까지 널 무시하는 구나. 키킥! 안하던 욕까지 하고 말야~”
그래도 성대는 별 상관없다는 듯 대혁이를 향해 소리쳤다.
“어이! 박대혁! 형우한테 꼬지르지는 않을테니까 오카리나로 대황하 한번만 더 불어줘! 아까 그거 죽이더라!”
대혁이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다가 할 수 없다는 듯 오카리나를 불기 시작했다. 수연은 눈을 감은 채 오카리나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저 멀리 파도소리와 함께 들리는 오카리나의 음색은 아까 대혁의 말대로 정말 자연을 닮은 것 같았다. 문득 오래전 문학 시간에 배웠던 신라의 ‘만파식적’ 이라는 전설의 악기가 떠올랐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 연주를 하면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게 하여 천하를 평안하게 만든다는 전설의 악기... 수연이는 만약 만파식적이 존재한다면 지금 대혁이가 부는 오카리나의 소리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대는 눈을 감은채 절로 감탄사를 토해냈다.
“죽이는군...”
대혁이가 연주를 끝마치자 모두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혁이는 쑥쓰러운지 잠시 고개를 숙이며 오카리나를 바라보다가 작은 오카리나를 수연에게 건내며 말했다.
“나는 집에 몇 개 더 있으니 이거 가지지 않을래?”
수연이는 당황해하며 손을 내저었으나 성대는 계속 받으라 권유를 했고 수연이는 잠시 망설이다 미소를 지으며 건네받았다.
“고마워, 잘 쓰도록 할게.”
성대와 성문이는 그 모습을 보고 대혁에게 조르기 시작했다.
“이봐! 나도 하나만 줘~~~!”
“몇 개 있으면 우리에게도 좀 적선해라. 그래야 나중에 극락으로 간다!”
대혁이는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휴우~ 다음에 동아리 방에 몇 개가지고 갈게.”
성대와 성문이는 신난다는 듯 둘이서 손바닥을 마주치다가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멈추고 외면한 채 수련원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수연이는 대혁에게 받은 오카리나를 한참 바라보며 걷다가 주머니 속에 갈무리했다. 수련원 건물 앞에 도착하자 2층 창문으로부터 필국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성대! 이 돼지녀석 아침밥 해야 하는데 어디로 도망간거야!!!”

 


 

 

 


23. 축제 (1)
계절의 여왕 5월은 그 이름에 걸맞는 아름다운 풍경을 캠퍼스 곳곳에 연출하고 있었다. 5월의 따사로운 태양은 푸른 나무를 더욱 푸르게 만들고 온갖 꽃들의 색깔을 더욱 빛나게 만들어 주었다. 캠퍼스 곳곳에 위치한 벤치에는 친구들끼리 혹은 연인들끼리 앉아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잔디가 있는 곳이나 노천극장부근에는 여러 학생들이 둘러앉아 간식을 먹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다. 수업이 끝난 뒤 형우와 만나 함께 동아리 방으로 걸어가던 수연은 이런 모습들에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요즘처럼 매일 매일이 즐거우면서도 또 아쉬운 날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그러자 형우는 의아해 하며 수연에 물었다.
“즐거운데 아쉽다니?”
수연이는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한번한 뒤 형우에게 말했다.
“따뜻하게 비추는 햇살도 푸른 나무도 예쁜 꽃들도 활기찬 사람들의 모습도... 그냥 이렇게 하루하루가 즐거운데 이런 나날이 영원할까 라는 생각이 들면 괜히 슬픈 마음도 들곤해.”
형우는 그말에 어이가 없는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러자 수연이는 기분이 상한 듯 뾰로통해져서 형우에게 물었다.
“넌 내말이 웃기니?”
“하하~ 오해하지마. 비웃는게 아니고 네가 무슨 사춘기 소녀 같은 말을 하니까 그게 우스워서 그래.”
“그게 비웃는거지, 칫!”
그때 둘 앞으로 한 여학생이 다가와 형우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너 형우 아니니?”
“맞는데.. 누구?”
한참 그 여학생 얼굴을 살펴보던 형우는 그제서야 기억이 난다는 듯 외쳤다.
“아! 너 은혜구나! 정말 반갑다! 이거 몇 달 만이니?”
은혜역시 반가운 듯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이 학교에 입학했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었지만 한번도 보지 못하고 이렇게 만나게 되네? 얼마전 고등학교 동문회 날에 참석 했으면 더 일찍 보았을 텐데 이 학교에 다니는 고등학교 선배들도 누가 있나 알게 되었을 테고. 옆에 분은 누구?”
그러자 형우는 수연이를 은혜에게 소개했다.
“얘는 여자친구야. 법대에 다니고 있고 얼마 전부터 사귀고 있는 중이야. 수연아, 얘는 고등학교 동창 주은혜라고해.”
은혜는 수연에게 인사를 청했다.
“같은 동기끼리 굳이 존대까지 필요없지? 난 무용과 주은혜라고해.”
“난 김수연이라고 해.”
시계를 보던 은혜는 바쁜일이 있는지 형우에게 말했다.
“난 지금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며칠 후에 동문회가 또 열리니까 그때 다시 보도록 해. 안녕~”
“그래, 그때 보자.”
형우는 은혜에게 손을 흔들고 다시 수연이와 가던 발걸음을 옮기며 혼잣말을 했다.
“호오~ 전에는 몰랐는데 은혜 쟤 대학 와서 정말 예뻐졌네.”
수연이는 그 말을 듣고 형우를 쏘아보며 말했다.
“뭐라고?”
“아냐~ 하하! 당연히 수연이가 더 예쁘지. 농담이야. 빨리 동아리 방으로 가자!”
수연은 걸어가면서 아까 은혜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비교하며 생각해 보았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아까 본 은혜의 모습이 어딜 가던지 눈에 확 뜨일 만큼의 미인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다. 길가에 세워져 있는 자동차의 창에 얼핏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집에서는 어머니가 화장을 많이 하면 피부가 죽는다면서 되도록이면 하지말거나 좀더 나이가 들면 하라고 수연에게 권하셨다. 수연이 자신도 굳이 화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아까 형우에게 말을 걸던 은혜의 모습이 괜히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나도 화장을 한번 해볼까? 정희가 그래도 화장을 조금씩 하고 다니니까 이따 정희한테 물어 봐야지.’
동아리 방문 앞은 문을 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연습이 한창인 듯 악기들 소리로 시끄러웠다. 형우와 수연이가 손잡고 문을 열며 들어오자 다들 연주하던 것을 멈추고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우우~~ 여기까지 와서 손을 꼭 붙잡고 다녀야해? 추하다!!!”
“동아리 방에 왔으면 악기 연습이나 하지 연애 연습하러 왔냐?”
“우린 무적의 솔로부대다!”
한참 드럼 연습을 하던 정희가 드럼스틱을 멋들어지게 손가락으로 돌리며 수연에게 소리쳤다.
“나 요즘 많이 삐졌어! 이제 남자친구 생겼다고 수업만 끝나면 날 홀로 버려두고 둘이만 돌아다녀? 너무 하는 것 아냐! 나 지금 너희 둘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드럼을 때려 부수고 있던 중이야! 나도 확 CC나 되어버릴까?”
그러면서 잠시 주위를 둘러본 뒤 한숨쉬며 말했다.
“휴우~ 적어도 이 동아리에서는 CC가 되지 않겠다!”
“우우~~~!!”
“우리도 선머슴은 싫어~~”
“네가 여자냐~ 우우우~!”
정희를 향해 야유가 쏟아졌다. 그때 필국이 동아리 방문을 열고 들어와 소리쳤다.
“어이! 다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축제날 공연인데 다들 연습들 안해? 그리고 너희 1학년들도 최소한 한곡은 무대에 올릴 생각이니까 무슨 곡을 연주할까 남은 시간동안 정하고 연습하도록 해라! 안 그러면 다음에 또 서해로 엠티가서 갯벌에 묻어버린다! 난 수업에 들어갈테니 다들 열심히해라!”
그러자 수연이가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죄송한데 이따가 과외에 가야 하는데요...”
그 말을 들은 필국은 웃으면서 말했다.
“하핫! 수연이하고 정희는 하던 안하던 무조건 패스니 너희들은 갯벌에서 안심해도 좋다. 걱정하지 말거라~ 그냥 아무 때나 오고 싶을 때 동아리방에 놀러와.”
수연이는 너무 미안한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성대가 억울한 듯 소리쳤다.
“형! 그런게 어디 있어요? 남녀 차별이 해도 해도 너무 한 것 아니에요?”
필국은 씨익 웃으면서 음흉하게 말했다.
“억울하면 네가 나중에 군대 갔다와서 회장하거라~ 여자회원 한사람이라도 추가로 영입시키면 너희들을 여자회원과 동일하게 취급해주마!”
“전 수연이하고 정희를 둘다 데리고 같이 가입했단 말이에요!”
필국은 수연이와 정희를 바라보았다. 둘은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고민을 하던 필국이 말했다.
“으흠.. 할 수 없군.”
성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나 필국은 표정을 무겁게 바꾸며 말했다.
“근데... 넌 1학년 부장이라서 빠꾸!”
“그런게 어디 있어요!”
성대의 표정은 흙빛이 되어 일그러졌다. 필국은 그런 성대를 무시하며 말했다.
“자 다들 연습 잘하고! 난 수업 들어간다~”
수연이는 너무 미안한지 정희의 손을 붙잡고 빠져나오려 했다. 그러자 정희가 귓속말을 했다.
“내 손은 왜 붙잡아?”
“혼자 나가기 너무 미안해서 그래.”
“그렇다고 나까지? 어헉! 아퍼~!”
수연이는 정희의 손목을 꽉 붙들고 종종 걸음으로 동아리 방을 빠져나갔다. 기타를 연습하고 있던 대혁이 말했다.
“연습이나 하자.”
그러자 형석이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축제때 1학년에게 한곡을 맡긴다는데 무슨곡으로 할까?”
그때 형우가 조용히 말했다.
“이번에 성문이 대신 내가 노래를 부르면 안될까? 어차피 성문이는 2학년 선배들하고 몇곡을 같이 하니까 내가 노래를 불러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성문이와 대혁이는 1학년이긴 하지만 2학년 활동기수와 몇 곡을 같이 할 예정이었다. 밴드에 락이나 메탈을 부를만한 보컬이 성문이 말고는 마땅치 않고 또 성문이가 이미 연주하려는 곡들을 잘 알고 있는 터라 같이 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그리고 대혁이는 현재 활동기수 선배들보다도 기타 실력이 더 출중한 터라 일찌감치 몇 곡을 같이 연주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성문이가 의아해하며 형우에게 물었다.
“왜?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형우는 근처에 있던 의자를 하나 끌어다가 앉은 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축제때 공연에서 수연이를 위해 노래를 하나 불러주면 정말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아서 말야. 도와줄 수 있니?”
그러자 성대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거 였냐? 그런거라면 그냥 아무곡이나 카피해서 연주하는 것 보다는 우리에게 훨씬 의미도 있고 좋지! 그런데 현재 드럼은 정희가 치고 있는데 선배들이 드럼 대신 무언가 시키려는것 같더라. 아무튼 그건 좀 두고봐야겠지만. 으흠...”
주위를 둘러보던 성대는 성문이를 보고 말했다.
“야! 너 드럼 칠 줄 알지? 그러면 이번에 보컬 말고 1학년 축제 공연때 네가 드럼 쳐보는건 어떠냐?”
성문이는 당황하며 반문했다.
“내가? 야이 돼지야! 난 드럼 기본적인 것 밖에 못쳐.”
성대는 당황해하는 성문이를 무시하며 말했다.
“기본이든 지랄이든 부장이 시키면 할 것이지 말이 많아. 꼬우면 네가 부장 하던가. 아무튼 기본은 할줄 아니까 조금만 연습하면 무리 없이 공연할 수 있을 거다. 다들 찬성이지?”
“나도 찬성!”
“송성문 파이팅!”
주위에서 그런 반응이 나오자 성문이도 어쩔 수 없이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대혁이가 손을 들고 말했다.
“그냥 다른 곡을 카피하는 것보다 직접 곡을 만들어서 연주하는 것이 더 의미있지 않을까?”
형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한다면야 더 좋긴 하지만 작곡이 무슨 쉬운 일도 아니고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그런 너무 무리인 것 같아.”
다들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대혁이가 형우에게 다가와 말했다.
“내가 한번 만들어 보도록 할게.”
 


24. 축제 (2)
“그게 정말이니?”
수연이는 정희의 말에 매우 놀란 듯 한참동안 정희를 바라보며 말을 잃었다. 정희는 걱정이 되는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떡하지? 나 부끄러워서 정말 할 자신이 없어...”
정희의 말인즉 동아리에 여자보컬이 없어서 선곡할 노래가 마땅치 않음을 고민하던 필국이 정희에게 드럼대신 2학년 활동기수 공연에서 노래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못하겠다고 말하지 왜 한다고 했어?”
“사실은 말이야. 처음에는 도저히 못하겠다며 거절을 했어. 그런데...”
정희가 부끄러워서 도저히 못하겠다는 말을 하자. 필국은 눈을 감은채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든 뒤 뺨에 침을 찍어 바르며 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오호~ 통재라! 우리 그린터틀의 종묘사직이 나를 마지막으로 끝난다는 말인가~ 꺼이꺼이! 내 어찌 구천에서 선배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 볼 수 있겠는가!”
수연이는 그 말에 너무 어이없다는 듯 정희를 다그쳐 물었다.
“그래서? 그래서 하겠다고 한거야?”
정희는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말했다.
“그 정도였으면 내가 말도 안하지...”
정희가 장난치지 말라며 못하겠다고 하자 필국은 간곡한 눈빛으로 재차 뺨에 침을 찍어 바른 채 두 손을 모으며 정희의 눈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종묘사직이 다 너의 어깨에 달려있음을 아직도 깨닫지 못했느냐! 작년 축제 공연에서는 우리가 가장 출중한 연주력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동아리에서 나온 멋진 여자보컬들의 카리스마에 밀려 제대로 호응조차 받지 못해 절망하여 그 후 끝없는 암흑 속에서 1년여를 보내왔다. 이번에 하늘이 무심치 않아 너를 우리 동아리에 보내주셨거늘 어째서 너는 너의 본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더냐. 오호~ 통재라! 꺼이꺼이~~!”
너무나도 기가 막히고 황당한 광경에 정희는 말까지 더듬었다.
“그..그근데.. 여자는 저..저저만 있는거 아...아니잖아요? 거기다가 저는 드럼이란 말이에요!”
그러자 필국은 눈빛을 반짝이며 정희를 바라보았다.
“네 남자동기들로부터 너의 노래 실력과 무대매너가 기가 막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제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동아리를 떠나느냐! 아니면 노래를 부르느냐이다! 뚜비 오얼 나뚜비!”
정희는 문득 맨 처음 동기모임 때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그렇게 놀은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정희는 힘없는 목소리로 필국에게 말했다.
“그럼 제가 떠나는 길밖에 없겠네요...”
“안돼!!!”
필국은 아까보다 더욱 비굴하게 뺨에 침을 더욱 많이 바르며 매달렸다.
“떠나다니! 아하~ 쏘리쏘리! 농담은 농담일 뿐이지 새겨듣지 말아주오! 정희야~ 제발~~ 우리 동아리 좀 살려주라~~ 플리즈~~!”
수연이 역시 힘없는 표정으로 정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하기로 한거야?”
정희는 한숨쉬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은 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혼잣말 했다.
“그래도 다행인건 남자애들처럼 갯벌에 묻어버린다는 소리는 안했잖아...”
그로부터 며칠 후 동아리방.
수연이를 제외한 모두 동아리방에 모여 스피커를 집중하고 있었다. 대혁이는 자신이 가져온 MP3플레이어를 앰프에 연결시킨 후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만들기는 했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 기타만 직접 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악기는 모두 컴퓨터를 가지고 작업한 미디음악이야. 나중에 파트별로 악보도 프린터로 찍어 왔느니 참고하도록 하고. 노래는 내가 잘 부르는 편이 아니라 녹음 하지 않고 그냥 보컬 멜로디만 깔았어. 가사는 너희들에게 나누어준 A4용지에 인쇄했으니 그걸 보면 될거야.”
성대는 대혁이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박대혁, 이 녀석 재주가 정말 대단하구만... 기타치는 모습으로도 대충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을 했지만 이렇게 곡을 빠른 시간에 하나 만들어 올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다!”
정희도 인쇄된 가사를 눈으로 읽어 내려가며 한숨을 푹 쉬며 푸념을 했다.
“수연이는 정말 좋겠다... 너무 부러워. 휴우~”
형석이는 궁금한지 대혁이를 재촉했다.
“대혁아! 뜸들이지 말고 빨리 플레이해봐.”
대혁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MP3플레이어의 재생버튼을 눌렀다. 스피커를 통해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모두들 말없이 종이에 인쇄된 가사를 바라보며 음악에 집중했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른 뒤 음악이 끝나자 모두들 말없이 대혁이를 바라보았다. 대혁이는 쑥쓰러운지 머리만 긁적였다.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흐른 뒤 성대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대혁아...”
대혁이는 말없이 물끄러미 성대를 보았다. 그러자 성대는 달려와 대혁이의 어깨를 붙잡고 소리쳤다.
“빨리 악보 내놓지 않고 뭐해! 당장 연습하자! 축제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걸 축제의 하이라이트로 만들자고!”
조용했던 동아리방이 갑자기 환호와 박수소리로 넘쳐났다. 형우가 대혁에게 다가와 감격스러운 듯 외쳤다.
“대혁아! 정말 고맙다!”
여느 대학의 축제들처럼 행당대학교 축제의 마지막 날 가장 큰 행사는 역시 가요제였다. 사전에 예선을 거쳐 나온 여러 학생들과 학교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는 여러 밴드들이 노천극장 무대에서 공연을 여는 행당가요제는 축제기간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행사이기도 했다. 또한 축제에 초대된 유명가수들이 막간마다 무대를 빛내주기 때문에 행당대학생들 뿐만 아니라 초대가수의 여고생 팬들부터 다른 여러 대학으로부터 구경을 온 학생들까지 노천극장은 그야 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필국은 곧 무대에 오를 활동기수인 2학년들과 1학년 부원들에게 격려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그동안 연습 잘했지? 떨지 말고 평소처럼만 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떨리지 않고 괜히 재밌게 한답시고 오버 하지 말고! 평소 하던대로만 하면 오늘 무대는 성공적으로 끝난다! 다들 알았지!”
필국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위로 한사람 한사람의 손이 차례로 올라갔고 모두의 손이 포개진 것을 확인한 필국이 큰소리로 외쳤다.
“화이팅!”

“화이팅!!!!!!!!!!!!!”
맨 처음 공연에서 노래를 부를 보컬은 정희였다. 정희는 우황청심환 하나를 깨물어 삼키며 수연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지금.. 떨고 있니?”
수연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대혁이가 무대를 향해 계단을 오르며 정희에게 말했다.
“나도 같이 가니까 너무 떨지는마. 화이팅!”
“화이팅....”
정희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혁의 뒤를 따라 무대에 오르며 말했다.
“하긴 대혁이는 나보다 불쌍하지... 수연아 다녀올게...”
대혁이는 사실 동아리 최고의 기타 실력을 지니고 있는 터라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선배들의 전폭적인 지지 솔직히 말하면 떠넘김에 힘입어 오늘 공연 중 몇몇 곡을 제외한 모든 곡에서 기타 연주를 담당하게 되었던 터였다. 성대는 정희의 힘없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실실거렸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나 다름없군. 킥킥!”
그때 형우가 수연이에게 다가와 말했다.
“저기 무대 가까운 자리에 몇 자리 마련해 놓았으니 거기서 구경해.”
형우의 말대로 무대 가까운 곳 가운데쯤에 몇몇 자리가 비워져 있었다. 수연이는 놀란 눈으로 형우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형우는 무대 부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부회장 병희와 상균이 손을 흔들고 둘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선배들이 여기에 미리 자리를 마련해 놓았어.”
“그래도 나 역시 부원인데 이렇게 앉아서 구경만 해도 되는 거야? 너무 얌체 짓 하는 것 같아...”
“괜찮아. 오늘 공연을 하는 멤버가 아니라면 여기 앉아서 플랜카드를 들고 응원하는 것이 무대 옆에 있는 것보다 더 나을 거야. 너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좀 이따가 선배들도 이 자리에 올거야. 그때 너도 선배들과 같이 우리가 공연할 때 응원해주면 돼. 알았지?”
수연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형우는 무대근처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는 공연 멤버들이 악기 및 장비를 세팅하는 모습과 정희의 안절부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공연을 진행하는 남녀 사회자는 장비 세팅 시간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로 주의를 끌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세팅이 끝나자 남자 사회자가 질문을 하기 위해 정희에게 다가왔다. 정희는 사회자가 다가올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머릿속으로 계속 같은 말들을 반복해서 생각했다.
‘저 앞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그냥 돌덩어리다... 무다.... 감자다.. 고구마다... 감자다... 고구마다...’
그때 사회자가 정희에게 질문했다.
“보컬 한분이 홍일점이시군요! 밴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정희는 얼떨결에 엉뚱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우리는 고구마밴드입니다!”
그러자 관중석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고 관중석에 있던 수연이를 비롯한 나머지 부원들은 머리를 싸매며 괴로워했다. 그 모습에 오기가 발동한 정희는 마음을 고쳐 먹었다.
‘에이씨! 이왕 쪽팔리고 스타일 구긴거!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하자!’
사회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출연자 목록을 살폈다. 그러자 정희는 관중석을 향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사회자님의 긴장 좀 풀어드리려 그냥 한번 웃겨본 거구요. 안녕하세요 그린터틀입니다!”
그러자 사회자는 머리를 긁으며 머뭇거렸고 관중석은 정희를 향해 환호했다. 그 환호에 정희는 자신감이 생겼다. 사회자는 정희에게 다시 질문했다.
“네, 오늘 그린터틀이 맨 처음 연주할 곡은 무엇인가요?”
정희는 대답대신 관중석을 향해 소리쳤다.
“날아올라!”

 


 

 

 


25. 축제 (3)
정희의 외침과 동시에 시작된 공연은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였다. 정희는 그러한 관중들의 분위기에 더욱 신이 난 듯 열창을 하며 무대 곳곳을 휘저었다. 한참 노래를 부르다 간주가 시작되자 정희는 무대에서 뛰어내려와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으로 내달리며 관중석을 향해 파도타기를 유도했다. 대부분의 관중들이 정희의 유도에 호응하며 파도타기가 시작되었다. 무대 부근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필국은 너무 신이 난 나머지 다음무대를 준비하고 있던 1학년 멤버들의 어깨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부라보!! 얘들아! 우리 이번에 대박이다! 우와아아아아!! 대박이야!! 으하하하하!!”
그러나 다들 필국의 호들갑은 뒤로 한 채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정희를 바라보느라 정신없었다. 모두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모를 정도로 감탄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말 대단한데...”
“올라가기 전까지만 해도 계속 앓는 소리만 내서 걱정했는데 대단해...”
“끼라는게 저런걸까... 저 정도일 줄은... ”
필국은 자신의 호들갑을 무시한 채 모두 정희만 바라보자 더욱 호들갑을 떨며 소리쳤다.
“훌륭한 기획자 밑에서 훌륭한 아티스트가 나오는 법! 정희를 발탁한 건 다 나의 삼고초려 덕택이거늘 왜 다들 나의 공로를 인정 해주지 않는거야! 왜에에에~~!”
그러자 모두 싸늘한 표정으로 필국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씨끄러워요!”
필국은 그 소리에 놀라 움찔했다. 그때 성대가 냉담한 목소리로 필국을 바라보며 말했다.
“얘들아! 갯벌에 묻어버려!”
그러자 성대를 비롯한 1학년 동기들 모두 필국의 주위를 막았다.
“이봐! 후배님들 무슨 짓들이세요!! 이봐!!!! 으아아!!”
필국의 구슬픈 외침은 1학년들의 강제적인 추방으로 인해 묻혀졌다. 2학년 선배를 비롯한 포함한 활동기수 멤버의 공연은 막바지로 들어가고 있었다. 필국을 내쫓고 다시 준비를 위해 돌아온 1학년 멤버들은 모두 손을 맞잡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때 형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수연이와 나를 위해 공연을 준비해준 모두들! 정말로 고맙다! 영원히 이날을 잊지 못할거다! 파이팅!”
그러자 성대가 웃으며 말했다.
“너희 커플 좋자고 한거 아니니 걱정 말아라~ 솔직히 우리가 더 재미있었다. 다들 안그래? 킥킥!”
“하하하!”
마침 활동기수 무대가 끝난 대혁이와 성문이가 급하게 달려와 손을 맞잡았다. 대혁이는 급히 뛰어오느라 숨이 차는지 호흡을 고르며 물었다.
“아직 늦은 것 아니지?”
형우는 감격스러운 눈으로 대혁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 네가 정말 크고 쉽지 않은 일을 도와줬다. 정말 너무나 고맙다. 대혁아! 그리고 그동안 기꺼이 즐겁게 도와준 모두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모두들 정말 고맙다!”
그러자 성문이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뭐 공연 다 끝난 것도 아닌데 벌써 끝나고 내려온 것처럼 이야기하냐? 이따가 공연 잘하고 호프집에 가서 감사의 말은 그때 실컷하거라. 빨리 무대에 오르자! 내 평생 보컬 대신 드러머로 무대 오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재미있겠는걸? 하하하하!”
다음 공연을 기다리며 무대에서 눈을 떼지 않던 수연의 옆에 정희가 다가와 앉았다. 아까 폭발적인 무대매너의 흔적인 듯 정희의 얼굴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숨을 헐떡였지만 얼굴만은 밝은 표정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수연이는 정희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소리쳤다.
“정희야! 아까 정말 최고였어! 너무 멋있었어!”
정희는 쑥쓰러운지 웃으며 이야기했다.
“아까는 될대로 되라는 식이었지 뭐. 헤헤~ 한번 실수하고 나니까 오기가 생기는것 있지? 그래서 그냥 마구 뛰어다녔어. 근데 공연이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와 여기까지 오는데 다들 나만 쳐다보는거 있지?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면서 뭐라 이야기하고 웃고 쪽팔려서 혼났어. 학교 전체에 얼굴 다팔리고 이제 나 학교 어떻게 다녀~~!”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런 관심이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정희는 비장한 표정을 지은 채 수연의 어깨를 쥐며 말했다.
“수연아! 다음 무대를 기대해라. 네 평생 잊지 못할 무대일거야!”
“그게 무슨 소리니?”
“그런게 있으니 구경이나 잘하셔~”
수연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희를 바라보았다. 정희는 무대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누군 참 좋겠다...”
어느 정도 관중석의 분위기가 진정되자 사회자가 무대 중앙으로 나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네! 그린터틀의 폭발적인 공연 잘 보았습니다. 특히 아까 노래를 부르신 여학생 정말 대단하지 않았나요?”
“와아아아아!!!”
관중의 환호소리에 정희는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
“쉬잇! 나 여기 없는 거야~”
관중들의 환호가 잦아들자 사회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까 폭발적인 무대에 이어 이번에는 그린터틀 1학년 부원들의 공연이 준비되어있다고 하는군요. 자 소개하겠습니다. 모두 나와주세요!”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성대, 성문, 대혁, 형우, 형석, 지훈이가 무대에 올랐다. 사회자는 성문이와 대혁이가 아까 공연에 이어 또 무대에 나오자 의외인지 질문을 던졌다.
“두분은 아까도 나오셨는데 또 나오셨네요?”
사회자가 성문이에게 마이크를 건냈다. 그러자 성문이는 드럼스틱을 들어 대혁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혁이 이 친구는 또 기타 치러 나왔구요. 아까 저는 보컬로 나왔는데 이번에는 드러머로 나왔습니다. 만능 엔터테이너라 할 수 있지요. 하하~”
성문이의 말에 관중들은 모두 뒤집어졌다. 성문이는 마이크를 성대에게 건넸다. 성대는 차례로 멤버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여기 이 친구는 리드기타를 치는 박대혁, 옆에 드럼스틱을 들은 친구는 송성문이라고 아까 들으셨죠? 저기 머리 노란 친구는 키보드의 김형석, 그리고 그 옆의 친구는 리듬기타 최지훈, 저기 가장 키 큰 친구는 원래 기타인데 이번에는 보컬로 나온 이형우이고 저는 1학년 부장이자 베이스를 맡고 있는 홍성대입니다.”
형우가 보컬이라는 말에 놀란 수연이는 정희에게 물었다.
“왜 형우가 기타를 안치고 노래를 불러?”
정희는 주위를 힐끗힐끗 쳐다보다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
“이유는 좀 있으면 알게 될 테니 재촉하지 마셔~”
사회자는 흥미로운지 형우에게 질문을 했다.
“아까 보컬이 셨던 분이 드럼을 치고 기타를 맡으신 분이 형우씨가 보컬로 나오신 이유라도 있나요?”
형우는 관중석 가운데에 앉아있는 수연이를 바라보며 외쳤다.
“이번 공연은 제 여자 친구 수연이를 위해 준비된 공연입니다!”
순간 관중석은 환호성으로 가득찼다. 수연이는 놀란 표정으로 말없이 정희를 바라보았다. 정희는 그저 혓바닥만 내밀며 익살스런 표정으로 수연이의 얼굴을 한번 본뒤 고개를 숙였다. 그때 사회자가 관중석을 향해 말했다.
“수연씨! 지금 관중석에 계신가요?”
“네!”
정희가 갑자기 일어나 외치자 수연이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모두의 시선이 일어난 정희에게 집중되자 정희는 뻘쭘한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앉아있는 수연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숨어 있어요.”
그러자 조용했던 관중석은 다시 한번 환호성으로 휩싸였다. 환호성이 잦아들자 사회자는 형우에게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의미 있는 공연이군요. 부르실 곡은 무엇입니까?”
형우는 관중석에 앉아있는 수연이를 한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제목은 언제까지 함께 하자는 뜻을 가진 With라는 곡으로 여기 기타를 치는 대혁이 이 친구가 노래와 가사를 만들어 주었고 또 여기 올라온 모든 친구들이 이번 공연의 연주를 위해 기꺼이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와아아~~!!”
관중석은 다시 엄청난 환호성으로 휩싸였다. 한참동안의 환호가 잦아들자 사회자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공연을 위해 직접 곡을 만들어 가지고 나오시다니 정말 대단한 실력들이군요! 준비 되셨습니까? 자 이제 다 준비가 되신 것 같군요. 네! 소개 하겠습니다! 다음은 그린터틀 1학년 멤버로 이루어지는 공연으로 노래를 부르시는 학생의 여자친구를 위해 직접 만들은 곡이라는군요! 모두 격려의 큰 박수를 보내 주십시오!”
“와아~~~!!!!”
관중들의 환호속에서 멤버들 모두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문이는 드럼스틱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연주를 시작했다. 뒤이어 형석이가 키보드의 볼륨을 올리며 성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혁이와 지훈이의 디스토션을 먹은 기타 배킹음이 성대의 베이스음을 타고 울리기 시작했다.

 

 


26. 축제 (4)
전주가 시작되자 무대주위로 수많은 폭죽들이 터지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주최측은 이 무대가 마치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듯 준비된 모든 폭죽을 터뜨리려는 것 같았다. 전주가 끝나자 형우는 반 쯤 두 눈을 감은 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직은 이 길이 낯설기만 해
내게 보이는 건 모두 텅 빈 어둠뿐이야
힘든 하루를 건너 지쳐 누울 때
그곳엔 아무도 있지를 않았지
다시 눈을 뜨면 바라보게 돼
시작은 있어도 끝은 보이질 않는 이 길을
난 불안하지 않아 난 흔들리지 않아
네가 내 곁에 있으니...
사랑해
함께 하기로 해
이제 저먼길이 두렵지 않아
잊지마
너의 곁엔 언제나
함께 걸어가는 내가 있는걸
기억해...“
노래의 앞부분이 끝난 후 짧은 간주부분이 시작되자 형우는 관중석에 앉아있는 수연이를 향해 손을 흔들며 무언가 소리쳤다. 관중들은 수연이가 앉아 있는 곳을 바라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수연이는 놀라움과 더불어 뭐라 표현 할 수 없는 감동에 목이 메어왔다. 간주가 끝나자 다시 형우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난 불안하지 않아 난 흔들리지 않아
날 항상 지켜봐줄 날 항상 붙잡아줄
네가 내 곁에 있으니
사랑해
함께 하기로 해
이젠 저먼길이 두렵지 않아
잊지마
너의 곁엔 언제나
함께 걸어가는 내가 있는걸“
형우의 노래가 끝나고 간주부분이 시작되자 대혁이가 무대 전면으로 나와 기타 솔로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한음 한음 최선을 다해 연주하려는 듯 말없이 기타 솔로에 열중하던 대혁이는 연주가 끝나자 천천히 뒤로 물러나 원래 있던 자리로 이동했고 형우는 다시 무대 전면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홀로 걸어가기에는 먼길이지만
너와 함께 걸어가면 나는 견딜 수가 있어
절망하여 말라버린 거친 마음에
비를 내려준 너를 영원히
사랑해
함께 하기로 해
이젠 저먼길이 두렵지 않아
잊지마
너의 곁엔 언제나
함께 걸어가는 내가 있는걸
워우워~ 예~
워우~ 예~“
형우의 노래와 멤버들의 연주가 모두 끝나자 조용히 노래에 집중하고 있던 관중석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그때 사회자가 무대에 나와 입을 열었다.
“이렇게 감동적인 선물을 받으신 여자친구분이 무대로 나오지 않는다는건 말이 안되지요? 수연씨! 수연씨? 어서 무대로 올라오세요!”
형우의 노래를 말없이 바라보며 듣고만 있던 수연이는 사회자의 말에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정희가 수연이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뭐해? 이제 앞으로 나갈 시간이야.”
무대위에서는 형우를 비롯한 모두가 자신을 부르며 손짓하고 있었다. 수연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를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너무 기분이 멍해서 자신을 향한 수많은 환호성도 귀에 잘 들리지가 않았다. 발걸음은 마치 구름위에 뜬 것처럼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조금 전 몇 분 동안 벌어진 일들이 그저 잠시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대를 향하여 걸으면서도 수연이는 모든게 실감이 가지 않았다.
‘방금전까지 무슨 일이 있던 걸까...’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새 무대위에 다다랐고 자신의 바로 앞에 형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연이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형우에게 물었다.
“이..이거 모두 어떻게 된 일이니?”
형우는 말없이 웃으며 관중석을 가리켰다. 수많은 관중들의 모습들이 보였고 아까는 멀리서 아득한 소리로 들려오는 것만 같던 엄청난 환호성이 수연의 귀에 똑똑히 들리기 시작했다. 관중석에서 누군가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무대를 향해 외쳤다.
“키스해! 키스해!”
그러자 순식간에 모든 관중들이 같은 목소리로 무대를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키스해! 키스해! 키스해! 키스해!”
수연이는 그런 관중들의 목소리에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눈을 크게 뜨며 형우를 바라보았다. 관중석으로부터는 수많은 카메라 플래쉬가 터져 나와 눈이 부셔왔다. 그저 주위의 모든게 아득한 기분이 들 때쯤 무언가가 수연이의 입술을 덮었다.
“으읍!”
“와아~~~~~~~~!!!”
관중석으로부터 수많은 박수소리와 함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때 무대 주위에서는 아직도 폭죽이 남았는지 수시로 터지면서 하늘을 수놓았다. 수연이는 갑작스러운 형우의 키스에 당황했지만 이내 눈을 감고 형우를 껴안았다. 뒤에서 그들의 키스를 바라보던 성대는 박수를 치며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무래도 너무 남 좋은 일만 시킨 것 같다. 연습할 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저렇게 그림이 좋은걸 보니 괜히 약오르는구만. 히히!”
성문, 대혁, 지훈, 형석이도 둘 뒤에서 박수를 치며 뿌듯한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 성대는 누군가가 뒤에서 종아리를 쿡쿡 찌르는 느낌을 받았다. 놀라서 뒤돌아보니 필국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성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필국은 놀란 성대에게 커다란 꽃다발을 건네며 말했다.
“내가 살아 돌아와서 놀랐냐? 킥킥! 갯벌에서 밀물이 몰려오기 직전에 간신히 살아서 돌아왔다. 너희들의 배반은 나중에 묻기로 하고 일단 어서 꽃다발부터 저 녀석들에게 전해라. 갯벌에서 빠져나와 안면도 꽃 축제에서 뽀려온 싱싱한 꽃다발이다~ 시들기 전에 어서가서 전하거라.”
“형...”
성대는 감동의 눈으로 필국을 바라보며 꽃다발을 받았다. 필국은 씨익 웃으며 다시 사라졌다. 근처에서 박수를 치며 바라보던 성문이는 성대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보고 이게 뭐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건 뭐냐? 어디서 났어?”
성대는 꽃다발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필국이형이 우리가 아까 바깥으로 내쫓은 동안 꽃다발을 사기위해 꽃집에 돌아 다녔던 모양이다.”
“정말로 안보이길래 삐져서 사라진 줄 알았더만... 형이 이런 준비를 해올 줄이야. 으흠...”
성문이는 감탄의 눈으로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성대는 꽃다발을 들고 형우에게 달려가 말했다
“필국이형이 준비한 꽃다발이야. 이런 날에는 꽃다발이 빠지면 고무줄 끊어진 빤쓰지!”
형우는 그 꽃다발을 받아 한쪽 무릎을 꿇으며 수연에게 건넸다. 그러자 관중석으로부터 장난기 섞인 야유와 환호가 쏟아져 나왔다.
“우우~~ 너무 닭살 아니야?”
“무리는 무적의 솔로부대다!!!”
“우우우우우~~! 솔로천국~ 커플지옥~~!”
관중석 가운데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희는 박수를 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에휴~ 수연이는 좋~~겠다... 누구는 무대에서 멋지게 사랑고백이나 받고 누구는 무대에 나가서 오버만 줄창하다가 학교에 얼굴만 다 팔리고~ 아이고 내 팔자야~ 필국이 오빠를 아무래도 갯벌에 묻어 버려야겠어. 휴우~”
부끄러운 듯 고개만 숙이고 있던 수연이는 꽃다발을 받으며 형우를 일으켜 세웠다. 형우는 미소를 지으며 수연이를 껴안았다. 수연이는 형우가 너무 힘을 주어 껴안아 잠시 숨이 턱 막혔지만 그 느낌이 싫지는 않았다. 수연이 역시 형우를 껴안자 관중석으로부터의 환호성은 그칠 줄 모르고 오히려 높아져만 갔다.
5월의 축제는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27. 입영전야(1)
“너희들 소식 들었어?”
“깜짝이야! 뭔 일인데 갑자기 놀래키는거야?”
형석이는 동아리방까지 뛰어서 온 듯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형석이가 문을 열고 소리를 친터라 다들 깜짝 놀라며 형석이를 바라보았다.
“너희들 대혁이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거야?”
다들 생각해보니 대혁이를 동아리방에서 보지 못한지가 며칠이 지난 것 같았다. 성대는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수업시간에도 요즘 나오지를 않는 것 같은데... 정희야 너도 수업 들을때 그 녀석 얼굴 며칠동안 보지 못한 것 같지?”
정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요 며칠동안 계속 결석인 것 같네? 형석아, 대혁이에게 무슨일이라도 생긴거야?”
형석이는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우연히 지하철 안에서 대혁이를 만났거든. 그런데 대혁이 머리가 무척 짧게 깎여있고 또 모자를 쓰고 있더라구. 그래서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면서 물어도 별일 없다면서 더 이상 말을 안하는거야.”
형우는 급하게 형석이를 다그쳐 물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된일인지는 전혀 모르는거야?”
형석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전혀 모르겠어.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말을 안해주니 답답하기 짝이 없네. 전화도 계속 꺼져있고.”
그렇게 다들 걱정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병희가 회원명부를 꺼내서 형석이에게 건네며 말했다.
“일단 집에는 누가 있던지 전화를 받을테니까 한번 걸어봐라. 집 전화번호는 회원명부에 기록 되어 있을테니 참고하고. 혹시 부모님이 받으신다면 뭔가 이야기를 해주실테지.”
병희의 말에 다들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회원명부를 뒤적거렸다. 회원명부에는 병희의 말대로 대혁이의 집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성대는 바로 휴대폰을 눌러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얼마간의 신호음이 들린 후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목소리는 젊은 남자인 듯 했다. 성대는 일단 먼저 자신을 소개한 뒤 동화를 하기 시작했다.
“네. 안녕하세요. 혹시 대혁이 집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저는 대혁이의 형인데 누구시죠?”
“네 저는 대혁이의 친구인 홍성대라고 합니다. 대혁이가 전화기도 꺼져있고 연락이 안되어서 무슨일이 있는가해서 전화를 걸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상대방은 잠시 말이 없다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혁이가 이번에 군대간다고 이야기 하지 않던가요?”
“네? 군대요?”
성대가 소리치자 다들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대혁이가 이야기를 안했나 보네요? 그 녀석 성질머리 하고는...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기 싫어하는 녀석이라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 같네요.”
“그러면 대혁이가 언제쯤 집으로 오는지 시간을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집주소도 알려 주시겠어요?”
저녁 8시.
필국을 비롯한 선배 몇 명과 1학년 회원 모두가 대혁이의 집 앞에 모여 대혁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대는 날씨가 더운지 손으로 부채질을 해대며 투덜거렸다.
“하여간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야. 지 군대가는 것 알면 우리가 뭐 잡아 먹을까봐? 이 자슥 자꾸 맘에 안들라고 하네. 쳇! 도대체 언제 신검 받고 또 언제 군대 입대 지원을 한거야? 속을 알 수가 없으니 원.”
필국이도 라이터로 담뱃불을 키며 투덜거렸다.
“신검 받고 바로 지원을 해버린 모양이네. 그래도 이렇게 빨리 입대할 줄이야. 이 녀석은 내년까지 계속 메인기타로 써먹으려 했건만 아무런 말도 없이 아직 기말고사도 끝나지 않았는데 벌써 군대를 간다고? 오기만 해봐라! 확~! 갯벌에 묻어 버리겠다!”
모두가 이러쿵 저러쿵 투덜거리고 있을 때 지훈이가 골목너머를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 대혁이가 온다!”
“박대혁! 너 빨리 튀어오지 못해!”
“어디 숨어있다가 이제야 얼굴을 비치는거야!”
천천히 걸어오던 대혁이는 그들의 갑작스런 방문에 놀라 말없이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필국이 말했다.
“군대빵을 피하고 네가 무사히 훈련소에 입소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냐? 얘들아 빨리 가서 저 녀석 덮쳐!”
“박대혁~~!!!”
수연이와 정희를 제외한 모두가 대혁이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말없이 그들이 달려 오는걸 바라보기만 하던 대혁이는 당황스러워 하며 손사래를 쳤다.
“저..저기... 뭐하려고..?”
성대가 대혁이를 향해 소리쳤다.
“아그들아, 덮쳐라!”
성대가 대혁이를 껴안고 넘어졌다. 그러자 차례대로 대혁이를 깔아뭉개기 시작했다. 대혁이가 뭐라고 외치는 듯 했으나 그 말은 곧 묻혀졌고 순식간에 골목 한가운데가 아수라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자~ 지화자!”
“지화자~~!”
필국이 먼저 맥주잔을 들어 건배를 외치자 모두 일어나 잔을 맞대며 건배를 했다. 이미 호프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차있어서 시끌벅적 했지만 그게 오히려 호프집 내부에 활기를 주는 듯 했다. 테이블 가운데에 앉아있던 대혁이는 쑥쓰러운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다들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러자 성대는 대혁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그럼 똑같은 상황이면 너도 무시할거냐? 잔말이 많구나. 이런일이 있으면 미리미리 알려야지. 동기가 없는 것도 아니고 네가 이렇게 하면 우리 무시 하는거밖에 안되는 거야. 이러면 섭섭하지. 어떻게 감쪽같이 속일 수 있냐?”
대혁이는 그 말에 미안한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냥 나 때문에 부담주기 싫어서 그랬던 건데 기분이 상했다면 다들 미안해. 형들한테도 정말 죄송해요.”
병희는 목이 마른지 맥주 한잔을 한번에 다 마신 뒤 웃으면서 대혁에게 말했다.
“부담주기 싫었다고? 너 땜에 우리 동아리 부담이 더 커지게 생겼어 이 녀석아~ 내년까지 널 메인기타로 계속 쓰려고 했는데 이렇게 휙하고 사라져 버리게 생겼으니 원... 앞으로 형우, 지훈이는 열심히 기타 연습하거라. 강호에서 은퇴한뒤 은거중이던 내가 또 메인기타를 맡아야 하다니. 하하~!”
“병희형 정말 미안해요.”
한참 배고픈지 안주를 집어먹던 필국이 대혁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갑자기 입대를 하려는 거야? 이유가 있을 것 아냐?”
대혁이는 별일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원래부터 일찍 군대에 다녀오려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빨리 다녀오는 것이 나중에 여유도 있고 시간도 벌 것 같아서요.”
“하긴... 그렇긴 하지.”
예비역 병장인 필국, 병희를 비롯한 남자선배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형석이가 대혁에게 물었다.
“그러면 정확히 훈련소 들어가는 날짜가 언제야?”
“오일 후에 들어가.”
“오일 후? 그렇게 빨리 들어가? 왜 진작에 이야기 안했어! 내가 물어볼 때는 무슨 묵언 수행하는 부처님인양 질문에 답도 안하고. 답답한 녀석이군. 휴우~ 논산훈련소로 가는 거야?”
“아니, 306 보충대로 입소해.”
가만히 말을 듣고만 있던 상균이 오징어를 뜯으며 말했다.
“의정부? 내가 거기 나왔는데. 더울 때에 가서 고생 좀 하겠군. 그렇다고 못 견딜 것은 아니고 말이야. 훈련소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아서 다행이군. 그리고 여기서 멀지도 않은 곳이니 너희 동기들 중에 그날 특별히 수업 없는 녀석들은 다녀오는 것도 좋을거다.”
그러자 형우가 대혁에게 말했다.
“그날이 화요일이지? 으흠.. 시험이 한 과목 있네? 으흠.. 뭐 그냥 째지 뭐. 같이 가도록 하자. 수연아 넌 그날 시험 특별히 없지?”
수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대혁이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시험까지 째면서 그럴 필요는 없어! 그럼 화낼거야! 다들 다녀오는 거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러자 정희가 말했다.
“어차피 화요일 날은 성대나 수연이나 나도 시험이 없으니 잠깐 대혁이랑 다녀오지 뭐. 굳이 시험 있는 사람이 째는 일은 무모한 짓이고. 성대하고 수연이랑 같이 갖다올게.”
그때 필국이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대혁이에게 주었다.
“형, 이게 뭐에요?”
“뭐긴? 당장 필요로 할테니 가서 잘 사용하도록 해라.”
대혁이는 천천히 포장을 뜯었다. 포장 속에는 전자시계가 들어있었다.
“당장 가서 필요할거 같아 구입했다. 비싼 것 절대 아니니까 막 써도 된다.”
“형.... 정말 고마워요.”
그때 성대가 잔을 들고 일어나 외쳤다.
“박대혁! 신파극 찍지말고 어서 잔이나 들어! 선배님들도 잔을 드시구요. 대혁이가 무사히 군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지화자~!”
“지화자~~!”

 


 

 

 


28. 입영전야 (2)
“내가 너무 일찍 도착 했나?”
성대는 시계를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10시까지 왕십리 역 6번 출구에서 만나 지하철을 타고 의정부로 가기로 했는데 성대의 시계는 9시 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성대의 주위로 짧은 머리를 한 자기 또래의 남자들이 왔다갔다하는 모습들이 종종 보였다. 하나 같이 모두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성대는 순간 생각이 복잡해졌다.
‘나도 언젠가는 군대에 가긴 가는 걸까?’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일인데 막상 대혁이가 가장 먼저 입대를 하게 된다니 마음이 싱숭생숭 했다. 자신에게도 이런 시간이 언젠가는 온다는 사실이 실감이 가지 않았다. 형이 입대를 할 때에도 그냥 당연히 가는 것이거니 싶었고 또 2년이 넘게 흐른 지도 몰랐는데 어느 순간 제대를 해서 집에 와있었다. 그리고 휴가를 정말 자주 나오는 것만 같았다. 형이 100일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던 날 나누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형이 군대 간지 벌써 100일이 넘게 지난거야? 뭔 시간이 이렇게 빨라? 금방이네! 아! 씨~ 왜때려~!”
형은 성대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금방? 이게 매를 벌어요!”
그렇게 쥐어박다가 힘이 빠지는지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한숨을 푹푹 쉬기 시작했다.
“정말 들어가기 싫다... 과연 제대 날짜가 오기는 올까... 600일도 넘게 남았네? 휴우~”
성대는 이해 할수 없다는 듯 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정말 형이 금방 갔다가 금방 휴가 나온 것 같은데?”
형은 또 한번 성대를 쥐어박으려 손을 올렸다. 성대는 눈치를 채고 슬쩍 사정권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형은 움직이기도 힘이 빠지는지 혼잣말을 했다.
“원래 자기 힘든 시간은 잘 안가고 남의 힘든 시간은 잘가는거야. 휴우~”
그때 성대는 맞을까봐 말은 못하고 속으로 이야기 했었다.
‘남의 시간은 잘가고 자기시간은 뭐 어쩐다고? 시간이 다 똑같지 무슨 시공을 초월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야? 칫!’
한참 생각에 빠져있던 성대의 어깨를 누가 두들겼다. 성대는 놀라서 뒤돌아보니 대혁이가 서있었다.
“일찍 왔네?”
대혁이는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찍은 무슨, 이제 10시에서 5분 남았는데?”
성대는 놀라 시계를 바라보며 혼잣말 했다.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냐. 이것도 상대성이론인가?”
“무슨 소리야? 상대성이론이라니?”
“아냐~ 아무것도. 저기 수연이하고 정희가 온다!”
성대가 손으로 가리킨 곳으로부터 수연이와 정희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정희는 숨을 고르며 성대에게 말했다.
“헉헉~ 안 늦었지? 얼른 가자!”
지하철에 오르자 훈련소로 가는듯한 사람들이 유난히 많이 보였다. 그들 역시도 부모님 혹은 친구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의정부로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성대가 대혁에게 물었다.
“기분 어떠냐?”
대혁이는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별다른 기분은 안들고... 그냥 거기도 다 똑같이 사람 사는 곳 일텐데 편하게 생각하려고해. 어디든 마찬가지겠지. 너도 나중에 나랑 똑같이 겪을텐데 뭐.”
“하긴.. 그렇지?”
성대는 그 말이 왠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그때 정희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디지털카메라였다.
“짜안! 대혁아! 나도 네 카메라가 부러워서 하나 샀다! 그냥 말없이 목적지 까지 가는 것보다는 사진같은 것도 찍으면서 가자구.”
정희는 대혁이와 성대, 수연이의 사진을 마구 찍어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희가 무언가 이상한 듯 카메라를 살폈다.
“왜 더 이상 사진이 찍히지 않지? 고장인가?”
“나에게 줘봐. 살펴볼게.”
대혁이는 카메라를 건네받아 살피다가 실소를 하며 정희에게 물었다.
“혹시 추가로 메모리 안샀니?”
정희는 어리둥절해 하며 말했다.
“추가로 메모리? 그것도 사야 하는거야?”
“기본 메모리는 용량이 너무 작아서 몇 장 못찍어. 그래서 추가로 메모리를 하나 사는건 거의 필수야. 지금이건 고장이 아니고 메모리 용량이 꽉차서 더 이상 찍히지 않는거야. 이정도 용량이면 15장 정도밖에 안찍혀.”
“그러면 어떻게 해야돼? 오늘 사진 많이 찍으려고 가져왔는데 바보같이. 휴우~”
성대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휴우~ 할 수 없지 그냥 쓸데없이 찍은 사진은 일단 다 지우고 필요한 것만 찍을 수밖에...”
얼마 후 의정부에 도착한 이들 일행은 다시 버스를 타고 306 보충대 정문앞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성대는 더운 듯 부채질을 해대며 투덜거렸다.
“이야! 날씨가 왜 이렇게 더운거야! 거기다가 버스는 만원에.. 아직 7월도 아닌데 왜 이리 더워!! 헥헥~”
정희는 한심하다는 듯 성대를 쳐다보며 말했다.
“넌 지금 이 땡볕에 들어가서 훈련 받아야 할 대혁이 모습이 안보이냐? 엄살은 왠 엄살이야?”
수연이는 주위를 살피다가 음식점 간판을 발견하고 모두에게 말했다.
“일단 점심부터 먹어야 할 것 같아. 대혁이가 배고프겠다. 저기 식당이 보이네.”
수연이가 가리킨 식당으로 들어와 식사를 하던 중 정희가 무언가가 생각이 났는지 모두에게 말했다.
“너무 오래있지 말고 조금만 여유 있게 일찍 나가자.”
“왜? 뭔일이 있는거야?”
“그건 아니고 몇 장 못찍긴 하더라도 다같이 사진을 찍어 두고 싶어서.”
정희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서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정희는 주위를 살피다가 지나가던 누군가를 붙잡고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했다.
“다들 훈련소 정문앞이 잘 보이게 자리 잡으세요.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찍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카메라 액정에는 4명의 모습이 매우 잘 찍혀 있었다. 정희는 미소를 지으며 대혁에게 말했다.
“여기서 찍었으니 이제 훈련소 안으로 들어가서 찍자. 오늘 찍은 사진들은 모두 나중에 인화해서 편지로 보내줄게.”
훈련소 안에는 바깥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입소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까지는 담담하던 대혁이도 연병장을 보자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본 정희는 대혁의 뒤로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도 웃으며 들어가야 우리도 덜 걱정하지. 이따가 꼭 웃으면서 들어가. 알았지?”
대혁이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잘되지 않는지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때 성대가 말했다.
“단체로도 모두 찍었으니 이제 각자 한명씩 대혁이랑 사진을 찍자!”
성대는 말을 마치자마자 대혁이의 옆으로 달려가 어깨동무를 했다. 정희는 카메라 액정을 바라보며 카운트를 셌다.
“이제 찍을게! 하나~ 둘~ 셋!”
“찰칵!”
“정희야! 이번에는 네가 대혁이 옆으로 와라. 내가 찍어줄게!”
“알았어~”
정희는 대혁이의 옆으로 다가가 팔짱을 꼈다. 대혁이는 당황스러워하며 정희를 바라보았지만 정희는 혓바닥을 내밀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희야 찍는다! 하나~ 둘~ 셋!”
“찰칵!”
“수연아~ 이제 너 찍을차례야!”
수연이도 대혁이의 옆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성대는 다시 카운트를 셌다.
“이제 찍는다! 하나~ 둘~ 셋!”
“찰칵!”
그렇게 사진을 찍고 나자 근처에 있던 스피커가 울리기 시작했다.
“삐이이익! 아아~ 훈련소 입소자를 제외한 분들은 연병장 밖으로 물러나시기 바랍니다. 훈련병 집합!”
대혁이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이렇게 같이 와주어서 정말 고마워. 다음에 100일 휴가 나오면 그때 보자!”
“그래! 대혁아! 몸조심해서 훈련받고 휴가 때 보자!”
대혁이는 연병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정희가 대혁이를 불렀다.
“대혁아!”
연병장으로 달려가던 대혁이는 그 소리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정희의 카메라 액정에 대혁이의 멀어지는 모습이 잡혔다. 정희는 초점이 잡히자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찰칵!”

 

 

29. 유리벽
과외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수연은 책상에 앉아 쉬면서 며칠 전 형우와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정말 형우를 사랑하는 걸까...’
그동안 수연이는 형우를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며칠 전 형우와 나누었던 대화는 그러한 수연이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형우와 함께 대학로를 거닐다가 잠시 쉬기 위해 근처 마로니에 공원 안에 마련되어 있는 벤치에 앉아 있을 때였다. 형우는 진지한 목소리로 수연에게 물었다.
“수연아, 넌 나를 사랑하니?”
수연이는 그런 질문이 어이없는지 실소를 하며 반문했다.
“그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니?”
그러자 형우는 더욱 진지한 목소리로 수연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나는 너에게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수연이는 그 말을 듣자 갑자기 할말이 잘 생각나지 않아 말을 얼버무렸다.
“으음.. 너는... 언제 어떤 상황이든 항상 내편이 되어 줄 수 있는 좋은 사람이고... 또... 자주 같이 있으니 정이 들어 가족같이 느껴지고... 또... 으흠...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건데? 무슨 일이라도 있니?”
“그런 것은 아니고... 으흠... 그렇다면 나는 네게 너희 가족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존재겠네?”
“응.”
수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우는 앞에 지나가는 연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연인들도 너처럼 생각하고 있을까?”
“으응? 무슨 소리니?”
그러자 형우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투명하고 두꺼운 벽이 존재하는 것 같아. 그 벽은 유리알처럼 맑고 투명해서 서로의 모습을 잘 투과시켜 보여주지. 하지만 손닿으려 노력하면 만져지는 것은 서로의 존재가 아닌 차가운 유리벽뿐이야. 무언가를 말하려 소리쳐도 두꺼운 벽 너머 존재하는 상대방에겐 전혀 들리지 않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요즘 책을 너무 많이 읽은 것 아니니?”
형우는 수연이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너와의 관계가 어느 이상으로는 넘어가지를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난 요즘 내가 너에게 어떤 존재인지 솔직히 약간 회의감이 들어. 네가 아까 말한 대로 내가 너에게 그런 사람이라면 난 너의 친구보다 좀더 친한 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난 너에게 조금 더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
책상에 앉아 한참동안 형우와 나누었던 이야기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수연이는 자신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특별한 존재라.... 특별한 존재... 특별한...’
“딩동! 딩동!”
“어마!”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중이라 갑작스런 벨소리에 놀란 수연은 허겁지겁 문 앞으로 달려가 물었다.
“누구세요?”
“누구긴? 언니야!”
사촌언니 세연이었다. 한동안 다니는 회사에서 연수를 받느라 바빠서 자주왕래를 못하는 터였는지라 수연이는 문을 열고 자기도 모르게 반가워서 소리쳤다.
“와! 언니! 얼마만이야!”
“얘는 무슨 이산가족 상봉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반가워하니?”
“언니, 방에서 기다려. 내가 커피 타가지고 들어갈게.”
“알았어~”
수연이는 곧 커피 두 잔을 타가지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방안을 이리 저리 살피던 세연은 책상 앞에 놓인 사진 하나를 보고 수연이에게 물었다.
“옆에는 남자친구니? 잘 생겼네!”
“응, 같은 동아리에서 만나 CC가 되었어.”
“그러니? 어떻게 만나서 서로 사귀게 된거야?”
수연이는 화이트데이때 선물을 받은 이야기부터 시작해 고3때 형우가 몰래 선물을 보내준 일, MT에서 있었던 고백, 축제 때 형우와 동아리 동기들이 자신을 위해 공연을 준비해서 노래를 불러준 일등을 세연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세연이는 그 이야기에 매우 감탄한 듯 보였다.
“정말? 내가 널 보지 못한 사이에 그런 일들이 벌어졌었니? 대단하네? 고등학교때부터 시작해서 대학교도 일부러 너와 같은 곳으로 진학하고... 그 친구가 널 정말로 사랑하긴 하나 보구나. 부럽다 얘.”
수연이는 세연의 말에 한숨쉬며 혼잣말을 했다.
“휴우... 그런데 나는 그 애를 사랑하는 걸까...”
세연이는 그 말에 어리둥절해 하며 수연에게 물었다.
“사랑하는 걸까 라니? 그게 무슨 소리니? 요즘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혹시 싸운거니?”
수연이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 그러고 보니 둘이 싸운 일도 한번 없는 것 같네. 특별한 일도 없고...”
“그 친구를 생각하면 어떤 느낌이 드니?”
“그냥... 편안함.. 든든함... 모르겠어. 사실 며칠 전에 그 애가 나에게 했던 말들 때문에 머릿속이 무척 복잡해.”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수연이는 힘없는 목소리로 형우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세연이는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넌 그 친구를 사랑하니?”
“언니까지 걔처럼 무슨 소리야?”
세연이는 수연의 눈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네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감정이 사실은 네 남자친구가 말하는 사랑과 다를지도 몰라. 어쩌면 수연이는 정이란 감정을 사랑과 착각한건지도...”
수연이는 의아해 하며 세연에게 물었다.
“사랑이 아니고 착각이라니? 그게 무슨...”
“사실 나도 사정은 잘 몰라서 이런 이야기를 하기 좀 망설여져. 하지만 그 친구는 나름대로 지금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 혹시 그 애를 생각하면서 마음 아파해 본적은 없니?”
수연이는 한참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글쎄... 잘 모르겠어...”
“사랑은 이런 거야라고 정의내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어. 모든 사람이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으며 또 그러한 사람들이 인연으로 만나서 사랑하고 이별을 하는데 어떻게 수학 공식처럼 정의를 내리겠니.”
수연이는 잘 모르겠다는 듯 세연이를 바라보았다.
“그렇긴 하더라도 말이야. 이건 좀 다르다고 생각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가족, 형제, 자매, 친구간의 우애, 우정, 사랑과 연인간의 사랑은 살짝 그 성격이 다르다고 봐. 사랑은 하면 할수록 아프다는 유행가의 가사 같은 말이 있지만 그말이 틀린 말은 아니야. 연인간의 사랑과 그 밖의 또 다른 사랑이 구별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생각할 때 아무 일이 없고 항상 보고 있더라도 느껴지는 아픔, 애틋함, 설레임 이런 것이라고 생각해.”
“아픔... 애틋함?”
“그리고 그 친구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너에게 답답함을 느껴서 인듯해. 네 남자친구가 다른 친구와 다른 점이 뭐라고 생각하니?”
수연이는 세연의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좀더 자주 만나 시간을 보내며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이상으로는 더 이상 뭐라 할말이 없었다. 세연이는 조용히 말했다.
“사랑을 주고받는 양이 서로 같아서 공평하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누군가는 더 받고 누군가는 덜 받아서 혹은 누군가는 더 주고 누군가는 덜 주어서 마음에 상처를 입어. 그 차이를 서로가 어떻게 채우거나 빼서 반반의 비율로 맞춰 나가려 노력하느냐 이것이 사랑의 기술이라 생각해. 네 남자친구는 너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만 너는 그런 남자친구의 감정이 전해져도 아직 잘 모르고 있는 듯 하고 또 너 자신의 감정조차도 아직 잘 모르고 있어.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져 특별한 의미가 되고 부족한 것을 채워가며 닮아가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사랑이 아닐까 싶어. 지금까지 특별히 싸운 일도 없고 무난했다고 해서 너와 그 친구의 관계가 탈없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야. 남자친구가 지금 힘들어하고 있는 것 같구나. 나는 네 남자친구가 유리벽이란 말을 왜 했는지 알 것 같은데...”
“언니도 그랬던 경험이 있어?”
“똑같은 건 아니고 비슷하게... 안타까운 것은 나오지 않는 감정을 억지로 나오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야. 불행한건 감정의 일방통행이지. 그리고 더욱더 불행한건 사랑인줄 모르고 떠나보낸 후에야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야...”
세연이는 그말을 마치고 나자 한동안 말없이 방바닥을 바라보았다.
"언니 왜 그래?"
세연이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수연이를 향해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참! 아까 축제때 이야기를 다시 해주겠니?"
"응!"
얼마 후 시간이 지나 세연이 돌아간 뒤 수연이는 또 다시 책상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자기가 자신의 감정조차도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이 한심하게 느껴졌고 또 한편으로 형우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정말 착각 하고 있는 걸까...’
30. 초우(初虞) (1)
초우(初虞)[명사] : 장사 지낸 뒤 처음으로 지내는 제사. 혼령을 위하는 제사로, 장사 당일에 지낸다.
“아이씨! 중요한 부분인데!”
금요일 저녁, 부모님이 모두 여행을 가셔서 집에 아무도 없는지라 혼자 맥주를 마시며 케이블 TV로 영화를 보고 있던 성대는 한참 중요한 장면을 보고 있는 중에 전화벨이 울려 짜증이 났다.
“여보세요!”
“고막 찢어지겠네! 뭐 이리 목소리가 크냐? 지금 뭐하고 있어?”
필국이의 목소리였다. 성대는 살짝 TV의 볼륨을 줄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냥 집에서 맥주 마시며 영화보고 있었어요. 무슨 일 있어요? 저 오늘은 술 먹으러 안 따라 갈거에요.”
그러자 필국은 급한 목소리로 성대를 다그쳤다.
“아무튼 지금 급한일이니 나머지 동기들에게도 연락을 취해서 사랑병원 영안실 앞으로 나오도록 연락해라!”
성대는 병원이라는 말에 놀라 TV 전원을 끄고 소리쳤다.
“병원요? 누가 다쳤나요?”
그러자 필국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전화를 통해 들렸다.
“동아리 선배의 부인되시는 분께서 돌아가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좀 필요하니 부를 수 있는 너희 동기들은 모두 불러 모아서 병원으로 오거라. 되도록이면 빨리 와라. 급하게 일손이 필요하다.”
성대는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남자동기들에게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먼저 성문이 에게 전화를 걸었다. 성문이는 이미 잠들었다가 깬 듯 졸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야.. 돼지야.. 왜 잘자는 사람 깨우고 지랄이야... 나 잘테니 나중에 걸어라...”
그러자 성대는 소리를 치며 말했다.
“얌마! 동아리 선배 부인되시는 분이 돌아가셨대! 그래서 일손이 좀 필요하니 빨랑 옷 입고 사랑병원 영안실 앞으로 튀어와라. 급한 것 같다!”
성대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성문이와 형우, 지훈, 형석이가 모두 먼저 와서 이것저것을 나르며 일을 하고 있었다. 저 멀리 필국을 비롯한 선배들이 뛰어다니는 모습도 보였다. 접시를 나르다 성대를 발견한 성문이는 성대를 향해 소리를 쳤다.
“야이 돼지새꺄! 확 삶아 버릴라! 지가 다 나오라고 전화 걸어놓고 지가 가장 늦게 오는 게 어디 있어? 빨리 준비해!”
한참 국그릇과 음료수를 나르던 병희가 다가와 말했다.
“일단 따라와라. 선배님 소개시켜드리고 조문을 드려야 하니까.”
병희는 성대를 데리고 조문실로 들어갔다. 조문실안에는 상주로 보이는 선배가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 이런 곳에 와본 경험이 없던 성대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병희를 쳐다보았다. 병희는 귓속말로 조용히 성대에게 말했다.
“먼저 가서 향을 하나 피워 올리고 다음에 절을 두 번 한 다음에 선배님 하고 한번만 절을 하면 된다.”
성대는 병희가 시킨대로 향을 하나 피워 올린 뒤 영정을 향해 절을 두 번 한 후에 선배에게 한번 절을 했다. 그 후 선배와 맞절을 한 뒤 성대는 입을 열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일을 당하셔서 뭐라 위로해 드릴 말이 없습니다.”
“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거지... 이름은 어떻게 되나?”
“저는 올해 새로 들어온 홍성대라고 합니다. 이제야 선배님을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난 송윤호라고 한다. 선배란 사람이 졸업하고 직장을 잡은 뒤에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동아리 한번 찾아 가보지도 못해서 미안했는데 후배들 얼굴도 이런 자리에서 겨우 처음 보게 되어 더 미안하구나. 그런데도 이렇게 도와주러 늦은 시간에 찾아와 주어서 정말 고맙다.”
그때 성대의 뒤로 또 다른 조문객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성대는 일어나면서 윤호에게 말했다.
“뒤에 다른 조문객들이 오신 것 같고 또 저도 나가서 도와드려야 할 것 같아서 먼저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이렇게 와주어서 정말 고맙다.”
성대는 조문을 마치고 나오면서 기분이 우울해졌다. 그리고 이런 자리에 와본 것은 처음이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한참 뛰어다니던 필국이 성대를 보고 달려와 무언가를 건네며 말했다.
“일단 거추장스러운 것은 벗고 이 행전을 발아래에 차라. 한 이틀은 계속 일해야 되니 밤샐지도 모르니까 각자 돌아가며 알아서 쉬도록 너희 동기한테 전해주고!”
다음날 아침에서야 연락을 받은 수연이와 정희도 부랴부랴 준비해서 영안실 앞에 도착했다. 아직은 점심때가 아닌지라 장례식장에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정희는 마침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필국을 발견했다.
“오빠! 저희 왔어요.”
“그래 너희들도 왔구나. 일단 나를 따라와라.”
수연이는 눈에 보이는 광경들이 너무 익숙했다. 필국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게 너무 힘이 들었다. 정희는 너무 표정이 굳어져 있는 수연이를 보고 당황했다.
“어디 아프니? 표정이 왜 그래?”
“아.. 아냐. 얼른 따라가자.”
필국을 따라 도착한 조문실 안에는 상주인 윤호 혼자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런 윤호의 모습위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상주로 서있던 동생 수완이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필국이는 잠시 멍하니 윤호의 모습을 지켜보던 수연이를 재촉했다.
“거기서 뭐하니? 어서 들어오지 않고.”
“아! 네. 들어갈게요.”
수연이는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정희와 함께 들어왔다. 수연이의 눈앞에 영정이 보였다. 영정 사진에는 상당히 미인인 여자가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수연이는 살짝 물러나 절을 두 번 하고 윤호와 맞절을 했다. 이런 자리에 처음인 정희는 수연이가 하는 행동을 눈치를 보며 따라했다. 밤새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한 듯 윤호의 얼굴에는 피곤함의 기색이 역력했다. 수연이는 윤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로 많이 슬프실텐데...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아니야... 그나마 내 곁에 조금이라도 더 있어준 아내가 더 고맙지. 이렇게 직접 찾아와준 후배들에게 정말 고맙구나.”
수연이와 정희는 윤호에게 자신들의 소개를 한 뒤 몇 마디를 들은 후 조문실을 나왔다. 그때 어디선가 유난히 큰 곡소리가 들려왔다. 수연이와 정희는 놀라서 곡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거의 쓰러질 듯 눈물을 흘리며 곡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이고~ 아버지~~ 아이고~ 우리 아버지~~~ 아이고~~~~~~”
정희는 그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지 수연에게 말했다.
“얼마나 슬프기에 저렇게 우는걸까...”
그러나 수연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과연 그럴까...”
수연이는 아버지의 장례식 때가 생각났다.
내내 멀쩡하시다가 과로로 인해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터라 수연이를 비롯한 가족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지만 아버지의 직장 동료와 계원들 그리고 고등학교 동창친구 분들의 덕택으로 장례식장에서 수연이의 가족은 어느 정도나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정작 그 안정을 깬 것은 가깝다는 일가친척들 이었다.
수연이의 어머니는 장례식장에서 단 한번도 자식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다. 수연이도 평소 어머니가 강단이 있으신 분이라는 것을 아는 터라 아무리 슬프고 힘들어도 사실상 가장이 되어버린 자신이 어린 자식들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하셨으리라 짐작을 했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는 친척들이 많았다.
수연이는 오래전 부모님이 결혼 하실 때 아버지 집안 쪽에서 어머니가 부모님이 없다는 이유로 결혼을 끝까지 반대했는데 아버지가 그 반대를 무릅쓰고 거의 친가와 각을 세우며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적으로 친가쪽과는 왕래가 드물은 편이었다. 아버지께서만 가끔 왕래를 하시는 정도였고 수연이나 수완이도 가끔 아버지를 따라 가기도 했으나 다들 그리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그런 일을 몇 번 겪은 뒤로는 수연이도 친척들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 거의 아버지를 따라가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몇 년 뒤 수연이가 수능을 본 후 법대에 진학할 때에도 몇 년 만에 친척들로부터 걸려온 전화 내용도 고작 여자애가 아버지 없으면 돈이나 벌지 무엇 하러 대학에 그것도 법대에 들어가냐는 소리였다. 사실상 수연이가 일가친척을 통틀어 가장 대학진학을 잘한 경우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질시까지 섞여있었다. 물론 자신이 입학했다고 친척들로부터 어떤 축하의 말이나 도움도 듣지도 받지도 못했었다.
그런 마당에 어머니가 눈물을 보이지도 않고 곡소리도 안한다는 이유로 남편이 일찍 죽어 속 시원하냐는 따짐부터 어떻게 자기 남편이 죽었는데 곡소리 한번 안낼 수가 있느냐는 둥 남편을 잡아먹은 거라는 말부터 심지어 어머니에게 대놓고 말은 안했지만 독한년이라고 스쳐 지나가는 욕까지 수연이의 귀로 똑똑히 들었었다. 수연이도 그런 욕들에 울컥했지만 또 그렇다고 냉정히만 계시는 어머니도 미웠다. 차라리 슬프면 슬프다고 우셔도 다 이해를 할텐데 왜 굳이 저렇게 계셔서 욕을 먹는지 원망스럽기도 했다.
찾아온 친척들은 마치 어머니가 들으라는 듯이 곡소리를 크게 내며 울었다. 마치 나는 이렇게 우는데 너는 뭐하고 있느냐는 듯이 따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곡소리를 내며 울다가도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리에 앉아 찾아온 다른 친척들과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고 떠들고 술을 마셔대며 화투를 쳤다. 수연이는 어떻게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곡소리를 내며 울던 사람이 순식간에 저렇게 표정이 바뀔수 있는지 이해하기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장례 비용을 많이 부담해 준것도 아니었다. 정작 장례비용이나 조의금으로 도움을 많이 준 것은 아버지 직장동료와 동창 친구들 이셨다.

31. 초우(初虞) (2)
수연이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응급실에서 눈물을 보이신 것을 제외하고는 끝까지 냉정한 모습을 보이시며 자식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수연이는 처음에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저녁때가 되면 집으로 아무렇지 않게 들어오실 것만 같았다. 자려고 방에 누워 있다가 아파트 복도로부터 구둣발 소리 같은 것이 들리면 아버지가 오시는 것만 같아 현관문을 급하게 열고 바깥을 쳐다 본적도 많았다. 물론 그 소리의 정체는 대부분 옆집 아저씨가 술에 취해 늦게 집으로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소리였다.
그 모습이 별로 보기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디선가 아버지가 저런 모습으로 들어오실 것만 같았다. 현실을 깨닫고 허탈한 마음에 문을 닫고 들어오면 텅 빈 거실이 보였다. 저녁때 퇴근 하고 들어오시면 항상 아버지는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시곤 했다. 방에서 공부를 하다 그 TV소리가 시끄러워 아버지한테 짜증을 낸 일도 많았다. 그러면 아버지는 볼륨을 부리나케 줄이고 미안해하시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 불 꺼진 거실에는 아무도 있지를 않았다. 한참 동안 말없이 어두운 텅 빈 거실을 바라보다가 주저앉아 울은 일도 많았다. 남은 가족 셋이서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다가도 한 자리가 비어있다는 걸 느낄 때면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엎드려 소리 없이 울었다. 그때도 어머니는 말없이 냉정 하셨다.
아버지를 선산에 마련된 장지에 묻은 지 2년이 지난 후였다.
수연이도 이제 아버지의 부재라는 현실을 어느 정도 인정을 하고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보험설계사일을 시작하셨다. 비록 아버지가 생전에 몰래 들어놓으신 보험금의 양이 상당하여 집안의 생계와 수연, 수완이의 교육에는 크게 지장이 없었지만 어머니도 수연이 수완이도 아버지의 목숨과 맞바꾼 그 돈을 쉽게 써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그 돈을 수연이와 수완이 교육비로만 쓰겠다고 못을 박으셨다. 마치 그 돈을 쓰는 것은 아버지를 갉아 먹는 것과 같다 생각하셨기 때문인지 어머니는 일자리를 잡고 직장생활을 하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점점 집안은 안정되어 갔다.
평소에 잠을 자다 잘 깨지 않는 편인 수연이는 잠에 깨어 화장실로 향하다가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놀라 섬칫했으나 소리의 출처를 따라가다 보니 그 소리는 안방에서 들리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흐느끼는 소리였다. 수연이는 당황스러웠으나 굳이 안방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 후로도 종종 잠을 자다 중간에 깨는 일이 잦았는데 그때 마다 안방으로부터 어머니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언젠가 안방의 문틈이 살짝 열려있어 그 틈으로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전화기를 붙잡고 울고 계셨다. 이해 할 수 없었던 것은 가끔 문틈으로 보이는 어머니는 전화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저 전화기만 붙잡고 흐느끼셨다.
그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한 수연이는 또 다시 그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을 때 이유가 무엇인지 너무나 답답해서 방문을 열고 어머니를 향해 물었다.
“엄마! 도대체 왜 매일 밤마다 전화기를 붙잡고 우는 거야!”
그러자 어머니는 당황해 하며 전화 수화기를 급하게 내려놓으며 눈물을 닦으시고 수연이에게 말했다. 아까 흐느낌의 흔적인 듯 여전히 어머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니까.. 흑.. 어서 들어가서 자. 내일 아침 일찍 학교에 가야 하잖니...”
수연이는 답답한 나머지 울며 소리쳤다.
“아빠 때문에 그래? 그런 거야? 장례식장에서도 나와 수완이 앞에서도 장지에서조차도 한번 울지 않더니 왜 혼자서 울고 있는 거야? 왜!!”
그 소리에 놀라서 깬 수완이도 깜짝 놀라 안방으로 달려왔다.
“누나!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야?”
어머니는 다시 눈물을 훔치며 수완이 에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니까... 너희들 내일 학교 가야 하니까 얼른 들어가서 자.”
수연이는 너무 답답해서 어머니한테 따졌다.
“도대체 아까는 어디다가 전화를 걸은거야? 어디다 전화를 거는데 매일 이맘때만 되면 전화기를 붙잡고 우는거야!”
수연이는 전화기를 붙잡고 재발신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어머니는 화를 내면서 수연이에게 소리쳤다.
“너 왜 엄마말을 안들어! 어서 전화기 끊고 들어가서 자지들 못해! 수완이 너도 어서 누나 데리고 방에 들어가서 자!”
“왜 전화를 끊으려 하는데! 우리가 알면 안되는거야!”
어머니는 수연이가 들은 전화기를 빼앗아 끊으려 하셨다. 그러나 수연이는 뺏기지 않고 계속 수화기를 귀에서 놓치지 않았다. 몇 초간의 신호음 후에 딸깍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뒤이어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딸깍! 안녕하세요, 김운환의 호출기입니다. 용건이 있으신 분은 메시지를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삐익!”
수화기로부터 들린 목소리는 그게 다였다. 아버지가 직접 녹음 해놓으신 무선호출기 멘트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밤마다 저 몇 초간의 목소리를 들으며 홀로 흐느끼고 계셨던 것이었다. 저 몇 초간의 소리를 매일 듣기위해 어머니는 2년이 넘도록 아버지의 호출기번호를 없애지도 않으신 모양이었다. 수연이는 너무나 슬픔이 복받쳐 올라와 수화기를 내려놓고 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기 시작했다.
“누나! 왜 그래! 뭔일인데 우는거야!”
수완이도 놀란 나머지 전화 수화기를 들고 재발신 버튼을 눌렀다. 잠시동안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던 수완이도 전화기를 놓치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수연이와 수완이를 껴안고 흐느끼셨다. 그렇게 셋은 그날 밤새도록 붙잡고 울었다. 다음날 아침식사를 먹을 때에는 어머니와 수연, 수완이 모두 눈이 퉁퉁 불어있었다. 서로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피식거리며 웃었다. 아침식사가 다 끝나자 어머니는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얘들아... 우리 여기서 살지 말고 다시 서울로 이사를 갈까? 수연이 수능만 마치고나면 서울로 이사를 가는 것이 어떻겠니? 어차피 수연이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테니 집이 서울에 있는 게 좋을 테고... 수완이가 곧 고3이라 걱정이긴 한데 그래도 괜찮겠니?”
수연이 수완이 둘 다 말없이 서로를 보다가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말없이 어머니를 쳐다보던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서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수연이의 등을 정희가 쿡쿡 찔렀다.
“깜짝이야!”
“왜 그렇게 멍하게 서있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요즘 자주 이러는 것 같네.”
정희가 조문실 방향으로 뒤돌아보며 수연에게 말했다.
“아까 윤호라는 선배있지? 그 선배 뭐 입고 있는지 봤어?”
“아니? 그건 못봤는데...”
정희는 어리둥절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아까 그 선배를 보니까 검은 양복 속에 꽃무늬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어? 이상하지 않아? 아내의 장례식에서 꽃무늬 와이셔츠라니...”
“그랬니?”
그때 뒤에서 필국이 다가와서 정희와 수연이의 가운데에 껴들며 말했다.
“윤호형이 저걸 입고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래.”
“그래요? 무슨 이유요?”
정희는 궁금한지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자 필국은 한숨을 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휴우... 사실 저 와이셔츠는 돌아가신 형수님이 형에게 마지막으로 사준 옷이라고 들었어. 아마 그래서 저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걸 거야. 둘이 정말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줄로만 알았는데...”
정희는 그 말을 듣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그리고 수연이를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아앙~!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이상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흐흑~ 난 정말 나쁜아인가봐~ 아아앙~~!”
수연이와 필국은 정희가 갑자기 울자 당황해서 진정을 시켰다. 필국은 진정을 시키며 정희에게 말했다.
“윤호형도 울지 않고 미소만 짓고 있는데 정희 네가 울면 안되지...”
그러자 수연이가 의아한 듯 필국에게 물었다.
“미소를 짓고 있다고요?”
“응, 형수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자기가 세상을 떠나게 되는 길에서 형이 얼굴을 찡그리거나 우는 모습을 보기 싫다고 했대. 너희들도 아까 봐서 알겠지만 그냥 담담히 미소만 짓고 있었을 거야.”
수연이와 정희는 아까 윤호선배를 만났을때를 생각해 보았다. 절대 슬픈 표정을 띠고 있지 않았다. 수연이는 뒤돌아 조문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희는 갑자기 수연이가 되돌아가자 당황해서 수연이를 향해 소리를 쳤다.
“야! 김수연! 너 어디가는거야!”
“잠깐만! 금방 다녀올게!”
조문실 앞에 도착한 수연이는 가만히 홀로 서있는 윤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필국의 말대로 표정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어서 결코 슬픈 일을 당한 사람 같지 않았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돌아서던 수연이는 순간 무언가를 본 것 같아 다시 뒤돌아서서 윤호의 모습을 살폈다. 윤호의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수연은 윤호의 손에서 시선을 멈췄다. 윤호의 양쪽 손은 굳게 주먹을 쥐어져 있었다. 쥐어진 주먹위로 굵은 힘줄 자국이 선명했다. 굳게 쥔 주먹은 보일 듯 말 듯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장례식 때 영안실에 게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났다. 어머니 역시 냉정한 표정뒤로 굳게 주먹을 쥐거나 입술을 깨물며 깊은 슬픔을 참고 계셨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호의 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아려왔다. 세연이가 얼마 전 이야기해준 사랑이란 감정이 설명할 수는 없어도 어떤 감정인지 마음속으로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수연아! 거기서 뭐하고 있니?”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자 형우가 저 멀리서 쟁반에 음식을 나르다 멈추고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곧 일이 바쁜지 다시 한번 손을 흔들더니 가던 길로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수연이는 형우를 향해 손을 흔들며 생각했다.
‘난 형우에게 단 한번이라도 가슴 아프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 본적이 있는가? 형우의 저런 마음을 난 받기만 하고 그나마 받은 마음조차 느끼지도 못하고... 나의 감정이 매마른걸까? 내 마음은 정말 형우에게서 아무것도 느끼지를 못하는 걸까? 그러면서 내가 옆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형우에게 죄를 짓는게 아닐까...‘

 


 

 

 


32. 모래성 (1)
9월의 태양은 오후까지도 여름의 끝을 붙잡으려는 듯 여전히 따갑게 세상을 비췄다. 하지만 매일 저녁 무렵이 되면 태양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듯 이전보다 빨리 산의 능선을 넘어 사라지고 공기는 식어 도시를 향해 시원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해질녘 대학로 거리를 수연이와 거닐던 형우는 점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저기 가서 궁합이나 한번 볼까?”
그러자 수연이는 손을 내저으며 말렸다.
“저거 믿을 수도 없는 건데 뭐 하러 저런걸 봐 괜히 나쁜 내용이 나오면 기분만 안 좋잖아. 그냥 가자.”
“그래도 저거 재미있을 것 같은데 같이 한번 보자!”
수연이는 내키지 않았으나 형우가 손목을 끌자 할 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뭐 이거 하도 많으니 어디로 들어가서 봐야 할지 모르겠네...”
한참을 이리저리 살피던 형우는 한 천막을 가리켰다. 그곳으로 가까이 가자 TV출연등을 비롯한 온갖 홍보물들이 천막 겉에 이리저리 붙어있었다. 게다가 다른 곳과 달리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형우는 맨 뒤에 줄을 서서 앞에서 대기를 하고 있는 한 남자에게 물었다.
“여기가 잘 보기로 유명한가요?”
그 말에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끄덕이며 말했다.
“저는 지방에서 신림동으로 올라와 공부하면서 이번에 사법시험 2차를 보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인데요. 학교 선배들 말을 들어보니 여기서 고시합격 한다고 말하면 언젠가 반드시 되고 안된다고 하면 바로 짐싸고 내려오라 하더라구요. 여기서 합격될거라는 말을 들은 선배들은 지금 모두 합격해서 법조인생활을 하거나 사법연수원에 있거든요. 요즘 공부가 참 안되고 불안하기도 하고 답답해서 한번 물어보러 왔어요.”
그러자 수연이도 무언가 생각이 난 듯 형우에게 이야기를 했다.
“나도 과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학교 고시반에 이런 소문이 있대. 대학로 어느 점집인가가 무척 용한데 거기서 합격할거라고 말하면 반드시 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거기서 안된다고 그러면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는 게 더 현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이곳이 선배들이 말한 그 점집인가 보네.”
“오오~ 정말이야?”
형우는 수연이의 말에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앞에서 대기 중인 남자가 들어갔다 나오자 형우는 결과가 궁금한지 물어보았다.
“뭐라고 말하던가요?”
그 사람은 다행이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난 여름에 2차 시험을 보았는데 너무 불안했거든요. 그런데 저 선생님이 여유 있는 점수는 아니더라도 이번에 2차를 붙기는 붙는다면서 붙게 되면 자기 잊어버리지 말고 찾아와 한턱 내라고 하던데요? 벌써 붙은 기분이에요. 하하!!”
그 남자는 기분이 좋은지 웃으면서 사라졌다. 형우와 수연이도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깐깐한 인상을 가진 노인하나가 앉아있었다. 그런데 둘을 보더니 대뜸 소리를 쳤다.
“둘은 여기 올 필요가 없는데 무엇 하러 왔어? 돈 버리지 말고 그냥 나가!”
형우는 노인이 대뜸 큰소리에 반말을 하자 황당했다.
“들어오자마자 보지도 않고 나가라뇨? 그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그러자 그 노인은 둘을 기분 나쁘게 계속 훑어보며 말했다.
“둘이 궁합 보러 온거 아니야? 딴거 보러왔으면 이리 앉도록 해.”
형우는 그 말에 화가 나서 말했다.
“이보세요! 우리는 궁합을 보러 왔다구요!”
그러자 그 노인이 기분 나쁘게 웃으며 말했다. 웃음소리는 날카롭기 짝이 없어서 수연이는 그 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궁합? 낄낄낄~ 어차피 이어지지도 않을 사이인데 뭐하러 봐? 난 사기꾼 아니니까 정 보고 싶으면 학생들 쌈짓돈 탐내는 딴곳에 가서 알아봐! 괜히 여기서 쓸데 없는데에 돈 버리지 말고!”
형우는 그 말에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뭐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수연이의 손목을 끌고 바로 나와 버렸다. 형우는 천막을 향해 침을 뱉으며 소리쳤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퉷!”
“진정해 나이도 많은 사람인데 그냥 참아.”
수연이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는 형우를 진정 시켰다. 형우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사주 까페라고 쓰여 있는 간판을 보았다.
“아까 그곳만 점집도 아니고 저기로 가서 차도 마시면서 알아보면 되는 거지! 수연아 저기로 가자!”
사주까페 안은 여느 까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단 바깥이 보이는 창문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까 점집과 같은 모습을 예상한 형우는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했다.
“그냥 일반 까페와 똑같은데? 사주는 어떻게 본다는 거야.”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다주기 위해 테이블로 다가오자 형우는 어떻게 사주를 보는지 질문했다.
“이따가 사장님이 나오셔서 보실거에요. 음료수는 무엇으로 시키실 건가요?”
“전 아이리쉬 커피로 주시구요. 수연이는?”
수연이는 메뉴판을 훑어보다가 종업원에게 물었다.
“여기 지금 맥주 되지요?”
“네, 됩니다. 어떤 걸로 가져다 드릴까요?”
“맥주 3000cc로 가져다주세요. 안주는 그냥 과일 안주로 갖다 주세요.”
그러자 형우가 말했다.
“그러면 전 그냥 커피 취소할게요. 맥주하고 시원한 얼음물 한컵 가져다 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고 사라지자 형우가 당황해 하며 물었다.
“평소에 술도 잘 마시지 않는 애가 갑자기 왠 맥주를 시키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하하~”
그러자 수연이는 바깥에 지고 있는 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일은 정말 해가 서쪽에서 떠올랐으면 좋겠어...’
주문한 맥주가 도착하자 형우는 잠시 맥주를 따르려하는 수연이를 멈추며 말했다.
“일단 사주부터 한번 보고 맥주를 마시자. 먹고 나서 사주를 보면 괜히 정신이 없을 것 같지 않니?”
수연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까페의 주인이 테이블로 와서 앉았다.
“안녕하세요. 연인이신가 보지요?”
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둘이 궁합을 한번 보고 싶어서요.”
그러자 주인은 종이와 볼펜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두 분의 이름하고 생년과 월일, 그리고 태어난 시를 적어주세요.”
형우가 먼저 자신의 사주를 적었고 수연이도 뒤를 이어 자신의 사주를 적었다. 그 사주를 참고로 주인은 무언가 알아볼 수 없는 한문으로 쓰인 책을 살피며 종이에 무언가를 계속 적어나갔다. 그리고 적어야 할 것을 다 적었는지 볼펜을 놓고 둘을 바라보았다. 형우는 궁금한지 주인을 재촉했다.
“뭐라고 나오나요?”
형우는 아까 내심 그 점집에서 말을 들은 이후 기분이 영 좋지 않아 속으로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주인이 둘을 한참 빤히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두 분은 전생에 부부셨네요...”
“정말요! 이야하~ 대단하네!”
수연이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형우도 기분이 좋은지 주인에게 맥주를 한잔 마시기를 권했다. 그러나 주인은 장사를 해야 되기 때문에 고맙지만 사양한다며 일어났다. 형우는 더 이상 권하지는 못하고 주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만 되풀이 했다. 그러자 주인이 형우에게 말했다.
“괜히 나중에 사주를 잘 못 보았다고 화내지나 말아요.”
주인장은 일어나 본래 앉아 있던 카운터로 돌아가 테이블에 앉아 있는 형우와 수연이를 바라보고 한숨을 쉬었다.
형우는 무척 기분이 좋은지 안주도 먹지 않은 채 맥주만 연거푸 마셔댔다. 수연이 역시 평소보다는 많은 양의 맥주를 마셔서 둘 다 살짝 취기가 돌았다. 형우는 기분이 좋은지 아까 주인이 말한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햐~ 정말 이 까페 주인 대단하다! 너무 잘 맞추는거 아니니? 아까 그 노인네는 뭐 돈 버리니까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수연이는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형우는 수연이의 그런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수연아, 너는 기분이 좋지 않니?”
수연의 두 눈에 눈물이 고여 형우의 얼굴이 흐리게 보였다. 수연이는 갑자기 잔에 들은 맥주를 벌컥거리며 마셨다. 그 모습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형우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형우야, 아무래도 너에게 솔직하게 말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33. 모래성 (2)
“널 그만 만나야 할 것 같아...”
형우는 그 말에 눈이 휘둥그레져 마시던 맥주잔을 놓고 수연이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말도 안된다는 듯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얘가... 장난도 그런 장난을 치면 화낼 거야. 어서 마시기나 해.”
“정말 미안해... 형우야.”
수연이의 말과 표정이 장난은 아니라는 것을 느낀 형우는 수연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수연이는 그런 형우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한참을 말없이 수연이를 바라보던 형우는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한 뒤 다시 수연이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흠...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이야기 해줘. 그리고 만약 내가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실망을 해서 그렇다면 말을 해줘. 내가 고치도록 할테니...”
수연이는 그저 떨리는 목소리로 창밖을 바라보며 이야기 할 뿐이었다.
“형우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잘못이 있다면 전부 나에게 있어.”
형우는 그 말을 듣자 더욱 답답한지 수연에게 소리를 쳤다.
“내게 문제가 없고 너에게 문제가 있다고? 그러면 아무런 상관없는 거잖아! 나는 네가 무슨 문제가 있던 고민이 있던 상관없어! 네가 무슨 잘못을 하더라도 나는 아무런 상관없어! 그런데 무슨 상관이야!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니!”
창밖만 바라보던 수연이는 갑자기 테이블에 고개를 숙인 채 흐느꼈다.
“제발.... 내가 형우의 옆에 있는건 죄를 짓는 것 밖에 안돼! 나는 나쁜 애야! 그러니 제발... 제발... 흐흑!”
형우는 수연에게 소리를 쳤다.
“네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나빠? 정말로 그렇다 하더라도 네가 나쁜 애란 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야! 설사 수연이가 나쁜 사람이라 하더라도 내게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어! 내가 지금보다 더 잘하면 되는 거잖아! 난 항상 네 편이야! 왜 내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받아들일 수 없어!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왜!!”
수연이는 숙였던 고개를 들은 채 형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정말 미안해... 난 너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어... 난 네게 너무도 미안하고 힘들어...”
“내가 너에게 무언가를 해달라고 바란 적이 있었니?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바란 적이 없어! 네가 나에게 아무것도 하질 않더라도 상관없단 말이야!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니!”
그 말을 들은 수연이는 테이블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끼며 소리쳤다.
“난 너를 사랑하질 않아!”
“무.. 무슨 소리야...”
수연이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형우는 말을 더듬었다. 수연이는 다시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정말 미안해! 너에게로부터 나는 항상 받기만 했어... 나에게 항상 헌신적인 형우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감사 했어. 너무 고마웠어. 그리고 그 고마움이 사랑이라 생각했어.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가 무슨 소리니?”
“난 항상 너에게 받기만 했고 아무것도 준적이 없어. 그런데 네가 전에 말했던 대로 형우가 내게 특별한 존재인지조차도 모르겠어. 너를 좋아하는 것은 맞지만 널 사랑하는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어! 그리고 그렇게 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 내 자신이 너무나 미워! 차라리 나를 욕하고 미워해!”
말을 마친 수연이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답답해서 가슴이 턱 막힌 형우는 가슴을 두드리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네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뭐가 중요해!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잖아! 그거면 되는 것 아니니? 네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 바뀌게 될 거야. 왜 내게 그런 소리를 하는 거니!”
수연이는 아까 보다 더욱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흐흑... 내가 너의 곁에 있다는 것은 행복한일이야. 하지만 너의 마음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해조차 못하면서 곁에 머물고 있다는 건 너무도 뻔뻔하면서도 네게 큰 죄를 짓는 일이야! 난 너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어!”
말을 마친 수연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형우는 수연이를 붙잡으며 자리에 도로 앉혔다.
“수연아! 어딜 가니? 어딜 가는거야!”
“형우야, 이러지 말아줘! 내가 더 이상 곁에 머물러 있는 건 너를 기만하는 것 밖에 되질 않아. 제발 나를 보내줘!”
형우도 수연이를 바라보면서 흐느끼며 소리쳤다.
“수연아 미안해! 내가 전에 너에게 괜한 소리를 했어! 정말 미안해!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니? 그건 너에게 섭섭하거나 실망해서 했던 소리가 아니야! 그걸 모르겠니? 그 말 때문에 이러는 거니? 그렇다면 내가 빌게 제발 이러지 말아줘!”
형우는 소리치며 수연의 앞에 무릎을 꿇며 소리쳤다. 그러자 주위의 시선이 모두 형우에게 향했다.
“제발... 수연아! 제발!”
수연이는 그런 형우의 모습을 보자 더욱 흐느끼며 울다 까페 밖으로 빠져 나갔다. 형우는 밖으로 나가는 수연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
“수연아! 수연아!!!”
그러나 곧 수연이의 모습은 문밖으로 사라졌다. 형우는 주저앉아 흐느꼈다. 그때 까페 주인이 다가와 형우를 일으켰다. 형우는 그 까페 주인의 모습을 보자 화가 치밀어 올라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당신이 아까 내게 뭐라고 말했어! 그런데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사주? 점? 씨발! 개소리 하지마! 이게 뭐냐고! 이게 뭐냐고!!!”
형우는 그대로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까페 주인은 형우가 쥔 멱살을 천천히 풀며 말했다.
“저는 아까 그저 사주가 나온 대로 손님께 말씀 드렸을 뿐입니다. 하늘의 이치는 사람이 신이 아니기에 누구도 정확히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짐작만 할뿐이지.”
“거짓말... 거짓말!!! 흐흑!!”
형우는 한참을 그렇게 주저앉아 울다 갑자기 일어나 까페 문밖으로 뛰어 나갔다. 계산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아르바이트생이 형우를 붙잡으려 했으나 주인은 그 아르바이트생을 만류했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뛰어나가는 형우의 모습을 치켜보며 혼잣말을 했다.
“전생의 부부는 현세에 이어지지 않는 노릇이지. 억지로 이으려 하면 천륜을 어기는 것이 되어버리고...”
주인은 형우가 눈앞에서 사라질 때 까지 창밖으로 지켜보았다. 그 역시 무언가 사연이 있는 듯 혼자서 눈을 감으며 한참동안 생각에 잠기다 다른 테이블의 주문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달려가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수연아! 무슨 일이니? 수연아! 수연아!”
수연이는 집으로 뛰어 들어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얼굴을 묻은 채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놀란 어머니는 수연이의 방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당겼으나 잠겨진 문은 열리지를 않았다.
“수연아! 수연아! ”
한참동안 문을 열으라고 방문을 두드리던 수연이의 어머니는 내심 걱정이 많이 되었지만 할 수 없다는 듯 발걸음을 안방으로 돌렸다.
‘큰일은 아니겠지...’
수연이의 핸드폰이 계속 울렸다. 휴대폰 액정에는 형우의 전화번호가 떠있었다. 그 전화번호를 보자 수연이는 휴대폰을 들고 배터리를 뺐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아까 자신이 했던 말들과 간절하던 형우의 모습들이 생각나 마음이 더욱 괴로워졌다.
“미안해... 흐흑.. 미안해...”
수연이는 너무 가슴이 아파왔다. 그동안 형우와 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쳤다. 고등학교 때 단과학원에서 쉬는 시간에 수연이를 향해 미소지으며 인사를 하던 모습... 화이트데이날 선물을 건네던 모습... 진실게임에서 자신에게 고백을 하던 모습... 축제에서 자신을 위해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주던 모습... 보지는 못했지만 수연이가 받으면 얼마나 기뻐할까 설레어 하며 선물 상자를 포장했을 형우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수연이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아까 자신을 향해 무릎을 꿇으며 가지 말라고 외치던 형우의 모습이 생각났다. 자기 자신이 너무나 미워졌다.
“형우야... 정말 미안해...”
그렇게 울며 형우의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지고 등골이 아파왔다. 눈물로 젖은 베게는 점점 축축해져 갔다.
‘너무 가슴이 아파... 너무 아파...’
얼마 전 세연이가 집에 들렀을 때 힘없는 표정으로 자신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똑같은 건 아니고 비슷하게... 안타까운 것은 나오지 않는 감정을 억지로 나오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야. 불행한건 감정의 일방통행이지. 그리고 더욱더 불행한건 사랑인줄 모르고 떠나보낸 후에야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야..."
수연이는 부리나케 일어나 다시 휴대폰의 전원을 켜고 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안해... 형우야. 제발 전화를 받아줘... 제발...’
한참 신호음이 들리다 연결이 되었다.
“지금 사용자가 휴대폰을 받을 수 없사오니....”
전화기를 통해서는 무미건조한 음성사서함밖에는 어떤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수연이는 다시 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열 번을 넘게 걸어도 나오는 소리는 아까와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음성사서함 안내음이 들리고 삐소리가 나며 녹음을 기다렸다. 한참을 말없이 흐느끼기만 하던 수연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힘들게 말했다.
“형우아... 사랑해... 그리고 미안해... 제발 전화를 받아줘...”
“녹음이 끝났습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녹음이 끝난뒤 흘러나오는 사무적인 안내소리에 수연이는 더욱 가슴이 아팠다. 전화기를 닫은 수연이는 다시 침대에 주저앉아 배게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34. 모래성 (3)
아침햇빛이 수연의 방 커튼사이로 비쳐 들어왔다. 그 햇빛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천히 움직이다 침대에 누워있는 수연이를 비췄다. 눈에 비친 밝은 빛에 잠을 깬 수연이는 일어나 눈을 비비며 몸을 뒤척이다 옆에 있던 시계를 보았다.
“벌써 10시네!”
이미 수업시간을 넘겨버린 뒤였다. 오후수업이 휴강되어서 이 수업만 들으면 더 이상의 수업은 없는 터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을 살펴보았지만 지금 수업인데 왜 아직도 오지 않고 있느냐는 정희의 문자 메세지를 제외하고 형우의 흔적은 없었다. 수연이는 다시 형우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여전히 음성사서함으로 이동을 할 뿐이었다. 수연이는 씻기 위해 문을 열고 나왔다. 식탁에는 어머니가 앉아 계시는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는 수연이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일어나 아무일도 없는 듯 말씀하셨다.
“어서 씻고 나와 아침 먹으렴.”
수연이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고 캐물어 보지 않으시는 어머니의 마음 씀씀이가 무척 고마웠다. 하지만 어제 밤부터 식탁에 앉아 한숨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걱정 하셨을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니 너무 죄송스러워 졌다.
“응... 바로 씻고 나와서 먹을게...”
식사 중에도 어머니는 말이 없으셨다. 수연이는 몇 숟가락을 뜨다가 더 넘어가지 않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넘어 가지를 않아서...”
“그래, 알았으니 들어가서 쉬도록 해.”
수연이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는 수연이의 방문이 닫히자 한숨을 쉬며 식탁을 치우셨다. 방에 들어온 수연이는 다시 휴대폰을 들어 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여전히 음성사서함 안내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책상에 내려놓자마자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수연이는 재빨리 휴대폰을 들고 외쳤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형우니?”
그러나 전화를 통해서는 한참동안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수연이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형우니? 왜 말을 안하니? 형우니?”
“김수연씨 핸드폰 맞나요?”
휴대폰을 통해 들리는 목소리는 매우 차가웠다. 수연이는 형우가 아님에 낙심을 하며 물었다.
“맞아요... 그런데 누구시죠?”
“오랜만이네, 난 주은혜라고 해. 예전에 한번 본적이 있지?”
“주은혜?”
수연이는 한참을 누구인지 생각하다가 예전에 형우와 같이 길에서 마주쳤던 형우의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은혜의 모습을 기억해냈다.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고...”
“아까 형우 동아리방에 찾아가서 정희라는 친구를 통해 알았어.”
“아아... 그런데 내게 무슨.. 혹시! 형우 소식 알고 있니?”
은혜는 아까보다 더 낮게 가라앉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래도 형우일 때문에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전화를 걸었어. 오늘 별다른 약속 없으면 나와 만날 수 있겠니?”
수연이는 급한 목소리로 대답을 재촉했다.
“그..그래! 몇 시에 어디서 볼까?”
“학교 앞에 정문 앞에 커피숍이 있지? 거기서 오후 3시쯤 봤으면 해.”
오후 3시.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온 수연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둘러보아도 은혜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 카운터에 다가가 물었다.
“여기서 사람을 만나기로 했는데...”
그러자 카운터의 직원은 미소를 지으며 2층을 가리켰다.
“여기 없으면 2층으로 가서 찾아보시면 됩니다.”
“네...”
수연이는 계단을 올라서 2층에 도착했다. 2층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쉽게 누군가를 찾기 어려웠다.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자 은혜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은혜는 수연이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여기야.”
수연이는 테이블로 다가가 은혜 앞에 앉았다. 테이블에는 이미 커피 두 잔이 차려져 있었다. 은혜의 모습은 예전에 보았을 때도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더욱 아름다워 진 것 같았다. 그에 비해 수연이는 어제 너무 울어서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나온 자신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다. 은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미 커피를 두잔 시켰어. 계산은 이미 다 했으니 마시도록 해.”
“고마워...”
수연이는 일단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은혜에게 물었다.
“형우와 연락이 되니? 형우에게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아.”
“당연히 받을 리가 없지. 이미 전화기가 다 부숴졌는데.”
은혜의 냉소 섞인 말에 놀란 수연이는 다시 물었다.
“어.. 어떻게 알고 있니? 전화기가 다 부숴지다니?”
은혜는 그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고 다른 말을 했다.
“어제 저녁에 형우가 공중전화로 나에게 전화를 걸었어.”
“그래서...?”
“나는 그 전화를 받고 바로 대학로로 달려 나갔어.”
짐작을 해보니 어제 형우는 수연이에게 아무리 전화를 해도 되지를 않자 화가나 휴대폰을 길 바닥에 던져 부수어 버린 모양인 것 같았다.
“형우는 자기가 어디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무작정 이러 저리 술집을 돌아다니며 뒤지고 찾아 다녔어. 그런데 아무 곳에도 형우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어. 그렇게 한참을 찾다가 포기를 하고 돌아서는데 마로니에 공원에 사람들이 몰려서 무언가 구경하고 있는 모습을 봤어.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리로 달려갔어.”
“그...리고..”
“그 곳에 형우가 누군가로부터 맞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어. 나는 달려가 말리며 소리쳤어. 왜 형우를 때리냐고. 그러니까 때리던 남자가 형우를 바닥에 팽개치며 말했어. 형우가 술에 잔뜩 취한 채 자기 여자친구에게 다가와 시비를 걸었다고 말이야.”
그 말을 듣자 수연이의 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수연이는 한참 동안 맞고 있었을 형우의 모습을 생각하니 너무나도 가슴이 아파왔다. 은혜는 그런 수연이의 모습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뭐라고 시비를 걸었기에 이렇게 사람을 패냐고 물으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형우가 자기 여자친구에게 다가와 정말로 남자친구를 사랑하느냐며 소리를 쳤다는 거야. 그래서 둘은 그냥 별 생각 없이 지나가려는데 형우가 쫓아와서 그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곁에 머물렀냐고 소리를 쳤대. 그래서 그 여자가 놀라니까 남자는 화가 나서 형우를 때렸다는 거야.”
“흐흑...”
수연이는 맞아서 만신창이가 되었을 형우의 모습을 생각하자 너무 마음이 아파 흐느꼈다. 수연이는 은혜에게 물었다.
“그래서... 형우는 지금 어디 있니?”
그러자 은혜는 차가운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너는 형우의 얼굴을 볼 자격이 없어!”
“뭐.. 뭐라고?”
수연이는 놀라 소리치며 은혜를 쳐다보았다. 은혜는 말했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형우의 곁에 가서 또 다시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수연이는 고개를 흔들며 흐느꼈다.
“아니야... 흐흑... 난 형우를 사랑해...”
은혜는 화가 난 목소리로 날카롭게 따졌다.
“네가 말하는 사랑은 도대체 뭐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면서 아쉬우니까 옆에 붙여두고 있다가 필요 없으면 버리고 그러다 시간이 지나 생각나면 괜히 불쌍한 느낌이 드니까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다시 돌아가 상대방의 마음을 또 아프게 하는 것! 그게 네가 말하는 사랑이니? 그게 사랑이야!”
“나.. 나는... 흐흑...”
은혜는 그런 수연이의 흐느낌은 상관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난 형우를 사랑해!”
“뭐라구?”
수연이는 그 말에 놀라 소리쳤다. 은헤는 수연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형우를 사랑한다고!”
“그..그게 무슨 소리야!”

 


 

 

 


35. 모래성 (4)
수연이는 은혜에게 다시 물었다.
“방금 전에 뭐라고 말했니?”
은혜는 차갑지만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형우를 예전부터 사랑해 왔어.”
“그게 무슨...”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해 형우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좋아했어. 물론 나에게 접근하는 남학생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나는 형우가 나에게 다가와 관심을 가져주기만을 3년 내내 기다렸었어. 바보 같이 3년이나... 그런데 형우는 내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를 않았어. 나 역시 남자들이 내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만 경험했기 때문에 내가 먼저 형우에게 다가가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해서 먼저 그런 말을 꺼낸 적이 없었어. 바보 같이 자존심 때문에!”
수연이는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은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렇게 3년이나 지났어. 그런데 어디선가 형우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 나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척을 했지만 속으로 너무 불안해 조바심이 났어. 그리고 관심 없는 척하면서 은근 슬쩍 남자애들한테 그 여자애가 누구인지 알아보았어. 그런데 그게 너였어. 사실 난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너를 알고 있었어. 너는 날 몰랐겠지만.”
은혜는 자신도 답답한 듯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하루에도 얼마나 먼저 다가가 고백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었는지 몰라. 하지만 내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질 않았어. 형우가 먼저 다가와 주기를 얼마나 속으로 기도 했는지 너는 모를거야. 하지만 형우는 그런 나의 마음을 조금도 알지 못했어. 그리고 어쩌다 눈길이 마주치더라도 그저 나에게 웃으며 인사만 했지 다른 남자 애들이 나에게 보이는 것처럼 그 어떤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어. 그런 형우가 같은 학원에 다니는 한 여자애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난 얼마나 절망 했는지 몰라. 너는 그래본 적이 있니? 난 3년이나 바보같이 말도 못하고 형우만 바라봤어.”
은혜는 점점 흥분해 창밖의 교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수능을 보고 원서를 쓰는데 형우가 이 학교에다가 원서를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나는 처음 다른 여대 무용과를 쓰려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부모님과 선생님이 반대를 하시는 것도 무릅쓰고 내 맘대로 이 학교 무용과에 원서를 집어넣었어. 물론 얼마 후 합격 소식을 들었고 나중에 형우도 합격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때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형우와 같이 대학교를 다니게 되었다는 사실이 말이야. 하지만 그때도 자존심 때문에 먼저 형우에게 찾아가지는 않았어. 바보같이...”
수연이는 모든 게 당황스러웠다.
“저기...”
“시끄러! 내말부터 들어!”
은혜는 흥분해서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치며 수연이의 말을 막았다. 수연이는 놀라 은혜의 얼굴만 보았다.
“얼마 후 학교 내에 고교 동문회가 열린다는 공고가 붙어있는 것을 보았어. 나는 동문회가 열린다는 것보다 그 자리에서 형우와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이 더욱 기뻤어. 그래서 그 날 얼마나 신경을 쓰고 동문회에 참석 했는지 너는 모를 거야. 그런데 그 곳에는 형우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어. 그 자리에서 나는 형우와 같은 반이었던 지훈이를 만났어. 지훈이와 이야기 하는 것은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었어. 걔도 고등학교 때 나에게 관심을 보이던 일반 남학생들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오직 형우의 이야기를 듣기위해서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야. 그런데 그날 나는 지훈이에게서 충격적인 소리를 들었어! 형우가 단지 너 김수연을 만나기 위해서 이 학교에 입학 했다는 소리였어! 난 네가 이 학교에 있을 거란 생각조차 못 했어!”
은혜는 너무나 억울한 듯 눈에 눈물까지 고이며 흥분을 했다.
“난 형우를 만나기 위해 이 학교에 들어왔는데 형우는 너를 만나기 위해서 이 학교에 들어오고 정작 당사자인 너는 입학을 하면서 그러한 사실 조차도 모르고... 너무 기가 막히지 않니? 그때도 나는 너무 바보 같았어. 내가 조금이라도 먼저 형우를 찾아가 고백을 했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그 알량한 자존심이 내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질 않았어. 그리고 얼마 후 길에서 우연히 만난 지훈이로부터 난 더욱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어. 너희 둘이 사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말이야!”
은혜는 눈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지훈이는 마치 그게 대단한 러브스토리라도 되는 양 나에게 줄줄이 늘어놓았어! 내가 형우의 관심을 기다리고 있을 때 형우는 수능시험 전까지 자신의 존재조차 밝히지 않은 채 너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고, 내가 형우를 만나기 위해 원서를 쓸 때 형우는 너를 만나기 위해 원서를 쓰고 있었어. 난 혼자 억울함에 치를 떨었고 이 학교 어디선가 형우와 같이 있을 너의 모습을 생각하면 너무 화가나 미칠 것만 같았어! 그로부터 얼마 후 형우와 너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 내색은 안했지만 속으로 얼마나 절망했는지 몰라!”
은혜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리고 다음번 동문회에서 만난 지훈이로부터 자기네 동아리가 축제 때 공연을 하는데 그때 형우도 노래를 부르고 자기는 기타를 치고 또 기가 막힌 깜짝쇼도 있다며 구경을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때도 나는 자존심 때문에 그 자리에 참석한 형우에게 말을 걸지 못했어. 차라리 그때라도 내가 붙잡고 고백을 했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흐흑!”
은혜는 목이 마른지 이미 다 식어버린 커피를 한번에 다 마시고 잔을 내려 놓았다.
“축제 마지막날, 나는 관중석에 앉아 마음을 졸이며 형우가 나올 순서만을 기다렸어. 그전의 기다림이 얼마나 길었는지 몰라. 그리고 나머지 공연들이 얼마나 지겨웠는지 할 수만 있다면 모두 무대에서 끌어내리고 싶었어. 얼마 후 시간이 되자 형우가 무대위로 올라왔어. 형우는 마이크를 들고 무대 가운데를 가리키며 너를 위해 노래를 부르러 올라왔다고 소리를 쳤어. 마치 형우가 가리키는 손길이 주은혜! 너는 더 이상 우리사이에서 빠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 나는 너무나 비참했어. 그리고 형우가 노래를 부르자 모두들 무대를 향해 환호를 했어. 여지껏 내가 그렇게 초라하게 보였던 적은 한번도 없었어! 그리고 노래가 끝나고 형우와 네가 키스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절망이라는 단어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를 않았어! 그리고 그 사이에 내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너를 미워하지 않기로 생각을 하며 체념했어. 내가 너를 미워 하는 것은 못난 짓을 하는 것 밖에 안되니까.”
은혜는 무섭게 수연이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젠 아냐! 넌 순수했던 형우의 마음에 배신을 한 것뿐 만 아니라 간절했던 내 마음까지도 멍들게 했어! 넌 결코 형우에게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여자야! 난 네가 너무나 미워!”
“흐흑....”
수연이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말할 수도 없었고 할말조차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때 은혜가 눈물을 닦고 흥분했던 표정을 바로잡으며 수연이를 향해 말했다.
“난 어제 형우와 같이 잤어.”
“뭐라고! 지금 뭐라고 말했어!”
수연이는 그 말에 크게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은혜는 그런 수연이에게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냉소했다.
“재방송을 해야 하니? 난 어제 형우와 같이 잠자리를 했다고.”
“그.. 그게 무슨!”
은혜는 깜짝 놀란 수연이의 표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어젯밤 맞아서 다친 형우를 돌보기 위해 택시를 타고 가까운 여관으로 데리고 갔어. 형우는 술에 취해서도 수연아 수연아... 네 이름만을 불렀어. 나는 그 상황에서도 네 이름만 부르는 형우가 너무도 야속했어. 하지만 다친 형우를 돌보는게 먼저이기 때문에 나는 방을 잡고 형우를 침대에 눕힌 뒤 얼굴과 손에 묻은 피를 닦았어. 그리고 누워 있는 형우를 향해 처음으로 울면서 고백을 했어. 사랑한다고. 그러자 형우가 갑자기 흥분해 일어나 나를 껴안고 누웠어... 그렇게 밤을 보냈어.”
수연이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아 어쩔줄 몰랐다.
“형우야... 흐흑!”
“김수연! 형우의 이름을 그 입에 올리지도 마! 네가 그 말을 듣고 울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너는 모든 것을 다 가져서 행복하다고 생각했겠지! 흥! 착각이야! 너는 어제 스스로 형우를 사랑하지 않는다며 떠나가 버렸어! 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는 거야? 나는 어제부터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렸어. 그깟 네가 형우에게 가진 값싼 연민과 동정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며 형우에게 다시 다가온다면 결코 용서치 않겠어! 이제 형우와 나 사이를 방해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 첫 번째는 너야! 다시는 형우의 앞에 나타나 마음 아프게 하지마! 그런 건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다시는 형우를 찾지마!”
은혜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수연이는 그저 고개만 숙인 채 흐느낄 뿐이었다. 1층으로 내려가던 은혜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수연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는 누구에게 사랑받을 자격도 그리고 사랑할 자격도 없어!”
은혜의 마지막 말은 수연이의 마음에 비수처럼 박혀 가슴이 아팠다. 말을 마친 은혜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당당히 걸어서 문을 열고 나오던 은혜는 2층 창문으로 보이는 수연이의 울고 있는 모습을 노려보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은혜는 자신을 안으면서도 수연이의 이름을 부르던 형우의 모습이 생각났다. 은혜의 두 눈에도 눈물이 고여 흘렀다.
“나쁜 계집!”
테이블에 주저앉아 울던 수연이는 자신에게 수없이 질문을 던졌다.
‘나는 정말 사랑을 받을 자격도 할 자격도 없는 나쁜 사람일까?’
‘나는 은혜의 말대로 지금 연민과 동정을 형우에 대한 사랑으로 착각하며 괴로워하는 걸까?’
생각을 하면 할수록 마음은 더욱 괴로워졌다. 창문이 열려있다면 밖으로 보이는 길로 떨어져 죽고만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그리고 마음 아파하며 괴로워하고 있을 형우의 모습을 생각하니 눈물만 계속 흘러 나왔다.
“형우야.. 미안해... 난 너에게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어... 흐흑!”

 


 

 

 

36. 고해 (1)
“야! 김수연! 너 어떻게 된 거야? 수업도 안나오고 동아리 방에도 오지 않고! 그리고 형우는 또 어떻게 된 거야? 말을 좀 해봐!”
정희의 흥분한 목소리가 휴대폰을 타고 수연이의 방 전체에 울렸다. 벌써 몇 번째나 반복된 정희의 전화였다. 수연이는 아까도 그랬듯 힘없이 정희에게 같은 말을 반복해서 말했다.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 하자... 지금은 말할 기운도 없어.”
“너라면 1주일 동안 아무리 전화를 해도 통화가 안 되던 친구가 겨우겨우 연락이 되었는데 고작 한다는 소리가 말할 기운도 없으니 나중에 이야기 하자면 흥분 안하겠어! 지금 도대체 어디야? 집이야?”
“미안해 정희야... 나중에 얘기 할게.”
수연이는 전화를 끊고 다시 배터리를 뺐다. 혹시나 형우의 음성이나 문자등과 같은 연락이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잠시 휴대폰을 켰는데 켜자마자 정희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었다. 형우의 모습을 떠올리면 형우의 얼굴 위로 싸늘히 자신을 바라보던 은혜의 모습이 겹쳤다.
‘너는 누구에게 사랑받을 자격도 그리고 사랑할 자격도 없어!’
은혜가 마지막으로 남기고간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면 행인들 모두 자신을 보고 그렇게 말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두려웠다. 1주일 동안 수연이는 방안에 처박혀 식사도 거른 채 울다가 잠들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그냥 별일 아니겠거니 하며 말없이 지켜보시기만 하던 수연이의 어머니도 1주일이나 이런 날이 지속되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수연이의 방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수연아, 무슨 일인지 엄마랑 이야기 하지 않을래? 수연아?”
문을 두드리고 몇 번을 불러도 수연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방안에서 혼자 울던 수연이는 모든 게 괴로웠다. 자기 때문에 걱정을 하시는 어머니와 정희를 생각하면 너무나 미안했다. 자신과 형우를 위해 기꺼이 힘 써주던 동아리 동기들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실망을 준 것만 같아 괴로웠다. 그리고 무릎까지 꿇으며 간절히 자신을 부르던 형우의 모습을 생각하면 너무 커다란 상처를 준 것만 같아 괴로워 미칠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소리 없이 울다 고개를 드니 책상위로 형우와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가 보였다. 수연이는 천천히 일어나 책상 앞으로 다가가 액자를 들었다.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던 수연이의 뺨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액자의 투명한 유리 위를 적셨다. 수연이는 사진을 내려놓으며 방안을 살펴보았다. 벽에는 형우가 선물로 준 꽃들이 말려져 걸려있었다. 벽의 한쪽 구석에는 형우가 선물한 박스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그리고 책장에는 형우와 찍은 사진들이 담긴 앨범이 보였다.
‘더 이상 이러는 건 안 되는 일이야...’
수연이는 방문을 열고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수완이를 불렀다.
“수완아, 잠깐 누나 방으로 와줄래?”
수완이는 며칠동안 말도 없이 방에 박혀 있는 누나가 걱정스러워 몇 번이나 문을 열고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어머니가 만류를 했던 터라 답답했었다. 그런 누나가 자신을 부르자 안심이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 반가운 마음까지 들었다.
“알았어~!”
그때 방안으로 들어가려던 수완이는 어머니에게 잠시 붙잡혔다. 어머니는 수완이를 보고 누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손짓을 하셨다. 수완이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수연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수완아 미안한데 부탁 한 가지만 들려줄래?”
“어떤건데?”
수연이는 방안 한쪽에 있는 옷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걸 잠시 옆으로 치워 주지 않을래? 너무 무거워서...”
“뭐하려구?”
“그럴일이 있어서 그래...”
수완이는 어리둥절했으나 말없이 옷장을 들어서 옆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끄응~ 얼마나 더 옮기면 돼?”
“조금만 더 옆으로 옮겨줘.”
“이제 된거야?”
“그래, 고마워 수완아. 이따가 다시 부탁할 테니 그때 한번 더 와줄래?”
“알았어.”
수완이는 이해할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방을 빠져나왔다. 방문이 닫히자 어머니는 수완이를 불러서 물었다.
“언니가 뭐라고 그러던?”
수완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옷장을 옆으로 잠깐만 옮겨 달라던데?”
“옷장을?”
어머니는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수연이의 방문을 바라보다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안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면 될까?”
옷장을 치우자 원래 벽에 붙어있던 벽장의 문이 나타났다. 처음 이곳에 이사를 왔을 때 이 벽장을 쓰면 방의 넓이도 좀 넓어 질 것 같고 해서 쓸까 말까 고민을 했었지만 벽장의 안쪽이 너무나 낡고 오래된 터라 그냥 이것저것 쓰지 않는 잡동사니만 넣어둔 채 그 앞을 옷장으로 막아 놓았었다.
“오랜만에 이 문을 보네...”
처음에는 형우가 준 모든 것들을 버리려 했었다. 그러기 위해 형우의 흔적이 담긴 모든 것들을 꺼내 방 한가운데 모아 놓았다. 그러나 버리려고 마음만 먹었지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에 밟히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기에는 너무 마음이 괴로웠다. 한참을 고민하던 수연이는 예전에 옷장으로 막아놓은 벽장을 떠올리고 그 속에 모두 담아놓으려 수완이에게 부탁했던 것이었다. 수연이는 벽장의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낡은 벽장의 문소리는 마치 폐가의 귀곡성 같다는 생각이 들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그 소리에 얼굴을 찡그리며 벽장의 안을 살폈다. 벽장 안에는 말 그대로 온갖 잡동사니들로 가득했다. 수연이의 눈에 익은 물건이 먼지가 약간 쌓인 채 놓여있었다. 아버지가 항상 들고 다니시던 서류가방이었다.
‘장지에서 아빠 옷을 태울 때 함께 다 태워 버린 줄 알았는데...’
수연이는 서류가방위로 살짝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가방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아버지의 필적이 담긴 각종 낡은 서류들이 담겨있었다. 그 서류들 아래로 결혼하시기 전에 찍은 듯한 아버지의 사진들이 여러 장 담겨있었다. 사진에는 청년인 아버지의 웃는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어머니가 일부러 여기에 남겨 두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도 잊기 위해 자신과 같은 방법을 택하신 거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건가 보다...“
수연이는 서류가방을 닫은 후 방에 모아둔 형우의 흔적들을 하나하나씩 벽장에 쌓기 시작했다. 하나하나를 날라다 벽장에 집어넣을 때마다 형우와 같이 있던 때가 떠올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집어넣다가도 몇 번씩이나 다시 꺼내 놓을까 망설이며 벽장 앞을 서성거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모두 집어넣게 되었다. 모두 집어넣자마자 수연이는 힘이 빠진 듯 벽장 앞에 주저앉았다. 수연이의 머릿속은 자신의 감정조차 제대로 알지 못해서 생긴 일에 대한 후회로 가득했다. 벽장 맨 아래 칸에는 이제는 더 이상 가지를 않는 낡은 시계가 먼지에 쌓인 채 수연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아니 이 시계처럼 영원히 멈출 수만 있다면...’
낡은 시계 옆으로 먼지 쌓인 작은 상자 하나가 보였다. 수연이는 그 상자가 무엇인지 기억을 해내려 했으나 기억이 날 듯 말 듯 해서 잘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열어보면 뭔지 기억나겠지.’
수연이는 상자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상자 속에는 초코렛, 사탕을 먹고 남은 봉지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받은 화이트데이 선물이구나.”
그 상자는 중학교 1학년 때에 익명으로부터 받은 화이트데이 선물이었다. 수연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도로 벽장에 집어넣기 위해 상자 뚜껑을 들었다. 그때 상자 뚜껑 안쪽에서 무언가가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뭐지?”
수연이는 떨어진 것이 무언가 살펴보았다. 그것은 사진이었다. 사진속에는 나뭇가지에 가득핀 꽃들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무슨 꽃이지... 라일락인가?’
수연이는 그 꽃의 사진을 살펴보다 그냥 도로 집어넣고 상자를 닫았다. 그리고 안쪽의 원래 있던 자리에 두고 벽장의 문을 닫은 뒤 방문을 열고 수완이를 불렀다.
“수완아, 한번만 더 와줄래?”
“알았어.”
수완이는 방으로 들어와 말없이 옷장을 원래 있던 자리로 옮겨 놓고 밖으로 나갔다. 형우와의 흔적이 담긴 모든 것들이 벽장 안으로 사라져 눈에 보이지 않게 되자 수연이는 허탈해져 힘없이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어머니가 방문을 두드리며 수연이를 불렀다.
“수연아, 정희한테 전화 왔다.”
“응...”
휴대폰을 배터리를 빼놓아서 전화가 되지 않으니까 성질 급한 정희가 집전화로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여보세요...”
“야! 이 못된 기집애야! 아예 전화를 꺼버려? 너 지금 집이지!”
정희의 목소리는 약간 화가 난 듯 했다.
“응... 집인데.. 나중에 내가 자초지종을 이야기 해줄게.”
“기다려! 넌 죽었어!”
“여보세요, 여보세요?”
정희는 갑자기 전화를 끊어버렸다. 수연이는 한숨을 쉬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어머니는 그런 수연이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셨다. 수연이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괜찮아.”
“딩동! 딩동!”
그때 갑자기 현관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수완이는 현관으로 달려가 누구이지 물었다.
“누구세요?”
“여기 수연이네 집이죠? 맞죠?”
“네. 맞는데... 누구시죠?”
그러자 밖에서 괄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 김수연!! 네가 안와서 내가 직접 왔다!”

 


 

 

 


37. 고해(告解) (2)
수완이는 그 목소리에 놀라 수연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누나, 누구야?”
수연이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수완이를 뒤로하고 수연이는 현관문을 열었다. 밖에는 정희가 서있었다. 급하게 뛰어서 온 듯 숨을 헐떡이며 수연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희야... 왔니...”
“그러면 왔지? 갔냐!”
수연이의 어머니가 놀라 무슨 일인가 안방에서 나와 현관문을 바라보셨다. 정희는 수연이의 어머니를 보고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아..아주머니, 죄송합니다. 저는 계시지 않은 줄 알고... 소리쳐서 죄송합니다~”
“정희였니? 바깥에 서있지 말고 어서 들어오렴. 저녁은 먹었니?”
“네. 방금 전에 먹고 왔어요.”
정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수연이는 정희의 손을 붙잡아 방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리고 방문을 닫으며 정희에게 말했다.
“이렇게 갑자기 오면 어떻게 하니?”
“야! 이 못된 지지배야! 너 같으면 지금 궁금하지 않게 생겼니? 너는 학교에 오지도 않고 형우도 동아리 방에 오지 않고. 학교에서 지나치다 보았는데 형우 옆에는 불여시 같은 게 꼭 붙어 다니고 있고!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이야? 형우가 바람이라도 펴서 이러고 있는 거야? 그런 거야?”
수연이는 바깥에서 말을 들을까봐 정희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형우가 바람핀거 아니야. 내가 자초지종을 이야기 할 테니까 좀 조용히 해줘.”
“알았으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야기를 해봐.”
“이것부터 먹으면서 이야기 하렴.”
“네, 고맙습니다.”
수연이의 어머니가 문을 열고 차와 과일을 방에 놓고 방을 나가셨다. 정희는 수연이의 어머니가 방문을 닫고 나가시자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이야? 동기애들도 무슨 일인지 너희들과도 연락이 잘 안되어서 걱정을 하고 있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갑자기 이렇게 되어버린 거야? 응?”
“휴우...”
수연이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정희에게 그동안 있던 일들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자신의 감정에 대한 의문과 그로 인한 이별의 결정 그리고 뒤 늦은 후회, 이후에 은혜와 만나 있던 일등을 하나하나 천천히 정희에게 털어놓았다. 한참동안 수연이의 말을 듣던 정희는 수연이가 이야기를 마치자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뭐가 이렇게 복잡한 거니? 나는 그냥 단순히 형우가 그 은혜인지 뭔지 하는 여자애하고 같이 지나가는 모습을 우연히 봤기에 형우가 바람을 펴서 네가 상처를 받아 학교에 나오지 않는 줄로만 알았어.”
수연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바보같이 다 내가 잘못 한거야...”
그러자 정희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걸 어쩌지... 사실 난 동아리 방에서 너희에 대한 이야기 할 때에도 그냥 형우가 딴 여자랑 같이 있는 모습을 본 뒤에 형우가 바람을 피워서 네가 상처를 받아 못나오고 있다는 식으로 단단히 열을 냈었거든. 그래서 지금 형우녀석 동기뿐만 아니라 선배들한테도 단단히 찍힌 상황인데 이걸 어쩐다...”
“뭐라구! 다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걸 어떡하지...”
수연이는 놀라 울상을 지으며 어쩔 줄 몰랐다. 정희는 미안해하며 머쓱 거렸다.
“그러게... 일단 네가 와서 해명을 했었어야지. 형우녀석도 나와서 이야기를 안하고... 아휴! 뭐가 이렇게 복잡한거야. 사랑은 원래 이렇게 다 복잡한거야? 그렇다고 이 내용을 누가 나서서 해명을 하기도 너무나 복잡한 일이잖아! 무슨 신파극도 아니고... 나도 몰라 몰라! 이걸 어쩌면 좋은 거야!”
수연이는 얼굴을 손에 묻고 흐느끼며 말했다
“흐흑...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난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형우를 위하는 거라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난 형우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만 줬고 형우와 나를 사랑해준 모두에게 실망만을 안겼어. 또 그것이 서로가 편해지는 길이라 믿었던 나조차도 지금에서야 뒤늦게 나의 진짜 감정을 깨닫고 나서 후회하고 있어... 흐흑...”
정희는 울고 있는 수연이를 달래며 말했다.
“이것을 어떻게 모두 네 탓이라고만 할 수 있겠니. 나는 그만큼 네가 순수 했으니까 그런 생각과 결정을 했다고 생각해.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누구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아니야... 흐흑... 모두 내 잘못이야...”
“수연아! 네가 말하는 식으로 원죄를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형우가 너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생기지 않았을 테니 그렇다면 형우가 죄인이 되는 거니? 또 형우가 잘못이 아니라면 네가 태어났다는 자체가 죄가 되는 거니? 난 이 상황의 주인공 모두가 원고이자 피고라고 생각해. 여기서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져서 그 결과를 짊어지게 한다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야. 난 적어도 네가 이렇게 방에 처박혀 울고 있어야 할 만큼의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흐흑...”
“난 네가 매우 순수한 아이란 걸 알아. 그리고 내가 잠시 오해를 했던 형우와 은혜라는 아이역시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이 가진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모두가 순수했다고 생각해.”
“난 아니야... 내가 나빴어.. 흐흑..”
“너는 그때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잘 몰랐다고 말하지만 어쨌든 형우를 위해 그런 결심을 내렸어. 비록 그 결과가 어찌되었든 큰 사랑이 전제가 되지 않았다면 절대 내릴 수 없었을 결정이라고 생각해. 네가 형우를 그만큼 아끼지 않았다면 그런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을 거야. 이런 상황에서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니. 수연아... 이제 그만 네 방에서 나오길 바래.”
정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연이를 일으켰다.
“정희야... 난 그냥 여기 있을래. 미안해...”
정희는 수연이의 양쪽 볼을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
“이보세요~ 수연씨~ 어서 일어나요~ 우는 아이에겐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가져다주지 않아요~”
“뭐하는 거니. 얘는...”
수연이는 그 모습이 어이가 없어서 정희의 손을 치우며 피식 웃었다. 정희는 수연이의 표정을 보고 다시 놀려댔다.
“어라? 얘 웃네? 방금 전에는 펑펑 울다가 이제는 웃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나는데? 킥킥! 못된 망아지 수연이~”
수연이는 어이가 없어서 계속 헛웃음을 쳤다. 정희는 다시 수연이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어서 일어나요~ 그러고 보니 둘이서만 같이 술 마신적은 한번도 없던 것 같네? 옜다! 오늘은 기분이다! 내가 한잔 살 테니 어서 일어나!”
“뭐라고? 지금 나가서 술 마시자고?”
정희는 수연이를 일으켰다. 수연이도 못이기는 듯 정희를 따라 일어났다.
“오늘은 바깥 날씨도 흐릿흐릿 하더라. 이런 날 술 마시면 술도 잘 넘어가잖아. 킥킥! 술도 더 잘 땡기고 말이야. 뭐 먹을래? 맥주? 소주? 막걸리?”
“그냥.. 아무거나...”
정희는 방문을 나와 수연이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아주머니! 오늘밤은 수연이 얘좀 데리고 좀 놀다가 올게요. 그래도 괜찮죠?”
“너무 늦지는 말고. 혹시 너무 늦으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가렴.”
“네! 알았어요~ 수연아 어서 나오지 않고 뭐해?”
정희는 먼저 신발을 신은 뒤 현관문을 열고 수연이가 나오기를 재촉했다.
“수연이 좀 데리고 놀다 오겠습니다!”
“엄마... 갔다 올게.”
“그래, 잘 놀다가 오렴.”
정희는 수연이의 손을 잡고 앞뒤로 흔들며 문을 나섰다. 수연의 어머니는 아파트 복도로 멀어지는 수연이와 정희의 뒷모습을 보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렇게 수연이를 직접 찾아와 준 정희가 무척 고마웠다.
“간만에 바깥 공기 쐬니까 어떠니?”
“그냥... 좋아.”
“좋긴 좋은데... 혹시 지금 비가 내리는 것 같지 않니?”
정희가 비라는 소리를 꺼내자마자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희는 수연이의 손목을 붙잡고 소리쳤다.
“수연아! 뛰자! 그리고 아무데나 간판 보이면 그리로 들어가는 거야!”
“알았어!”
그렇게 고개를 숙이며 한참을 뛰던 정희는 앞쪽에 무언가 간판불이 켜져 있는 걸 하나 발견했다.
“수연아! 따라 들어와!”
일단 비를 피해 들어온 둘은 서로의 모습을 보고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 자리를 잡으려했다. 순간 수연이와 정희는 표정이 굳어졌다. 테이블에는 대부분 아저씨들이 앉아서 술을 걸치고 있었다. 이들은 급하게 뛰어 들어온 수연이와 정희를 보고 깜짝 놀라 술을 마시다 말고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희는 어이없어 하며 중얼거렸다.
“여긴 도대체 어디야...”
“어디긴요? 곱창집이죠 아가씨들. 어서들 앉아요!”
눈치 빠른 종업원은 이 둘을 얼른 빈 테이블로 안내하고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뭘로 드릴까요?”
한참 벽에 붙은 메뉴판을 보던 정희는 종업원에게 말했다.
“곱창, 막창, 곱창, 막창, 순대, 곱창, 막창... 헤에~ 전부다 이런 거네. 그냥 제일 맛있고 잘 나가는 것 하나하고 소주 한 병 주세요.”
“모듬 곱창 구이가 가장 맛있어요! 그거하고 소주 한 병 갖다 드릴게요!”
종업원은 행여나 이들의 마음이 변할까 염려하여 재빨리 소주 한 병과 홍합 국물을 가져왔다. 정희는 소주병을 따 수연이의 잔에 따랐고 수연이도 병을 받아 정희의 잔에 따랐다. 정희는 어이없는 듯 한숨쉬며 말했다.
“어떻게 급하게 뛰어 들어온 곳이 곱창집이니? 히히~”
“그러게 말이야.”
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씽긋 웃었다. 정희가 갑자기 느끼한 목소리로 수연이에게 말했다.
“일단... 건배부터 하실까요? 수연씨”
“그래요, 푸훗! 건배!”
건배를 하고 소주 한 모금을 마시자 정희가 입을 열었다.
“수연아, 다음에는...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시 사랑하게 된다면 그때는 흔들리지 말고 후회하지 않게 꼭 잡아! 알았지?”
수연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정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수연이의 귀에다 손을 대고 속삭였다.
“실은...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궁금하지?”
깜짝 놀라 정희만 바라보며 할말을 잊은 수연이에게 다시 정희는 속삭였다.
“실은 그게... 성대야...”
정희는 속삭이자마자 다시 자리에 앉아서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수연이는 너무 놀라운지 말까지 더듬으며 정희에게 물었다
“그.. 그게 정말이니?”
“그렇기는 한데 성대 이 녀석은 나에게 통 관심이 없네. 내가 그렇게 선머슴 같은가?”
둘은 한참동안 웃음꽃을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연이는 정말 오랜만에 별 다른 생각 없이 웃어본 것 같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소주가 생전 처음으로 맛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곱창이 생각보다 맛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그렇게 한참동안 정희와 이야기를 나누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는 아까 보다 더 많은 양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씻겨 내려는 듯...

 


 

 

 


38. 낙화 (1)
“수연아, 정말 동아리 방에 들르지 않을 거야?”
“그냥... 다들 얼굴 보기도 미안하고. 형우 얼굴 보기도 미안하고...”
“그렇다고 맨날 도서관에 처박혀 있을 거야? 이 가방 좀 봐. 뭐가 이렇게 많이 들어가 있는 거야? 휴우~ 그리고 너도 안나오지만 형우 이 녀석도 동아리 방에 얼굴을 비치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어.”
성대는 수업이 끝난 후 도서관으로 향하던 수연이를 붙잡고 이야기 나누는 중이었다. 정희에게 대충 이야기는 들어서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수업이 끝나면 혼자서 조용히 도서관으로 사라져 버리는 수연이를 볼때마다 매우 걱정이 되었다. 이미 동아리 방에서 수연이를 본지 2달이 넘은 터라 1학년 부장으로써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수연이는 다시 가던 길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다들 어색하게 만들어서...”
“수... 수연아.”
성대는 수연이를 붙잡고 뭐든 물어 보고 싶었지만 딱히 화제 거리가 떠오르질 않아 그대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수연이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저 멀리 힘없이 어디론 가로 향하는 성대의 뒷모습이 보였다. 수연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가서 웃고 떠들기에는 이제 너무 미안한 자리야...”
도서관으로 향하던 수연이는 무언가를 보고 깜짝 놀라 길옆에 있던 건물로 들어가 몸을 잠시 숨겼다. 형우와 은혜가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모습을 발견 한 것이었다. 수연이는 유리문을 통해 지나가는 형우와 은혜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은혜는 뭐가 좋은지 깔깔 웃으며 형우의 팔짱을 낀 채 재잘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형우의 표정은 간간히 은혜를 향해 억지로 웃기만 했을 뿐 그다지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수연이는 그런 형우의 뒷모습이 눈에서 멀어질 때까지 유리문 뒤에 서서 바라보았다.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휴우...”
요즘 들어 수연이는 고등학교때 가입만 하고 별로 관리를 하지 않던 블로그에 자주 접속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몰래 형우의 블로그에 접속을 했다. 몇 번이나 이번이 마지막 접속이라고 속으로 다짐을 반복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형우 역시 관리를 하지 않는 듯 항상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형우의 블로그를 통해 방문하게 된 은혜의 블로그에는 거의 매일 형우와 찍은 사진이 올라오고 있었다.
‘내 사랑 형우와 함께’
‘형우♡은혜’
‘형우왕자와 은혜공주’
‘형우와 은혜의 사랑이야기’
블로그에 올라온 낯간지러운 제목의 사진 속에 담긴 형우의 웃음은 그리 자연스러워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 유리문을 통해 바라본 형우의 표정역시 사진속의 표정과 다를 바 없었다. 고개를 저으며 문밖을 나서려고 할 때 누군가가 수연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성문이가 수연이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고 있었다.
“앗! 성문아?”
“이게 얼마만이야? 도통 동아리 방에 얼굴을 비치지 않으니 같은 학교에 있으면서 이렇게 얼굴을 보기 힘들어서야 원... 같은 대한민국 하늘아래 살고 있는 것 맞아?”
“미안해...”
“참! 일단 급하게 할 이야기도 있고 해서 마침 너에게도 연락을 할 참이었어. 바람도 쌀쌀한데 같이 차나 마시며 이야기 하자. 내가 살 테니 얼른 따라와.”
성문이는 수연이를 데리고 휴게실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자판기에서 차를 두잔 뽑아와 자리에 앉았다.
“어서 마셔. 이렇게 쌀쌀한 날에는 코코아만큼 좋은 것도 없지.”
“고마워, 그런데 급한 일이라니?”
성문이는 답답한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에휴~ 대혁이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어.”
“그게 무슨 소리니? 안 좋은 일이라니?”
수연이는 깜짝 놀라 물었다. 성문이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동아리 방에 그동안 대혁이가 부대에서 보낸 편지들이 몇 통 왔었어. 편지에 늦어도 10월이면 100일 휴가를 나가니까 그때 보자고 쓰여 있어서 나는 휴가 나오면 직접 만나서 술이나 사주면서 볼 생각으로 별 다른 답장은 안했었고 정희만 몇 통 답장을 보냈었어. 그 녀석이 생긴 거랑은 다르게 동아리 방으로 편지를 자주 보내더라구.”
“그랬구나...”
안 그래도 정희가 얼마 전에 대혁이의 부대 주소를 알려주면서 편지를 써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하지만 그동안 마음의 여유가 없어 그럴 겨를이 못된다는 핑계로 편지 쓰기를 계속 미루어온 터였다. 예전에 제대한 예비역 선배들로부터 군대에서 편지를 받았을 때에 가장 기분이 좋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떠오르자 수연이는 대혁이에게 무척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10월이 지나 11월이 되어도 아무런 연락이 없고 편지도 더 이상 오지 않아 이상하니까 형석이가 아까 대혁이의 집에 직접 전화를 해서 알아보았나봐.”
“그래서 어떻게 된거니?”
“대혁이가 100일 휴가를 나오기 며칠 전에 부대에서 작업을 하다가 발을 헛디뎌 높은 곳에서 떨어졌대. 그래서 머리도 다치고 몇 군데에 골절상도 입었나봐.”
“세상에!”
수연이는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그런데 생각보다 머리를 많이 다쳐 군병원에서 수술하기가 어려운가봐. 그래서 사랑병원 응급실로 옮겼다더라. 그래서 지금 그 병원에 입원해있어.”
“지금은 좀 나아진거니?”
“아니...”
성문이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이후 아직까지 의식조차 회복을 하지 못했나봐. 형석이 녀석 말로는 거의 죽을 뻔한 걸 빨리 조치해서 그나마 살아난 거래. 하지만 만약에라도 잘못되면 식물인간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것 보니까 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것 같아.”
“식물인간 이라고? 어쩌면 좋아!”
“그러게 말이야...”
수연이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주변에서 항상 무사하게 건강히 제대하는 사람들만 보아왔기 때문에 군에서 사고를 당해 다치거나 죽는다는 이야기는 그저 뉴스에만 나오는 먼 나라 이야깃거리 인줄로만 알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대혁이가 그런 일을 당했다는 말을 들으니 그러한 뉴스가 정말 현실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다.
“그래서 일단 동아리 부원들 모두 병원에 가보기로 했어.”
“가도 될까...”
수연이는 망설여졌다. 만나서 부원들의 얼굴을 보기가 왠지 두려웠다. 그보다는 그곳에서 형우의 얼굴을 보게 될까봐 더 두려웠다. 성문이는 수연이의 마음을 알고 있는 듯 차분히 이야기를 꺼냈다.
“정희가 설명을 해주어서 다들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어. 나 역시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 심정은 약간 이해가 가. 그리고 아무도 너나 형우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으니 걱정마.”
“그래도...”
“대혁이는 동아리부원이기 이전에 네 동창이고 동기이고 그것도 같은 과 동기인 친구 아니니. 그러니 너무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고. 일단 대혁이가 나아지는 게 먼저지. 내일 오후 3시까지 사랑병원 정문 앞으로 와줄 수 있지?”
수연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곧 수업이 있어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내일 오후에 병원 앞에서 보자!”
“그래, 내일 봐.”
다음날 오후 3시 사랑병원 정문 앞
약속시간보다 약간 일찍 도착한 성대와 성문이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주위를 살피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제 겨울이 되려고 그러나 왜 이리 바람이 쌀쌀한 거야! 그건 그렇고 다들 왜 이렇게 안 오는거야?”
“추워? 진짜로 추워? 넌 나보다 가죽옷을 하나 더 껴입은 녀석이 뭐가 그렇게 춥다고 불만이야?”
“부러우면 너도 밤마다 삼겹살 쳐먹고 디비자서 살이나 찌워라!”
“짐승 같은 놈~ 날씨 추우니 겨울잠 자려고 살찌웠냐? 킥킥!”
한참을 투덜거리던 성대의 눈앞에 수연이와 정희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성대는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여기야! 여기!”
병원 정문 앞에 도착한 정희는 추워서 손이 시려운 듯 계속 비벼댔다.
“아직 12월도 아닌데 뭐 이렇게 추운거야! 아이고 추워~~!”
성대는 수연이에게 다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결국 와주었네, 고마워.”
그러자 정희는 성대를 바라보며 투덜댔다.
“수연이는 반갑고 나는 안 반갑냐! 이 못된 돼지야!”
“각하는 그다지...”
“뭐라구!”
그때 성문이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다들 온다! 야~! 여기야! 어서들 와! 추워 죽겠다!!”
저 멀리서 형석이와 지훈이 그리고 형우와 은혜가 함께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수연이는 그 모습을 보자 표정이 굳어졌다. 정희는 굳어진 수연이의 표정을 바라보며 답답한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저 애는 왜 따라온 거야? 휴우~ 갈수록 태산이군.”
그렇게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자 왠지 모를 어색한 공기가 흘러 다들 할말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수연이는 그저 고개를 숙이며 형우의 눈을 피했다. 그때 형우가 어색한 목소리로 수연이에게 말을 건넸다.
“수연아... 오랜만이네...”

 


 

 

 


39. 낙화 (2)
수연이 역시 어색한 표정과 목소리로 형우에게 답했다.
“그래... 그동안 잘 지냈니?”
“응...”
성대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자아~ 자! 이제 들어가야지! 가만히 추운데 서 있으려고 온 거야? 대혁이가 어떤지 궁금하지도 않아? 다들 날 따라와.”
“그래, 얼른 들어가자! 여긴 너무 춥다!”
은혜는 형우의 팔짱을 단단히 끼고 병원 안으로 들어가며 수연이를 무섭게 쏘아보고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형우는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거의 끌려가듯 발걸음을 옮겼다. 정희는 그런 은혜의 모습에 기가 막혔지만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수연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기가 막히네. 하핫! 수연아, 어서 들어가자!”
“알았어...”
성대는 병원 안내 데스크 앞으로 다가가 성대가 입원해 있는 병실의 위치를 물은 뒤 일행에게 다가와 말했다.
“지금은 응급실에서 나와 중환자실로 옮겨졌대.”
“응급실은 아니라니 그나마 다행이다. 몇 호에 입원해있대?”
“504호.”
중환자실까지 가는 길은 수연이에게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모두들 말이 없었다. 복도는 들어오는 빛이 적어 어두웠다. 벽을 통해 울리는 발자국 소리, 수연의 옆쪽으로 급히 옮겨지고 있는 병상과 그 위에 초점 없는 눈빛으로 누워있는 깡마른 노인의 모습. 그 노인의 얼굴위로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졌다. 모든 것이 수연이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중환자실 안에 누워있을 대혁이의 모습을 보기가 너무 두려웠다.
“여기군.”
병실 문 앞에는 여러 이름들이 쓰여져 있었다. 그 이름 중에는 박대혁이라는 이름도 선명하게 쓰여져 있었다. 성대는 무거운 표정으로 중환자실의 문을 열었다. 문틈을 통해 밝은 빛이 새어나와 수연이의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수연이는 눈을 가리며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병실 안에는 대여섯명 정도의 환자가 누워있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노인이었기에 대혁이를 알아보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형석이는 곧바로 대혁이를 발견하고 놀라서 소리쳤다.
“대혁아!”
침대위에 대혁이는 팔과 다리가 깁스로 고정된 채 머리와 목은 붕대로 싸매어져 있었다. 언뜻 보아도 머리를 많이 다친 듯 보였다. 모두들 안타까움에 말없이 누워있는 대혁이만 지켜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병실의 문을 열고 그들에게 다가와 물었다.
“저기... 어떻게 오셨나요?”
성대는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대혁이의 동아리 친구들입니다. 어제서야 대혁이 소식을 알게 되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대혁이는 좀 많이 나아 진건가요?”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힘없이 말했다.
“이렇게들 찾아와줘서 정말로 고마워요. 저는 대혁이의 형이에요. 안타깝지만 대혁이는 지금 보기보다는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아요. 사고를 당할 때 높은 곳에서 머리부터 떨어져서 다른 곳보다도 머리를 크게 다쳤어요. 다행히 응급조치가 빨리 되어서 위험한 고비를 넘기긴 했는데 아직도 의식을 회복 하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의식이 회복되는 기간이 언제 일지를 모른다더군요. 잘못되면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고... 그냥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는 중이에요.”
“대혁아...”
다들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대혁이의 형의 말에 할말을 잃고 한숨만 쉬었다. 성대는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그러면... 더 이상은 상태가 나빠지지 않겠지요?”
그는 대혁이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위기를 넘기고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넘어왔으니 더 이상 나빠지지는 않겠죠. 아니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겠죠...”
모두들 말없이 누워 있는 대혁이를 바라보며 안타까워 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불과 여름까지만 해도 같이 동아리 방에서 연습하고 때로는 같이 수업을 듣던 대혁이가 운이 나쁘면 식물인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전혀 믿겨지지 않았고 도저히 납득할 수도 없었다. 그저 한참을 바라만 보다 병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성대는 병실을 나서며 대혁이의 형에게 1학년 동아리 부원들의 전화번호가 모두 적혀 있는 쪽지를 하나 건넸다.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혹시 대혁이에게 다른 일이 벌어진다면 이 전화번호 중에서 아무 번호든 좋으니 꼭 연락을 주십시오.”
대혁이의 형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에요. 고맙기는 한데 굳이 다들 급한 일 있는데 일정을 쪼개서 부담스럽게 올 필요는 없어요. 그냥 아무 일도 없을 때나 생각나면 들러주세요.”
“에휴... 그런 소리 마시구요. 조만간 다시 또 찾아오겠습니다. 특별한 사항이 있으면 꼭 전화를 주세요.”
“이렇게 다들 와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모두들 착잡한 기분으로 병실을 나왔다. 어두침침한 복도를 한걸음씩 걸어 갈 때마다 이들의 마음도 조금씩 무거워져 가는 느낌이었다. 가까웠던 친구가 이러한 일을 당한 경험은 처음이라 더욱 그러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형우가 걸음을 멈추고 수연이를 돌아보며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수연아... 지금 잠시 나와 이야기 할 수 있니?”
그 말을 들은 수연이는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성대는 살짝 눈치를 본 뒤 짐짓 모르는 척 하며 말했다.
“자~ 다 같이 나가서 햄버거나 먹자. 아까 오면서 보니까 반값세일인데 한정 판매더라. 빨리 안가면 못 사먹는다. 내가 쏠테니 얼른들 따라와~”
“그래 그래! 떨어지기 전에 얼른 가서 사먹자.”
“짠돌이 돼지가 햄버거를 쏜댄다! 이 녀석 맘 바뀌기 전에 얼렁 따라가자!”
모두들 재빨리 그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정희는 멈춰있는 수연이와 빠져나가는 다른 일행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얘들아! 가려면 다 같이 가야지!”
“허허~ 빨리 가야 햄버거를 사먹지! 각하께서는 너무 눈치가 없으셔~”
성대는 정희에게 윙크를 하며 계속 등을 밀어부쳤다. 정희는 뒤돌아 수연이를 계속 바라보았지만 결국 성대에게 떠밀려 자리를 벗어났고 복도에는 수연이와 형우 그리고 은혜만이 남았다.
“수연아...”
형우가 수연이를 부르자 은혜는 형우에게 소리쳤다.
“너는 자존심도 없니? 저 애가 너에게 어떻게 수모를 주었는데 너는 화도 나지를 않니? 그렇게 속도 없니! 아직도 저 못된 애한테 미련이 있는 거니? 너는 내가 보이지도 않니!”
“은혜야... 잠시만 조용히 해줘.”
“너는 어떻게 자존심도...”
은혜는 화가 나서 식식거리다 그냥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수연이는 고개를 숙인 채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형우야...”
형우는 한참을 말없이 수연이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수연아... 언제 어디서든 서로 마주치더라도 대하기 어려워 피하거나 꺼리는 사이가 되지 말도록 하자. 앞으로 기분 좋게 서로 반가운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친구사이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것이 내 마지막 부탁이야.”
수연이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복도에는 수연이의 흐느끼는 소리만이 크게 울려 퍼졌다. 형우는 다시 한번 더 부탁을 했다.
“그래 줄 수 있겠니?”
“알았어... 형우야...”
형우는 은혜를 돌아보며 말했다.
“은혜야... 이제 오해 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수연이를 좋아하지는 않아도 좋으니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줘. 들어 줄 수 있겠니?”
은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를 않았다. 형우는 다시 한번 은혜에게 물었다.
“은혜야, 부탁이야.”
“알았어.”
은혜는 마지못해 대답을 했다. 그리고 나서 형우의 팔짱을 잡아끌며 말했다.
“이제 우리도 돌아가.”
“알았어, 수연아 너도 추운데 조심해서 들어가.”
형우는 가벼운 미소를 띠며 수연이에게 말했다. 수연이도 어색하긴 했지만 가벼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래 형우야... 너도 은혜와 조심해서 들어가렴.”
형우가 은혜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자 은혜도 마지못해 수연이에게 말했다.
“안녕,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
말을 마치고 다시 고개를 돌리고 형우와 함께 복도를 빠져나갔다. 그때 어디선가 정희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오~ 형우 대단한데! 난 형우가 은혜인지 뭐시기 하는 애한테 꽉 쥐어 잡혀있는 줄 알았는데 방금 보니까 실은 형우가 잡고 있었구만. 히히!”
“정희야! 아직 안갔었어?”
“가려다가 무슨 말들을 할지 하도 궁금해서 저기 복도 끝 쪽 화장실문에 숨어서 다 엿들었지롱!”
“얘는!”
정희는 수연이와 복도를 빠져나가며 힘없이 말했다.
“대혁이는 조만간에 깨어 날 수 있겠지? 제발 깨어나야 할 텐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나도 걱정이야... 믿어지지가 않아...”
창밖으로 낙엽이 날리는 모습이 보였다. 바람이 회오리치며 부는 듯 바닥에 쌓인 낙엽들은 뱅글뱅글 돌며 공중으로 솟아오르다 이내 흩어지곤 했다. 정희는 흩어지는 낙엽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정말 겨울이 되어 가나봐...”

 

 

 

40. 진실 (1)
기말고사도 끝나고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지만 수연이는 방학도 별 관계없다는 듯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채 학교로 향하는 지하철에 올랐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있는 듯한 느낌에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은 시간이 너무 촉박하긴 했기만 얼마 남지 않은 사법시험 1차를 준비해보려고 마음을 먹은 터였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보았다. 휴대폰 위로 세연이가 선물로 주었던 펜던트가 반짝였다. 수연이는 그 펜던트에 새겨져 있는 글자를 보자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Carpe Diem... 흐음... 내가 올 한해는 너무 굽은 길로만 다녔던 것 같아. 돌이켜 보면 즐거운 기억의 양이 훨씬 많았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어.’
창밖을 보니 지하철은 행당대역으로 진입 중이었다. 수연이는 휴대폰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열차에서 내리자 차가운 공기가 수연이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맨 처음 입학실때도 돌아오는 길에 바로 이곳에서 혼자 차가운 바람을 맞았었다는 기억이 들자 더욱 씁쓸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혼자야...’
수연이는 가방을 다시 고쳐 매고 역을 빠져나가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역 입구에는 각종 고시 합격자 명단과 이를 축하하는 플랜카드가 이리저리 붙어있었다. 그 명단들을 보자 더 빨리 도서관 의자에 앉고 싶어졌다. 수연이는 도서관을 열람실을 향해 더 빨리 발걸음을 재촉했다.
“우우웅~~”
한참 책을 들여다보며 강의 테이프를 듣고 있던 수연이는 휴대폰 진동소리에 놀라 잠시 카세트를 멈추고 전화기를 꺼내보았다. 전화기에는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누구지?’
배터리를 빼고 다시 공부를 할까 했지만 하는 수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열람실 밖으로 빠져나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혹시 김수연씨 핸드폰이 아닌가요?”
“맞는데... 누구시죠?”
“저번에 한번 본적 있죠? 전 대혁이의 형이에요.”
“아아~ 네. 그런데 어쩐 일로... 혹시 대혁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무슨 일이 생긴건 아니구요. 잠시 만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지금 시간이 되시나요?”
수연이는 내심 하던 공부를 방해받아 그리 내키지는 않았지만 대혁이의 형이 굳이 만나서 이야기 하려는 것은 무언가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고쳐먹으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어디서 뵐까요?”
“수연씨 편한 곳으로 정하세요. 저는 차를 타고 바로 가면 되니까요?”
“지금 학교 도서관에 있거든요. 근처로 와주실 수 있나요?”
“금방 갈수 있어요. 그러면 그리로 가서 전화를 드릴게요. 학교 정문 앞에 커피숍이 하나있는 것 같던데 거기서 기다리셔도 좋고요. 이따가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수연이는 은혜와 그 커피숍에서 있던 일이 생각나 꺼려지긴 했지만 이왕 말이 나온 터라 하는 수 없이 열람실로 들어가 코트를 챙겨 입고 도서관 밖으로 빠져나왔다.
“여기에요! 수연씨.”
대혁이의 형이 먼저 도착해 까페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연이는 다가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제가 괜히 수연씨 도서관에서 공부중인데 급한 시간을 뺏은 것이 아닌가요? 이렇게 불쑥 불러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뭐 드시겠나요?”
“그냥... 커피 마실게요.”
“네, 그러세요. 여기요! 커피 두잔 주실래요?”
곧 커피가 나왔고 대혁이의 형은 잔을 들고 한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러면 식어요. 어서 드세요.”
“네.”
“저번에 병원에서는 너무 겨를이 없어서 제 소개를 못했군요. 저는 박대호라고 합니다. 대혁이랑은 나이가 좀 차이 나서 형이라고 소개를 안하면 다들 당황하시더군요.”
“네... 그런데 대혁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수연이는 대호가 갑자기 성대나 형석이도 아니고 궂이 자신에게 불쑥 연락을 해서 만나자고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대호는 숨을 한번 크게 쉰 뒤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말을 하자니 좀 길어질 것 같네요. 그러니 두서가 없더라도 이해해주세요.”
“네. 말씀 하세요.”
수연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대혁이를 보면 아실 테지만 별로 말수도 없고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에요. 하지만 누구보다도 속정이 깊은 녀석이에요.”
“네.”
말은 별로 없어도 뒤에서 든든히 받쳐주는 타입이라는 것은 수연이도 잘 알고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부터 그렇게 말이 없던 아이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대혁이가 어렸을 때에 어머니께서 유방암 때문에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어요. 그 뒤부터 애가 말도 없어지고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지요. 전 대혁이가 애 같다고 느껴본 적이 별로 없어요. 좀 일찍 철이 든 편이라요.”
“그랬군요...”
수연이는 대혁이의 어머니가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아니 이에 대해 알고 있는 친구들도 없었다.
“어머니는 더워지려고 하는 5월쯤에 돌아가셨어요. 그동안 아무 일없이 건강하셨는데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4달도 안되어 돌아가셨어요. 그때 제가 받은 충격도 컸는데 어린 대혁이가 받았을 마음의 상처는 말할 것도 없겠죠.”
어머니의 상여가 나가던 날 대혁이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집 밖에서 혼자 뛰어놀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아무 것도 모르는 듯 밖에서 이리저리 뛰어놀고 있는 대혁이의 모습을 바라보던 대호의 가슴은 찢어 질듯이 아팠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천진한 표정이었어요. 그런 아이에게 나중에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그리고 저는 고등학생이었는데 갑자기 일을 겪게 되니 그 상황을 견디기 힘들더군요.”
수연이는 대호가 느꼈을만한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저도 고등학교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게다가 대혁이가 어려서 많이 고생하셨겠네요. 어떤 기분이셨을지 이해가 가요.”
“수연씨도 그런 일을...”
대호는 목이 마른 듯 물을 마신 후 다시 이야기를 계속 했다.
“어머니를 실은 꽃상여가 길 밖으로 나왔어요. 요즘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꽃상여를 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그것도 시골도 아닌 서울에서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가시기전에 꽃상여에 태워 보내 달라는 부탁을 하셨대요. 평생을 제대로 된 꽃 한 송이조차 선물로 받아 보지 못하신 게 무척 서운하셨나 봐요. 아버지는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을 듣고 오열하시면서 그렇게 해주겠다 하셨죠. 그리고 지금 돌이켜 생각을 해봐도 정말로 아름다운 꽃상여를 만들어와 어머니를 보내셨어요. 꽃상여가 대문 밖을 나서자 대혁이는 놀던 것을 멈추고 멍하니 꽃상여만 바라보더군요. 대혁이는 아직 어려서 데려가기에는 좋지 않다고 생각한 집안 어른들은 대혁이를 그대로 두고 상여를 매며 길을 나섰어요.”
대호는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날은 동네 사람들이 다들 집에서 몰려나왔어요. 상여 나가는 걸 본지 오래된 터라 신기하기도 했겠죠. 가깝게 지내던 아주머니들의 울음소리가 온 동네를 울렸고 순식간에 동네전체가 어머니의 추모행사장 같이 되어버렸죠. 평생 고생만 하셨지만 마지막 가시는 길은 그 누구도 부럽지 않게 가셨지요.”
수연이는 대호의 말을 듣자 아버지의 일이 생각나 기분이 너무 우울해졌다. 대호는 미안한 듯 수연이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수연씨. 제가 너무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 같네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대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상여를 뒤따라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대혁이가 가만히 서서 멍한 표정으로 꽃상여만 바라보고 있더군요. 저는 그냥 그러다 들어가겠거니 싶어 집안으로 들여보내진 않고 어른들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장지에다 어머니를 묻고 일이 다 끝난 후 초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 보니 대혁이가 아까 서있던 자리에 계속 서있더군요.”
대호는 그런 대혁이의 모습이 당황스러워 달려와 물었다.
“너 아까부터 여기에 계속 서있던 거야?”
“응, 엄마가 타고 간 거 너무 예쁘다. 꽃들이 너무 예뻐...”
대혁이는 멍한 표정으로 길 한가운데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대혁이가 대호를 붙잡고 물었다.
“형아야, 엄마 어디로 간거야?”
“엄마는 저기 하늘나라로 갔어.”
대혁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하늘나라 어디?”
한참을 생각하던 대호는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달 옆에 반짝이는 별 보이지?”
“응, 저거?”
“저건 샛별이라는 건데 초저녁하고 새벽에만 보여 엄마는 저기로 가셨어?”
“정말? 와... 예쁘다.”
대호는 한숨을 쉬며 수연이에게 말했다.
“저는 그냥 애니까 대충 둘러대며 말했던 거죠. 그런데 애는 애인지 제 말을 그대로 믿더군요.”

 


 

 

 


41. 진실 (2)
수연이는 그 말에 어리둥절해져 대호에게 물었다.
“그 말을 믿었다면... 대혁이가 혹시 샛별에라도 간다 했었나요?”
“그런 건 아니구요. 그 이후 대혁이는 초저녁만 되면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곤 했어요. 그리고 들어올 때 마다 어디서 캐왔는지 들꽃들을 캐서 비닐봉지에 담아 들어와 마당에 있던 빈 화분에 심더군요.”
수연이는 초등학교 때 학교 화단에 물을 주던 대혁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의 꽃상여... 그래서 대혁이가 꽃들을 좋아했던 거군요.”
“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유독 꽃들에 관심을 가지더군요. 그것까지는 상관없었는데 그 이후부터 집으로 이상한 편지들이 자주 반송이 되어오는 일이 잦았어요. 살펴보면 모두 대혁이가 어머니한테 보낸 편지더군요. 받는이의 주소가 샛별이고 받는 이가 엄마라고 적혀있으니 도착 할 리가 없죠. 편지를 뜯어서 읽어보면 언제쯤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느냐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죠. 그리고 대혁이는 꽃상여를 보고 어머니가 꽃을 타고 하늘로 간 거라 생각했는지 돌아올 때 까지 꽃을 잘 키우고 있겠다고 써놓았더군요.”
“저런...”
수연이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한숨을 쉬었다.
“어딜 다녀오느냐고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아 속상해서 혼을 내니 그제서야 울면서 말을 하더군요. 초저녁만 되면 낮에 써놓은 편지를 집 근처 우체통으로 가서 부치고 왔던 거였어요. 내가 어린애한테 괜한 소리를 했나 해서 마음이 아팠죠. 저도 무척 속상했고요. 저는 대혁이에게 엄마는 너무 멀리 떠나서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시지 않을 테니까 다시는 이런 편지를 쓰지 말라고 소리치며 화를 냈었어요. 그 이후로는 편지를 보내지 않더군요. 그리고 말 수도 적어지고 멍하니 있는 일이 잦아졌어요. 하지만 어디서 캐오는지 몰라도 이것저것 들꽃들을 많이 캐와 화분에 심고 모자라면 우유팩에 심는 일은 전보다 많아졌어요. 그것 까지는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더군요.”
“네...”
“그게 언제였더라...”
무언가 기억을 해내려는지 눈을 감고 생각하던 대호는 생각이 난 듯 말했다.
“맞아... 대혁이가 중학교에 입학 할 무렵쯤이니 아마 3월초였을 겁니다. 그때 그 녀석,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혼자 웃으면서 왠 상자를 포장하고 있더군요. 선물 상자 같았어요. 평소에 잘 웃지도 않는 녀석이라 하도 신기해서 왜 웃느냐 물어보니 대답대신 싱겁게 웃기만 했어요. 다음날 저에게 그 상자를 건네며 말하더군요. 학교에 가느라 시간이 없으니 이걸 대신 부쳐 주면 안되겠느냐고 말이죠. 상자에는 받는 이의 주소와 이름만 적혀있고 보내는 이를 적는 칸은 비워 놓았더군요. 그래서 왜 받는 이만 적었냐고 묻자 그냥 말없이 학교로 가더라구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냥 대혁이의 부탁대로 해주었습니다. 저는 그냥 속으로 짝사랑 하는 여자애한테 보내는 화이트데이 선물이겠거니 했어요.”
“으음...”
수연이는 대호가 왜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지에 대해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문득 벽장에 먼지가 쌓인 채 놓여있던 낡은 선물상자가 떠올랐다. 대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다음해 3월에도 똑같이 선물 상자를 포장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표정이 매우 우울해 보였어요. 그래서 걱정이 되어 왜 그런가 물어도 대답도 안하기에 대답을 안하면 소포를 부쳐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그때서야 낙심한 표정으로 말하더군요. 그 애가 전학을 갔다고 말이죠.”
수연이는 놀라 대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기요.. 혹시?”
“죄송해요. 아직 더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 남아서요.”
대호는 수연이의 말을 완곡히 가로 막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전학을 갔는데 작년과 똑같은 주소를 적어서 보내면 그 애가 어떻게 받을 수 있냐고 핀잔을 주었어요. 어디로 전학 갔는지 이사 간곳의 주소는 알고 있는지 물었지만 전혀 모른다고 고개를 흔들더군요. 그래도 그 주소로 부쳐 달라 말하더군요.”
- 언젠가는... 언젠가는 도착할 거야. -
“그렇게 저는 몇 년 동안 제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었어요. 매년 그 주소로 선물상자를 소포로 보냈어요. 제가 대혁이를 보았을 때는 꽃과 3월에 보내는 소포, 그리고 그냥 한번 쳐보라고 가져다 준 기타말고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녀석처럼 보였어요. 당연히 학교성적도 별로 좋지 않았고 또 따로 가깝게 지내는 친구도 없는 것 같았어요. 그저 집에 오면 기타에 매달렸고 컴퓨터로 뭘 하는지는 모르지만 음악에 매달리는 것 같았어요. 집안 마당의 화단에는 어디선가 캐와 심어놓은 들꽃으로 넘쳐났고 매년 3월초만 되면 들떠서 혼자 웃고 다니고... 제 동생이긴 하지만 정말 이해 할 수 없는 녀석이었어요. 무척 걱정이었죠. 게다가 고등학교 때는 좋지 않은 사건이 일어나서 학교를 자퇴까지 하는 일이 벌어졌고요. 막말로 사람구실이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어요. 자퇴를 한 이후에는 거의 방에만 처박혀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대호는 목이 마른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갑자기 이 녀석이 저에게 공부를 하겠다며 책을 사달라더군요. 왜 갑자기 공부냐며 이유를 물으니까 한다는 말이 대학에 들어가면 그 애를 만날 지도 모른다더군요. 저는 속으로 어이가 없어서 일단 검정고시부터 보고 합격하면 공부하게 해주겠다고 말을 했어요. 그런데 얼마 후에 바로 합격증을 받아오더군요. 그것도 아주 높은 성적으로요. 저는 놀라서 그 이후에 그 녀석이 사달라는 문제집이며 책들을 모두 사다줬어요. 그러니까 집에서 빈둥거리며 멍하니만 있던 녀석이 무섭게 공부에 매달리기 시작했어요.”
“그래서요?”
수연이는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생각했다.
‘설마... 나 때문에? 그럴리가!’
“그래서 무슨 과를 가고 싶냐고 물어도 가고 싶은 과가 없다고 그러더군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러면 무엇 하러 공부를 하냐고 물어도 그 녀석은 말도 없이 그저 방에 틀어박혀 공부에만 집중했어요. 그리고 나서 수능 시험을 보았는데 그 녀석 성적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성적표를 받아오더군요. 그런데 문제는 정작 성적을 잘 받아오고도 어느 대학에 어떻게 원서를 써야 할지도 전혀 생각조차 안 해놓았다는 거였어요. 답답했죠.”
대호는 말을 많이 해서 입이 타는 듯 계속 물을 마셔가며 이야기를 했다. 그는 마신 후 창밖의 학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게 수능 시험 결과가 나오고 나서 며칠 뒤에 갑자기 이 학교 법대에 원서를 쓰겠다고 말하더군요. 왜 굳이 이 학교 그리고 다른 과도 아닌 법대에 원서를 쓰려는지 물었지만 이유는 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원서도 딱 이 학교 한군데에만 집어넣었어요. 걱정이 되긴 했지만 다행히 무난하게 합격을 했어요. 그때 정말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수연이는 너무 놀랍고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모두... 저 때문에 벌어진 일들인가요?”
대호는 그에 대한 대답 없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입학 후 첫 수업을 듣고 온 대혁이의 표정이 그렇게 밝을 수가 없었어요. 저도 그 표정을 보고 기분이 좋아져서 이유를 물으니 그 녀석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 드디어 그 애를 다시 만났어! -
수연이는 모든 일들이 당황스러워 머릿속이 복잡했다. 도대체 어떻게 받아 들여야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 역시 그 말을 듣고 반가워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어요. 물으니 그제야 기분이 좋은 듯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 해주더군요.”
‘사실은 별 생각 없이 그 애 이름을 가지고 블로그를 검색했는데 우연히 그 애의 블로그 홈페이지를 발견했어. 그 애가 이 학교에 원서를 쓴다는 글을 게시판에서 보았거든. 그래서 다른 생각안하고 바로 이 학교에 원서를 접수 했어.’
“매년 3월초에 그랬던 것처럼 대혁이는 또 선물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화이트데이날 매우 즐거운 표정으로 학교에 갔어요. 저에게 대신 부쳐달라고 상자를 건네지 않은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직접 가방에 담아서 간 듯 했어요. 저는 그 아이 어디가 얼마나 좋아서 그렇게 몇년을 기다리고 따라가는거냐고 물었어요. 에전에는 물어도 대답을 안했는데 그 때는 처음으로 제게 말을 해주더군요."
- 그 애는 엄마를 많이 닮았어... -
"하지만 그날 저녁 시무룩한 표정으로 집에 들어왔어요. 무슨 일이 있었느냐 혹시 그 애한테 거절이라도 당한 거냐고 물어도 아니라는 듯 고개만 흔들었어요. 그러더니 가방에서 선물을 꺼내어 매년 그전에 보내던 주소를 그대로 적어서 소포를 발송 달라고 부탁했어요.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전 그냥 동생이 말한 부탁을 그대로 들어주었어요.”
수연이는 화이트데이날 형우에게 선물 상자를 받았던 일이 떠올랐다. 모두들 놀려대며 즐거운 듯 웃었고 대혁이도 그 모습을 보며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짓고 있던 모습이 생각났다. 수연이는 대호가 이야기하는 모든 일들이 믿어지지 않고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 일이 있고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에요. 그 녀석을 데리고 둘이 같이 술을 마신일이 있었어요. 마침 동생이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은 터라 그 녀석에게 몇 급을 받았냐고 물으니 1급을 받았고 바로 입대 신청을 했다고 이야기 하더군요. 저는 뭐가 급해서 1학년도 마치지 않고 군에 가려고 하느냐고 물으니까 이렇게 말하며 술잔만 계속 비웠어요.”
- 더 이상 그 애의 얼굴을 보기가 힘이 들어서 그래... -
수연이는 대호가 한 이야기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때 대호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수연이에게 건네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혁이가 추락하면서도 끝까지 손에서 쥐고 있던 물건입니다.”
건네받은 것은 훈련소에서 수연이와 대혁이가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정희가 편지를 보낼때 같이 동봉해 보낸 사진인 듯 했다. 사진은 구겨졌다가 펴진 듯 이리저리 굴곡이 져있었다. 수연이는 끝내 테이블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흑...”
“사실 저도 이런 이야기를 수연씨에게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수연씨를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옆에서 계속 대혁이를 지켜봐온 저로써는 동생의 그런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대혁이가 지금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받아들이시기는 힘들겠지만 형으로써의 제 마음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수연이는 대호를 바라보며 절규했다.
“결국은 저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대혁이도 그렇게 다치게 된 건가요? 정말 그런 건가요! 흐흑... 제가 뭐가 대단하다고 다들 저 때문에 힘들어 하는거죠! 제가 뭐가 대단하다고... 흐흑!”

 


 

 

 


42. 꽃이 전하는 말 (1)
대호와 이야기를 나눈 후 까페밖으로 나온 수연이는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며 한숨만 쉴 따름이었다. 그때 수연이의 뺨에 눈송이 하나가 내려앉아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와~ 눈이다!”
“이야! 첫눈이다. 진짜 눈이 내리네!”
수연이의 앞으로 지나치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들 즐거워 보였다. 저마다 지인들이나 연인들에게 첫눈의 소식을 알리려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것 같았다. 수연이는 쓴 웃음을 지으며 가방을 챙기기 위해 도서관으로 향하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차피 열람실은 24시간이니 챙겨오지 않아도 상관없겠지.’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수연이에게 뒤늦게 까페에서 나온 대호가 말을 걸었다.
“수연씨 어디로 가실거에요? 바로 도서관으로 안가실건가요?”
“부탁이 있는데... 괜찮으시다면 저 차에 좀 태워 주실수 있나요?”
“네. 데려다 드릴 테니 말씀하세요. 어디로 가실건가요?”
“상계동이요.”
눈은 점점 많이 내려 도로를 질퍽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수연이를 태우고 차를 몰고 가던 대호가 말했다.
“혹시 예전에 살던 집으로 가보려는 건가요?”
“네...”
수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한참을 가던 중 수연이가 창 바깥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세워 주시겠어요?”
“저기 가로수 옆 골목 말인가요?”
“네.”
대호가 차를 세우자 수연이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며 말했다.
“고마워요. 눈이 와서 길도 안 좋은데 이렇게 데려다 주셔서 고마워요.”
“수연씨가 다녀올 때 까지 기다리고 있을게요. 날씨도 좋지 않은데 혼자서 집으로 돌아가기가 마땅치 않을거에요.”
수연이는 말도 안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무슨... 여기까지 데려다 주신 것만도 고마운데 그런 수고를 끼쳐 드리게 할 수는 없어요. 걱정 안하셔도 되니 돌아가세요.”
대호는 빙긋이 웃으며 수연이에게 말했다.
“저도 그 선물들이 원래 받아야 사람에게 잘 도착하는가 보고 싶어서 그래요. 그러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도...”
“괜찮으니 다녀오세요. 저 때문에 빨리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연이는 잠시 망설이다 미안한 듯 대호에게 고개를 숙이며 골목으로 향했다. 대호는 수연이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늦게 도착한건 아니겠지...”
골목 안을 걸어가던 수연이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몇 발자국 뒷걸음질을 했다. 그곳에 낯익은 대문이 보였다.
“정말 오랜만이네...”
도색은 다시 되어있었지만 문고리에 매달린 사자모양은 그대로였다. 다만 문패에는 아버지의 이름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고 수연이는 벨을 눌렀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벨소리는 오래전에 들었던 탁한 전자음 그대로였다. 스피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이토록 길었던 적이 없던 것 같았다. 그때 스피커로 인터폰의 연결 소리가 들렸다.
“딸깍! 누구세요?”
“네, 안녕하세요. 저는...”
수연이는 뭐라고 자신을 소개해야 할지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스피커로는 나이가 약간 있는 듯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수연이의 반응을 재촉했다.
“누구시라구요?”
“저는 예전에 이집에서 살았던 사람이거든요? 뭣 좀 알아볼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기다려보세요. 딸깍!”
스피커로 인터폰을 끊는 소리가 울렸고 곧이어 문이 열렸다. 수연이는 천천히 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록 시간이 많이 흘러 마당의 풍경은 예전과 달랐지만 담장 옆의 감나무만은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감나무 가지에는 아까부터 내리던 눈이 쌓여서 반짝였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집 주인인 듯한 아주머니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잠시 실례 할게요.”
“어떻게 오신건가요? 예전에 이집에서 살았다구요?”
“네, 여기서 살다가 한 7년 전쯤에 이사를 갔어요.”
“아아... 기억이 나는 것도 같은데... 일단 추운데 안으로 들어와요.”
수연이는 주인아주머니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왔다. 비록 벽지의 색깔들이 달라지긴 했지만 모두 익숙한 광경이었다.
‘예전과 바뀐 게 별로 없네...’
한참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있을 때 방에서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하나가 문을 열고 나와 수연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세요?”
그러자 아주머니는 핀잔을 주며 말했다.
“예전에 여기서 살았던 분이래. 그리고 지영이 너 이제 곧 고3인데 들어가 공부 안할 거야? 어서 들어가!”
지영이라는 이름의 그 여학생은 아주머니의 말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수연이에게 다가와 물었다.
“혹시 이름이 김수연... 아닌가요?”
“맞아요, 그런데 어떻게...”
수연이는 놀란 눈으로 지영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지영이는 주인아주머니를 보며 뭐가 그리 좋은지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엄마! 맞잖아! 언젠가는 분명히 찾아올 거라고 했잖아! 언니 어서 들어와요! 안 그래도 해줄 이야기가 많아요!”
수연이는 그런 지영이의 호들갑이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이야기를 들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지영이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온 수연은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예전에 이방을 썼었는데...”
“그래요? 지금은 많이 바뀌었죠?”
“그러네요. 많이 바뀌었네요.”
“저한테 존댓말 쓰지 말아요. 제가 더 듣기 부담스러워요. 그냥 말 놓으셔도 되요.”
“그래도 될지...”
“네~ 서있지 말고 앉으세요.”
지영이는 수연이를 바라보며 씽긋 웃었다. 수연이는 지영이의 웃는 모습이 정말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런 웃음을 가졌으면 좋을텐데...’
“찾았다!”
서랍을 뒤지던 지영이는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수연이의 앞에 그 상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매년 화이트데이날 전후쯤 되면 항상 선물상자가 집으로 배달되어 오곤 했어요. 안타깝게도 그 안에 들어있던 건 모두 제가 다 먹어버려서 드릴게 없네요. 헤에~”
지영이는 수연이에게 미안한 듯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수연이도 그런 지영이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 예쁜 것들은 몇 년 동안 이 상자에 모두 챙겨 놓았어요.”
지영이는 상자를 열어보였다. 그 안에는 사탕이나 초코렛을 장식했었을 포장이나 악세사리같은 것들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예쁘다 생각되는 것들은 모두 이 안에 담아 놓았어요. 처음 이 선물상자를 받았을 때에는 연락을 해서 되돌려 드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보낸 사람의 이름이나 주소도 적혀 있지 않고 어디다 연락을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그러다보니 그냥 얼렁뚱땅 제가 챙기게 되었죠.”
“그랬구나...”
“처음에는 그냥 잘못 배달 온 거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요. 그런데 다음해에도 배달되어 오고 또 그 다음해에도 오고... 그렇게 올해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6번이나 선물 상자가 배달 되어왔어요. 매년 화이트데이날 선물걱정은 없었죠. 헤헤~”
지영이의 익살스러운 표정에 수연이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언젠가는 언니가 찾아오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제 나름대로 중요하다 생각했던 것들을 모두 이 안에 담아서 보관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제서야 제대로 주인을 만나게 되었네요. 선물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아나요?”
수연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영이는 감탄을 하며 손뼉을 쳤다.
“짝짝! 정말 대단해요! 누군가요? 어떤 사람이에요? 저도 이런 선물을 받아보았으면 좋을 텐데... 언니 너무 부러워요~”
수연이는 상자 속을 뒤적거리다 무언가를 꺼내 집어 들었다. 사진이었다. 수연이는 얼마 전 벽장을 열 때에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선물상자가 생각이 났다. 그 안에 들어있던 사진처럼 이 상자 속에도 꽃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들어있었다.
“맞다! 중요한 걸 잊어 깜빡했네요. 그 사진은 편지에요.”
“편지?”
수연이는 사진의 앞뒤를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글씨도 보이지 않았다. 수연이는 어리둥절해 하며 지영이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편지라는 거니?”
지영이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저도 그동안 몰랐는데 얼마 전에야 이 사진들이 편지라는 확신이 생겼어요.”
여기에 실린 꽃 사진들중 물망초와 튤립을 제외하고는 제가 직접 돌아다니며 담은 사진들입니다.
개인적으로 물망초는 직접 찍고 싶었던 꽃인데 작년에는 저랑 인연이 닿지 않더군요.
하는수없이 다른곳에서 물망초꽃 사진을 퍼왔습니다.
튤립사진역시 제가 찍은 것보다는 퍼온게 예뻐서 퍼온사진을 썼습니다.

 

 


43. 꽃이 전하는 말 (2)
지영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꽂이로 다가가 책 하나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 책을 펼치며 말했다.
“사진들을 모두 다 꺼내 바닥에 펼쳐 주시겠어요?”
“그냥 펼치면 되는 거니?”
“사진 뒤에 보시면 아래쪽에 자그맣게 숫자를 적어놓은 것이 보일거에요. 그 순서대로 바닥에 놓아주세요.”
“숫자?”
살펴보니 지영의 말대로 숫자들이 적혀있었다.
“이 숫자는 뭐니?”
“각각 선물이 도착한 순서에요. 1번이 맨 처음 도착한 선물이고 6번이 올해 도착한 선물이에요.”
“아...”
수연이는 차례대로 사진을 나열하며 꽃이 찍힌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처음은 해바라기 그다음은 팬지 그 다음은... 자주 보았던 꽃이긴 한데... 국화인가,,,”
“쑥부쟁이에요. 여름에서 가을이 넘어가기 전에 피는 꽃이에요. ”
지영이는 책을 보여주었다. 그 책은 식물도감이었다.
“아... 이게 쑥부쟁이구나. 그다음은...”
“다음은 물망초에요.”
“와~ 꽃에 대해 많이 아네?”
“모두 이 사진들 덕분에 꽃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거에요. 그래서 이렇게 도감도 하나 구입을 했구요.”
지영이는 도감을 들어 보이며 씽긋 웃었다.
“그다음은... 이것도 정말 자주 본 꽃인데.”
“그건 달맞이 꽃이에요.”
“아아! 이게 달맞이 꽃이구나.”
“아마 길에서 자주 보셨겠지만 피어 있는 건 별로 못 봤을거에요. 이름 그대로 해가진후 밤에만 피거든요. 간혹 이거와 비슷한데 낮에 피어있는 꽃을 보았다면 아마 애기똥풀이라는 꽃이었을거에요.”
“그렇구나... 그리고 마지막은 튤립.”
“튤립이긴 한데 빨간 튤립이란 사실이 더 중요해요.”
“그건 무슨소리니?”
“이따가 제가 드릴 책을 살펴보시면 알거에요.”
수연이는 나열되어 있는 꽃사진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편지라는 거니?”
“잠시만요.”
지영이는 다시 책꽂이로 다가가 얇고 작은 책 하나를 꺼내와 수연이에게 건넸다.
“꽃말모음?”
“네, 그 책이 열쇠에요. 보내신 분의 의도가 제 생각과 같다고 확신 할 수는 없지만 전 이게 편지의 내용이라고 생각해요. 한번 직접 찾아보세요.”
책을 건네받은 수연이는 꽃말모음 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해바라기는 그리움... 그리고 팬지는...”
“나를 생각해 주세요~”
지영이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수연이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푸훗! 쑥부쟁이는... 으음, 여기있네... 기다림이고 물망초는...”
“나를 잊지 마세요~”
“달맞이꽃은 말없는 사랑 그리고 튤립은...”
“그냥 튤립은 안 되고 사진에 있는 그대로 빨간 튤립이어야만 해요!”
“그래... 빨간 튤립은...”
수연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책을 바닥에 놓쳤다. 그리고 무거운 표정으로 지영이에게 물었다.
“이게 올해 배달 되어온 선물에 들어있던 사진이라고 했니?”
지영이는 수연이의 갑작스런 표정변화에 당황스러운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수연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다리에 힘이 빠져 비틀거렸다.
“언니, 괜찮아요?”
“응... 괜찮아.”
수연이는 일어나 밖으로 나가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언니, 이거 챙겨 가셔야죠!”
지영이는 재빨리 사진을 상자에 담아 뚜껑을 닫은 뒤 수연이에게 건넸다.
“그래, 고마워 지영아. 잠깐... 라일락의 꽃말은 무엇인지 알려주겠니?”
“잠깐만요!”
지영이는 바닥에 놓인 꽃말모음책을 집어 들어 찾기 시작했다.
“라일락은.. 라일락은... 첫사랑의 감정이에요. 그런데 라일락은 왜요?”
수연이는 상자를 챙겨 현관문을 나서며 말했다.
“내가 맨 처음 받았던 편지야. 지영아 고마워!”
“언니! 엄마가 따뜻한 차를 타놓으셨어요! 추운데 드시고 가요!”
대문을 열며 빠져나가던 수연이가 뛰어가며 소리를 쳤다.
“괜찮아! 고맙지만 가볼 데가 있어서 그래! 다음에 꼭 들를게!”
“언니! 언니!”
지영이는 수연이를 뒤따라 달려가 붙들며 쪽지를 건넸다.
“제 휴대폰 번호를 급하게 적었어요. 저도 이후에 언니에게 무슨일이 생길지 너무 궁금해서 그래요. 그러니 전해주실 만한 이야기가 있으면 제 핸드폰으로 꼭 전화를 주세요. 부탁이에요.”
“그래, 알았어.”
수연이는 다시 눈속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지영이는 멀어지는 수연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상자를 들고 눈 속을 뛰어가면서 멀어지는 수연이의 뒷모습이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하.. 죄송하지만 대혁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데리고 가주실 수는 없나요?”
급하게 뛰어온 수연이는 숨을 헐떡이며 기다리고 있던 대호에게 말했다.
“일단 추운데 차안으로 들어오세요.”
“하아... 네!”
수연이가 문을 열고 차안에 들어오자 대호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선물 잘 받았나요?”
“네... 제게 도착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네요.”
대호는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정말 오래 걸렸어요.”
“지금 바로 대혁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가주실 수 있나요?”
“아직은 안돼요.”
대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황한 수연은 이유를 물었다.
“왜 안 된다는 거지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이건 보여드리지 않으려 했는데...”
대호는 뒷자리에서 무언가를 집어들어 수연이에게 건넸다.
“이건 뭐죠?”
“대혁이가 훈련소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저에게 맡긴 수연씨 선물이에요.”
수연이는 그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뜨며 포장을 뜯으려 했다. 그러자 대호는 그런 수연이의 손길을 막았다.
“왜 막으시는 거에요?”
“사실 대혁이는 이걸 다 만들어 놓고도 어쩐 일인지 그냥 집에다가 보관만 해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왜 보내지 않으려하냐고 물어도 이유는 말을 하지 않은 채 그냥 보내지 말아달라는 부탁만 반복 하더군요. 그래서 아까 까페에서 수연씨를 봤을 때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것을 집에서 챙겨 나오기는 했지만 전혀 언급을 하지는 않았어요.”
“아아...”
“수연씨가 잠시 다녀오시는 동안에 이것을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어요.”
“네에...”
“제가 내린 결론은 대혁이가 이 선물을 만들었다면 반드시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저는 이 안에 들어있는 게 뭔지 수연씨가 방금 전에 보고 나오신 게 뭔지는 전혀 모릅니다. 다만 수연씨가 예전에 살던 집에 다녀오면서 무언가 심경에 큰 변화가 있었을 거라는 것만 짐작만 하고 있어요.”
수연이는 대호의 말에 그저 말없이 한숨만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말을 멈추고 수연이를 바라보던 대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일단 수연씨의 집으로 데려다 드릴게요. 그리고 집에서 그 상자를 열어보세요. 전 그게 판도라의 상자와 같을지 모른다고 생각해요. 수연씨가 어떤 생각과 결정을 내리실지는 모르겠어요. 집으로 돌아가 열어보신 후에 마음을 정리하고 병원에 가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 마음의 정리라뇨? 그게 무슨 소리죠?”
“담배를 피워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대호는 한숨을 쉬며 차창을 살짝 열은 뒤 담뱃불을 붙였다.
“다행히 목숨에는 별 이상이 없지만 생각보다 의식 회복이 너무 느려요. 병원에서도 깨어나느냐 깨지 못하느냐의 확률을 반반으로 잡더군요. 깨어나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 식물인간의 상태가 지속될 수도 있고요. 일단 집으로 모셔다 드릴 테니 집에서 상자를 확인해 보세요.”
대호는 말을 마친 뒤 반 정도 태운 담배를 재떨이에 쑤셔 넣고 페달을 밟았다. 눈이 그 사이에 많이 쌓인 듯 자동차의 바퀴가 잠시 헛도는 느낌이 들었으나 곧이어 천천히 움직였다. 수연이의 마음속은 불안함, 기대감등이 끝임 없이 교차하며 평정심을 찾기가 어려웠다. 자신 앞에 놓인 마지막 선물상자는 무엇을 이야기 해줄지 그리고 자신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모든 것들이 미궁에 빠진 듯 캄캄하게 느껴졌다.
배경음악은 제가 작곡한 '창백한 푸른점'이라는 연주곡입니다.

 

 


44. 부치지 못한 편지 (1)
날씨는 눈 때문에 흐려져 평소보다 일찍 어두워졌다. 대호의 차에서 내린 뒤 집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수연이는 자신이 안고 있는 상자 2개를 바라보며 불안한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상자 안에서 나를 기다리는 건 무엇일까...'
아까 대호가 건네준 상자에는 자신의 이름석자 외에 아무런 글자도 적혀있지 않았다. 반짝거리는 선물상자위로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있던 대혁이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은 더욱 불안해졌다.
"딩동! 딩동!"
집 앞에 도착한 수연이는 벨을 계속 눌러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들 아직 안 들어왔나...'
하는 수 없이 현관문을 열쇠로 따고 집안으로 들어온 수연이는 깜깜해진 거실의 불을 켠뒤 자기 방으로 들어와 대호에게 건네받은 선물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옷장을 바라보았다. 가려진 옷장 뒤에 숨겨진 벽장 그리고 먼지에 쌓인 채 놓여있던 선물상자를 떠올리며 천천히 선물의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맨 처음 선물... 그리고 마지막 선물...'
포장을 걷어낸 뒤 드러난 상자의 뚜껑을 보자 마음이 두근거렸다. 수연이는 잠시 심호흡을 길게 한 뒤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끼이익!"
상자의 뚜껑은 너무 꽉 닫혀 있어서 잘 열리지 않았다. 수연이는 뻑뻑하게 닫혀있던 상자의 뚜껑이 내는 소리가 마치 얼마 전 벽장을 열었을 때 문틈에서 나던 소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겹게 상자를 열은 수연이는 뚜껑을 들어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들여다 보았을 때 가장 먼저 수연이의 눈에 띈 것은 또 다른 꽃의 모습이 담겨진 사진이었다.
‘무슨 꽃이지?‘
수연이는 꽃사진을 아무리 바라보아도 무슨 꽃인지 알 수 없어서 사진을 꺼내 그냥 방바닥에다가 내려놓았다. 사진을 들추니 상자의 안에는 각종 사탕과 초코렛들이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자그마한 선물상자 하나와 편지로 보이는 무언가가 사탕과 초코렛들의 사이에 묻혀져 있었다.
‘이것들은 뭐지?’
수연이는 아까 지영에게서 이전에 받았던 선물상자에 사진 말고 다른 편지가 들어있다는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 선물상자에는 사진뿐만 아니라 편지 그리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조그만 선물상자가 같이 담겨져 있었다. 수연이는 그 조그만 상자를 들어 흔들어보았다. 그러나 흔들어서는 안에 들은 게 무엇인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그래서 포장을 열어 확인을 하려다 마음을 고쳐먹고 편지를 먼저 집어 들었다. 그리고 봉투를 열어 편지지를 꺼내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수연이 에게
내일 훈련소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잠이 오지가 않아.
이제 내일이 아니네.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이 훨씬 넘었어.
반나절후면 난 훈련소안에 들어가 있겠지.
그곳은 어떤 모습으로 날 맞이할까...
너무 오랫동안 망설이다 처음으로 수연이를 향해 펜을 들었어.
하지만 펜을 들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떨려서 생각이 나지를 않아.
이렇게 펜을 들고 편지를 쓰는 내 모습이 네 앞에서 발가벗고 서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부끄러워.
네 앞에서도 몇 번이나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입을 열면 괜히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오고 또 실수를 할 것만 같아 망설이다 말도 먼저 걸어보지도 못하고... 네가 앞에 있지도 않은데 편지에서 까지 나는 이러고 있어. 바보 같지?
지금 쓰고 있는 이 편지를 수연이가 읽게 되는 날이 올까?
아니... 내가 그동안 보낸 모든 것들이 수연이에게 도착할 날이 오기는 오는 걸까...
비록 메아리 없는 외침이긴 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되돌아오리라는 믿음.
그 믿음은 내가 힘들 때 지탱해주는 힘이었어. 그래서 난 수연이에게 고마워.
하지만...
이제는 너를 보기가 너무 힘들어 그리고 미안해.
화이트데이때 네가 들고 가던 선물이 형우가 아닌 내가 준 선물이었더라면...
엠티 때 진실게임의 주인공이 형우가 아닌 나였더라면...
축제의 무대에서 형우가 서있던 자리가 나였더라면...
너의 옆에 마련된 자리의 주인공이 얼마나 나이기를 바랬나 몰라. 집에 홀로 틀어박혀 축제 때 너를 위한 곡을 만들면서도 그 가사의 주인공이 내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홀로 괴로움에 몸을 흔들다 고개를 떨구며 머리를 쥐어뜯곤 했어.
이런 내 모습이 너무나 싫었어. 어느 순간 이건 내가 널 생각해온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집착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더 이상 너를 그런 마음으로 바라보는 건 형우와 너에게도 매우 미안한 일이야. 그리고 나에게도 너무나 힘든 일이야. 힘든 건 나 하나면 충분해.
그래서 이렇게 잠시 떠나 있으려고 해. 내가 학교에 돌아올 때쯤에는 너도 졸업을 했거나 마지막 학년이라 굳이 찾지 않는 이상 너를 볼일이 없겠지...
다시는 볼 수 없겠지...
나는 네가 이 편지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이렇게라도 나 혼자 써놓지 않으면 홀가분한 기분으로 훈련소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 미안해... 아마 너에게 이 편지가 가는 일은 없을 거야.
이렇게라도 나 혼자 이야기를 하니 한결 편안해지네. 하하~
편지를 쓰다 문득 어렸을 때 보았던 은하철도 999에서 메텔이 마지막으로 철이에게 남겼던 대사가 떠올랐어.
‘나는 시간 흐름 속을 여행하는 여자. 나는 너의 추억 속에 있는 여자. 나는 너의 어린시절 마음속에 있던 청춘의 환영.’
오래전에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 할 수 없었어. 그런데 지금은 메텔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아. 너무도 잘 알 것만 같아...
너무 오랫동안 꿈을 꾸어 왔어. 너무도 오래...
꿈을 꾸기 전으로 되돌아가기엔 너무 늦었고 끝마치기에는 슬프지만...
난 이제 그 꿈에서 깨어나야만 할 것 같아.
수연아
나의 추억... 그리고 내 어린시절 마음속에 있던 청춘의 환영...
안녕...
P.S.
아마 한번도 제대로 된 오르골 소리를 들어보지는 못했을 거야.
작은 상자를 열어 보렴.
그리고 네가 이 편지를 보는 일이 영원히 없기를 바래‘
편지를 다 읽은 수연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수연이는 상자 안에 들어있던 작은 선물상자를 뜯었다. 그 안에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이것이 오르골인가...’
수연이는 오르골을 들어 태엽을 감았다. 그리고 태엽을 놓자 맑은 금속성멜로디가 흘러 나왔다. 무척이나 익숙한 멜로디... 엘가의 ‘사랑의 인사’ 였다. 오르골은 10초정도 연주되자 멈추었다. 수연이는 다시 태엽을 감았다.
“너무 아름다워... 흐흑...”
수연이는 연주가 끝나면 계속해서 태엽을 돌렸다. 그때마다 수연이의 뺨을 타고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 내렸다.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수연이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수연이의 우는 모습에 놀라 왜 그런지 물었다.
“수연아! 무슨 일이니?”
수연이는 눈물을 닦고 바닥에 놓여있던 꽃사진을 들어 어머니에게 보였다.
“엄마... 이 꽃이 무슨 꽃인지 알아?”
어머니는 수연이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사진을 받아 살펴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건 수선화 같기도 하고 개난초꽃 인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네.”
수연이는 주머니에서 급히 무언가를 꺼내었다. 아까 지영이에게서 건네받은 전화번호였다. 수연이는 바로 전화번호를 눌렀다. 약간의 신호음이 흐른 뒤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혹시 지영이 핸드폰 아닌가요?”
“네. 맞아요. 아! 수연이 언니에요? 무슨 일이에요?”
수연이는 어머니에게 꽃사진을 건네받으며 지영에게 물었다.
“혹시 개난초꽃의 꽃말을 알고 있니?”
“개난초요? 무슨 꽃이지... 저도 잘 모르겠는데.”
“너도 잘 모르는 꽃이니?”
“기억이 날것 같기도 하고 이름은 들어본 꽃인데...”
잠시 전화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지영이는 무슨 생각이 난 듯 외쳤다.
“개난초꽃은 상사화의 사투리에요! 혹시 마지막 편지인가요?”
“그래! 상사화의 꽃말이 무엇인지 좀 알려줄 수 있니?”
“잠시만요!”
지영이는 휴대폰을 잠시 내려놓고 꽃말책을 뒤적거렸다. 책을 뒤적저리던 지영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전화를 들며 말했다.
“언니... 정말 그게 마지막 편지인가요?”
“응, 꽃말이 뭐라고 나와 있니?”
전화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지영아! 안들리니?”
잠시 후 한숨소리와 함께 지영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사화의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에요.”

 


 

 

 


45. 부치지 못한 편지 (2)
지영이와 통화를 마친 수연이는 급히 일어나 코트를 걸치고 현관문을 나서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그런 수연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고 걱정되어서 복도 끝으로 멀어지는 수연이를 향해 소리쳤다..
“수연아! 지금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는데 어딜 가는 거니? 가더라도 내일 가! 지금 너무 늦었지 않니!”
수연이는 그런 어머니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달리며 외쳤다.
“급하게 가볼 데가 있어서 그래! 금방 들어올게!”
어머니의 말대로 바깥은 아까보다도 더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게다가 내리는 눈송이는 아까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눈을 밟을 때마다 바닥에서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러다보니 걸음은 느려졌고 신발사이로도 눈이 녹아서 물이 새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이렇게 지하철역까지 걷기에는 너무 시간이 걸리겠어!’
수연이는 택시를 잡기위해 큰 도로로 향했다. 도로는 질퍽거리긴 했지만 인도보다는 눈이 덜 쌓여 있었다.
“택시! 택시! 여기요!”
눈이 와서 그런지 빈 택시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발을 동동 굴리며 기다리던 수연이의 앞으로 빈 택시하나가 멈춰 섰다. 재빨리 뒷자리에 탄 수연이는 다급한 목소리로 기사에게 말했다.
“사랑병원으로 가주세요!”
한참 제 속도로 잘 달리던 택시의 속도가 어느 순간부터 점점 느려졌다. 앞에는 많은 차들로 인해 도로가 정체된 모습이 보였다. 수연이는 급한 마음에 기사에게 물었다.
“아저씨, 왜 갑자기 이렇게 차가 막히나요?”
“글쎄요... 무슨 일이지...”
기사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 거렸다. 그때 택시 안에 있던 무전기로 소리가 들렸다.
“지지직.. 지직... 아!아! 지금 성수대교에서 눈길 미끄럼 때문에 10중 추돌사고가 일어나 사고 처리를 때문에 도로가 정체되어 있습니다. 진입하고 계신 기사 분들은 다른 도로로 우회하여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연이는 깜짝 놀라 기사에게 물었다.
“앞에 지금 사고가 일어났다고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막히는 있는 모양이네...”
“그러면 다른 도로로 빠져나가 이동하실 수는 없나요?”
기사도 답답한 듯 뒷자리에 앉아있는 수연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뒤쪽을 봐요. 지금 차가 전혀 움직일수 없는 상황이에요. 사고처리가 끝날 때 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기사의 말에 택시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뒤쪽역시 수많은 차로 막혀 어디로도 빠져 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한참을 말없이 한숨만 쉬던 수연이는 갑자기 기사에게 요금을 건네며 택시의 뒷문을 열었다. 기사는 놀라 창문을 열어 수연이에게 외쳤다.
“아가씨! 어디가요!”
그러나 수연이는 택시기사에게 아무런 대꾸도 없이 눈보라 속을 뛰기 시작했다. 거센 찬바람이 숨쉴 때마다 목구멍으로 밀려들어와 아려왔다.
“하악~ 학!”
계속 뛰다 지친 수연이는 숨을 헐떡이며 멈춰 섰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았지만 앞에는 휘날리는 눈보라와 막혀서 움직이지 못하는 자동차 그리고 넓은 한강의 모습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뛴 것 같은데도 아직 다리조차 건너지 못했잖아.’
아직 다리조차 건너지 못했다는 사실에 수연이는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리고 차가운 바람은 수연이가 입고 있는 코트사이를 뚫고 들어와 몸은 오들오들 떨렸다. 그때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리고 아주 어렸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5살박이 어린 꼬마 수연이는 따뜻한 봄날 푸른 초원위에서 아버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저 멀리 초원 꼭대기에서 수연이를 향해 웃으며 어서오라 손짓을 하셨다. 한참을 아버지를 향해 달려가던 수연이는 바닥에 박혀 있던 돌부리를 보지 못하고 걸려 넘어졌다. 수연이는 넘어진 채로 울면서 꼭대기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수연이에게 다가오지 않고 어서 일어나 달려오라며 손짓을 하셨다.
“수연아! 어서 일어나 달려오렴!”
그때 향긋한 풀냄새가 느껴졌다. 봄날의 햇빛을 받은 풀과 들꽃들의 향기가 넘어져 엎어져있는 수연이의 코로 들어왔다. 수연이는 집에서 보았던 만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솟는 꼬마자동차... 수연이는 일어나 다시 뛰어가며 소리를 쳤다.
“붕붕! 붕붕!”
수연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했다. 얼굴위로 눈송이가 떨어져 녹아내렸다. 그리고 녹은 눈송이와 함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수연이는 저 멀리 앞을 향해 소리를 쳤다.
“나 이제 달려갈게!”
그리고 수연이는 100m 달리기 준비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멈춰서 있는 차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수연이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수연이는 그런 시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수연이는 눈 속을 달려가며 외치기 시작했다.
“붕붕! 붕붕!”
빠져도 되는 수업을 굳이 끝까지 듣다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던 일이 떠올랐다. 자신의 신경질적인 짜증을 다 받아주시던 아버지의 웃는 얼굴과 미안해 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수연이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계속 뛰었다.
“흐흑.. 붕붕... 붕붕!!”
자신에게 고백을 하던 형우의 모습과 축제 때 자신을 위해 열심히 노래를 부르던 형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릎을 꿇으며 가지 말라고 간절히 외치던 형우의 모습이 그 위로 겹쳐 떠올랐다. 너무나도 간절했던 눈빛과 목소리가 눈앞에 아른거리고 귓가에 맴돌았다.
“미안해... 흐흑.. 붕붕!!!”
바다에서 오카리나를 불던 대혁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자신을 말없이 뒤에서 지켜만 보고 있었을 대혁이의 우수어린 눈빛이 떠올랐다. 연병장을 향해 달려가다 뒤돌아보며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던 모습이 떠올랐다. 훈련소에서 둘이 어색한 포즈로 같이 찍은 사진을 사고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쥐고 있었을 대혁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대혁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에 고인 눈물과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수연이는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신발로는 이미 많은 눈이 새어 들어와 녹아 발은 얼어버린 것처럼 감각이 없었다. 그래도 수연이는 얼굴을 소매로 닦으며 쉬지 않고 뛰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수연이 자신도 놀라워하며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는 날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런 사랑을 모르고 지나쳐버려 뒤돌아 후회하며 눈물 흘리지도 않을 거야!’
수연이는 어느 순간부터 뛰는 게 아까보다 힘들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기는 했지만 아까처럼 목이 아프거나 아려오지도 않았다. 마치 자신의 두 다리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에서는 무언가 희열의 감정 같은 것이 올라왔다.
‘무언가를 향해서 뛰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인지 몰랐어!’
‘다시는 그냥 지나쳐 놓치지 않겠어!’
수연이는 눈물을 닦고 미소를 지으며 뛰었다. 그러자 아까보다 시야가 확 트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았을 때 자신이 이미 다리를 한참이나 벗어나서 병원으로 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멀리 병원으로부터 나오는 듯한 형광등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리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줘! 붕붕!! 붕붕!!”
뛸 때마다 병원의 불빛은 점점 더 가까워 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연이는 병원의 정문 앞에 도착했다. 그러자 두 다리의 힘이 풀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정문 경비실에서 놀란 수위가 달려왔다.
“아가씨! 아가씨! 괜찮아요?”
수연이는 주저앉은 채 고개를 들고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하아.. 하.. 여기 분명히 사랑병원 정문 맞지요?”
“네..네.. 맞는데...”
당황한 수위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수연이를 바라보았다. 수연이는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하아... 다리야 조금만 더 힘을 내줘! 붕붕!!”
수연이는 다시 일어나 병원의 안으로 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뒷모습을 수위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라볼 뿐이었다.
“잠깐만요!”
1층의 엘리베이터 문은 수연이가 도착하자마자 닫혀 위층으로 향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수연이는 옆쪽 통로에 있는 계단으로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1층... 하아.. 2층... 3층.... 하아... 4층.... 학학! 5층!!”
5층에 도착해 복도를 달리던 수연이는 입원실 문을 살폈다. 그리고 504호 정문에서 대혁이의 이름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수연이는 자신의 모습이 무척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근처에 있던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보며 머리 매무새를 다듬고 손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땀을 닦고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그리고 다시 504호 정문 앞으로 돌아가 서서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한 뒤 문을 열었다.
“끼이익!”
문을 열때 나는 소리가 마치 집에 있는 낡은 벽장의 소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까 마지막 선물상자의 뚜껑을 열었을 때의 소리와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수연이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문을 열고 들여다보자 한쪽 구석의 침대에 누워 있는 대혁이의 모습이 보였다. 수연이는 천천히 대혁이의 침대로 다가갔다. 그러자 다리의 힘이 빠져 침대 옆에 주저앉고 말았다.
“대혁아... 이제 일어나줘. 네가 일어나면 정말로 해줄 말이 많은데... 흐흑!”
수연이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침대의 옆에 기대어 대혁이를 향해 말했다.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모르고 지나쳐버렸는데... 흐흑... 뒤늦게 알았는데... 이대로 지나치고 보내버려 후회하고 싶지 않아... 대혁아... 대혁아... 흐흑! 제발 일어나 무슨 말이라도 해줘...”
그러나 대혁이는 아무 말도 없었고 수연이의 흐느낌 섞인 독백은 계속되었다. 마침 안으로 들어오려던 대호는 침대 옆에 주저 앉아있는 수연이의 모습을 보고 뒤돌아 조용히 문밖으로 나와 휴게실로 향했다. 대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라이터를 켰다.
“내가 잘한 건지 모르겠군...”
대호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에 내리는 눈은 점점 그 양이 더해가 한 치 앞도 보이질 않았다. 마치 온 세상을 뒤덮으려는 듯...

 


 

 

 


46. 만파식적
거친 물결을 타고 육지로 불어오는 2월의 바닷바람은 가만히 모래에 앉아서 견디기에 힘들만큼 매서웠다. 꽉 여민 옷깃 사이로 불어 들어오는 차가운 기운은 머리카락이 쭈뼛서게 만들 정도였다. 겨울 바다를 구경하러 온 많은 사람들은 백사장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곧 추위를 피해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그 자리에 한참을 홀로 모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수연이었다.
“추워...”
수연이는 추위에 옷깃을 여미었다. 물결이 일렁이는 바다를 바라보자 지난여름 새벽에 바닷가에서 오카리나를 불던 대혁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벌써 2달이 넘었는데...’
사고 이후 단 한번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대혁이의 모습이 생각났다. 지난 2달 동안 답답한 마음에 의사에게 달려가 언제쯤 의식을 회복해서 일어나는지 물은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의사들은 하나 같이 대혁이가 평생 깨어나지 못할 수도 혹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최악의 경우만을 강조했다.
- 기적을 기다려야죠. -
수연이는 그런 의사들의 사무적인 대답이 답답하고 가끔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지켜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기에 그런 자신에 대해 더욱 화가 나고 답답했다.
틈나는 대로 수연이는 대혁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찾아가곤 했다. 그리고 누워있는 대혁이의 옆에 앉아 이것저것 하루 일들을 마치 대혁이가 앞에서 듣고 있는 듯 이야기를 하며 웃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방에 홀로 앉아 대혁이를 위해 기도를 했다. 사실 수연이는 아무런 종교도 믿지 않았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만 한 종교에 기대어 산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라 여겨왔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자신이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도 분명히 자신의 주위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경이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존재함이란 반드시 이유가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하찮게만 여겨 관심을 가지지 않아왔던 수많은 작은 들꽃들이 대혁이의 삶 속에서 커다란 의미가 되어 왔다는 사실은 수연이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기도를 드리는 그 순간에도 자신이 누구를 향해 기도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누구든 절대자를 향해 기도를 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절대자에게 자신이 대혁이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인지 또 대혁이는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인지 묻고 싶었다. 그리고 대혁이가 자신에게 그런 중요한 존재의 이유가 있음이 분명하다면 절대자를 향한 기도를 통해 기적을 바라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여겼다.
‘저는 기적을 믿고 싶습니다. 저는 지금 이렇게 당신께 기도를 드립니다.
저는 제 기도를 받을 당신이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세상에 존재함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고 아버지와 어머니역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위의 분들 역시 마찬가지 일겁니다. 더욱더 거슬러 올라가면 당신이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 기도를 드리기로 생각했습니다. 길고 긴 오랜 세월을 딛고 이렇게 제가 세상에 탄생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보이지 않을 만큼 작더라도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당신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저를 세상에 내보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많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혹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존재인지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이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중간에는 속하는 존재일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의지대로 저와 모든 사람들을 만드셨다면 모두가 알고 있는 선이라는 기준역시 당신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당신이 우리를 만들고 거두어감을 장난감 다루듯 쉽게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거두어감이 당신의 뜻이라는 핑계를 듣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이 그렇게 무책임하면서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사 갑작스럽게 거두어감에도 반드시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대혁이가 저렇게 누워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신이 저를 세상에 내려 보낸 이유가 절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함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당신이 그렇게 무책임 존재는 아니라고 믿습니다.
전 바보같이 두 번이나 저에 대한 큰 사랑을 지나쳐버리고 뒤늦게야 후회하며 눈물 흘렸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는 전보다도 더 늦게 알아채고 뒤따라 쫓아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끝이 보이질 않습니다.
제가 겪는 지금의 이 시련이 저에게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의 어리석음의 대가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혁이에게는 지금 이 현실이 너무나도 가혹하다고 생각합니다. 전 대혁이가 세상에 존재함이 보잘 것 없는 저를 한없이 바라보다가 이렇게 허무하게 끝마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그 정도로 당신이 모진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두들 저에게 기적을 말하는 군요. 무작정 기다리며 기적을 바라라는 군요. 세상 사람들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일컬어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대혁이가 그동안 저를 향해 보여주었던 헌신과 끊임없는 애정을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인연의 끈을 단순히 우연이라고 표현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대혁이에게 정말 기적이 필요합니다. 제 이야기가 들리시나요? 당신이 지금 저의 기도를 듣고 계시다면 한번만... 단 한번만 기적을 만들어 주세요. 이렇게 지나쳐 보내버리고 만다면 대혁이에게도 그리고 저에게도 너무나 가혹한 일입니다.
제발 기적을 만들어 주세요.‘
수연이는 주머니를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MT때 대혁이가 주었던 자그마한 오카리나였다. 연주를 할 줄도 모르고 또 그렇다고 연주를 할 만한 여유도 없어서 그냥 책상 서랍에 오랫동안 넣어두었던 물건이었다. 수연이는 오카리나를 입에 물고 불어보았다.
“뿌..뿌우...”
오카리나에 뚫려있는 구멍을 이리저리 막아보며 불어 보았지만 그저 뿌우 하는 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전혀 낼 수가 없었다. 수연이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오카리나를 입에서 떼었다. 그리고 오카리나를 바라보자 대혁이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 기름처럼 한번에 확 타올라서 곧바로 사그라드는 사랑은 하지 말고 형우와 둘이 저 장작처럼 은근하게 오랫동안 이어가는 사랑을 했으면 좋겠어. -
수연이의 두 눈에 눈물이 고여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뜨거웠던 눈물은 흘러내리면서 차가운 바람을 맞았고 눈물이 턱에서 떨어질 때쯤에는 차갑게 식어 모래를 적셨다. 수연이는 눈물에 젖은 모래를 바라보며 오카리나를 불었다.
“뿌~ 뿌우~ 뿌~ 흐흑... 뿌~”
수연이는 대혁이가 불던 오카리나의 소리가 전설의 만파식적의 소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엉뚱한 생각을 했었던 일이 떠올랐다. 소리는 아무런 음의 높낮이도 없이 그저 한음씩 뚝뚝 끊기며 바닷가에 가득 울려 퍼졌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불고 있는 보잘 것 없는 오카리나의 소리가 정말 만파식적의 소리이기를 바랬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 불면 천하가 편안해 졌다는 전설의 악기 만파식적. 수연이는 오카리나를 불때마다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때 전화기가 주머니 속에서 진동을 하며 떨렸다. 집에서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수연아! 너 도대체 아침부터 혼자 어디를 간거니? 아까는 전화를 받지도 않고! 정희한테 전화해도 전혀 모른다고 그러고 어떻게 된거니?”
수연이의 어머니는 힘없이 혼자 아침부터 어디론가 나간 수연이가 걱정되어 전화를 했던 것이었다.
“금방 들어갈게. 걱정 하지마.”
“너무 늦게 들어오지마. 엄마가 저녁때 수완이랑 같이 먹자고 맛있는 것을 준비해 놓았으니 시간 맞춰서 들어오도록해. 알았지 수연아?”
“응 알았어.”
수연이는 전화를 끊고 수신목록을 확인해보았다. 정희와 집으로부터 온 부재중 통화의 흔적이 수없이 떠있었다.
‘내가 이렇게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모래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모래를 털은 후 수연이는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에는 제 시간에 도착하여 미리 끊어 놓은 승차권을 낸 후 버스에 올라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미리 끊지 않아도 될 뻔 했네.’
버스에는 기사와 수연이 말고는 더 이상 아무도 타지를 않았다. 졸지에 버스를 전세 낸 것과 다름없이 되어 버렸다는 생각에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수연이는 승차권에 인쇄된 자리대신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찾다가 버스의 중간 쯤 창가가 있는 자리에 앉았다. 버스는 곧 시동을 걸고 출발을 했고 수연이는 창틀에 팔을 기댄 채 바깥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서해대교가 보였다. 새해대교 아래 바닷물에는 석양이 비치어 반짝였다. 아까 바닷가에서 본 거칠은 물결과는 달리 서해대교 아래의 물결은 무척 잔잔한 듯 고요해 보였다. 수연이는 피곤함에 못 이겨 잠을 청하기 위해 좌석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우우웅! 우웅!”
막 눈을 감았을 때 주머니에서 전화기의 진동이 울렸다. 대호의 전화였다. 정희는 급하게 전화를 열었다.
“여보세요!”
“수연씨!”
수연이는 대호의 다급한 목소리에 놀랐다
“네. 말씀하세요! 대혁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대혁이가... 대혁이가요!”
수연이는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온몸이 떨렸다.
“대혁이가 어떻다구요?”
“......”
잠시 침묵이 흐르다 전화기로 대호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대혁이가 깨어났어요! 드디어 깨어났다고요! 이건 정말 기적이에요!”
수연이는 그런 대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전화기를 붙잡으며 흐느꼈다.
“흐흑.. 흐흑...”
“여보세요! 여보세요!!! 수연씨!!! 여보세요!”
흐느끼는 수연이의 얼굴로 햇빛이 비쳐 눈이 부셨다. 수연이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다너머로 지고 있는 붉은 석양이 보였다. 수연이는 두 손을 모아 쥐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고 속삭였다.
“기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47. 발렌타인데이 (1)
“이봐! 각하! 추워 죽겠는데 학교에 왜 부르셨어요?”
성대는 혼자 동아리방안에서 추운지 전기스토브 앞에서 손을 비비고 있었다. 그러다 약속시간보다 30분 늦게 들어온 정희를 보자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정희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무슨 남자가 이렇게 무드가 없어!”
“무드? 그게 뭔데?”
성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정희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성대는 정희의 손에 무언가 들려있는 것을 보았다.
“근데 손에 들고 있는 건 도대체 뭐야?”
“이...건...이건...”
정희는 얼굴이 빨개져서 말을 더듬었다.
“뭔데 말을 못하세요? 설마 나한테 발렌타인데이 선물이라도 주려고 나오라고 한거냐?”
“그래! 이 무식한 돼지야!”
정희는 화가 난 듯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성대는 깜짝 놀라 움찔하면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정희를 바라보았다.
“이..이봐?”
“왜!”
“정희야? 너 뭐 잘못 먹었냐? 무슨 나한테 뜬금없이 발렌타인데이 선물이야? 오늘 뭐 정신적으로 대단한 충격이라도 받은 일이 있던 거야?”
정희는 심호흡을 하며 표정을 다듬은 뒤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건넸다.
“돼지야! 아니.... 성대야! 발렌타인데이 축하해!”
“어어..이이..이게.. 무슨...”
성대에게 선물을 건넨 정희는 바로 뒤돌아 동아리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뛰어 나가기 시작했다. 성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정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희야...”
성대는 자신의 손에 들린 선물과 멀어지는 정희의 모습을 번갈아 쳐다보며 할말을 잃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형우가 좀 늦네...”
은혜는 대학로 한 까페의 바깥이 보이는 창가의 자리에 앉아 형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혜는 자신의 옆에 놓인 선물과 창문 바깥을 번갈아 바라보며 손에 턱을 괴고 있었다. 창문 바깥을 바라보던 수연이는 건물아래에서 바쁜 걸음을 걷고 있는 형우의 모습을 발견했다. 은혜는 환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흔들며 뺨을 몇 번 톡톡 치며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표정을 만들었다.
“은혜야, 내가 좀 늦었지? 미안해...”
“미안하면 다음부터는 여자를 기다리게 하지마. 여자먼저 기다리면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줄 아니?”
“미안해...”
자신이 한말에 놀란 은혜는 속으로 자신을 책망했다.
‘이 주둥이! 아직도 자존심, 자존심! 휴우~’
은혜는 옆자리에 놓여있던 선물을 들어 형우에게 건넸다.
“형우아, 발렌타인데이 축하해.”
“뭐 이런거를... 난 그 동안 제대로 해준 것도 없는데.”
“그러면 이제부터 제대로 잘 해주면 되는 것 아니니?”
“고마워, 은혜야...”
형우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은혜를 바라보았다. 은혜역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형우를 바라보았다. 형우는 문득 햇살이 비친 은혜의 얼굴에 지어진 미소가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혜야, 너 환하게 미소 짓는 것을 보니 정말 예뻐.”
“정말?”
은혜는 그 말에 너무 기뻐서 더욱더 환한 미소로 형우를 바라보며 웃었다.
“기형이가 왜 이렇게 늦는 거지? 올 시간이 훨씬 지난 것 같은데...”
지영이는 같은 반 친구인 기형이의 집 앞에서 추운지 손을 비비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손목에는 선물상자로 보이는 물건이 들어있는 쇼핑백이 걸려있었다. 지영이는 한참을 손을 비비며 입김을 불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게 주위를 돌아보던 지영이는 골목 저 멀리서 누군가 다가오는 모습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외쳤다.
“기형아!”
집으로 가고 있던 기형이는 자기 집 앞에 서서 손을 흔드는 지영이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지영이에게 달려갔다.
“지영아, 추운데 왜 여기에 서있는 거야?”
“잔말 말고 받아.”
지영이는 손목에 걸려있는 쇼핑백을 빼내어 기형이에게 건넸다. 건네받은 기형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영이에게 물었다.
“이게... 이게 뭐니? 어어! 지영아”
지영이는 기형이의 말도 듣지 않은 채 골목 바깥으로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지영이는 뛰어가면서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기형아! 발렌타인데이 축하해!”
“지영아...”
기형이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쇼핑백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예쁘게 포장되어있는 선물상자하나와 사진하나가 들어있었다. 기형이는 사진을 꺼내 살펴보았다.
“튤립이잖아...”
사진 아래 오른쪽에는 수정액으로 쓴 듯한 작은글씨가 적혀있었다.
“빨간 튤립의 꽃말이 뭔지 아니... 무슨 소리지?”
기형이는 지영이가 사라진 골목을 한참동안 쳐다보며 할말을 잃은 듯 멍하니 서있었다.
“이렇게 튤립을 파는 곳이 없어서... 휴우~”
수연이는 손을 비비며 또 다른 꽃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빨간 튤립을 구하기 위해 꽃집을 이미 몇 군데를 들렸지만 튤립을 팔고 있는 곳이 없었다. 아예 없거나 알뿌리를 제외하고는 꽃들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수연이는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남은 꽃집은 저 집밖에 없는데...”
수연이는 마지막 꽃집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주인인 듯한 아주머니 하나가 수연이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무슨 꽃 찾으시나요?”
“혹시... 빨간튤립을 구입 할 수 있을까요?”
“겨울에는 튤립을 구하기 힘들텐데...”
“그렇죠? 휴우... 안녕히계세요...”
“잠깐만요.”
아주머니 힘없이 뒤돌아 나서던 수연이를 붙잡으며 말했다.
“꽃다발이 아니라 화분이라도 괜찮아요?”
“화분요? 튤립이 있나요?”
“따라와요.”
수연이는 아주머니의 뒤를 따라 꽃집의 구석진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도 튤립을 좋아하긴 하지만 아쉽게도 겨울에는 튤립을 보기가 힘들어요.”
“네... 저도 아까 다른 곳에서 들었어요. 튤립이 있는 건가요?”
“온실에서 튤립 몇 개를 따로 화분에 담아 키우고 있어요.”
아주머니는 수연이를 작은 온실로 안내했다. 온실 안은 겨울 날씨가 무색하게 따뜻한 기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양은 적지만 다양한 꽃들이 자라고 있었다. 수연이의 입에서는 절로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아주머니는 튤립이 피어있는 작은 화분을 수연이에게 들고 왔다.
“이 녀석들은 팔려고 키우는 건 아니고 제가 보고 싶어서 키우는 녀석이에요. 여기 튤립이에요.”
“아아...”
수연이는 2송이의 튤립이 피어있는 작은 화분을 받아들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얼마를 드리면 되나요?”
“주시지 않아도 되요.”
“네?”
수연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아주머니는 수연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원래 팔으려고 키운 것이 아니에요. 제 짐작이 맞는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져다 주려는 것 같은데... 맞지요? 그냥 가져가셔도 돼요.”
“네...”
수연이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여 화분에 피어있는 튤립을 바라보았다. 꽃잎에 이슬을 머금은 채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튤립이 수연이에게는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배경음악은 제가 작곡한 '꼬마를 기다리며' 라는 곡입니다. 사실상 이 소설의 주제 음악으로 쓰인 곡이기도 합니다. Play를 누르시면 나올겁니다.

 

 

 


48. 발렌타인데이 (2) [완결]
수연이는 택시를 타고 대혁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택시기사는 기분이 좋은 듯 뒷자리에 앉아있는 수연이에게 물었다.
“아가씨,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요?”
“네?”
“오늘 발렌타인인가 뭔가 하는 날 아닌가요?”
“아... 네. 맞아요.”
수연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사는 핸들 옆에 붙어있는 작은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번에 6살 먹은 딸인데 말이에요. 오늘이 여자가 남자한테 초코렛을 주는 날이라면서 저에게 초코렛을 하나 주더라구요. 허허~”
“그래요?”
수연이는 신기하다는 듯 사진 속에 담긴 꼬마아이를 바라보았다. 기사는 조그만 초코렛 하나를 들어 수연이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살다보니 마누라도 아니고 딸내미한테 이런 걸 다 받아보고 하하~ 아가씨도 남자친구한테 발렌타인 초코렛인가 뭔가 주러 가는 건가요?”
“네.”
“병원으로 가는걸 보니 남자친구가 좀 아픈가보네요?”
“많이 안 좋았는데 지금은 나아졌어요.”
“하하~ 그래요? 잘 되었네요!”
기사는 신이 난 듯 콧노래를 부르며 택시를 몰았다. 수연이는 택시 창밖으로 지나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평소보다 많은 연인들이 거리 곳곳을 거닐고 있었다. 수연이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박대혁 환자는 중환자실에서 나와 이제 일반 병실로 옮겨 졌어요.”
“그래요? 몇 호 병실인가요?”
“305호에요.”
수연이는 한손에는 튤립화분을 그리고 다른 한손에는 선물상자가 들은 쇼핑백을 들며 305호로 향했다. 엘리베이터가 바로 멈춰서 문이 열렸지만 수연이는 그냥 계단으로 향했다. 그냥 오늘은 왠지 걸어 올라가고 싶었다.
‘대혁이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뭐라고 말할까...’
계단을 하나하나씩 올라갈 때 마다 수연이는 가슴이 떨려왔다. 그러나 이전에 느꼈던 불안함 보다는 설레임이 더욱 컸기에 발걸음은 가벼웠다.
‘이제 3층이구나...’
수연이는 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전과는 달리 복도에는 햇빛이 들어와 밝게 비추었다. 수연이는 얼마 전 입춘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이제 정말 봄이 오려나 봐...’
수연이는 한 병실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 305. 박대혁... -
병신의 문에는 대혁이를 비롯해 몇 명의 이름이 더 적혀있었다. 수연이는 병실의 문을 천천히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휠체어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대혁이의 모습이 보였다. 대혁이를 제외하고는 다들 어디로 나간 듯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수연이는 천천히 대혁이를 향해 다가가 화분을 창틀에 내려놓았다. 대혁이는 놀란 듯 수연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연아... 어떻게...”
“대혁아, 답장이 너무 늦었지?”
대혁이는 그 말을 듣고 멍한 표정으로 수연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있다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늦었지만 도착 했나 보구나...”
“그래... 늦게... 너무도 늦게 받았어. 답장이 늦어져서 미안해.”
수연이의 두 눈은 붉게 충혈 되며 눈물이 고였다.
“너에게서 그 동안 너무 많이 받았는데...”
수연이는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에서 선물을 꺼내어 대혁이에게 건넸다.
“나는 이제야 너에게 무언가를 주게되네...”
“수연아...”
눈에 고인 눈물을 닦은 수연이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혁이에게 말했다.
“내가 가져온 편지를 읽어 보지 않을래?”
“편지?”
“응. 편지.”
수연이는 창틀에 내려놓은 튤립 화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내 편지야, 대혁아.”
“저 화분이 편지라고?”
대혁이는 한참동안 말없이 창틀에 놓인 튤립화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혁이 역시 충혈된 눈으로 수연이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연아... 빨간 튤립의 꽃말이 무엇인지... 아니?”
수연이는 젖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먼저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우습게보지 않는 거지, 대혁아?”
말을 마친 수연이는 환한 미소로 웃으며 대혁이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대혁이도 환한 미소로 웃으며 수연이의 두 손을 맞잡았다. 창밖으로부터 밝은 햇살이 비쳐 들어와 둘을 비추었다. 대혁이는 받은 선물의 포장에 비치는 햇살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연아... 이제 정말 봄이 오려나 봐.”
방으로 들어온 기형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영이가 건네준 쇼핑백에 들어있던 사진에 적혀있는 글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빨간 튤립의 꽃말이 뭔지 아니... 이게 무슨 소리지...”
기형이는 별 생각없이 사진을 바닥에 내려놓고 선물상자를 꺼내 열었다. 상자속에는 여러가지 초코렛과 사탕들 그리고 자그마한 책 하나가 들어있었다. 기형이는 그 책을 꺼내 들었다.
“아름다운 꽃말 모음?”
기형이는 책을 펼쳐 들어 빨간 튤립의 꽃말을 찾기 시작했다.
“튤립은 자애, 명예, 명성... 노란튤립은 헛된 사랑... 하얀튤립은 실연... 빨간 튤립은...”
무언가에 놀란 듯 기형이는 책을 내려놓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잠시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책을 덮었다. 그리고 아까 바닥에 내려놓았던 빨간튤립 사진을 들어 바라보다 가슴에 가져다 대며 눈을 감고 미소를 지었다.
- 빨간 튤립 : 사랑의 고백 -
8년전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학원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던 수연이는 학교부근을 지나가고 있었다. 수연이는 학교 주위로 담장대신 쳐져있는 철조망 안에 누군가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수연이는 궁금해서 철조망 안을 들여다보았다. 들여다보니 대혁이가 학교 건물 뒤편에 마련되어 있는 화단에 물을 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 대혁이네? 방학 때 학교에 와서 뭐하는 거지?”
수연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혁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다시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화단에 물을 주고 있던 대혁이는 학교 철조망 바깥으로 멀어지는 수연이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한참을 가만히 서서 수연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대혁이는 더 이상 수연이의 모습이 보이지를 않자 돌아서서 화단의 앞쪽으로 다가갔다. 화단 앞에는 여러 가지 꽃들의 이름이 적힌 안내판이 있었다. 화단 앞을 지나며 꽃을 바라보던 대혁이는 패랭이꽃 앞에 멈추어 섰다.
- 패랭이꽃 : 쌍떡잎식물 중심자목 석죽과의 여러해살이풀 -
분류 : 석죽과
분포지역 : 한국·중국
자생지 : 낮은 지대의 건조한 곳, 냇가 모래땅
크기 : 높이 약 30cm
꽃말 :
패랭이꽃 안내판의 꽃말 부분이 흐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대혁이는 잠시 주위에 누군가 있나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대혁이는 주머니에서 매직펜을 꺼내 안내판의 흐려져 보이지 않는 부분에 무언가를 적으며 미소를 지었다.
- 꽃말 : 순결한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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