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 없는 삶은 맹목이고 독서 없는 삶은 공허하다
반성 없는 삶은 맹목이고 독서 없는 삶은 공허하다
  • 한양대학보
  • 승인 2008.09.01
  • 호수 127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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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후반 서울의 모 대학에 강의를 나간 적이 있다. 수강생이 많지 않아서 비교적 자유롭게 강의를 할 수 있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동서양의 인문교양서를 정해주고 그것을 읽어오라고 했다. 처음에는 무척 긴장한 듯 여기에 대해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낯빛이 어두웠고 자기들끼리 서로 불안한 눈빛만 교환하였다.

대학생이라고는 하지만 제대로 된 독서를 깊이 있게 해본 경험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짐짓 그들의 불안을 외면했다. 학생들은 내가 정해준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 박이문의 ‘노장사상’, 가스통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김용옥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조셉 켐벨의 ‘신화의 힘’,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인간현상’같은 책을 읽고 토론하였다. 사실 이 책들은 모두 그들이 소화하기엔 벅찬 것들이었다.

처음부터 너무 어려운 책을 정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을 하면서도 지성인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의 책은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들의 지적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그들에게 무조건 책을 읽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이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였고, 다른 하나는 ‘일상 속에서 어떻게 그것을 즐겁게 향유할 수 있는가?’였다. 둘 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동안 그들에게 이런 식의 고민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사실들은 무슨 특별한 프로그램된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삶의 환경으로 주어져야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환경은 어떠한가. 사유는 근대의 개발 논리에 묻혀 스테레오타입의 형태로 전락해 버렸고, 그렇게 죽은 포즈만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있는 형국 아닌가. 사유가 스테레오타입화 되고 또 포즈로 변한 삶의 환경 속에서 독서는 제대로 그 존재성을 드러낼 수 없다.

우리는 늘 요즘 젊은 세대들이 사유의 깊이가 없다고 한탄을 한다. 그리고 그 탓을 비트화된 매체 환경 탓으로 돌린다. 어느 정도 여기에 원인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을 비난하는 기성세대 역시 사유의 깊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유의 깊이 없음은 꼭 매체 환경 탓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근대 이후 우리의 삶의 영역에 견고하게 자리한 개발과 속도의 논리가 행사하는 효용성과 효율성의 가치에 대한 경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개발과 속도의 논리가 가지는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삶으로부터 반성과 성찰의 과정을 빼앗아 갔다는 것이다. 반성과 성찰이 없는 삶은 인간다운 삶과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책 읽기가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책은 한가할 때 읽는다는 고정관념이 우리에게 있다. 그 한가로움을 기다리다 세월 다 보낼 것이다. 책 읽기는 속도가 지배하는 일상의 장 속에서 향유되어야 하는 것이다. 과도한 정보량과 복잡한 사회 시스템 속에서 하나의 자율적인 주체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삶이 한없이 허무해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환경은 너무 척박하다.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 동서고금의 다양한 인문교양서를 읽고 토론하는 강좌를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우리의 대학 앞에는 마음 편하게 앉아서 이런 책을 읽고 토론할만한 문화적인 공간 하나 없다. 이것은 댄디적인 취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가 새로운 심급 단위가 된지 오래지만 어쩐지 그것이 껍데기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껍데기의 욕망이란 허망한 것 아닌가. 그 허망함을 달래줄 지혜를 무겁고 낡은 책 속에서 찾는 것은 어떨까. 그 속에서 그것이 낡은 것이 아니라 새로움의 원천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눈을 감고 한번 헤아려 보라. 지금까지 내가 정독한 동서고금의 고전이 몇 권이나 되는지를. 빈약하다면 우선 그것부터 반성하고 그리고 서둘러 책을 들어라.
이재복 교수
<국문대ㆍ한국언어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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