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이란 이름의 달콤한 함정
1등이란 이름의 달콤한 함정
  • 이시담 기자
  • 승인 2008.08.24
  • 호수 127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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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제 통한 신분상승, 우리사회 1등주의 영향 줘

 
역사는 1등을 거머쥐고도 얼마든지 몰락을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3차에 걸친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는 승리했다. 그 후 아테네를 중심으로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 도시와 에게 해의 섬들은 페르시아로부터 독립을 지키려 델로스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델로스 동맹은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페르시아에 거둔 승리에 도취한 아테네는 에게해에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보였고 맹주라는 위치를 이용해 작은 섬들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으면 델로스 동맹에서 제외시킨다고 협박했다. 밀로스 섬에서 이를 거절하자 아테네는 그곳을 공격해 거주민들을 노예로 팔기도 했다.

스파르타, 코린트, 테베 등의 폴리스들은 아테네의 지배에 회의를 느꼈다. 이렇게 싹튼 불만은 코린트와 코르푸의 전쟁에서 아테네가 코르푸의 편을 들면서 더 커져갔다. 위협을 느낀 코린트는 펠로폰네소스 회의를 개최했고 여기서 아테네의 횡포를 견디지 못한 폴리스들과 스파르타의 참전이 결정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는 패배했고 그리스 전체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한족은 자국 영토를 찬란한 중앙의 큰 나라라는 의미로 중화(中華)라 불렀다. 주나라 시대에 처음 사용된 ‘중국’은 주 왕조의 수도나 왕이 통치했던 지역 일대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이 용어는 공자 시대에 문화적 우월지역이라는 새로운 의미가 첨가되고 유교와 결합돼 지금의 중화사상의 틀을 마련했다.

1840년 여름 영국이 함대를 이끌고 와 공격할 때까지 중국은 중화사상에 빠져 서구 열강의 문명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졌고, 청나라를 동양의 ‘잠자는 사자’라 여겨 건들지 않았던 서구 열강들의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 후 중국은 난징 조약, 베이징 조약이라는 치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1등주의는 올림픽에서도 나타난다. 중국의 경우 프로젝트 119를 통해 어릴적부터 스포츠에 자질 있는 선수를  금메달을 따기 위한 운동기계로 키워냈다. 또 베이징 올림픽 남자 유도 60kg급에서 금메달을 딴 최민호 선수도 4년 전 아테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고 소외당하는 설움을 뼈저리게 겪었다고 한다.

박찬승<인문대ㆍ사학과> 교수는 한국사회의 지나친 1등주의의 원인을 조선시대 과거제에서 찾았다. 박 교수는 “서구사회나 일본사회는 신분제가 엄격히 세습돼 자신의 신분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전통이 이어져왔다”며 “한국, 중국 사회는 과거제를 통해 신분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었고 이로 인해 앞자리로 치고 나가려는 경쟁이 심화됐다”고 말했다. 

이시담 기자 lerne@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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