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라는 용어의 문제점
'통일신라’라는 용어의 문제점
  • 한양대학보
  • 승인 2008.03.31
  • 호수 1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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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고대사-삼국시대에 나당연합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는 멸망한다. 나당전쟁에서 당은 패퇴하고 7세기 동아시아 국제전을 거쳐 신라만이 살아남는다. 그 결과 신라는 일통삼한(一統三韓)을 표방했지만, 얼마 후 고구려의 옛 땅에서는 고구려 유민이 말갈족을 규합하여 발해를 건국했다.

발해는 해동성국이라 불릴 정도로 발전하였지만, 거란에 의해 멸망한 후 후속 국가도 등장하지 않은 데다 발해(인) 스스로 남긴 기록도 전하지 않음으로써 발해사는 이후의 역사에서 잊혀졌다. 

신라와 발해가 병존했던 200여년의 시기를 현재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는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본문에서는 ‘통일신라’와 ‘발해’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1980년대 초반까지 사용하던 ‘통일신라시대’라는 표제어를 ‘남북국시대’로 바꾸었을 뿐 그 내용에 큰 변화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신라와 발해를 한국사 체계 속에서 파악하려고 할 때 ‘남북국시대’라는 표현은 적절하다.

그러나 ‘통일신라’와 ‘발해’는 논리적으로 서로 모순된다. ‘통일신라’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통일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에 따르면 고구려 옛 땅에서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는 한국사에서 배제된다는 점에서 모순이다.

따라서 발해사에 대한 인식은 이른바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평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흔히 신라의 삼국 통일과정에서 신라가 그 과정에서 외세를 이용했고 대동강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는 두 가지 점에서 한계성을 갖지만,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몰아낸 사실에서 자주적이었으며 고구려와 백제 문화를 수용하여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더 크다.

역사는 과거 사실에 대한 현재적 해석인 만큼 시대의 변화나 인식 주체의 입장차에 따라 해석은 바뀔 수 있다. 그렇지만 그 해석은 사실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근거로 할 때 타당성을 갖는다. 위에서 언급한 삼국통일의 의의를 떠나 일단 객관적인 사실만 살펴보면, 문제는 대동강 이북의 고구려 옛 땅이 신라의 영역에서 제외됐기 때문에 통일이라는 용어가 적합하지 않다. 게다가 더욱 중요한 사실은 648년 당과 신라가 나당동맹의 맺을 때 각자 고구려와 백제 땅을 나누어 갖기로 했듯이 신라는 애초에 고구려까지 통합할 생각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신라인이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하나로 통합했다고 표방한 일통삼한 의식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가리키는 유력한 증거로 간주됐다. 그러나 이는 경주 중심의 지배계급인 진골귀족의 의식이었던 것이지, 옛 백제와 고구려 지역 출신과 피지배계급 모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의식은 아니었다.
신라 말기에 궁예와 견훤이 각각 고구려와 백제의 부활을 표방하며 후삼국시대를 열었던 것은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한 발해의 건국은 신라의 일통삼한론을 근저에서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라인에게 발해는 미개한 북방의 말갈족으로 인식됐다. 이러한 인식은 경주 출신의 문벌귀족인 김부식이 12세기 초 묘청의 난을 진압한 다음 편찬한 「삼국사기」에 그대로 반영된 이래 조선시대까지 전근대적 역사인식의 주류를 이뤘다. 발해 역사도 우리 역사가 아니냐는 데서 학계는 통일신라시대란 용어를 고찰하게 된다.

 김종복<성균관대ㆍ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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