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시티와 신자유주의
심시티와 신자유주의
  • 성명수 기자
  • 승인 2007.12.02
  • 호수 12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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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시티」라는 PC게임이 있다. 사용자가 도시를 건설하고 주민들을 유치해 더 많은 세금을 걷는데 게임의 목표가 있다. 그렇게 모은 자금으로 도시를 확장하고 더 발전된 형태의 시설물을 건설하면 시민들의 생활수준이 윤택해진다. 도시 재정이 흑자로 돌아서고 더 이상 발전시킬 공간이 없다면 이 도시를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는 사용자의 자유다. 게임제작자가 의도한 게임의 목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심시티」 게임을 즐기기 위해서는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게임을 시작해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초반에는 조금만 잘못해도 도시재정이 파탄 나 도시건설을 실패하기 다반사다.

하지만 자신이 세운 도로에 차들이 다니고, 주택에는 사람이 살고, 야구장이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 본격적인 게임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내가 만든 도시가 ‘살기 좋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것도 아무것도 없었던 황무지에 만든 도시인데.

게임은 주로 유형의 가치를 제공하지만 「심시티」를 할 때는 무형의 가치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정해져 있는 시나리오대로만 플레이해야 게임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롤플레잉이나 정해진 룰을 엄격히 지켜야 하는 스포츠 게임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게임 「심시티」는 사용자의 의지대로, 사용자가 생각하는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을 기대할 수 있다. 「심시티」는 사용자가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최소한의 툴만 제공하고 모든 진행을 사용자에게 맡긴다.

혹자들은 사람의 ‘삶’을 게임에 비유하기도 한다. 2007년을 살고 있는 대학생들은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어보자. 신자유주의가 개인에 강요하는 매뉴얼을 따라 지루한 반복동작을 되풀이하고 있지는 않은가. 신자유주의는 개인으로 하여금 모두가 똑같은 게임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문을 열지 않으면 더 이상 게임을 진행할 수 없는 어드벤처 게임처럼 거대자본을 손에 쥐고 있는 권력자가 요구하는 행위를 수행하지 않으면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 역시도 신자유주의가 생산하고 있는 개인의식화 작업에 불과하다. 실제 정치제도의 미비, 기업구조의 불안으로 오는 사회 불안정을 가리기 위해 개인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대중들의 조직적 반발로 무너지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개인을 치열한 경쟁으로 몰아 서로 협동할 수 없는 구조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실제 경쟁이 불필요한 부분에까지 경쟁구도를 만들어 한 목소리를 낼 수 없게 한다.

세상에는 신자유주의가 생산하는 유형의 가치만이 아니라 더 소중한 무형의 가치가 존재한다. 젊은 혈기가 살아있는 대학시절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자신만의 도로와 공장, 집을 건설할 수 있는 기회와 용기가 그것이다. 기억해두자. 「모던 타임즈」에 나오는 찰리 채플린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는 향후 수십 년간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는 대학시절이 아니면 다시는 개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심시티」를 통해 만들어 놓은 도시에 시민으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머지않아 다가온다. 대학이라는 게임 틀 안에서 얻어낼 수 있는 무형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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