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한 가을날 유상한 것을 그린다
무상한 가을날 유상한 것을 그린다
  • 한양대학보
  • 승인 2007.11.26
  • 호수 126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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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다. 그 푸르던 잎들이 여름 내내 동색을 유지했던 것이 부끄러웠는지 갖가지 색으로 단장을 하던 것이 엊그제 같았는데 낙엽이 되어 하나 둘 떨어진다. 떨어지는 낙엽들은 바람에 구르다 하나둘씩 사라져버린다.

하늘은 투명하게 푸르러 그처럼 청정한 마음을 품게 하고, 볼을 스치고 지나는 바람은 제법 차가와선 따스한 인간을 그립게 한다. 이맘때가 되면 사람들은 불교도가 아니더라도 무상감을 느낀다. 싱그러운 신록이 조락(凋落)하듯, 자신의 삶도 무상할 것임을 새삼 깨닫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왠지 모를 상념에 잠겨 거리를 헤매는가 하면, 괜시리 애틋해져 차 한 잔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먼 곳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무상이 우리 삶에 주는 지혜, 그것은 실체와 영원성에 대한 부정이다. 정녕 하늘아래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데, 사람들은 간혹 그를 영원한 실체로 착각한다. 이는 오만과 부정, 그리고 야만을 낳으며, 결국에는 자신의 파멸로 귀결된다.

파키스탄에서, 미얀마에서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자들이 시민은 물론 승려와 변호사들에게도 총부리를 겨누었다. 21세기에도 다른 어떤 나라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할 것이라 확신하는 부시정권은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제3세계 민중들을 억압하고 학살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영원한 제국을 건설하려고 언론계와 사법계와 정치계에 소위 ‘장학생’을 양육하고 세계적 기업을 자처하면서도 노조를 원천봉쇄하던 ‘삼성제국’의 비리가 속속 밝혀지고 있다. 유신체제까지 만들어가면서 영원한 권력을 꿈꾸던 박정희가 육혈포에 맞아죽고 퇴임이후 상왕제까지 추진하던 전두환이 유배를 간 기억이 아직 대중의 뇌리에 생생할 터인데, 이것이 별로 학습효과를 유발하지 못하나 보다.

개인의 차원에서도 사랑하는 이가 영원할 것으로 알고 마구대한 이들은 이별을 맞고서야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건강에 자만한 이들은 병상에 누워서야 마구 몸을 굴렸던 지난날 들을 후회한다.

무상이 우리 삶에 주는 지혜가 영원성의 부정이라면, 깨달음의 세계에 던지는 것은 유상의 그리움이다. 단 1분 1초 사이에도 인간의 얼굴을 형성하는 세포 가운데 수 백 개 이상이 사라지고 새 것으로 교체된다. 1주일 만에 만나는 내 강의의 수강생들의 얼굴은 이미 수천 개 이상의 세포가 변한 그것이다.

우리가 어느 사람을 볼 때 같은 사람의 같은 얼굴로 보지만 그것은 찰나의 순간에도 유사할 뿐, 절대 같지 않다. 그것에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착각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변하고 서로 조건이 되고 인과관계가 돼 변하지만, 여기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람의 몸에 내재된 얼굴을 형성하는 원리다. 수 억, 수 조 개의 세포가 변해도 이 원리에 따라 세포가 꼴을 짓고 작용을 하기에 그 사람의 얼굴은 동일성을 형성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사람을 보고 알아보고 누구, 누구라 부른다. 수 억, 수 조개의 세포들이 모두 변해도 얼굴을 형성하는 원리는 그대로다. 이처럼 무상을 넘어 유상한 것이 바로 진리, 도(道)이다. 무상의 순리를 깨닫고 실천하면서 유상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대학(大學)이다. 그대여! 무상한 이 가을날, 유상을 그리워하지 않을런가.

이도흠<인문대ㆍ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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