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선택은 누구의 것인가, 씨인사이드
죽음의 선택은 누구의 것인가, 씨인사이드
  • 김보만 기자
  • 승인 2007.03.18
  • 호수 12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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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마비 된 채 26년간 침대에 누워있는 사내, 라몬. 몸이 마비된 순간부터 그의 삶도 정지됐다. 움직일 수 없는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친구를 떠나보냈고 오랜시간 스스로가 사랑할 자격조차 박탈해 버렸다. 그는 휠체어도 거부한다. 휠체어를 탄다는 건 “내가 자유로웠을 때의 빵부스러기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며 철저하게 자신을 묶어둔다.

이제 그런 라몬이 “죽고 싶다”고 말한다. 언론을 통해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설득하고 합법적인 안락사를 도와줄 사람들과 변호사, 훌리아를 고용한다. 훌리아를 비롯해 재판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얘기한다. “당신을 이해하는 것이 재판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지만 영화는 침대에 누워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라몬과 자유롭게 걸어다니며 사랑의 감정을 누리는 그들을 같이 보여준다. 결국 라몬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라몬은 죽기위해 하루하루를 보낸다. 글을 쓰고 방송을 하고 재판을 준비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절망에 빠진 한 여인의 방문을 받는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그는 여인에게 삶의 이유를 들먹이며 위로한다. 잃어버려서 절대 찾지 못할 것 같던 그 이유를 그는 알고 있었던 걸까. 영화의 후반부, 훌리아는 예전부터 앓아오던 퇴행성 다리질환으로 두 다리를 휠체어에 의지하게 된다. 그녀가 라몬을 찾아온다. 훌리아는 자신의 몸이 점점 마비되서 결국 식물인간이 될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도 남자와 같은 길을 선택하겠다고 한다.

죽음은 자신의 것일까. 스크린에선 죽음의 소유권에 대한 갈등이 벌어진다. 육체의 부자유가 삶의 반대말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주어진다. 죽음의 선택권이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될 때 쯤, 라몬의 아버지가 한 한마디가 기억난다. “아들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아들이 죽고 싶어한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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