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눈부처를 바라보자
서로 눈부처를 바라보자
  • 한대신문
  • 승인 2007.03.11
  • 호수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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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역만리 먼 땅에 와서 우리가 마다하는 일을 하여 돈 좀 벌어보자는 이주 노동자들이 죽음을 당했다. 지난 2월 여수출입국 관리 사무소 외국인 보호소에서 불이 나 9명이 숨지고 18명이 다치는 참사가 발생하였다. 아이들 불장난 같은 방화였지만, 방화시설은 없었고 문조차 열리지 않아 사람들은 철창 안에서 고통 속에 죽어갔다. 유족들의 절규처럼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의 죽음을 보면서 손이 잘리고 발이 잘린 채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추방당해 한국인을 증오하며 생을 영위하고 있는 제3세계의 이주 노동자들이 떠올랐다. 이어서 서독으로 떠났던 우리 광부와 간호사가 겹쳐졌다. 몹시 부끄러웠다.

한국인의 이중적인 ‘마름근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백인에게는 한없이 친절한 한국 사람들이 동남아 사람들이나 흑인들에게는 노골적으로 경멸의 태도를 보인다.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에 대해서는 거만할 정도로 당당하던 의원들이나 관료들이 선진국, 특히 미국을 만나면 머슴 행세를 한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한미 FTA도 마찬가지다. 가뜩이나 정치, 경제, 군사 면에서 미국에 종속적인 국가인데 그리 다 내주고 어떻게 나라를 유지할 지, 그래서 더욱 극심해질 양극화와 종속성을 어찌 감당할지 지금부터 걱정이다. 이런 이중성이 약소국민의 속 좁은 사대주의와 열등감의 발로일 뿐만 아니라 기회주의적인 생존전략 같아 더욱 안쓰럽고 수치스럽다.  

어찌 나라만이겠는가. 우리 학교를 둘러봐도 대동소이하다. 우리 학교에 유학 온 학생들이 근 800여 명 되는 모양이다. 유학생 중 백인계는 서로 친구하자 덤비고 중국계는 사람 따라 친교를 맺는다면 동남아나 흑인계 학생들이 교우관계를 맺으려 하면 애써 거절하는 경향이 강하단다. 일부 교수들은 권력을 가진 윗사람에 대해선 할 말조차 하지 못한 채 굽실거리면서 조교나 제자는 노예 부리듯 한다. 일부 학생들도 무서운 선배에게는 온 몸을 다해 충성을 하면서도 약한 후배들은 무시하고 윽박지른다.

상대방을 똑바로 마주 보면 눈동자에 내 모습이 보인다. 이를 우리말로 ‘눈부처’라 한다. 눈부처를 보는 순간 나와 타인의 경계가 무너진다.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 노동자는 다름 아닌 서독에 광부나 간호사로 간 내 형이요, 누이다. 우리 어머니를 강제로 위안부로 동원하여 욕보이고 우리 아버지를 고문으로 죽여서 그리 증오하고 욕을 퍼부어대던 그 일본 군인과 순사는 바로, 나보다 권력이 약한 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나 자신이다. 어떤 상황이든, 어떤 상대든 그에 대하여 내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관계라면 그 순간 눈부처를 바라볼 일이다. 이는 그를 부처로 만드는 것이자, 내가 부처가 되는 길이다.

이도흠<인문대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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