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문예상- 비평부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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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대신문
  • 승인 2006.12.02
  • 호수 12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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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 찬드라, 그녀의 시선을 옹호하며

박찬욱 감독의 ‘찬드라’는 근래에 본 영화 중 가장 작위적인 영화이다. 우리 사회의 불감증과 부조리를 근 7년간에 걸쳐 몸소 보여준 찬드라 사건을 영화화하면서 감독이 외국인 노동자문제와 정신질환자 혹은 부랑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고민한 흔적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사회가 바라보는 시선과 그들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한 화면에 나타내고자 몇 가지 형식적 변주를 행했다. 그 결과 실험성이 보다 보장되는 단편이라는 장르적 특성과 그 재기발랄한 박찬욱의 감수성이 화학 작용을 해 극영화와 다큐, 그리고 텔레비전의 재현 프로그램의 특성이 적당히 섞였다. 이 영화의 독특한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양측의 시선을 여러 장르적 특성에 바탕을 둔 시점을 가지고 이종교배 한 것. 이를 통해 감독은 어떻게 보면 가련하기도 하지만 한심해 보일 수 있는 찬드라를 적극 옹호한다. 또한 찬드라를 넘어서 대한민국의 사회 시스템이란 것이 얼마나 허술한지. 그리고 그 시스템을 초탈한 찬드라를 보여주며 쓴 웃음을 짓는다.

흑백화면에서 궁극에는 총천연색 컬러 화면으로 전환 되는 이 영화는 이렇듯 기본적으로 이분적인 세계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찬드라의 고향으로 들어간 카메라는 찬드라를 찾는다. 이때는 흑백이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종료되고 찬드라가 카메라 앞에 나타난 때부터 총천연색으로 바뀌며 네팔의 수려하며 장엄한 풍경을 보여준다. 한국에서 힘든 임노동자로 말 한마디 못하면 정신병자 취급받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의 마을 잔치는 이국적인 풍경이기에 앞서 행복한 축제이다.

흑백에서 컬러로의 전환과 함께 가장 크게 이분적인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은 카메라의 시점이다. 우리는 흑백 화면에서는 결코 찬드라를 마주하지 못한다. 대신 찬드라의 눈을 분한 헨드헬드의 거친 움직임에 떨리는 화면은, 찬드라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잘 표현한다. 그 외의 시점은 모두 전지적 시점으로 카메라 즉, 감독이 개입해 영화 내에 존재하는 시점이다. 그런데 이 전지적 시점은 단 하나의 구도를 고집한다. 첫 화면인 찬드라를 찾는 화면에서부터 줄 곳 정방형의 꽉 막힌 화면 정 중앙에 인물을 배치한다. 영화를 지배하는 숏은 바로 이 정방형 숏이다. 이 화면의 쓰임새는 텔레비전 리얼리티 재현프로그램의 그것과 유사하다. 실제 이야기의 인물들에게 그 당시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 이것들은 장르영화에서 쓰이는 시점 숏과 어우러져 재현 형식의 다큐도 극영화도 아닌 모호한 장르적 특색을 갖추게 한다.
그런데 마스터 숏으로 쓰이는 정방형 숏은 일반적으로 답답한 느낌을 준다. 답답한 화면으로 일관하는 이유는 찬드라의 심적 상태를 표현 한 것이 아닐까. 실제 사람은 정신이 없어 당황스런 상황에 빠지면 시야가 좁아진다. 꽉 막힌 세상. 그럴수록 돌파구는 줄어드는 셈이며,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을 상기해야 할 순간이다. 또한 이 숏을 유지하면서 찬드라의 시점과 카메라의 시점이 누구의 시선인지 헷갈리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의사와 첫 면담하는 장면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의사에게 설명을 듣는 것 같았는데 이네 틸트로 카메라가 심하게 움직인다. 그제야 이 화면이 찬드라의 시점임을 알게 해준다. 다큐도 극영화도 아닌 장르의 혼합처럼, 누구의 시선인지 모르겠지만 마찬가지로 갑갑한 현실이란 것의 방증이다.

박찬욱은 시점과 정방형 숏을 통해 찬드라 사건을 보며 일부 사람들이 가졌던 얼마나 부족한 사람이면 그렇게 세월을 보냈을까하는 의심에 강력한 항의를 표한다. 이는 찬드라에 대한 강한 옹호이다. 찬드라의 어지러운 시선으로 그녀의 심정을 표현하고 꽉 막힌 화면으로 찬드라가 처해진 상황을 보여준다.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과 말 한마디 통하지 못하는 상황. 사람에 대한 믿음은 연쇄적인 무관심에서 배신의 감정으로 돌아서고 이것과 비례해 맘에 문은 점점 닫힌다. 이런 찬드라의 내 외적인 심경을 가장 잘 보여준 방식이 바로 이런 재현 다큐형식을 빌려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다. 한국어 한 마디만 배워놓길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만, 찬드라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게 되고 그녀가 왜 한국 땅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는지 조목조목 따져가는 카메라 앞에서 우리는 그녀에게 깊은 연민의 정과 사죄의 맘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다. 찬드라의 시점 숏을 제외하면 재현과 첨언으로 이뤄진 영화에 파열구를 내며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지 못하게 하는, 혹은 중의적으로 이야기에 몰입하게 하는 장치가 존재 한다. 영화 전체에 3번 반복되 나오는 만큼 박찬욱의 치밀한 계산이 깔린 이 장치는 민무늬토기에  빗살무늬를 새겨 넣는 듯 영화를 더욱 정교하게 만든다. 그 장치 중 두 번은 서울 부녀자 보호소 복도 씬에서 나온다. 먼저 수용소 담당자를 따라 가는 카메라를 보고 황급히 자리를 피하시는 할머니는 시골 할머니만의 전형적인 반응을 연기인지 실제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기막히게 표현한다. 또한 찰나에도 노출욕을 감출 수 없는 어떤 여인의 허리춤에 그린 v자 표시는 그 여인의 바람과는 달리 일반적으로 편집 대상 일 순위에 놓일 것이다. 허나 영화에서는 그대로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국적인 네팔의 한 마을 축제 장면에서 갑자기 카메라가 뒤로 빠져서 축제를 촬영하고 있는 촬영 팀을 의도적으로 보여준다. 보통 통제된 상황 하에 촬영하고 편집한 영화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장면이기에 영화를 보면서 가장 튀는 장면이자 뇌리에 아로새겨진 장면이다. 이 장치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감독의 존재를 계속 상기시키며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미리 언급했듯 이 장치는 짐짓 거리두기만 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장면은 예외지만, 만약 이 영화를 사실 재현에 더욱 비중을 두고 보는 관객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그 핍진성에 더욱 매료될 수 있는 장치인 것이다. 박찬욱은 이런 장치를 통해 관객들이 일차적으로 이야기에 흡입되도록 하면서 또한 영화를 보면서 찬드라를 통해 비춰진 외국인 노동자 인권 문제 등에 생각할 틈을 벌여준다.

그렇다면 흑과 백, 사실 따라가기와 픽션의 경계, 카메라와 찬드라의 시선 등 이분화 된 세계관으로 이뤄진 형식으로 영화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일까. 단 한 번도 카메라 시야에 잡히지 않고 카메라의 시점으로 분했던 찬드라. 우리는 그녀가 카메라 앞에 처음으로 보이는 순간 자연색이 총 천연색으로 부활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찬드라의 시점이건 감독이 개입한 카메라의 시점이건 어차피 사실은 하나였다. 컬러로의 전환은 같은 사실이지만 상반된 시점이 합치되고 만나는 순간이다. 영화는 찬드라를 비추면서 비로써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 찬드라의 순수한 눈빛이 우리를 용서해 준 것일까.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는 우리에게 찬드라가 화면에 들어서는 순간 이 영화의 영문제목이 뜻하는 세상이 이뤄진 것이다. 그러나 박찬욱은 비록 찬드라는 이렇게 돌아와 잘 살지만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반복되질 않기를 바라는 듯하다. 영화 내내 불안한 시선과 함께, 꽉 막힌 화면으로 찬드라를 적극 옹호한다. 찬드라가 결코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얼마나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각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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