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문예상- 소설부분(1)
한양문예상- 소설부분(1)
  • 한대신문
  • 승인 2006.12.02
  • 호수 12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수 : 무량의 빛 김인숙<교육대학원·국어교육 5기>

나는 탑사를 돌다 우뚝 멈춰 섰다. 탑사는 인간의 소망이 응집된 소박한 건축물처럼 보였다. 노랑머리 셀파가 그 돌탑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나는 셀파를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셀파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외면하는 듯하더니 이내 마음씨 좋은 촌부처럼 웃어 보였다.    나는 어젯밤에 출발 시간을 놓고 그와 간단한 통화를 했었다. 그 전까지, 나는 그가 젊은 사람일 거라고 추측했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지긋한 중년이어서 약간 놀랐었다. 하지만 그가 목소리만큼 늙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삼십대 중, 후반쯤 돼 보였다. 나도 그를 향해 웃음을 내보였다. 최대한 명랑한 웃음을 지으려 했기 때문에, 그 웃음은 대상과 가장 먼 거리를 둔 것처럼 냉정하게 흘러 나왔다. 아무런 의미를 담지 않은 웃음이 짧은 시간 우리 사이에 오고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우리가 달리 취할 수 있는 방도가 없기도 했다. 우리의 눈빛은 고작 처음 스친 것이었고, 공식적인 얘기를 제외하면 단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눈길이 마주쳤을 때 서먹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바람꽃과 웨이가 탑사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셀파는 그쪽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즈에서 마른번개처럼 빛이 새어나왔다. 내가 보기에, 적어도 그들은 이미 서너 번 이상 함께 등반한 경험이 있는 듯했다. 서로 마주보며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고, 익숙한 사이처럼 허연 치아를 드러내 친근한 웃음을 머금기도 했다. 낯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들은 다정한 연인처럼 보이기도 했고, 허물없는 죽마고우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이들을 만난 것은 인터넷 동호회 때문이었다. 그다지 만나는 사람도 없었고, 최근 들어 일상은 무료한 햇볕처럼, 바람처럼 무심하게 흘렀다. 나는 그것을 많이 따분해했다. 그 리듬을 벗어난 색다른 뭔가를 연출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미혼들이 모이는 산악회였다. 아직 총각이다 보니 마음에 맞는 아가씨라도 만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가장 컸다는 걸 솔직하게 시인은 해야겠다. 게시판을 통해 올라오는 사진을 구경하고, 산행 후기를 읽고, 간간이 댓글을 달며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던 내가 첫 산행을 결행한 이유였다.
치악산 절경은 나무랄 데 없었고, 일행은 등산로 입구에서 서로의 닉을 소개하며 얼굴을 익혔다. 산길이 깊어지자 사람들은 하나 둘 유머 섞인 농담을 시작했고, 그 분위기에서 특별히 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가볍게 허허댔다. 나도 박자를 맞추기 위해 무진장 노력했지만, 그들의 농담도 웃음도 나와는 별개의 일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그래서 혼자 부끄러웠고, 또 어색해서 민망했다. 
바람꽃은 웨이와 촬영을 끝낸 후 돌멩이를 돌탑 위에 올렸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냄새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탱탱한 그녀의 젖가슴에 나도 모르게 자꾸 눈길이 가는 바람에 마음이 어지럽고 군색스러웠다.
“한 나문 님은 인상이 퍽 과묵한 분처럼 보여요.”
그녀가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대답대신 소리 없이 웃어 보였다. 잘 익은 홍옥처럼 그녀의 뺨이 햇빛에 볼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휴게소에서부터 지금까지 한 나문 님 목소릴 들어본 적이 없어요. 혹시 벙어린 건 아니시죠?”
나는 벙어리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내 목소리를 들은 그녀는 신기한 것을 본 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학생처럼 깔깔 웃었다. 그녀의 밝은 표정에 마음이 끌려 나도 목젖이 보일 만큼 호탕하게 웃었다.  
“한 나문 님, 우리 같이 사진 찍어요? 네?”
그녀의 목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첫 만남임에도 상당히 호감 가는 타입의 여자였다. 그녀가 다짜고짜 들이대는 ‘우리’라는 호칭이 노곤할 정도로 감미로웠지만, 정확한 발음의 ‘한 나무’라는 기호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그리고 호칭이 품은 무심함 뒤에 도사리는 어두컴컴한 거리감이 굴 속 같은 몸 속을 서느렇게 흘러내렸다. 
내가 바람꽃을 처음 본 것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였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두건을 만들어 머리에 뒤집어쓰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 모습은 참 이색적이었다. 온라인에서 만났을 때, 나는 그녀에게 별반 관심이 없었다. 합쇼체를 구사하는 그녀의 깍듯한 어투가 도대체 정감 가지 않았던 까닭이다. 나는 그녀가 정말 멋없는 조각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녀의 문체는 권위적인 것 같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소심하고 겁 많은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자기 몸을 사리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예의 바른 격식체였다. 기계가 주는 싸늘함 때문에 그녀의 어투가 더욱 부정적으로 부각돼 나에게 다가왔었다.
그런데 바람꽃은 나의 상상을 뛰어넘어 존재했다. 그녀는 상당히 육감적이었고, 매력적이었다. 한 사람이 어떤 변이를 일으켜 둘로 분화된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녀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정신이 다 얼떨떨할 지경이었었다. 나는, 그때 언어를 매개체로 한 상상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가를 새삼 깨달았다. 결국 상상은 일상과 동떨어졌다는, 그래서 더 없이 허무하다는 걸 그전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나는 그 허무맹랑한 상상력을 난감해하며 그녀를 오래도록 지켜보았었다. 그녀는 거기서도 셀파에게 사진을 부탁했었다. 포즈를 취하는 그녀의 모습은 주변과 묘한 조화를 이루기도 했고, 그것과는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없는 독특한 공해 같기도 했다. 자신을 주시하는 나를 바람꽃도 두리번두리번 훔쳐보는 듯했었다.
그러던 그녀가 이제 나에게 관심을 보이며 말을 붙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카메라만 눈앞에 갖다대면 이상하게 눈동자가 한쪽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꼭 범죄형 눈매가 돼버리곤 했다. 나는 인화된 나의 사진을 보며 무서움을 느끼곤 하던 터였다. 사진 속의 나는 현실의 나에게서 그 만큼 먼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나이면서도 동시에 내가 아니었다.
“한 컷 하자니까요!”
내가 계속 망설이자 그녀가 재촉하며 스스럼없이 나의 팔짱을 끼었다. 물큰한 그녀의 젖가슴이 나의 왼쪽 팔에 살풋 와 닿았다. 그러자 꼭 다정한 연인 같다고, 옆에 섰던 길끝이 장난스럽게 소리쳤다. 찰칵 소리와 함께 빛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팔짱을 뺀 뒤, 얼굴을 붉히며 나를 뒤로 밀어내고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목덜미가 보였다. 육감적인 엉덩이와 허리의 곡선, 그리고 구릿빛 살결을 가진 건강한 여자였다. 나는 성욕을 느꼈다. 그리고 꼭 어딘가에서 그녀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일행들은 여기저기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나도 카메라를 사고 싶었다. 계약직 노동자로 불안정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긴 했지만, 다음 달에는 꼭 카메라를 장만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순간을 포착하는 그 매력적인 사진 예술가 흉내를 내는 것도 그다지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바람꽃의 꿈틀거리는 엉덩이를 찍고, 가슴을 찍고, 나무를 찍고, 바람을 찍고, 야생화를 찍고 싶었다.
내가 관찰한 바람꽃은 사교적인 웃음을 잘 내보였고, 명랑했으며, 붙임성이 있었다. 한 마디로 세련된 여자였다. 휴게소가 지난 뒤, 버스간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줄곧 흥얼대던 바람꽃을 나는 떠올렸다. 팝송 같기도 했고, 샹송 같기도 한 노랫가락이었다. 내가 힐끗 거리자 웃음으로 답례하던 그녀의 얼굴에는 보조개가 패였었다. 뒤로 살짝 묶어 올린 머리채에서 서너 가닥의 올이 빠져 귀밑으로 흘러내려 여자 냄새를 짙게 풍기기도 했다. 말하자면, 휴게소 이후로 우리는 자주 눈이 마주쳤던 셈이었다. 나는 그것이 서로에 대한 호감의 첫 징후라고 생각했다.
사진을 찍고 났을 때, 나는 그녀와 상당히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피부를 접촉한 효과인 듯 싶었다. 멀어지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자 앞으론 자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녀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리고 야생화를 꺾어 그녀의 머리에 꽂아 줄까 잠시 망설이다 그만 두었다. 불편함을 느끼도록 타인에게 치근덕대지 말라는 동호회 회칙 한 대목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바람꽃은 거짓말처럼 멀어져 갔다. 그녀는 웨이를 향해 커다란 눈을 찡긋하며 또 웃고 있었다. 옅은 립스틱 사이로 유난히 도드라진 하얀 치아가 돋보였다. 나는 질투라고 단정하기는 곤란한 이상야릇한 질투의 감정 앞에서 심리적 불편함을 맛보아야 했다. 그래서 소모적인 감정을 정화시킬 겸 돌을 주워 돌탑 위에 올렸다. 그러나 무엇을 염원했는지는 잘 몰랐다. 여자를 소유하게 해 달라고 한 것 같기도 했고, 좀 안정적인 직업을 갖게 해 달라고 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것이 아니어서 몽롱했다.
주변은 몹시 소란스러웠다. 동호회 일행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비로봉 주위를 알록달록 수놓고 있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 탓에 나는 눈이 피곤했고, 정신까지 노곤해졌다. 산야를 정신없이 감상하고 있는 바람꽃조차 흐릿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녀 주변에는 여전히 카메라 불빛이 터지고 있었다. 빛은 산을 가로지르는 번개처럼 보였다. 나는 바위에 걸터앉아 야릇한 신비에 휩싸여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자식, 뭘 그리 뚫어지게 쳐다보냐?”
코드였다. 그녀는 너그럽고 여유만만한,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독소가 스며든 듯한 느낌이 드는 소녀 같은 여자였었다. 그녀를 상봉하기 전에, 나는 게시판 사진자랑에서 그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었다. 한쪽으로는 반가움이 일었고, 또 다른 한쪽으로는 치부를 마주한 것처럼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오르기도 했다. 친했던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친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던 그녀는, 대학 시절에 기숙사에서 한 학기 정도 함께 기거했던 동창 계집애였다. 내가 오래도록 기숙사에 머물러 있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친한 친구가 됐을지도 모르는 사이였다. 하지만 기숙사 생활에 진절머리를 느낀 나는 자취를 시작했고, 그 다음 학기에는 휴학을 해버렸다. 내가 다시 복학을 했을 때, 그녀는 졸업을 한 뒤였다. 그 뒤로 나는 그녀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용케도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너무 섬세하게 생겨 오히려 조잡해 보이는 그녀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미혼들만의 산악회에 그녀가 가입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아니 이 나라 지적 풍토라면 당연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를 발견했던 날, 나는 사진 밑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었다.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옛날처럼 친근감 있게 대하기가 어쩐지 머쓱했다. 게다가 기억 속의 동기와 코드가 쉽사리 연결되지도 않았었다. 그녀는 아련했고, 코드는 형체가 없었다. 산행에서 코드를 만난다면 얼싸 안고 반가워해야 할지, 그냥 가볍게 악수를 나눠야할지조차 모호한 실정이었다. 나는 셀파에게 코드의 연락처를 물어볼까 약간 망설이기도 했었다. 셀파는 산악회 총 책임자로 회원들의 신상 명세서를 모두 받아 놓은 사람이었다. 그는 등반할 산을 선택했고, 회칙을 정해 회원들을 관리했다. 그의 직업은 산악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코드를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었다. 우리가 아는 사이라는 걸 그다지 밝히고 싶지 않았었다. 이것이 한 달 전 일이었다.
그런 그녀를 오늘 출발지에서 처음 만난 것이었다. 예상대로 우리는 얼싸 안지 않았다.     “어어, 너, 혹시? 그래, 그래..... 너, 맞구나!”라며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했고, 건조한 반가움을 표했었다. 세상이 아무리 좁다지만 추억 속에서조차 이미 희석된 사람을 현실에서 다시 만난다는 것은 참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학교를 입밖에 내지 말자고 내게 은밀히 제의했다. 나는 약간의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거기에 흔쾌히 동의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서로의 일상에 대해서도 뻥긋하지 않았다. 익명의 만남은 가볍고 자유로워 행복했으며, 또 현실의 구질한 모습을 숨기고 적당히 근사해질 수 있어 좋았다. “너 혹시 바람꽃 알아?”
내가 물었다.
“꽤 자유로운 여자 같던데.....정확하게는 잘 모르지만서두.”
그녀의 말이 끝났을 때, 나는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코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나중에 또 보자고 하니까 코드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셀파를 멀끔 쳐다보았다. 그는 상하 모두 검은색 복장이었는데, 특히 멜빵바지를 입고 있어 말썽 많은 아동처럼 보였다. 황금색 머리카락에는 무스를 발라 놓았다. 나는 그가 꼭 양아치 사촌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허공 여기저기 셔터를 연신 눌러대고 있었다. 능선을 둘러싼 구름바다를 담으려 함이 분명했다. 구름에 둘러싸인 능선은 수묵의 세계처럼 깊고 고요하며 침착했다. 인간의 삶이 도저히 미칠 수 없을 정도로 숙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셀파는 그 모습을 게시판 <사진 자랑>에 올릴 모양이었다. 동호회 게시판 <사진 자랑>은 인터넷을 헤매는 수많은 익명의 물고기들을 향해 던지는 미끼였다.
그의 옆에는 웨이가 정좌한 채 단전호흡 중이었다. 삼십대 후반쯤 돼 보이는 웨이의 표정이 자못 엄숙했다. 어느 사찰에 입정한 승려처럼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는 약간 변별되는 느긋함이 배인 사람이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짧은 머리카락이 아무렇지도 않게 바람에 날렸다. 나뭇잎이 바람에 수런거렸다.
“명상에 방해되지 않죠?”
“물론입니다.”
그는 숨을 길게 뱉어내며 대답했다. 내가 올 것을 예견이라도 한 듯한 말투였다. 나는 그의 곁에 앉았다. 계곡을 지나온 공기는 습기를 품고 있어 눅눅했다. 멀리서 바람꽃이 또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메마른 흡연 욕구를 느꼈다.
“담배 한 대 하시겠어요?”
내가 필터를 건네자, 웨이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의 눈동자가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 모습은 사시처럼 보였는데, 보통 사시와는 다르게 눈매가 사뭇 매서웠다. 나는 그가 왜 줄곧 썬그래스를 끼고 있었는지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자신의 눈매에 신경이 곤두 서 있음을 눈치챘는지, 그가 오래도록 햇볕을 잘못 쐬어 그렇다고 말했다. 나는 괜히 무안해졌다. 나는 홀로 필터에 불을 붙였다. 그가 손으로 바람을 막아주었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분홍빛 손톱이었다. 그 손톱은 죽은 경수 형님을 연상케 했다. 형님의 손톱도 여자처럼 연분홍 빛이 감돌았었다. 그 손으로 사과를 깎아 건네주었고, 라면을 끓여주었고, 방 청소와 설거지를 했다. 형님의 일손은 우리 고아원에서 가장 야무졌다. 입양 상견례가 있을 때마다, 형님은 계집애처럼 동생들의 머리를 다듬어 주었고,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었었다. 그리고 검은 승용차를 탄 낯선 사람들이 도착할 때면, 정작 자신은 뒤로 슬쩍 숨어버리곤 했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제법 어른스럽게 말했던 형님은 열 아홉의 나이에 오토바이 사고로 즉사했다. 길바닥에 형님의 피가 흥건하게 말라붙은 걸 경찰들이 튜브로 씻어냈고, 우리는 그들 옆에 올망졸망 서서 씻겨 내려가는 붉은 핏물을 구경꾼처럼 바라보았었다. 형님의 핏물은 아래로 흘러내려 대지에 스며들었다. 형님은 그렇게 고아원을 떠나갔다. 그때 우리는 아무도 울지 않았었다. 왜 울어야 하는지를 몰라 눈물이 나지 않았었다. 눈물은 사랑과 이별을 아는 자의 본능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청년이 된 뒤에야 그 사건을 떠올리며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바람도 맑았고, 새소리가 들려왔다. 웨이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담배를 깊게 빨아 당기며 물었다. 
“산악회 가입한 지 오래 됐어요?”
“회사 산악회가 흐지부지 되면서 여기 들어왔지요. 체계적인 회원관리 때문에 믿고 오는 거죠. 앞으론 한 나문 님도 자주 나오세요. 웹 서핑만 즐기지 마시고…. 자주 자주 봐야 사람이 정도 들고, 없던 일도 생기는 거 아니겠습니까?”
“혹시 바람꽃 님과 자주 등반했어요?”
나는 망설임 없이 대뜸 말머리를 돌렸다. 그녀에 대한 노골적인 관심의 표시였다.
“한 마디로 모델 같은 여자죠. 섣불리 단정 짓긴 곤란하지만, 뭐랄까, 뭔가 익숙한 맛이 나는 여자요.”
눈을 뜬 그가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채 얼굴 근육과 눈매를 미세하게 움직였다. 아무래도 그녀의 냄새를 떠올리는 모양이라고, 나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단정지었다. 그러자 답답한 침묵이 짧게 흘렀다. 무수한 향수 입자가 결합된 듯한 그녀의 냄새는 내게도 짙었었다. 사진을 찍을 때, 나의 왼쪽 가슴을 살짝 스치던 물큰한 젖가슴도 잊지 못할 추억처럼 애틋했다. 그 느낌은 시원의 양수를 허우적거릴 때처럼 아늑해서, 나는 오래도록 그대로 서 있고 싶었었다. 어쩌면 이것이 여자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나에게 그 어떤 것도 남겨 놓지 않으려는 듯 급하게 자리를 옮겨버렸었다. 나는 그때 내 심장 한 복판에 고였던 알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
나는 열쩍은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아까 근사한 포즈 잡고 사진 찍으시던걸요.”
“제가요?”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감을 잡지도 못하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한참만에 “아하, 바람꽃 님과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벗어 던졌던 장갑을 배낭에서 꺼내 끼었다. 바람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을 잇지도 않았다. 
“손바닥에 이상한 습진이 생겨 병원 갔더니 쇠줄을 잘못 잡아 그렇다더군요. 산에 다닐 때 빼면 쇠줄 잡을 일도 없는데 싶어, 얼른 장갑 한 컬레 샀죠. 몸에 이상 생길 때만큼 걱정되고 우울한 일도 없어요. 뭐니뭐니 해도 건강이 최고지요. 옆에서 누가 바라지 해 주는 것도 아니겠고….”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여자처럼 수다스럽다고 생각했다. 웨이의 표현대로 바람꽃은 모델 같았다. 나는 계속 그녀에게 눈길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녀는 풀어헤친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여러 사람들과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하지만 난해 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형체를 선명하게 그릴 수 없는 어떤 분위기가 그녀의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투명 안개와 흡사한 아주 특이한 아우라였다.
“바람꽃에게 관심 있나보지요?”
몸에 배인 습관처럼 숨고르기를 반복하며 웨이가 무심한 척 물어왔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지요. 그런데 몇 번 다녀보니, 그게 참 우둔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말하자면, 이런 곳에선 특정 사람과의 인연보다는 여러 사람들과 부담 없이 자유롭게 대활 나누며 인간에 대한 자기 편견을 벗어나는 길을 찾는 게 남은 인생에서는 더 좋을 것 같더라구요. 그 깨달음 이래 저는 산에 오면 이성에 대한 그리움을 그냥 벗어 던져버리죠. 지금은 숨쉬기하는 것처럼 여자들이 자유롭고 편합니다. 버리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기 마련인가 보다 생각했지요. 짝을 못 찾은 쓸쓸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서두.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게 인생인 것을….”  
그는 경수 형님처럼 친근감 있고 따뜻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 산을 내려가면 자신의 일상과 이곳이 직접 연결된 게 단 한가지도 없을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산에 와서는 산길만 따라 걷는 게 삶의 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산행의 후유증을 며칠 견디고, 그러다 또 산 생각이 나면 산을 찾아들고, 그때마다 낯선 사람들과 어우러져 처음처럼 산행을 즐길 모양이었다. 그것은 일상의 연결고리가 모두 끊어진 허공에 인맥을 쌓는 것과 비슷했다. 산행은 책을 읽는 것과 비슷해 자신이 느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양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름의 개똥철학을 바탕으로 소화해야만 삶에 보탬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허공에 쌓은 인맥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발견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저도 처음엔 코드 맞는 처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산악회에 가입했어요. 그런데 산행을 하면서 애초에 갖고 있던 그 기대가 산산조각 났지요. 오히려, 이 사람, 저 사람과 대활 나누며 내가 얼마나 틀에 박힌 사골하며 살아왔나 깨닫게 되었다고 해야할까요. 게다가 개인적인 고민거리를 일상의 그 누구 앞에서보다 더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조언을 구할 수도 있었구요. 앞으로도 산에 오면 나는 그렇게 머물다 가볍게 떠나고 싶더군요. 아무에게도 구애받지 않으니 편하기도 하구요.” 
그는 정말 편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안면 근육이 보일 듯 말 듯 꿈틀거렸다. 짝을 찾는 본능은 부끄러울 정도로 단순하지만, 그 만큼 절박한 생존이고 퇴폐였다. 그런데 그런 진실을 숨긴 채 그는 단정한 가부좌를 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은폐가 고상해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천하고 불결했다.
웨이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람꽃의 향기에 젖어 있었다. 흘러내린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끊임없이 펄럭였다. 잘 익은 포도송이처럼 짙은 빛깔을 내는 그녀의 머릿결은 볕에 반사된 물결처럼 탐스럽고 아름다웠다. 그녀의 육체는 변함없이 육감적이었다. 나는 숨이 막히고 어지러웠다.
“미약한 관념은 자기 자신도 언어로 재현할 수 없나봐요. 나는 바람꽃이 저렇듯 매력적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글과 실물이 완전 따로국밥인걸요.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나는 그녀가 매력적이라고 자연스럽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아무 소리도 내지 않던 웨이가 “동감이요!”라는 반응을 내보였다. 나는 씩 웃고 말았다. 선글래스 너머로 엷게 비치는 그의 두 눈동자가 나를 낯설게 응시하고 있었다. 도망쳤던 경수 형님이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온 뒤의 눈빛과, 그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보모 님이 말썽 많은 동생들을 심하게 때렸던 날, 형님은 원장 선생님의 예물 시계를 훔쳐 아무도 몰래 고아원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가 왜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왔는지, 또 학교를 그만 두고 하필 피자 배달을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쨌든 형님이 죽자 영희도 고아원을 소리 없이 나갔다. 이제 더 이상 고아원은 자신에게 의미가 없다고 영희는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만약 형이 죽지 않았다면, 지금쯤 영희는 형님과 결혼을 했을 나이였다. 어엿한 아가씨가 된 영희를 내가 새삼 상상하는 일은 그다지 쉽지 않았다. 나는 영희가 언제 고아원에 들어왔는지, 또 어디로 가버렸는지도 몰랐다. 원장 선생님은 영희가 그냥 독립을 했다고, 청소하라는 말처럼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었다. 그런 영희는 다시 고아원을 찾아온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나를 버린 부모를 잊듯 그렇게 영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셀파가 “자, 출발입니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카메라를 정리했고, 웨이도 엉덩이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꽃은 길끝을 따라 선봉대로 출발했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여자처럼 그녀가 한없이 익숙했다.    하지만 그 형상은 망막 너머로 미처 파고들지 못한 그림자처럼 가뭇가뭇하기만 했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어깨를 정신없이 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웨이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의 등을 툭 치며, “자, 우리도 이제 갑시다!”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떠났다. 바람이 푸새를 쓸고 지나갔다. 바람꽃이 자꾸 눈앞에 밟혔다. 나는 바람꽃의 발자국을 더듬으며 한참 동안 말없이 걸었다. 바람꽃과 영희가 어딘가 모르게 닮았다고 생각했다. 원장 선생님은 경수 형과 영희가 사귀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벌써 연애질을 한다고 노골적으로 꾸짖곤 했었다. 저러다 아이라도 덜렁 낳아 화장실이나 휴지통에 버리면 제 팔자 되물림하는 것밖에 더 되겠냐며 이맛살을 찌푸리며 몹시 싫어했다. 어린 내 가슴에도 영희가 들어 있을 무렵이었다.
나는 침묵에 빠져 과거를 헤매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일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때, 약간의 머뭇거림이 묻은 어투가 뒤에서 들려왔다. 선봉대로 출발했던 길끝이었다.
“아까 먼저 출발하지 않았어요?”
나는 대답대신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아, 네에.... 볼일 좀 보느라......처졌죠, 뭐.”
아직은 오줌 줄기가 한창일 나이였다. 이십 대를 가까스로 벗어난 서른 살이라고, 자신을 밝힌 길끝이었다. 나는 그의 젊음을 부러워했다. 산 입구에서 “한 나뭅니다!”라고, 내가 닉을 밝히자, 그는 “아하!”라며 아주 짧은 탄성을 내질렀었다. 그리고 나도 ‘길날을 기억했다. 그의 글에는 산보다 사람을 먼저 보는 따뜻한 시선이 있었다. 그래서 산과 사람이 함께 살아 있었다. 나는 그의 형상을 그려보고는 했었다. 나이가 지그시 든 아저씨 같기도 하고, 산전수전 다 겪은 총각 같기도 한 그의 문체는 은은한 향기를 품은 한 떨기 금강초롱처럼 스산하고도 수수로웠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하곤 했다. 그런 그가 지금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반가운 일이었다.
“그, 그렇군요. 근데, 아, 아직은 좋을 나이죠….”
서른 다섯의 나는 말을 더듬으며 그의 젊음에 뜬금 없는 찬사를 보냈다. 아직은 그럴 나이도 아니건만 나는 스트레스로 인한 전립선에 시달리고 있었다. 시원스레 배설할 수도 없었고, 배설 후에도 잔뇨가 남아 있어 끝이 늘 찝찌름했다. 한밤중에도 일어나 화장실에 가면 만족스럽게 볼일을 볼 수가 없었다. 
“예전에 님의 글 읽으면서 뾰족뾰족한 털을 가진 고슴도치 생각이 났어요.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거리가 있어야 짙푸른 절경을 만들 수 있다던, 그게 바로 거리의 아름다움이라는.....   이론상으로는 참 그럴 듯한데도, 실상 부진한 일상과 맞닿으면 그게 참 어려운 얘기거든요. 사람을 깊이 알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타인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기도 하고, 본능적으로 다가가고 싶어하죠. 이를테면 마음에 담은 그 타인과 같아지기를 무의식적으로 원하고 있는 거에요. 프로이드의 말처럼 더 성숙한 단계로 발전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동일시를 꿈꾸는 거죠. 이렇게 봤을 때, 사람 사이의 거리 유지를 꿈꾼다는 건 사랑해보지 못한 자의 자기 변명이거나, 그럴 듯한 위선의 논리가 아닐까 싶었어요.”
그는 대뜸 인터넷에 게시한 나의 글 얘기를 꺼냈다. 닉의 의미를 소개하는 코너에서, 나는 ‘한 나무’의 의미를 밝히며, 사람은 나무와 나무처럼 거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피력한 적이 있었다. 즉,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을 때 가장 가까운 사이다. 너무 가까이 다가오거나 다가가면 서로의 가슴에 상처를 주거나 받기 마련이다. 나무와 나무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 관계는 가장 원만하고 자유로우며 아름답다. 산야의 짙푸른 절경도 나무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거리의 아름다움이다.”를 운운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길끝이 지금 그 글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그는 아주 명확한 발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막힘 없이 술술 풀었다. 하지만 나는 과거에도, 지금도, 어쩌면 미래에도 한 그루 나무처럼 살아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침묵을 선택했다. 그러자 내가 참 조용한 편이라고 그가 말했다. 나는 조용한 사람이 돼야 한다는 의무감에 젖은 사람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발걸음을 두벅두벅 옮겼다. 눈앞에는 여전히 바람꽃이 서성거렸다. 아니 까마득한 기억의 저편에 묻힌 영희 같기도 했다.
“바람꽃 님은 먼저 갔나보지요?”
나는 슬며시 말의 방향을 돌려 그녀 얘기를 꺼냈다. 우리의 대화는 끝간데 없이 퍼지고 있었다. 이제 닉은 내게 그다지 의미가 없기도 했다. 어쩌면 무의미한 글자의 조합일 뿐이었다. 길끝은 동문서답을 주워섬기는 나를 의아한 눈빛으로 한 번 쳐다본 후 대답했다.
“참, 그 여잔 사람 사귀는 달인 같더군요. 뒤따라오던 사람들 속에 파묻혀 아마 선두 자릴 고수하고 있을 게요.”
바람꽃에 대한 적당한 조롱과 냉소가 묻은 어투였다. 나는 그만 비위가 상해버렸다. 뿐만 아니라 짜증스러움과 신경질이 갑작스럽게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럼, 바싹 붙어서 꼭 뭔가를 부수고 상처를 내야 사람 관계가 깊어진단 말이요?”
나는 그의 궁금증에 대한 답변을 그제서야 시작했다. 각자의 토양에서 자란 나무는 그 토양에 걸맞는 나뭇잎을 만들어 햇빛을 쐬고 수분을 방출할 것이었다. 아무도 그 나무의 생장에 관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여자를 보면, 한때는 분명 궁금했을 어미를 떠올렸고, 고아원 누이를 떠올렸고, 또 나의 정액을 받아줄 여자의 아늑한 자궁을 생각했다. 한 여자가 내게 몸과 마음을 맞길 때, 나는, 환희에 젖어 그녀의 토양을 혼신의 힘을 다해 바라볼 것이었다. 그녀의 토양을 변화시키지도, 나뭇가지를 꺾지도, 광합성을 방해하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그것이 내가 말한 거리(距離)의 아름다움이었다. 나무와 또 다른 나무가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말하자면, 사람 사귀는 달인이든, 혼을 빼먹는 귀신이든, 그건 한 그루의 나무가 존재하는 방식일 뿐이요. 님이 괘념치 마시요!”
나는 불필요하게 언성까지 높여 껄끄럽게 말했다. 왜 저러나 하는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이  빤히 쳐다보았다. 길끝 또한 몹시 황당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뒤돌아보는 웨이와도 나는 눈이 짧게 마주쳤다. 먼 곳을 쳐다보는 듯한 시커먼 그의 썬그래스가 어둠처럼 막막했다. 그 어둠 너머에는 나와 같은 욕망이 꿈틀꿈틀 명멸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연적처럼 쏘아보았다.
“근데, 제가 님께 뭐라고 했습니까? 왜 소릴 지르고 그러시죠?”
나의 공세에 몰렸던 길끝이 겨우 정신을 차린 모양인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주 정중한 그의 어투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젠 내가 어리벙벙해졌다.
“사람이란 게 원래 본능에 민감한 동물이라오. 아무리 고상한 이념을 가졌다 하더라도 본능이 충족되지 못하면 스타일이 그대로 망가지죠. 짝짓기도 가장 치열한 생존 본능이 아닐까 싶어요.”
웨이가 그 사이를 가로막으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팽팽한 긴장이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나는 웨이에게도 너무 마음을 열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람꽃을 변호하기 위해 길끝에게 성급히 소리를 질렀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부끄러웠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 본 여자와 섹스를 생각한 게 수치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생존 방식이었고, 종족 본능을 위한 암컷에 대한 수컷의 이끌림일 뿐이었다.
“아무리 봐도 한 나문 님은 아직 청춘이요, 청춘!”
나를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웨이는 한 마디 더 던졌다. 길끝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바람꽃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파악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게 적잖이 실망한 눈치였다. 사이버에서 받은 나의 이미지가 그대로 깨졌다는 시늉을 했다. 푸새를 흔들던 바람이 숨을 죽였다. 우리는 각자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여 헐떡헐떡 침묵을 삼키며 발걸음을 옮겼다. 땀이 등줄기에 배이기 시작했다. 짙푸른 낙엽수들이 파라솔처럼 태양을 가렸건만, 공기는 아열대를 연상케 할만큼 후덥덥했다. 산길은 평지와 달라 오르막길과 내리막길로 이어졌고, 능선과 능선을 연결하는 길의 굴곡도 평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모든 길이 조심스럽고 낯설었다. 
“그나저나 바람꽃이란 여잘 언제부터 봐 왔더랬소?...... 벌써 아삼륙 돼 버린거요?”
길끝의 낮고 조용한 발음이 어색한 침묵을 깨고 고막을 두드렸다. 그녀가 나의 팔짱을 끼었을 때, 나는 딱딱하게 굳은 근육의 부드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결여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녀의 젖가슴이 살갗을 스칠 때, 나는 이것이 바로 여자인가 했다. 그리고 가슴이 부풀어오르다 공기의 압박에 내리 눌리듯 숨막혔다. 또 내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시간이 멈춘 듯 했고, 또 심장이 혈액의 용솟음에 맞춰 깊은 곳에서 두근거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아주 짧은 순간의 움직임에 지나지 않았다.
“.......”
“역시 그렇군요.”
“나는 두 분께 욕망을 들켰소. 하지만 비밀에 붙여두고 싶군요. 우리가 익명이듯, 그녀와 나도 익명에 지나지 않으니까.”
나는 무안해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길끝은 아주 실망한 눈치였다. 나는 그런 길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어떤 여자에게 성욕을 느끼든, 막말로 하룻밤 속옷을 벗기든 그가 관여할 일이 아니었다. 삶은 순전히 개인의 몫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그는 아직 모르는 철부진 모양이었다. 물론 우리는 게시판을 통해 1년 정도 꾸준히 친분을 쌓아온 터이기는 했다.    하지만 익명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것은 성인의 일이 아닌 듯싶었다.   내가 웨이에게서 한순간 경수 형을 보았다 해서, 그가 그 형이 될 수 없고, 길끝 역시 ‘한 나무’란 이미지를 통해 어떤 환상을 그렸든, 그건 그의 허상일 뿐이었다. 이미지는 본인이 그려낸, 지극히 개인의 취향에 맞는 자신의 허구라는 게 나의 지론이었다. 한 인간에 대한 순간적 통찰이나 직관을 나는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저는 한 나문 님이 특정인에게 집착하지 않고, 나무처럼 단단하게 살아갈 거란 생각을 품었죠. 집착은 허약한 자신의 나체를 드러내는 것이니까요. 글이 견고한 나무 같았죠. 그런데, 글이 글쓴이의 의식을 담은, 더 깊게는 삶의 실천적 철학을 담아낼 것이란 생각을 했던 건 순전히 제 독해 실력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네요. 지금 충격을 받은 건 제 독해 실력 때문입니다. 사기로 조합한 문잘 가지고 사람의 뿌리를 보려했다니.....!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지요.”
‘사기로 조합한 문자’라는 말이 나는 몹시 신경 거슬렸다. 그리고 나와 대화 도중에 그가 줄곧 자신을 점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약간 당혹스럽기도 했다. 그는 나에게 애당초 관심이 없었고, 오직 자신의 내적 발전에만 신경을 곤두세웠음이 분명했다. 그가 나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처음부터 내가 그에게 배제됐다는 사실은 나를 무척 자존심 상하게 했다. 심지어는 묘한 배신감까지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 다양한 감정이 버무려진 유쾌하지 않은 감정을 꾹 삼켜야만 했다. 그는 나와 실오라기 한 올 얽히지 않은 타인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생각이 들자 더 이상 그의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잠시 후에 다시 마음이 편해졌다. 길끝은 푸새를 쓸던 바람처럼 그렇게 멀어져 갔다. 만남과 이별은 스스럼이 없었고, 가벼워서 가슴에 부채를 남기지 않았다.
대신 바람꽃의 냄새는 갈수록 짙었다. 그녀는 나의 시상하부를 가득 채워 감각 신경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나는 그녀의 나체를 껴안을 황홀한 상상을 하며 걸었다. 시간은 지루하지 않게 흘렀다. 일행은 걷던 길을 멈추고 바위에 걸터앉아 오이를 깎아먹으며 땀을 축였다. 산길은 끝이 없었고, 봉우리도 사람만큼 제 각각이었다.
휴식 시간이 지났을 때, 바람꽃이 다시 다가왔다. 그녀의 란제리가 겉옷 밖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나의 음경과 고환에 힘줄이 섰다. 그리고 민망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래도 첫 산행은 아니신가봐요? 산을 굉장히 잘 타시는데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흥분에 몸을 떨었다.
“그냥 평상시에 운동을 좀 하는 편이죠. 그랬더니 놀라울 정도로 몸이 가볍군요.”
겨우 흥분을 진정시킨 나는 그녀와 익숙한 사람처럼 말을 받았다. 내리막길에서는 그녀와 나의 몸이 밀착됐다 멀어졌다 하며 나를 전율시켰다. 산길이 가파르거나 험하면, 나는 스스럼없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아무 망설임 없이 내 손아귀에 의지해 발걸음을 옮겼다. 때때로 그 사이를 비집고 호젓한 새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산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그녀가 헐떡헐떡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십 대 땐 이 산 저 산 홀로 다녔죠. 서른 넘으니 혼자서는 도저히 엄두가 안 나던걸요.  혹시 잘못되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에. 겁이 좀 많은 편이죠. 그런데, 바람꽃 님도 늘 선두에서 달리시던걸요. 산을 많이 타 본 솜씨 같던데, 맞아요?”
“원래 산골 출신이에요. 어릴 때부터 앞산 뒷산을 종주하며 다녔어요. 시골에는 산이 많잖아….”
그녀는 갑자기 말을 뚝 끊었다. 내가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그녀의 볼 위로 파운데이션에 뒤섞인 하얀 눈물이 난데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매력이, 그녀에 대한 나의 또 다른 이미지가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어 문득 처량해지며 괜히 짜증이 나려고 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어릴 때 나를 본 사람들은 어른이 된 나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더라구요. 언젠가 한 번 어릴 때 살던 곳을 갔더니…. 모든 일이 그렇듯이 사람은 잊혀지는 존잰가 봐요. 그래서 제게도 지나온 모든 사람이 까마득하고 허망해요. 어릴 때 보아온 산이며, 나무며, 꽃이며, 새소리는 이렇게 여전한데 말이에요.”
그녀는 대책 없이 흘러내린 눈물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그녀에게는 또 다시 투명 안개 같은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거기에는 빈 항아리 냄새가 났다. 그 모습은 처음 그 자리에서처럼 매력적이었다. 원장 선생님이 영희를 나무라면 영희는 그냥 울었다. 그때마다 경수 형은 원장실 밖에서 영희를 기다리며 서성거리곤 했었다. 눈물로 얼룩진 영희가 밖으로 나오면 나중에 피자를 꼭 사 줄 테니 제발 바보처럼 울지 마라고 형은 영희를 달랬다.   영희는 주인의 손길이 절대로 가 닿지 않을 빈 항아리 같은 계집애였다.  
“당신의 향기가 참 좋군요!”
내가 말하자, 그녀가 여성 특유의 냄새를 풍기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더니 오줌이 마렵다고 했다. 나의 속마음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몸을 가릴 수 있는 곳으로 숨었고, 나는 오래된 연인처럼 망을 봐주었다. 솨 풀잎 젖는 소리가 귓가를 쳐댔다. 나는 그 소리를 따라 마약에 취한 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미 바지를 여민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에 떠밀린 듯 나의 가슴속으로 바람처럼 파고들었다. 나도 어미의 품속으로 안기듯 풍성한 그녀의 젖가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나 나의 가슴은 더욱 메말라 갔다. 나는 그녀를 거칠게 다루었고, 그녀는 나의 모든 요구를 용납했다. 바람에 가랑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숨소리는 쫓기는 자처럼 다급했다. 나의 가슴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드문드문 사람들의 발길 소리도 들렸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얼마 뒤에 풀숲을 나왔고, 아무 말 없이 다시 산길을 걸었다. 뒤늦게 산을 내려왔을 때, 일행은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장마가 끝난 뒤의 계곡 물은 맑고 거셌다.
“두 사람 도대체 어딜 갔다 오는 거야?”
얼굴빛이 하얗게 변한 코드였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잠시 사라졌다는 것조차 모르는 듯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꽃이 허적허적 다른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걱정하셨습니까?”
내가 코드의 말을 정중하게 받아 거리감을 두었다. 바람꽃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음부에 난 상처의 고통스러움을 참으려는 듯 인상을 잔뜩 쓰고 물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코드와 나는 한동안 서로를 쏘아보았다.
“너, 혹시 학교 깠어?”
그녀가 힘을 잔뜩 실은 목소리로 주변 눈치를 봐가며 낮게 뇌까렸다. 나는 아무 감정을 싣지 않은 채 고개를 저으며, “아뇨.”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의 혈색에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심한 굴욕감을 느꼈다. 세상 어디에서든 동창 따위는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아주 짧고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한 일행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코드와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 급, 급류에 사, 사람이 휩쓸렸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계곡 물에 씻겨 떠내려갔다. 뒤늦게, 그 사람이 바로 바람꽃이라는 말이 들려왔다. 나는 몸에 힘이 쫙 빠지며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런데 신기할 정도로 정신이 맑아지며, 나는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불쑥 드는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는 분명 처음이자 마지막 여자 같기도 했고, 또 고아원 누이 같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미 그것은 과거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119 구조대가 와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길끝과 웨이의 시선이 신경 쓰였고, 잠시 사라졌던 우리들의 알리바이를 증명하기도 결코 쉽지 않을 듯 싶었다. 갑작스레 온몸에 피곤이 확 몰려왔다. 나는 코드에게 먼저 자리를 뜨겠다고 말했다.
“이, 철면피 같은 자식! 너, 기껏 사이버 간음을 즐겼니? 맞아, 넌, 학교 다닐 때부터 삼류였어. 너는 내가 물살에 휩쓸렸어도 물끄러미 바라봤을 놈이야. 그것도 나무의 존재 방식 운운하며! 어디, 그 잘난 개똥철학 또 한 번 까보시지. 인생에서 중요한 건 ‘왜?’라는 물음보다 ‘따라서’라는 결론이라니 뭐라니 하며…. 개떡 같은 자식!”
아무래도 그녀는 흥분한 것 같았다. 나는 코드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꽁무니를 내뺐다. 경찰이 몰려와 성가시게 하기 전에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한참 내려오다 일행들 쪽을 슬그머니 돌아보았을 때, 코드는 사람 사귀는 달인이라던 바람꽃처럼 이리저리 계곡을 서성이고 있었다. 웨이는 멍하니 급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산길 옆으로 흐르는 계곡에는 양말 한 짝이 붉은 포말에 섞여 떠내려오고 있었다. 바람꽃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나는 죽은 경수 형님이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배꼽이 생각났다. 그녀의 배꼽은 너무 작아 뱃살 안에 깊게 파묻혀 있었다. 국화빵 모양을 한 그것은...... 어느 원주민의 자손처럼 태어나면서부터 버림받은 자의 것이었다. 나는 그 배꼽에 입을 맞추었다. 거기에는 주인의 손길이 가 닿지 않는 빈 항아리 같기도 하고, 또 누군가의 눈물 같기도 한 이상한 맛이 스며 있었다. 사람들 가슴에 내가 꾹 찍혔으면 좋겠어...... 내가 사진처럼 그렇게 세상의 가슴에 새겨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그렇게 외롭진 않겠지...... 환한 빛 속에 파묻힌 사람처럼...... 그렇게 그렇게 환한.......빛처럼....... 
그녀는 내 목을 끌어안고 적막하게 속삭였었다. 그런 그녀가 이젠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없었다. 고아원을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던 영희처럼 바람꽃도 이젠 치악산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를 싸고돌던 카메라 불빛이 연신 머릿속을 번득이는 것 같았다.
나는 비로소 그녀 이름이 궁금해졌다. 나이는? 직업은? 그리고 처음 같고 또 마지막 같던 그녀를 이제 다시는 마주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했다. 대신 지방 신문 꼭지 기사를 통해 그녀를 대충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왜 인생은 희극을 연출할 수 없는 것일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