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잘 날 없는 K-콘텐츠의 사춘기
바람 잘 날 없는 K-콘텐츠의 사춘기
  • 신준엽 기자
  • 승인 2023.05.15
  • 호수 1566
  • 5면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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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두사 ‘K’는 △K-드라마 △K-영화 △K-POP 등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우리 문화 콘텐츠에 붙는다. K-콘텐츠는 전 세계를 가리지 않고 큰 열풍을 몰며 한국의 자랑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이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다. 일부 K-콘텐츠에선 다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지 않고, 심지어는 비하했단 지적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 인종차별로 논란이 된 드라마 「라켓소년단」의 한 장면이다.
                                  ▲ 인종차별로 논란이 된 드라마 「라켓소년단」의 한 장면이다.

성장통 겪는 K-콘텐츠
최근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K-콘텐츠에 대한 △문화 훼손 △역사 왜곡 △인종차별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를테면 지난달 방영된 예능 방송 「장사천재 백사장」이 도마 위에 올랐다. 모로코와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 사이 영토분쟁지역인 서사하라를 중립지역으로 표시해 논란이 된 것이다. 이에 모로코 시청자들은 프로그램의 대표 출연자 백종원의 SNS에 항의 댓글로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또한, 지난해 국내외로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수리남」은 자국을 마약과 비리의 온상으로 왜곡했다며 수리남 정부의 공식적인 항의를 받았다. 지난 2021년 방영된 드라마 「라켓소년단」는 인종차별 논란이 일기도 했다. 작중 인도네시아는 배드민턴 대회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스포츠맨십이 없는 나라로 묘사됐다. 이에 불쾌함을 느낀 인도네시아 시청자들은 인종 차별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런 문제가 유독 최근 들어 조명받기 시작한 배경엔 K-콘텐츠의 시장이 확대된 것에 있다. 과거 K-콘텐츠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한류 콘텐츠는 해외에 판권을 수출하지 않으면 해외 소비자에게 다가갈 길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 K-콘텐츠는 K-POP의 성공과 OTT 플랫폼의 등장으로 세계 시장으로의 접근성이 좋아졌다. K-콘텐츠는 이제 수많은 언어로 번역, 더빙돼 전 세계에 공유되고 있다. 이렇듯 시청하는 문화권이 다양해지면서 기존엔 주목받지 않았던 문제가 조명받기 시작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문제를 비교적 짧은 시간에 우리나라의 콘텐츠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생긴 부작용으로 본다. 박기수<국문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미국은 세계 엔터테인먼트 시장 장악까지 약 100년, 일본은 약 70년이 걸렸다”며 “우리나라는 단기간에 급격한 성장을 하다 보니 문화적 저항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를 정제할 능력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국내 시장만을 전제로 콘텐츠를 제작하다 갑작스레 세계 시장에 진출하면서 부족했던 한국의 문화 감수성이 여실히 드러나고 만 것이다.

부족했던 문화 감수성
전문가들은 K-콘텐츠가 세계 시장을 전제로 제작되지만, 막상 다른 문화권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다고 본다. 심지어 특정 인종이나 국가를 소재로 콘텐츠를 제작할 경우 부정적인 편견을 확산할 수 있단 점을 고려하지 않는 작품도 많았다. 박 교수는 드라마 「수리남」을 예로 들며 “한 국가를 부패하고 폭력이 난무한 마약 생산국으로 묘사하는 데 굳이 국가의 명칭을 그대로 쓸 필요는 없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드라마 「수리남」은 제작 단계부터 수리남 정부의 국가 이미지를 훼손한단 우려가 있었다. 이에 한국 외교부는 수리남과의 외교적 분쟁을 막기 위해 OTT 플랫폼과 협의하여 영문 제목을 ‘수리남’ 대신 마약 대가란 뜻의 ‘Nacro Saint’로 변경했다.

또한, 같은 내용이어도 콘텐츠 소비자의 문화와 역사에 따라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단 것을 고려하지 않아 문제가 됐다. 우리나라 사례에 대입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만약 해외에서 제작한 콘텐츠에 동해를 일본해로, 독도가 다케시마로 표기한 지도가 나온다면 우리나라 국민들 대다수가 분노할지도 모른다. 이런 역사적 갈등이나 분쟁을 겪는 국가는 우리뿐이 아니다. 김강석<한국외대 아랍어과> 교수는 예능 방송 「장사천재 백사장」에 모로코인들이 분노한 이유를 두고 “모로코는 과거 스페인이 지배하던 서사하라를 1970년대 중반부터 사실상 장악하고 통치했다”며 “서사하라 주민들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지만, 모로코는 해당 지역 영유권을 주장하는 상태이므로 현지에선 아주 민감한 문제”라 설명했다. 방송 「장사천재 백사장」이 아직 영토분쟁이 진행 중인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K-콘텐츠 속 적나라한 인종주의도 문제가 됐다. 정회옥<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는 개항기부터 백인들은 우수하고 유색인종은 열등하다고 받아들이는 인종차별적인 사회였다”며 “한국 사람보다 피부색이 어둡거나 백인으로 간주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의도치 않게 콘텐츠에 투영되는 것”이라 지적했다. 드라마 「라켓소년단」의 경우 주인공이 역경의 상황을 이겨내는 장면에서 인도네시아를 문화 수준이 낮고 이기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비열한 국가로 묘사했던 것이 문제였다. 제작진들이 의도하진 않았더라도, 은연중에 인도네시아인들은 그럴 것이란 편견이 반영된 것이다. 정 교수는 “한국 사람들은 아직 자신들이 인종차별적 편견이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다른 분야에도 불똥 튀어
이런 문제는 논란이 된 콘텐츠만을 향한 문제 제기와 불매로 끝나는 게 아니다. K-콘텐츠와 한국의 국가 이미지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윤석진<충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K-콘텐츠의 이미지는 한국과 관련될 수밖에 없다”며 “콘텐츠에 대한 불매가 단순히 문화 콘텐츠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다른 한국산 재화나 수출품에 대한 불매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 2월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K콘텐츠 산업조사’와 관세청 수출입 무역통계에 따르면,  지난 2021년 959만 달러였던 인도네시아의 K-POP 음반 수입액은 드라마 「라켓소년단」의 인도네시아 비하 논란 이후 지난해엔 368만 달러로 떨어졌다. 또한, 인도네시아의 한국 방송프로그램 수입액도 지난 2019년 262만 달러에서 지난 2021년 152만 달러로 대폭 줄었다.

대책이 필요한 시점
이렇듯 차별·혐오 표현으로 인한 문제가 잦아지자, 일각에선 이 같은 문제를 규제하거나 방지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 마련돼야 한단 의견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20년 중국 동포 단체가 영화 「청년경찰」의 제작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우리 법원은 화해 권고 결정을 내렸다. 사실상 문화 콘텐츠 속 혐오 표현에 법적 책임을 물은 것이다. 정 교수는 “규제와 가이드라인이 표현의 자유와 충돌하긴 하지만 일정 수준의 가이드라인은 필요하다”며 “이를 계기로 콘텐츠 제작에 만연한 인종차별적 관행에 대해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면, 규제나 가이드라인은 표현의 자유를 해칠 우려가 있기에, 그보단 창작자가 윤리 의식을 지녀야 한단 입장도 있다. 윤 교수는 “창작자는 특정 인종이나 국가 같은 소재를 단순히 흥미 요소로 쓰는 것을 넘어 콘텐츠가 사회에 줄 영향을 고려하는 도덕과 윤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콘텐츠가 사회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한단 것이다. 또한, 산업적인 측면에서 보면 규제가 없어도 시장의 논리에 따라 자연스레 해결될 것이란 입장도 있다. 박 교수는 “콘텐츠는 결국 시장에서 통용돼야 살아남는다”며 “규제가 없어도 시청자들이 원하는 방향에 따라 콘텐츠는 변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더 좋은 K-콘텐츠가 되기 위해
전문가들은 앞으로 콘텐츠 제작자들이 타국의 문화와 역사를 다룰 때 신중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목소리를 모은다. 박 교수는 “해외 진출을 전제로 한 콘텐츠는 기획 단계부터 진출할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고려해야 한다”며 “일방적으로 문화를 전달하기보단 이해하고 교류할 수 있는 상호주의가 바탕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거나 특정 인종이나 국가를 소재로 쓸 경우 오해의 소지를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 윤 교수는 “특정 인종이나 국가를 배경으로 할 경우 전달하고자 하는 기획 의도를 명확하게 하고 오해의 여지를 줄여야 한다”며 “문제가 될 수 있을 땐 허구로 설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말했다. 실제로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선 중동의 이라크를 배경으로 한 나라를 이라크라고 하지 않고 ‘우르크’라는 가상의 나라로 설정했다. 이는 실제 국가 이름을 사용할 경우 부정적으로 묘사된 장면이나 대사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외교적 문제를 방지하기 위한 제작사의 선제적 대책이었다.

세계를 휩쓸고 있는 K-콘텐츠는 동방에 있는 작은 나라인 우리 한국을 알리는 얼굴이나 다름없다. 그 얼굴에 먹칠하지 않도록 우리 사회에선 여러 논의가, 콘텐츠 제작자들은 콘텐츠 윤리 함양이 필요한 시점이다.


도움: 김강석<한국외대 아랍어과> 교수
윤석진<충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정회옥<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사진 제공: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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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원 2023-08-01 11:47:18
콘텐츠의 영향력과 시장성이 높아질수록 책임감 있는 제작과 윤리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규제와 가이드라인도 중요하지만, 창작자들 스스로가 문화 감수성을 갖추고 사회적 영향을 고려하는 데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좀 더 나은 K-콘텐츠를 위해 지속적인 논의와 윤리적인 콘텐츠 제작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