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올바름에 소설 속 표현도 변한다
정치적 올바름에 소설 속 표현도 변한다
  • 신준엽 기자
  • 승인 2023.05.01
  • 호수 1565
  • 4면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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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의미는 사회적 약속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약속이 변하면서 의미도 변한다. 원래는 부정적이지 않던 말이 시간이 지나면서 부정적인 의미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쓴 문학 속 표현이 현대에 와서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의미로 변한다면 수정돼야 하는 걸까? 이 문제에 직면한 일부 해외 출판사에선 유명한 소설의 개정판을 출간하면서 작품 속 표현을 수정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이게 왜 차별적 표현이야?
이런 변화의 배경엔 정치적 올바름이 있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지난 1980년대에 미국을 중심으로 차별하거나 혐오가 될 수 있는 표현을 쓰지 말잔 취지로 시작된 인권 운동이다. 취지에 공감한 지지자들이 일상 언어에 숨겨져 있던 차별 표현에 문제를 제기해 올바른 언어를 장려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남간호사, 여군처럼 특정 직업에 성별을 붙여 부르던 걸 간호사, 군인으로 바꿔 부르는 식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하나의 사회 현상이 되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기존엔 인지하지 못했던 차별 표현을 밝혀냈다.
 

탈바꿈하는 소설들
문학계에서도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독자가 늘어나면서 명작이라고 여겨진 작품들도 심판대에 오르고 있다. 이에 일부 출판사에선 유명 작가의 작품을 정치적 올바름에 맞춰 수정한 개정판을 내고 있다. 개정판에서 수정된 내용은 주로 △성차별 △외모 비하 △인종차별 표현이다. 로알드 달의 소설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나오는 움파룸파족을 부르는 말은 남성을 전제하는 단어인 ‘men’에서 중성적인 단어인 ‘people’로 변경됐다. 사람의 무리를 묘사할 때 남성을 기준으로 삼는 표현에 성차별적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소설 속 인물을 묘사한 ‘뚱뚱한(fat)’은 ‘거대한(enormous)’으로 대체됐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 또한 인종차별 표현 때문에 수정의 대상에 올랐다. 소설 「스타일즈 저택의 괴사건」에선 주인공이 한 등장인물을 향해 ‘물론 유대인’이라 언급하며 특정 인종의 편견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삭제됐다.

이런 움직임은 국내에도 퍼졌다. 지금껏 우리 문학계에선 해외 작품을 번역할 때 현실 사회의 가부장 권력관계를 작품 속에도 반영시키는 풍토가 있었다. 예를 들면 경어가 없는 해외의 작품을 번역할 때 상황이나 맥락과 관계없이 여성 등장인물은 주로 남성 등장인물에게 경어를 쓰며 순종하는 등 수동적인 대상으로 그려진 것이다. 김은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번역은 있는 그대로 말을 옮기는 게 아니라 시대의 감수성, 문화를 바탕으로 해석하는 것”이라며 “그동안 해외 작품 번역에 한국 사회에 암묵적으로 깔린 가부장적인 문화의 관습이 담겨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관행은 독자들의 성인지 감수성이 향상되며 깨졌다. 작품 설정이 아니라면 등장인물 간 관계를 평등하게 재설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처녀’ 같은 성차별적인 표현을 성중립적 표현인 ‘독신녀’로 수정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그동안 문학이란 이름에 가려 작품 속 묘사된 성차별과 폭력을 예민하게 보지 못했다”며 “일상에서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잘못됐다 인식하고 비판적 질문을 하자 재검토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변화하는 소설에 엇갈리는 반응
한편, 정치적 올바름에 따라 기존 문학 작품의 내용을 수정하는 것에 관한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을 옹호하는 측은 부적절한 내용과 혐오적인 표현을 담고 있다면 수정되는 게 합당하단 입장이다. 영문학을 전공한 홍은영<국제대 간호학과> 교수는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언어엔 사람들의 사상과 생각이 반영돼 있다”며 “시대가 변하며 문학이 따라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답했다. 실제 표현이나 문장을 수정한 개정판을 출간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반면, 정치적 올바름에 따른 수정을 반대하는 측은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작품도 그 자체로 가치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수정하면 안 된단 입장이다. 임지훈 문학평론가는 “문학은 시대상을 반영하기 때문에 보존돼야 하고, 윤리적으로 나쁘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며 “오히려 그런 작품이 그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로알드 달의 소설 「마틸다」엔 아이들의 교육을 지원하지 않는 부모, 폭력을 일삼는 교장 선생이 등장한다. 이는 당시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단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홍 교수는 “현대 독자가 과거의 작품을 읽고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소설의 내용을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란 것이다.

출판계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따른 개정판을 내놓은 건 일종의 마케팅 전략이란 시각도 존재한다. 임 문학평론가는 “현대의 잣대에 맞춰 수정한 개정판을 냈다는 건 그 이전의 판본들은 혐오적인 표현을 담고 있는 유해한 작품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라며 “개정판은 이전 판본보다 좋은 상품이라는 걸 알려 구매를 유도하는 의도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한 개정 작업은 주로 꾸준히 읽히는 인기 소설을 위주로 진행되고 있다.

문학계가 가야 할 길은
문학 작품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해야 하느냐에 대한 논의는 현재 진행 중이다. 무비판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면 대체할 수 없는 표현까지 수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가령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난장이’만큼 주인공을 확실하게 상징할 수 있는 표현이 있을까? 불필요한 상황에 혐오 표현은 독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지만, 적재적소에 쓰인 표현은 문학의 작품성을 한층 강화한다. 임 문학평론가는 “작품 전개, 인물 묘사를 위해 차별·혐오적인 표현이 필요하다면 사용해야 하지만 굳이 안 써도 되는 상황엔 쓰지 않는 게 좋다”며 “그런 표현을 씀으로써 일부 계층에게 비판받을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표현을 사용하든 작가의 자유지만, 그 표현에 누군가는 불편할 수도 있단 것을 인지해야 한단 것이다.

원문의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내용과 표현을 수정하는 것에 대한 논의도 이어져야 한다. 전문가들은 원문 자체를 수정하는 것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임 문학평론가는 “같은 단어라도 시대와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며 “당대의 표현을 지금의 관점에서 재단하고 제한하는 것보단 각주나 주석 형태로 설명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엔 의식되지 않던 표현들에 의문을 제기하게 됐다. 하지만 차별적 표현을 제한하는 움직임이 강요되면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원문을 해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도움: 김은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임지훈 문학평론가
홍은영<국제대 간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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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원 2023-08-01 12:04:00
작품 속 표현이 시대적 변화에 따라 의미가 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수정할 때 작가의 의도와 작품성을 얼마나 존중해야 하는지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되, 작품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수정하는 것이 적절한 접근 방법일 수 있겠습니다. 표현의 자유와 사회적 가치를 균형있게 고려하는 논의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