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라] 제가 기억력이 좀 나쁜데요, 괜찮아요
[아고라] 제가 기억력이 좀 나쁜데요, 괜찮아요
  • 이예빈 기자
  • 승인 2023.03.20
  • 호수 1562
  • 6면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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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왜 그걸 기억을 못 해?’ 필자가 주변인에게 종종 듣는 말이다. 짙은 타박이 묻어있는 말이지만 억울하진 않다. 필자가 느끼기에도 본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어떤 것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책 읽고 공부한 내용은 기억하면서 친구가 나눈 대화는 가위로 싹둑 자른 것처럼 기억이 없는 식이다.

필자는 학창 시절 아주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한 명 있다. 그맘때 필자가 세상에서 제일 동경하는 친구였다. 하지만 친구가 필자의 삶에 녹아들어 정서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게 됐을 즈음, 필자는 그가 자살 기도를 했단 사실을 알게 됐다. 오랜시간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왔단 사실 또한. 크게 놀랐지만 동요하진 않았다. 자해하는 친구도, 그가 자해할까 두려워하는 필자 본인도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 뒤 필자는 한 아이돌 멤버가 자신의 SNS에 올린 자해 상흔을 보고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당시 필자는 사진을 본 본인의 반응이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진인데, 하물며 사진의 주인공이 사망한 것도 아닌데 팔목의 칼자국을 보자마자 몸이 떨리고 눈물이 흘렀다. 종국엔 숨 쉬는 것마저 어려워 복도의 사물함을 열고 얼굴을 묻었다. 어떻게든 진정하고 싶었지만 통제에서 벗어난 목구멍과 폐는 초단위로 숨을 들이쉬기만 했다. 찰나에 이러다 죽는 건가 하는 터무니 없는 생각도 스쳤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그 이상한 증상은 전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의 일환이었다. 가까운 사람의 자살 기도와 자해를 보며 생긴 트라우마는 필자가 모르는 새 폭탄처럼 마음에 심어져있던 것이다. 그때부터 필자는 특정 기억을 드문드문, 조금밖에 기억하지 못하게 됐다. 다른 기억엔 전혀 이상이 없는데도 말이다.

이제 누군가의 자살 기도나 자해 상흔이 필자를 몸서리치게 하진 않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기억력이 좀 나쁜 애’로 살아가게 될지 모르겠다. 여전히 불리한 기억이나 스트레스 받던 상황, 잊어버리고 싶은 것들은 머릿속에 빈칸으로 기록되기 때문이다. 기억 못 하는 필자를 보며 상대가 답답한 만큼, 떠올리려 할수록 눈앞이 새하얘지는 필자 또한 갑갑한 날들이 좀 더 이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또한 두렵거나 걱정되지 않는다. 늘 그랬듯 달라진 환경에 적응할 스스로를 믿기 때문이다.

지난해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던 시기, 전국적으로 필자처럼 어떤 트라우마 증상을 경험한 이들이 상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이젠 겨울에서 완연한 봄으로 넘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그 시간에 얼어있는 마음들도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전부 헤아릴 순 없겠지만, 혹여나 필자처럼 트라우마란 변덕스러운 녀석에게 시달리는 이가 있다면 대단할 것 없는 필자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었다.

필자 본인도 수년 전부터 지금까지 트라우마의 변덕에 현재 진행형으로 당하고 있지만, 미세하게라도 보이는 진전을 믿고 버티다 보니 힘들어 울기만 하던 그 경험을 소재로 글도 쓰는 날이 왔다. 부디 모든 이들이 춥고 어두운 시기에 굳세게 버텨 그 경험을 기록하고 세상에 나눌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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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원 2023-08-01 13:38:35
트라우마로 인한 영향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며, 또 다른 사건들과 연관되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필자의 강한 의지와 성찰적인 글쓰기는 힘든 상황에서도 희망을 보여줍니다. 이런 이야기를 공유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겪는 어려움에 공감하고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