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 가작] 소외된 시대
[2022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 가작] 소외된 시대
  • 김나연<사범대 국어교육과 20> 씨
  • 승인 2022.11.28
  • 호수 1558
  • 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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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대한 공감

<타인의 방>은 1971년 『문학과지성』 봄호에 발표된 최인호의 단편소설로, 현대인의 소외를 다룬 작품이다. ‘소외’란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 상태에 놓이는 일을 의미한다. <삼포 가는 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 1970년대 문학 작품을 배울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단어이지만 나는 늘 그 작품들에 공감할 수 없었다.  

1970년대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소외가 새로운 문제로 인식된 시기이다. 사람들은 당대 사회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었으므로 그것을 다룬 문학에 공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2010년대의 청소년이던 나에게는 추상적이고 지금과는 거리가 먼 일로만 느껴졌다.

최근에는 ‘이것이 현대인의 소외인가’라는 생각을 할 때가 가끔 있다. 대면 학기가 시작되면서 해가 지고 귀가하는 날이 많아졌다. 문을 열면 6평 월세방 대신 어둠으로 가득 찬 넓은 공간만이 내 눈 앞에 나타난다. 끝없는 어둠에서 빠져나오지 못 할 것만 같은 두려움으로 인해 집 안에 들어서기 망설일 때가 있다. 

<타인의 방>의 주인공 ‘그’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것 같다. 그는 나와 달리 집 안의 조명이 켜졌을 때이지만, “낯선 곳에 들어선 사람처럼 어리둥절하게 서있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생 때였다면 <타인의 방>도 두꺼운 벽 하나를 두고 읽었겠지만 위와 같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생겼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곧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에 대해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아파트. 가족 관계, 소리 등 <타인의 방>에 드러난 소외의 요인은 2022년 현재와 이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그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 

 

아무도 없는 복도, 열리지 않는 문

<타인의 방>의 시대적 배경인 1970년대는 전후 피폐했던 경제가 산업화를 통해 성장을 이룩한 시기였다.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 구조가 완성되면서 나타난 물질만능주의는 화폐 가치에 따라 인간의 가치를 서열화했다. 그리고 인간을 사물로 전락시켜 소외를 유발했다. 이는 부의 양극화, 환경 문제와 함께 당대의 주요 문제 중 하나였다. 물질적 풍요와 이전까지 중시되던 정신적 가치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1970년대 문학은 현실에의 대응을 형상화했다. 

최인호의 문학도 그러하다. 그는 197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어느 누구보다 예리하게 포착함으로써 모순된 현실에 문학적으로 대응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평론가 김치수는 최인호의 작품세계를 4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주인공이 어린이로 등장하는 경우, 둘째, 장편소설 형식으로 전개되는 경우, 셋째, 도시적 삶의 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개인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경우, 넷째, 현실의 단면을 제시하는 경우이다. <타인의 방>은 세 번째 경우에 해당하며, 최인호는 이 작품을 통해 도시 주거 공간의 한 형태인 ‘아파트’에서 현대인의 소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파트는 ‘그’가 거주하는 공간적 배경으로, 작품이 창작된 1970년대 초부터 한국에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즉, 아파트에 거주하는 인물들은 근대화의 최전방에 선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파트의 구조적 특징은 고립을 유발했다. 최인호는 이에 주목했고 <타인의 방>에서 아파트는 ‘그’가 겪는 소외와 고독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심한 피로감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온 ‘그’는 초인종을 눌러 아내가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린다. 아내가 나오지 않자 ‘그’는 손에 경련이 일 만큼 초인종을 누르다가 나중에는 문을 부숴버릴 듯이 두드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둘씩 현관문을 열고 그 집엔 아무도 없는 것 같으니 그만 돌아가라고 말한다. 그제야 ‘그’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보였지만 사람들의 경계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우리는 이 아파트에 거의 삼 년 동안 살아왔지만 당신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소.”

“아니 뭐라구요?”

그는 튀어오를 듯한 분노 속에서 신음 소리를 발했다.

“당신이 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해서 그래 이 집 주인을 당신 스스로 도둑놈이나 강도로 취급한다는 말입니까. 나두 이 방에서 삼 년을 살아왔소. 그런데두 당신 얼굴은 오늘 처음 보오. 그렇다면 당신도 마땅히 의심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겠소.” (p.65)

 

‘그’는 같은 층 주민들에게 이웃이 아니라 강도, 타인으로 취급받으며 소외되고 있다. 그 이유는 아파트의 구조에 있다. 언뜻 보면 아파트는 이웃과의 소통에 최적화된 곳이다. 담장으로 경계가 나뉘는 단독 주택과 달리, 우리 집의 벽이 곧 다른 집의 벽이 되어 이웃과의 거리가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한정된 지역에 과밀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지어졌기 때문에 동일 면적 대비 인구 밀도 또한 아파트가 단독 주택보다 훨씬 높다. 

그러나 현실은 3년 동안 옆집에 살아온 사람의 얼굴도 모른다는 것이다. 좁고 긴 복도는 집에 들어가기 위한 통로일 뿐 이웃과의 소통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두꺼운 철문은 이웃과의 접촉을 차단한다. 아파트의 벽은 이웃과의 공유물이 아닌 단절을 유발하는 칸막이인 것이다. 

50년이 지난 현재, 아파트는 보편적인 주거공간이 되었다. 이는 이웃으로부터의 고립이 보편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나 또한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이사 온 지 3년이 되었지만 옆집, 앞집 주민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방까지 오는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했고 아파트 복도에도 사람이 없었다”라는 것을 “운수 좋게”, 점점 당연히 여기게 되었다. 소통의 통로이어야 할 아파트 복도는 굳게 닫힌 문의 나열에 불과하게 되었다. 아파트의 구조적 한계가 현재까지  고독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결여된 사랑, 가족이 사물이 되는 순간

‘그’는 자신을 타인 취급하는 이웃에게 분노하며 “문을 쾅 닫아” 이웃과의 단절을 공고히 했다. 그러나 ‘그’의 소외는 집안에 들어와서도 끝나지 않았다. 집밖에서의 고독감이 이웃으로 인한 것이었다면 집안에서는 아내의 부재가 원인이다. 아내는 화장대 거울 아래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기고 집을 비웠다. 

 

여보, 오늘 아침 전보가 왔는데, 친정아버님이 위독하시다는 거예요. 잠깐 다녀오겠어요. 당신은 피로하실 테니 제가 출장 가신 것을 잘 말씀드리겠어요. 편히 쉬세요. 밥상은 부엌에 차려놨어요.

당신의 아내가 (p.66)

 

메모를 본 ‘그’는 남편을 반겨야 할 아내가 집에 없음에 화를 내고 “심한 고독”을 느낀다. 앞서 ‘그’를 ‘근대화의 최전방에 선 사람’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성향을 보인다. 열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어주는 것은 아내 된 도리이며”, “아내가 문을 열어준 후에 들어가는 것이 남편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가장 근대적인 공간에서 가장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1970년대의 모순을 표방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화를 내던 중, “거울 속에서 주름살을 잔뜩 그린 늙수그레한 남자를 발견”하고 “맹렬한 욕”을 퍼붓는다. 그 남자는 자기 자신이다. 가장 편안해야할 장소인 집에서조차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은 ‘나의 방’을 낯선 ‘타인의 방’으로 만들었다. 가부장적인 ‘그’의 기대를 충족하지 않는 아내는 물리적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부재한 상태이다. 아내는 남편을 인간이 아니라 사물로 여기고 있다. 이는 아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작품 말미에 잘 드러난다.

 

그녀는 곧 잃어버린 것이 없는 대신 새로운 물건이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물건은 그녀가 매우 좋아했던 것이었으므로 며칠 동안은 먼지도 털고 좀 뭣하긴 하지만 키스도 하긴 했다. 하지만 나중엔 별 소용이 닿지 않는 물건임을 알아차렸고 싫증이 났으므로 그 물건을 다락 잡동사니 속에 처넣어버렸다. (p.78)

 

“새로운 물건”이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나는 그것을 ‘그’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는 남편은커녕 인간에 대한 단어도 등장하지 않는다. “매우 좋아했던 것”, “별 소용이 닿지 않는 물건” 등 사물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물건을 남편이라고 추측한 이유는 “키스도 하긴 했다”와 아내가 다시 방을 떠나기 전에 남긴 두 번째 메모 때문이다.

 

여보. 오늘 아침 전보가 왔는데 친정아버님이 위독하다는 거예요. 잠깐 다녀오겠어요. 당신은 피로하실 테니 제가 출장 갔다고 할 테니까 오시지 않으셔두 돼요. 밥은 부엌에 차려놨어요.

당신의 아내가 (p.78)

 

언뜻 보면 첫 번째 메모와 같아 보이지만 다른 부분이 있다. 첫 번째에는 “여보”와 “왔는데” 뒤에 쉼표가 있으나, 두 번째에는 마침표뿐이다. 전자는 다음 말이 부드럽고 여유롭게 이어지지만 후자는 말이 끊기고 급하게 읽게 된다. 그리고 “편히 쉬세요”가 “오시지 않으셔두 돼요”로 바뀐 부분은 남편을 배려하기보다 배제하는 느낌을 준다. “밥상”이 “밥”으로 바뀐 것도 성의가 부족해 보인다. 

두 번째 메모는 아내가 ‘그’를 사랑하는 남편에서 거추장스러운 ‘사물’의 위치로 밀어낸 상태임을 보여준다. 집에서 남편을 보았음에도 직접적인 대화가 아닌 쪽지를 남기는 모습은 말 한 마디 건넬 애정도 갖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반복되는 아내의 외출은 ‘그’의 소외가 끝나지 않을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가족 관계는 어떤가. 보험금을 타기 위해 남편을 살해한 아내, 아이를 낳자마자 죽인 부모, 늙고 병든 부모를 시설에 유기한 자식 등 비인간적인 관계가 만연하다. 물건 대하듯 버려지고 방치된 사람들은 ‘그’와 같이 가족과의 진정한 애착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고립된 것이다. <타인의 방>을 통해 사랑이 결여된 가족 관계가 소외의 원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리를 통한 소외의 극복과 실패

인간적 가치를 잃고 사물화된 ‘그’의 소외는 주로 청각적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가 낸 것으로 인식되는 ‘그’의 소리, 타인이 낸 것으로 인식되는 ‘그’의 소리, 사물이 내는 소리이다. 

‘그가 낸 것으로 인식되는 그의 소리’는 고독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신음하거나 욕을 하거나 낄낄 웃기도 하면서 자기만의 소리환경을 창조한다. ‘소리환경(soundscape)’은 1960년대 말 캐나다의 작곡가 셰이퍼(R. Murray Schafer)가 제창한 개념으로, sound와 landscape의 합성어이다.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소리로 이루어진 하나의 풍경을 의미하며, 눈을 감고 10초 동안 가만히 있을 때 들리는 소리의 조합이 바로 소리환경이다. 소리환경의 구성 요소로는 비생물적 자연에서 나는 소리인 지오포니(geophony)와 인간이나 가축을 제외한 생물이 내는 소리인 바이오포니(biophony), 인간이나 가축으로 인해 만들어진 소리인 앤스로포니(anthrophony)가 있다. 

‘그’는 아내의 부재로 고독을 느낀 후, 아내가 끄지 않아 윙윙거리고 있는 트랜지스터를 끈다. 그리고 “쉴새없이 투덜”거린다. 지오포니만으로 가득 찬 소리환경을 변화시키려한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스스로 소리를 냄으로써 결여된 앤스로포니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가 두 번이나 반복해서 부르는 노래는 그 노력 중 하나이다. 

  

나뭇잎에 놀던 새여. 왜 그런지 알 수 없네.

낸들 그대를 어찌하리. 내가 싫으면 떠나가야지. (p.69)

 

이 노래의 주제는 자신을 떠나려는 새에 대한 원망과 체념으로, 상황상 ‘새’는 아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노래 모두 ‘그’가 목욕을 하면서 또는 끝마치고 벌거벗은 상태로 불렀다는 점은 ‘그’가 본질적인 소외를 느끼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를 극복하고자 사물 위주의 소리환경에 인간성을 추가하여 스스로를 새로운 소리환경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타인의 소리로 인식되면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역시 집이란 즐겁고 아늑한 곳이군”, “그럼 행복했었지. 행복했었구말구”와 같이 긍정적인 정서의 발언을 타인의 것으로 여긴다는 점은 해당 발언에 고독감이 잠재하고 있었음 암시한다. 이렇게 ‘타인이 낸 것으로 인식되는 그의 소리‘는 고립이 자아정체성의 상실로 이어짐을 보여주었다.

‘사물이 내는 소리’는 집안의 각종 물건들이 의인화된 표현이다. 

 

그가 스위치를 내리자, 벽에 도료처럼 붙었던 어둠이 차곡차곡 잠겨서 덤벼들고 그들은 이윽고 조심스럽게 수군거리더니 마침내 배짱 좋게 깔깔거리고 있었다. 말린 휴지 조각이 베포처럼 늘려 허공을 난다. 닫힌 서랍 속에서 내의가 펄펄 뛰고 있다. 책상을 받친 네 개의 다리가 흔들거리기 시작한다. (p.76)

 

사물은 말을 하고 움직일 수 있는 주체성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는 다리부터 시작하여 온몸이 굳으며 사물이 되어갔다. ‘그’가 이 상황들에 체념하고 저항하지 않는다는 점은 인간이 사물에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겼음을 의미한다. ‘사물이 내는 소리’는 집 안의 소리환경을 구성하는 주체를 사물로 설정하며 ‘그’를 배제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소리환경으로 인한 소외를 경험하고 있다. 소리환경을 이용해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오히려 고독은 심화되었다. 나는 자취방에서 주로 노래를 듣는다. 아니, 듣지 않더라도 재생해놓는다. 지오포니가 독점한 나의 소리환경에 가수의 목소리라는 앤스로포니를 추가함으로써 고립감과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사람들의 대화가 뒤섞인 길거리에서는 이어폰으로 노이즈캔슬링 기능까지 사용하며 독립된 소리환경을 창조한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으면 가끔 옆에 누가 와도 어깨를 두드리며 부르지 않는 이상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타인의 방>과 마찬가지로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소리가 개인화와 파편화의 원인이 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소외를 해결하기 위한 작은 실천, 대화

<타인의 방>에는 인물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다. 인물은 ‘그’, ‘아내’, ‘여인’, ‘사내’로만 제시된다. 이러한 익명성은 그들에게 주체로서의 고유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대신 객체로서 존재하게 만든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인물이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 아내도 사랑이 결여된 부부관계를 맺고 있고, 여인과 사내 또한 이웃을 3년 만에 처음 본 소외된 사람들이다. 

익명성은 <타인의 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에게 해당될 수 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독자는 현대인의 소외가 1970년대에 한정되지 않고 본인이 살고 있는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2022년의 우리는 그것이 진행되고 있음을 아파트와 가족 관계, 노래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벽 너머에 사람이 살고 있는지 아닌지도 알지 못하고, 가족과는 한 공간에 살고 있을 뿐 개인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파편화된 관계를 맺고 있다. 또한 고독을 극복하기 위한 노래는 오히려 우리를 주변 사람에게서 분리시킨다. 

그렇다면 소외와 고독, 고립의 해결방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주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하다. 길고 심각한 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감사 인사 한 마디가 기분 좋은 하루의 원동력이 되는 것처럼 간단한 것부터 시작하자는 의미이다. 

물론 약 50년 동안 존재해 온 사회 문제를 한 순간에 해결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지속적으로 노력한다면 문제는 해결되리라 믿는다. 오늘부터 복도에서 이웃을 마주치면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 가족과 일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학교나 직장에서도 이어폰을 착용하는 대신 옆에 앉은 동료에게 안부를 물어보는 것은 어떨까.


1) 오창은 (2004). 도시 속 개인의 허무의식과 새로운 감수성. 어문론집, 32, 249-270.
2) 최인호, 『타인의 방』. 민음사(2005). (이후의 인용문은 페이지 수만 기재한다.)

참고자료

최인호, 『타인의 방』. 민음사(2005).
심재욱 (2015). 최인호 단편소설 「타인의 방」 서사구조 연구. 우리문학연구, 45, 287-311.
오창은 (2004). 도시 속 개인의 허무의식과 새로운 감수성. 어문론집, 32, 249-270.
이희경 (2012). 도시 문명에 갇힌 인간 소외와 상실감. 동서언론, 15, 143-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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