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슬픔 속 월드컵…자유와 질서
[칼럼] 슬픔 속 월드컵…자유와 질서
  • 박록삼<서울신문> 논설위원
  • 승인 2022.11.28
  • 호수 1558
  • 7면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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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록삼<서울신문> 논설위원

한국 사회가 월드컵의 한복판으로 훅 들어온 듯하다. 불과 한 달 전 참사의 안타까움과 책임 있는 이들의 책임 회피에 대한 분노는 지루한 정쟁에 대한 염증 뒤편으로 사라진 느낌이다.

 월드컵이라는 전 지구적 열기에 함께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이듯 핼러윈 축제에 젊음의 열기를 더하는 것 역시 개인의 자유였다. 물론 그 자유로움을 만끽한 대가가 짓눌린 죽음이란 것은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였다. 그저 젊음답게 젊음에 임했을 뿐인데 이게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라 생각한 이는 숨진 158명 중 단 한 명도 없었을 테다. 그날 그 자리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대비는 오롯이 용산구청이나 △경찰 △소방 △행정안전부 등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가의 몫이었으니 말이다.

지난달 29일 저녁 대한민국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는 최소한의 규율인 질서가 부재했다. 사전에 예상했듯 10만 인파의 다중이 운집할 것에 대비해 이태원 골목길을 일방통행으로 만들고, 차선 일부를 통제해 도보 통행하게 하고, 지하철역을 무정차 통과시키는 등 기본적인 질서만 갖췄더라면 하는 부질없는 회한은 사라지지 않는다. 국가의 역할인 집단의 질서가 부재한 속에서 개인의 자유는 허망한 죽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자유와 질서 두 축으로 지탱되며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 사회지만 그날, 개인의 자유를 뒷받침해주는 국가의 질서는 없었다.

애써 강조하고 부르짖지 않아도 자유의 가치가 있었기에 인류의 발전은 가능했다. 예술 문화의 표현과 창작에서도, 위대한 사상이 되는 사유의 힘도, 한계를 극복하는 과학기술의 발전도, 자본과 생산의 증대에도 자유의 가치가 바탕에 있었고 자유를 통해 더 멀리 더 높은 이상을 추구할 수 있었다.

자유는 필연적으로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 욕망은 양심과 관습, 규범, 법률이라는 체계 있는 질서와 최소한의 규제를 통해 안정과 균형감, 그리고 건강함을 갖출 수 있다. 욕망과 자유를 지향하는 자본주의와 공동체의 질서 체계 역할을 하는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의 핵심 운영 원리로 자리 잡게 된 궁극적 배경이다.

이번 월드컵 또한 의지가 닿는 만큼 한껏 즐기길 바란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도 그랬다. 그해 6월 중학교 2학년 학생 효순이와 미선이가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졌지만, 온 나라는 월드컵 4강 신화에 흠뻑 빠졌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역시 세월호 참사 두 달 뒤에 열렸고 월드컵에 빠졌다. 이태원 참사 직후 열리는 이번 카타르 월드컵 역시 한동안 국민들의 관심사를 축구로 가득 채울 것이다.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도, 바다의 포말이 된 세월호의 아이들도 월드컵이 끝나고 나서 다시 모두 기억하고 함께했다. 이번에도 월드컵 이후 다시 그 슬픔과 분노를 기억하고 각자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자유로운 지구촌 개인들의 자유가 위축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월드컵 또한 만끽해야 할 일일지 모른다. 슬픔 속 월드컵이지만 월드컵 이후 우리 사회에 또 다른 희망의 근거와 에너지, 그리고 안전의 질서가 만들어지길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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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원 2023-08-01 19:35:54
사람들이 월드컵과 핼러윈을 자유롭게 즐기지만, 사고로 인한 희생자들과 국가의 책임 회피에 대한 분노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은 자유와 질서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며, 국가는 안전하고 안정적인 질서를 제공하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