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속을 모르겠어요
[취재일기] 속을 모르겠어요
  • 이예빈 기자
  • 승인 2022.11.21
  • 호수 1557
  • 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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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예빈<문화부> 정기자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다닐 법한 나이대의 어린이들과 대화해본 경험이 있는가? 필자는 다섯 살배기 어린이를 돌보는 일을 하기에 일주일에 두 번은 그런 상황에 놓인다. 까치발을 들어도 필자의 허벅지께에 닿을락 말락 하는 이 작은 사람을 돌보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속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색연필을 꺼내달라더니 돌아서면 공놀이를 해야겠단다. 인형이 마음에 안 든다고 마구 때릴 땐 언제고 좋다며 뽀뽀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고 만다.

어째서 ‘취재일기’에 이런 이야길 꺼내느냐 하면, 학보사 기자 활동도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사를 쓰는 작업이 돌봄노동 같았단 비유는 아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이 다섯 살배기 어린이 같았단 뜻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학보사의 모든 활동은 소통의 연속이었고, 다른 사람과 소통해야 하는 매 순간 필자는 ‘이 사람의 속을 모르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때론 좋아하는 인형에게 극단적인 이중성을 보여주는 어린이에게서 느끼는 것만큼이나.

선배 기자들이 그간의 취재일기에서 자판이 닳도록 썼던 것처럼, 학보사는 결코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지속할 순 없는 활동이다. 그 이유론 각자의 고충이 있겠지만, 필자에겐 소통이 가장 어렵게 느껴졌다. 필자는 한대신문에 들어오기 전까진 한 번도 소통에 어려움을 느껴보지 않았다. 심지어 꽤 잘한다고도 생각했다. 상대의 이야기에 적당히 반응하며 묵묵히 듣고만 있으면 둥글게 살 수 있는데 어려울 게 뭐 있냐는 자만이었다.

그런 필자에게 한대신문 활동은 끊임없이 본인의 생각을 말하고 상대를 설득하길 요구했다. 어떤 기사도 피드백을 거치지 않은 채 발간될 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사 피드백이란 게 늘 ‘첫 문단의 두 번째 문장 삭제하세요’처럼 직관적이고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한 문화부 기사의 특성상, 피드백을 주는 기자들의 접근이 필자와 다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 페이지를 겨우 넘기는 정도의 글만 읽고서 글쓴이의 생각을 가늠할 순 없는 노릇이니 당연하다. 하지만 피드백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이 사람의 속을 모르겠다’란 생각에서 끝나고 넘어가면 누구의 의견도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글이 나올 뿐이었다. 소통이 처음으로 어렵게 느껴졌다. 한대신문에서 기사를 쓰며 소통다운 소통을 해보니 이거 원, 적당한 맞장구와 대충 수긍하는 태도론 어림도 없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대신문은 게으르게 소통하던 과거의 필자를 적극적인 사람으로 바꿔 놓았다. 한 마디 한 마디 상대의 의도를 고민해보고 본인의 말을 여러 번 점검하는 습관을 길러줬다. 물론 전처럼 스스로 소통을 잘하는 편이란 자만은 감히 못 하겠다. 여전히 남들 속을 알 수 없어 머리를 싸매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젠 ‘이 사람도 내 속을 몰라 답답할 테니 한 번 더 설명해보자’ 생각할 수 있게 됐으니, 소통의 첫걸음을 떼는 법 정도는 배운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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