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라떼 한 모금 하실래요?
[칼럼] 라떼 한 모금 하실래요?
  • 권재현<주간경향> 편집장
  • 승인 2022.09.26
  • 호수 1554
  • 7면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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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재현<주간경향> 편집장

저녁 모임이 있었습니다. 초행길이었습니다. 목적지만 생각하고 직진하는데 횡단보도가 보이더군요. 차가 없길래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3분의 1쯤 다다랐을까. 우회전하던 오토바이가 멈추지 않고 다가왔습니다.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꼈습니다. 고개를 돌려 째려봤습니다. 되레 그가 외쳤습니다. “빨간 불이라고, 빨간 불!”
그제서야 나무에 가려 보일락 말락 빨간 빛을 뿜어내던 조그만 신호등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무단횡단, 저의 잘못 맞죠. 그런데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왜 반말이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였거든요. 이런 걸 두고 본말전도라고 하나요. 사안의 본질은 제쳐두고 껍데기가 온 정신을 지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경계했던 ‘꼰대’ 기질이 나도 모르게 발현되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다행히 오토바이가 자리를 떴기에 망정이지 생각도 하기 싫은 불상사가 벌어졌다면 어쩔 뻔했습니까. 그 정도에서 사태가 마무리된 걸 하늘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날 들은 반말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군요. 동일한 상황에서 또래나 연장자가 반말을 했다면 어땠을까요. 역시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생각했겠지만 분명 충격은 덜했을 겁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이 느끼는 건 이렇게 다릅니다. 

대한민국 사회, 적어도 겉으로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직급 구분을 없애거나 연차에 관계없이 ‘님’으로 호칭을 통일하는 등 권위주의 시대의 잔재인 상명하복과 연공서열 타파 움직임이 도처에서 일고 있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언론계도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과거엔 소속 매체와 나이를 불문하고 “몇 년 입사야?” 한마디에 일사분란하게 선후배가 정리됐었지만, 지금은 같은 매체 선배라도 다짜고짜 말을 놓기 쉽지 않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등장, 경력직 채용 확산 등 선발 방식의 다변화가 불러온 모습입니다.

공식 회의를 아예 존댓말로 진행하는 풍경도 낯설지 않습니다. 선배가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후배는 따르기만 하는 모습은 적어도 표면적으론 사라졌습니다. 다들 세대와 △계층 △성별 △이념 △지역 △학벌을 넘어 생산적이고 활발한 의견 교환과 토론이 오가는 조직문화를 지향합니다.

표정도, 어휘도 부드러워졌는데 숨은 더 막힌다는 하소연이 나옵니다. 선배는 선배대로, 후배는 후배대로 힘들답니다. 곳곳이 살얼음판입니다. 어쩌면 이 긴장과 간극은 당분간 더 커지고 깊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살벌한’ 사회를 외면하지 않고 함께 끌고 가보겠단 후배들에게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선배들은 솔직함과 당돌함, 첨단기술로 무장한 후배들이 못내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론, 너무 반가워서 몇 시간이고 열변을 토합니다. 그러다 선을 지나쳐 그만 ‘라떼’(나 때는 말이야)를 외치고선 이내 후회하곤 합니다.

한국 언론의 표상인 고 리영희 선생이 일찍이 갈파하셨죠.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요즘엔 하나 더 덧붙여야 합니다. 신구(新舊)가 조화를 이룰 때 이 사회는 제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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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원 2023-08-01 23:36:41
선배와 후배 간의 통제적인 관계에서부터 개인적인 사소한 상황까지, 사회의 변화를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소재가 풍부하네요. 선배 후배의 관계가 더욱 상호 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형성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는 사회 전반에 적용되는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일상 속에서도 이런 관점으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소통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