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곶매] 뜨거웠던 꿈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장산곶매] 뜨거웠던 꿈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 이휘경 기자
  • 승인 2022.08.29
  • 호수 1551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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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경<편집국장>
                                                        ▲이휘경<편집국장>

미술 시간만 되면 빤히 바라보던 그림들이 있다. 이 그림들은 교과서 단골 손님이면서 참 재미있는 작품이다. 여러 인물이 등장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며 그 표정과 자세 하나하나가 제각각 섬세하다. 무엇보다 시끌벅적한 역사 교과서 속 사건 사고들 그 너머, 평범한 서민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담아냈단 점에서 흥미롭다. 서민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화가, 바로 단원 김홍도 선생의 <서당>과 <씨름>이다.

필자는 굉장히 평범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풍족하지 않은 집에서 태어나 결혼 이후 빚을 내고 집을 구한 부모님. 남들 다 하는 피아노, 태권도 학원에 보내주며 부족함 없이 아들딸을 키우면서도 돈 때문에 때때로 다투기도 하는 그런 부모님. 우리는 서민이라는, 특별한 가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먹고 살기 힘든 서민’을 대변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의 불씨는 순식간에 불타올라 꺼질 줄 몰랐다.

이러한 생각은 모두 매체에서 비롯됐다. 교과서에는 김홍도 선생의 그림보다는 억압받고 괴로워하던 배고픈 서민들의 투쟁의 역사가 더 많았다.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억울함을 갖거나 복수심을 품고 있다. 뉴스에는 국민의 삶을 두루 살피지 못하고 막말을 내뱉는 정치인들이 가득하고, 그에 맞서는 시민들은 언제나 피해자의 위치에 놓여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고생고생하며 살고 있다는 프레임.

민중의 기록자, 언론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시끄럽고 끔찍하기만 한 장면들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태어났다. 특별함은 투쟁의 삶 속에서 꽃 피운다 믿었고, 형체 없는 적을 향해 끓어 올랐던 마음은 인내가 필요한 현실의 길에서 맥없이 쓰러졌다. 명언을 떨치며 민중을 통합하고 시대정신을 이끌었던 위인들처럼 되고 싶었으나, 살면서 계속해서 마주했던 것은 자기 인생 자기 뜻대로 어떻게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치열하지만 평화롭고, 서글퍼도 아름다운 삶들로 가득했다.

몇 대째 식당을 운영하는 사장님이 TV에 나오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먹고살기 바빴지 뭐.” 필자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맥이 빠졌다. 먹고 사는 것을 너머 이들도 원대한 목표, 한때 끓어올랐던 열망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 참 가소롭고 건방진 생각이었다. 이들의 삶을 단순히 힘없이 꺾인 풀잎이라 바라봐 온 것이 어느 순간 부끄러웠다.

한창 서울대 청소노동자 산재가 이슈가 되었을 때, 우리 신문사 기자들도 청소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을 취재하겠다며 나선 바 있다. 필자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나 돌아왔던 건 우리 학교 미화원분들은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고 계시다는 이야기였다. 또 한 번 부끄러웠다.

모든 이의 삶 속에는 희로애락이 있음이 당연하고, 다양한 감정들은 삶의 주체성에서 탄생한다. 당신이 아닌 내가 당신의 삶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진정한 민중의 기록자가 되고 싶다면, 김홍도 선생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어떠한 편견 없이 제각각인 표정과 자세를 가진 인물들을 한 폭에 그려내는 것.

언론의 역할은 국민의 권리가 보호될 수 있도록 국가를 감시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 분명히 맞다. 그렇기에 언제나 세상의 균열 속에서 슬픔과 분노를 겪는 사람들이 없는지 눈과 귀를 열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경계해야 할 것은 직접 들어보지 않고 이들의 감정을 속단하는 것이다. 비판과 기록의 기능을 균형 있게 가져가려면, 충분한 시간과 인내, 날 것의 투명한 시선을 지켜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거창한 꿈에 짓눌려 속없는 기록물을 남기지 않게 하는 유일한 노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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