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배우고 입학한 이공계열 신입생, 학력 저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돼
덜 배우고 입학한 이공계열 신입생, 학력 저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돼
  • 지은 기자
  • 승인 2022.06.07
  • 호수 1550
  • 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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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된 고교 과정에 골머리 앓는 대학들
올해부터 고교 과정에서 인문계열과 자연계열이 통합된 교육과정을 학습한 학생들이 입학했다. 이에 맞춰 서울캠퍼스는 공대 전공 기초 필수 과목인 ‘일반 물리학 및 실험I’과 ‘일반 화학 및 실험I’에 고교과정을 추가했다. 이렇게 변경된 교과목이 정착된 지 어느덧 한 학기 중반이 지나고 있다. 이에 대해 오차환<자연대 물리학과> 교수는 “요즘 물리나 화학, 미적분 등 학과 수업에 꼭 필요한 고교 필수과목을 아예 접해보지도 않은 경우가 유독 많다”며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입학하자마자 대학 기초 과목을 바로 수강하기엔 불가능해 어쩔 수 없이 전공 커리큘럼을 변경했다”고 말했다.

ERICA캠퍼스에선 고교 교육과정과 대학 과정 사이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기초 교과목인 ‘ERICA 역량새로배우기 프로그램(CORE)’을 개설해 이공계열 학생들에게 기초 역량을 보충해주고 있다. 박경호<과기대 화학분자공학과> 교수는 “고교와 대학의 학습 간극 중 가장 큰 것은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재의 수준 차이”라며 “이와 같은 간극을 줄이고자 CORE 기초 과목을 개설하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 학교만 학생들의 기초 역량 부족에 골머리를 앓는 것은 아니다. 서울대는 지난 2019년부터 ‘물리의 기본’이란 강좌를 수강하게 해 물리II를 수강하지 않은 학생들이 전공 수업에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 외 대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1명의 교수진이 참여한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하 한림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공계열 학생들의 기초 역량 부족은 오래전부터 지속돼 왔으며, 특히 신입생들은 수업 참여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으로 늘어난 사교육
이렇듯 고교 교육과정 변경은 이공계열 학생들의 기초 역량 부족을 야기시켰단 비판을 받고 있다.

교육부에선 이같은 비판에 학습량을 줄여 공교육의 과열된 경쟁교육체제를 완화하기 위한 것이라 주장한다. 이를 통해 사교육을 억제한단 것이다. 하지만 의도한 바와 달리 사교육이 줄어드는 효과는 미비하고, 오히려 사교육이 성행하는 역효과가 발생하고 있다. 대입에 필요한 기초 학문을 고등학교에서 배우지 못해 대학교 입학 전 사교육을 받는 것이다. 전공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대학생들은 과외 수업에 의존하거나 유료 인터넷 동영상 강의을 통해 부족한 역량을 메꾸고 있다. 예비 대학생과 재학생을 대상으로 한 수학, 과학 과외는 성행하고 있으며 인터넷 강의 사이트에선 중고등학교의 수학 교과 과정부터 대학 전공 심화 과정까지의 강의가 대학생들에게 제공되고 있다.

대학 전공 인터넷 강의 사이트는 갈수록 흥행하는 실정이다. 관련 업체 U의 회원 수는 2년 전보다 3.2배 증가했으며, 또 다른 업체 A의 경우 지난해 수강생이 약 80% 늘었다. 우리 학교 학생 A씨는 “‘일반 물리학 및 실험I’ 과목이 너무 어려워 동기들과 함께 유료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며 “수능 선택 과목으로 물리를 선택하지 않아 공부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말했다.

많은 대학생들이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보완한 기초 수준의 과목을 대학교에서 수강하고 있어 심화적인 내용을 탐구할 시간이 줄어드는 것도 문제다. 박 교수는 “학생들이 심화적인 교육 과정을 통해 자기 개발을 해야 할 시기에 기초 수준의 교육을 받게 된다”며 “이는 대학의 교육 역량을 소모하고,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라 비판했다.

이에 대해 한림원 보고서에서 이경우<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어느 정도 *워싱턴 어코드와 국제적인 기준에 교육과정을 맞춰나가야 한다”며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나라의 전공 교육 시스템과 졸업 후 학생들의 수준이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실제 △미국 △유럽 △일본 △중국 등의 교육 경쟁 국가와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 교육과정에서 삭제된 내용의 상당 부분은 이들 국가의 대학입학시험에 출제되고 있다. 이공계열 학생들의 기초 학문 역량 부족은 학습 수준의 약화로 이어지고, 결국엔 전문 인력의 국제경쟁력 약화로 연결될 가능성이 농후하단 게 보고서의 설명이다. 즉, 공학 인재의 양성은 국가의 산업 양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다시 검토돼야 할 고교 과정
고교 과정에서 배우지 못한 기초 학문을 대학교 과정에서 수강하게 되거나 사교육을 통해 배운다고 해도 이엔 한계가 존재한다. 이 교수는 “대학 입학 전 바짝 과외를 하는 경우 단기간 동안 피상적인 지식의 습득은 가능하겠지만 정규 교과에서 오랜 시간 동안 어려운 문제와 씨름하면서 얻어지는 사고력과 문제해결 능력은 습득될 수 없을 것”이라 말했다.

또한, 한림원에서 이공계열 학생 611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고등학교의 모든 수학 과목을 이수한 집단이 그렇지 못한 집단보다 전공만족도 및 전공정체감이 유의미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박 교수는 “기초 역량의 부족은 신입생들에게 학과와 적성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게 한다”며 “이는 중도 이탈로 이어져 학생들의 시간과 인생을 허비하게 한다”고 우려를 표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교육 제도에 대한 전면 재검토를 진행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오 교수는 “학생들에게 편리함을 주기 위한 형태로만 대학 입시와 교육 제도, 방향이 바뀌고 있는데, 정작 대학 입학 이후 어떻게 수업을 받고 어떤 인재가 될지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는 것 같다”며 “고등학교 교육정책과 대학 입시제도의 변화를 통해 AI, 첨단산업 등 우리 사회 인재 양성을 위해서 기초 학문을 더욱 탄탄하게 해야 할 것이다”고 밝혔다.

또한 고등학교까지의 교육과정과 대학교의 교육과정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점도 지적된다. 박 교수는 “고등학교에서의 교육이 대학수학능력을 기르기 위한 과정이라면 대학에서의 학습이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교육과정이 개정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며 대학 이전의 과정에서도 힘써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모두가 고민해야 할 기초역량 문제
기초과학 역량에 대한 문제는 우리 사회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김호영<자연대 물리학과> 교수는 “기술 발전으로 선진화된 미래 사회에선 모든 분야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기초 과학 역량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오 교수 또한 “수학, 과학과 같은 기초 학업 역량에 대한 문제가 지속되면 대학 역량 저하를 넘어 인력 감소의 수순을 거칠 것”이라며 “이대로라면 기초과학의 미래는 없다”고 그 중요성을 역설했다. 변화된 교육과정이 우리나라의 이공계열, 더 나아가 과학 분야 전반에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할 것이다.


* 워싱턴 어코드 : 세계 공통 공학 교육인증 체계로, 공학 교육의 품질 수준을 인증해주는 일종의 세계적인 품질인증 마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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