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 놓을까?
우리, 말 놓을까?
  • 나태원 기자
  • 승인 2022.05.23
  • 호수 1549
  • 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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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이다은(29) 김상혁(28) 이한별(32) 씨가 평어로 대화하고 있다.
▲ 왼쪽부터 이다은(29) 김상혁(28) 이한별(32) 씨가 평어로 대화하고 있다.


“여기선 존댓말이 아니라 평어체로 이야기 하는 거야. 서로 편안하게 존중하면서 대화하기 위해서야.” 지난 19일 기자가 박임마누엘<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인재네트워크실> 실장과 나눴던 인터뷰 내용이다. 이처럼 최근 반말을 하되 그 안에 격식을 갖춘, 이른바 평어 문화가 기업 내에서 더 활발히 사용되고 있다.

평어, 갓 태어난 언어 체계
평어는 최근 떠오른 개념으로 ‘격식있는 반말’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이는 상대를 오로지 이름으로만 부르며, ‘~했냐?’ 같은 비격식체 어미 사용을 자제하는 것이 특징이다. 스타트업이나 일부 교육기관에선 이를 실험적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디자인학교(이하 디학) △라프텔 △클래스101 등이 가장 적극적으로 평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들 외에도 카카오 등 IT기업들에선 호칭을 통일하거나 서로를 영어 이름으로 부르는 등 호칭의 격식을 없애려 시도하고 있다. 이다은<디학 4기> 졸업생은 “수업할 때도 ‘선생님’이라고 잘 안 하고 이름을 직접 부른다”고 전했다.

과한 존중이 대화의 장벽이 되다
상대의 직급이나 나이를 정확히 몰라 그 사람을 부르기 난감해하거나 어물쩍 넘어간 경험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실제로 지난 2017년 국립국어원이 발표한 「사회적 소통을 위한 언어 실태 조사」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4천 명 중 약 68%가 상대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어려움을 겪는다고 답했다. 

이처럼 여러 조직에서 평어를 실험하고 있는 이유는 존대 표현의 비효율적인 대화방식에 있다. 존대 표현은 상대를 존중한단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때론, 언어 사용에 제약을 걸기도 한다. 대개 우리나라에선 존대 표현을 사용할 때 나이나 직급에 맞는 호칭으로 부르기 때문에 상대가 누군지 정확히 알기 전까진 말을 건네기 어렵다. 혹, 적절한 호칭을 찾더라도 평소보다 긴 문장과 상황에 맞는 특수 어휘를 사용해야 한다. 말 한 번 거는데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권우진<국문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는 “어느 언어나 존대의 정도가 강해짐에 따라 말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며 “우리는 한 살의 나이 차이로도 윗사람 아랫사람이 나뉘어지고 이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사회적 위계가 있기 때문에 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존중과 소통 두 마리 토끼를 잡다
평어는 존중과 소통의 효율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디자인과 인문학을 배우는 커뮤니티 디학은 평어의 긍정적인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이들은 약 4년 전부터 관계 형성의 평등을 지향하기 위해 평어를 사용했다. 학생과 선생님도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지낸다. 디학 안에선 나이, 직위와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한 존재인 것이다. 이다은 졸업생은 “선생님, 교수님이란 표현엔 권위가 담겨있어 의사표현에 소극적으로 임하거나 말을 포장하려 한다”며 “평어를 사용하면 서로 동등한 인격체란 느낌이 들어 편하게 대화에 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평어를 사용했던 회사 근무 경력이 있는 김상혁<디학 4기> 졸업생은 “확실히 평어를 사용하면 필요한 것들을 바로 전달할 수 있어 효율적”이라 답했다. 

반말 어투로 인한 갈등이 생길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이한별<디학 4기> 졸업생은 “다른 기수엔 50대와 20대가 동기로 있는데, 그들도 서로 평어를 사용하며 잘 지낸다”며 “말투는 반말체지만 친구한테 쓰듯이 하는 편한 말투는 지양하기에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고 전했다.

단순 평어 문화 적용에만 급급했던 과거 시행착오들
하지만 평어 사용이 언제나 순조로운 것은 아니다. 지난 2000년대 후반 △포스코 △한화 △KT 등 여러 기업들이 호칭을 통일하거나 존칭을 없앴지만 얼마 안 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서용구<숙명여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런 현상에 대해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존대 문화가 잡혀 있어 이를 완전히 극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젊은 세대와 달리 기성 세대는 평어를 무례하다 여기는 것도 정착하는 데 어려움을 줄 것”이라 밝혔다. 
 

전문가들은 평어가 정착하기 위해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적 환경이 우선적으로 조성돼야 한다고 말한다. 박임마누엘<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인재네트워크실> 실장은 “사회 구성원들이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언어 체계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흔히 언어는 살아있는 유기체라고 표현한다. 시대의 상황에 따라 언어는 그 모습을 변화해왔다. 우리말의 가장 큰 축을 차지하고 있는 높임 표현에도 이제 변화의 시점에 맞닥뜨린 듯하다. 이런 움직임의 끝에 우리의 존대 표현이 어떻게 변화될지 주목해봐야 할 시점이다.
 


도움: 임민영 수습기자 angelaiem01@hanyang.ac.kr
박임마누엘<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인재네트워크실> 실장
서용구<숙명여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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